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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 상 ㅣ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7월
평점 :
커글린 가문 3부작 중 2부인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가 출간됐을 때부터
이왕이면 1부인 이 작품부터 순서대로 읽어야겠다고 작심했지만,
결국 3부인 ‘무너진 세상에서’가 출간된 뒤에도 한참동안 게으름을 부리다가
뒤늦게야 두 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책읽기를 마쳤습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 중 일부와 최근 출간작인 ‘더 드롭’까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꽤 읽은 편이지만
커글린 가문 3부작이 이런 서사의 작품일 줄은 미처 예상 못했습니다.
일부러 출판사의 소개글이나 심지어 책 뒷면의 카피조차 미리 보지 않는 습관 때문에
표지나 제목만 봤을 때는 ‘대부’와 비슷한 톤의 이야기가 아닐까 기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20세기 초반 혼돈의 미국 사회를 배경 삼아 펼쳐지는
데니스 루헤인 특유의 시니컬하면서도 잔혹함이 배어있는 사건과 캐릭터를 기대했던 것이죠.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전히 캐릭터들은 날것처럼 생생하고, 사건은 참혹합니다.
수많은 죽음이 등장하고, 애증과 갈등, 연대와 배신이 난무합니다.
다만, 대하 역사소설로 분류되는 것이 마땅한 이 작품은
데니스 루헤인의 기존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서사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운명의 날’은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1917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10월 혁명,
1914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막을 내린 세계 1차 대전,
1920년에 발효되어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일으킨 금주법,
그리고, 이 작품의 소재인 1919년 보스턴 경찰의 파업이 그것들입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보와 보수, 흑과 백의 인종갈등, 각지에서 몰려든 이민자의 문제 등
당시 미국 사회는 온갖 가치관과 이념의 충돌로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모든 급진적인 것은 ‘빨갱이’로, 모든 집회와 시위는 ‘체제전복적인 시도’로 매도됐습니다.
그런 와중에 10년 넘게 임금과 처우 개선을 받지 못한 보스턴 경찰의 파업은
미국 전체를 뒤숭숭하게 만들 정도로 파괴력이 컸던 최초의 공무원 파업이었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은 이런 혼란의 시대를 커글린 가문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그려갑니다.
보스턴의 유력한 경찰서장 토마스의 아들인 대니 커글린은
다분히 반골적이면서도 한량의 기질과 정의감을 함께 지닌 청년 경찰입니다.
그런 그가 보스턴 경찰 내의 불온한 움직임(노조 결성)을 조사하고,
공산주의와 테러리즘으로 무장한 급진단체 기밀 파악을 위해 언더커버 역할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또한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와 권력지향적인 동생과 번번이 충돌을 겪습니다.
그 과정에 대니가 사랑했던 여인 노라까지 개입되면서 가족 간에도 큰 균열이 벌어집니다.
대니 커글린과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한명의 주인공은 흑인 청년 루터 로렌스입니다.
루터는 악질적인 폭력조직 보스와 그 수하들을 살해하곤 고향을 떠나 보스턴에 정착합니다.
커글린 가문에서 일하게 된 루터는 대니 커글린과 인연을 맺게 되고
당시 여전히 차별받던 흑인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상, 하권을 합쳐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진 않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문장은 쉬우면서도 꼭 필요한 비유만을 동원하여
독자에게 골치 아픈 ‘난독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을 간직한 보스턴의 서늘한 분위기,
대니 커글린, 노라, 루터 로렌스가 겪는 목숨을 건 위기일발의 사건들,
쉴 새 없이 몰락으로 치닫는 커글린 가문의 암울한 상황 등
분량만큼이나 다채로운 소재들이 지루함을 느끼게 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상황을 그린 이 작품이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생생했던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 아니, 진행형이라 해도 무방한 한국의 현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양립 불가능한 이념의 대결, 권력과 자본의 민낯, 사회적 약자들의 무력감 등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자꾸만 비교 또는 대입하며 읽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스턴 경찰 파업과 가족과의 충돌을 겪으며 상처투성이 성장을 거친 대니 커글린이
이어지는 2부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와 3부 ‘무너진 세상에서’를 통해
또 어떤 굴곡진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늦어도 올해 안엔 커글린 3부작을 완독할 계획인데,
아무래도 대니 커글린이 더는 경찰의 삶을 살 것 같지 않아서 더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