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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ㅣ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평점 :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 고진은 원래 도진기 작가가 붙여준 ‘어둠의 변호사’ 외에
‘죽음의 변호사’, ‘뒷골목 변호사’, ‘뒷구멍 변호사’ 등 불쾌한 뉘앙스의 여러 별명을 얻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합법적인 살인이 가능한 자”라 여기며 ‘죽음의 변호사’라 불렀고,
누군가는 그의 이력을 만천하에 공개하며 ‘뒷구멍 변호사’라 비아냥댑니다.
그만큼 이번 작품을 통해 고진은 예전 어느 시리즈보다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고진 시리즈의 독자 입장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재야에 머물던 고진이 처음으로 법정에 서서 사건을 다룬다는 점이었습니다.
번듯하게 변호사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거의 야전 탐정처럼 사건 현장에서 활약하던 고진은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이 원래 있어야 했을 법정에서 맹활약을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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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한 여인을 사랑했던 네 남자가 달리기 시합을 벌였습니다.
여인은 승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고, 우여곡절의 레이스 끝에 승자와 패자가 갈렸습니다.
모두 결과에 승복했지만, 그날의 승부는 이후 다섯 사람의 인생을 질곡에 빠뜨렸습니다.
20년이 지난 현재, 그날의 승자였던 남편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잔인하게 살해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남편 살인혐의로 법정에 서게 됩니다.
고진은 중년이 됐지만 여전히 그녀를 아끼는 그날의 패자 3명을 주요 참고인으로 호출합니다.
여인의 무죄를 믿지 못하면서도 고진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법정 공방에서 확실한 승리를 장악하지 못한 고진은
결국 사건이 벌어진 블라디보스톡까지 날아가 진실을 찾아내려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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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평이하고 작은 규모의 이야기가 나올 법한 소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도진기 작가는 반전을 거듭하는 법정에서의 치열한 공방과 함께
한 여인과 네 남자 간의 20년의 악연과 추억을 밀도 있게 그려냄으로써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을 촘촘하고 밀도 있게 채워 넣었습니다.
때론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있고,
예전의 시리즈들과는 달리 작위적으로 보이는 설정도 곳곳에서 눈에 띄지만
어쨌든 쉽고 간결한 문장들로 이뤄진 ‘도진기 식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공식 법정에 선 변호사 고진의 매력이 1등 공신입니다.
특유의 냉소와 비아냥, 적절한 비유와 빈틈없는 논리로
재판장과 검사, 배심원과 방청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장면들은
야전에서만 활동하던 고진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이었습니다.
특히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정으로 법정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대목은 통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런 재미는 법정이라는 ‘무승부 없는 극단적인 대결장’이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앞으로도 종종 법정에 선 고진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족의 탄생’ 때도 느낀 바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사건의 배후에 있는 각양각색의 인간관계와 심리에 대한 묘사가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20년 전, 한 여인을 놓고 벌인 치기어린 달리기 시합이
여러 사람의 운명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는 설정은
‘정말 운명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문을 하게 만듭니다.
이제 40대 중반에 이른 ‘그날의 패자들’이 남편 살해범으로 몰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애증이 뒤섞인 양가적인 모습이면서 또한 애틋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건과는 별개로 이들이 서로에게 내비치는 다양한 감정들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한꺼풀씩 드러나는 참혹한 실상과 사건의 진실들은
한편으론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하게끔, 또 한편으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고진 스스로 “이 살인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면 제일 좋았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하지만 안타까운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비록 소설 속이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짐들의 무게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저만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