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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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머스 데커는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전직 경찰입니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경찰이 된 후 그 특별한 능력 덕분에 최고 검거율을 자랑하는 형사가 됐지만, 어느 날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된 이후 그는 끝없이 추락하고 맙니다. 16개월 후, 노숙자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데커는 상관이었던 경찰서장 덕분에 인근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에 공식 컨설턴트로 참여합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데커는 수많은 단서를 찾아내지만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 뿐이고, 오히려 동일범에 의한 소행으로 보이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뭔가를 잊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좀 잊고 싶어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은 양날의 검입니다. 그 능력을 이용하여 부와 권력과 명예를 거머쥘 수도 있겠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 평생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저주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참혹하게 살해된 아내와 딸의 시신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면, 그래서 그 모습을 평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기억력을 제외하곤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대사증후군의 표본으로 삼아도 손색없는 초고도비만의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추레한 행색과 꺼칠한 얼굴 등 누구라도 기피할 것 같은 외양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자살 직전까지 갔던 그는 마음마저 피폐해진 탓에 말 그대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보기 흉하게 망가진 중년남의 신세입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수사에 합류하면서 발휘하는 유능한 형사로서의 모습은 비호감에 가까운 비주얼 때문에 때론 위화감을 주기도 하지만, 고된 수사를 마치고 홀로 머물고 있는 좁은 여관방으로 돌아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며 자기학대 또는 자기연민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 어떤 대목에서는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을 자아낼 정도로 안쓰럽고 애틋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가 마음만 먹었다면 비주얼만큼은 해리 보슈나 해리 홀레처럼 어딘가 스산함과 애수가 깃든 멋진 중년으로 포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만일 그랬다면 데커의 매력은 훨씬 덜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명한 캐릭터와 잔혹하면서도 흥미를 유발하는 사건들 덕분에 페이지는 정말 잘 넘어가지만, 중반부쯤에 이르렀을 때 이런 의문이 든 독자가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데커의 능력과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 데커의 캐릭터가 과연 사건의 진상과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의 기억력이 수사에 큰 진척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 사건의 진실을 찾는 큰 줄기는 지극히 일반적인 스릴러의 서사대로 흘러가고 있기에 혹시 이러다가 그의 기억능력과는 무관하게 덜컥 범인을 잡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단지 독특한 주인공을 창조하기 위해 데커를 희귀한 기억능력자로 포장했더라면 아마 이 작품에 세 개 이상의 별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매끄러운 전개와 구성을 통해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과 현재의 사건들을 연결시킵니다. 물론 그 과정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완벽하진 않았지만, 점차 데커의 기억 속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범인의 정체와 그 동기를 지켜보면서 데이비드 발다치라는 작가의 명성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정교하게 직조한 것은 물론 그 안에 희귀한 기억능력자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필력은 감탄을 자아낼 만 했습니다.

 

주인공인 데커 외에 작가는 조연들에게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부여했는데, 경찰 시절 그와 찰떡궁합을 발휘했던 유능한 파트너 메리 랭커스터, 갈등과 협조의 상대인 연방정보국 특수요원 로스 보거트, 언제나 얄밉게 등장하기 마련인 집요한 저널리스트 알렉스 재미슨 등이 그들입니다. 어느 스릴러에서나 볼 법한 상투적인 관계들이지만 작가가 창조한 그()들의 캐릭터와 말빨은 그런 상투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이들이 이후 한 배를 타게 될 것 같다는 암시를 준 덕분에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는데, 부디 그들의 팀플레이를 꾸준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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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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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스무 살에 술집 손님이던 거친 뱃사람과의 하룻밤 정사로 나를 가졌어.

난 엄마에게 매를 맞으며 자랐고, 엄마의 강요로 술집 손님들을 상대로 매춘에 내몰렸지.

사랑 따위, 마음 따위, 웃음이나 눈물 따위는 애초부터 내 인생에 없었던 것 같아.

러브호텔 호텔 로열의 사장이자 엄마의 애인이던 30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것 역시

단지 그가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고 프로포즈 했기 때문이야.

그는 좋아하니 어쩌니 하는 말도, 마음을 시험하지도,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어.

 

무색무취한 날들이지만, 딱히 싫지도, 심심하지도 않았어.

그런 날들에서 도망치거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그냥 이렇게, 중력이든 인력이든 나를 끌어당기는 쪽으로 흘러가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일까?

내가 쓴 유리 갈대라는 단가(短歌)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 처럼, 어쩌면 내 몸에 흐르는 것은

빨간 피가 아니라 마른 모래가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어.

누군가 내 마음을 흔드는 것도 싫고,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더 싫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속박당하는 것도 싫은 나...

 

그래도 내 어느 한구석엔가 마음의 조각이란 게 남아있기 때문이었을까?

러브호텔의 세무를 맡은 사와키와 간간이 몸을 섞으며 절정과 위안을 얻기도 하고,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매 맞는 소녀를 만난 뒤론 냉정한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어.

엄마가 여전히 내 남편과 몸을 섞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나답지 않게 폭발하기도 했고,

전적으로 내 의지에 의해 몇 번이고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역시 나는 유리 갈대이거나, 그 안을 흘러가는 가슬가슬한 모래야.

깨지기 쉬운 유리이거나, 절대 꺾이지 않고 출렁대기만 할 뿐인 갈대거나,

또는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나 무정한 세상에 내맡긴 채 이리저리 떠다니는 모래...

이런 삶은 무슨 색일까? 의미란 게 있을까? 더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여름조차 서늘한 훗카이도 동부의 대기와 호텔 로열앞에 펼쳐진 광대한 습원의 습기,

그리고 바다에서 무시로 몰려오는 축축한 안개 속에서

유리 갈대이자 그 대롱 속을 흐르는 모래인 나는 그럭저럭 오늘을 살아가고 있어...

 

● ● ●

 

어떻게 서평을 시작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느닷없이 주인공 세쓰코의 독백 같은 것을 쓰고 말았습니다.

사실 유리 갈대에는 여러 가지 파격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이 묘사되지만,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세쓰코라는 한 여자의 유리 같거나, 갈대 같거나 모래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상투적인 줄거리 정리보다는 멋대로 세쓰코가 되어 멋대로 독백해보기

서평의 오프닝을 삼고 말았습니다.

 

작품 내내 세쓰코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타고난 허무주의자 같기도 하고, 학습된 냉소주의자 같기도 한 세쓰코의 캐릭터도 그렇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일이나 그 엄마의 피를 물려받아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그렇고,

끝내 몇 번씩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기구한 운명도 모두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쓰코의 유리 갈대 또는 모래 같은 삶은 도대체 어디에서 종장을 맞이할지,

또 그 종장은 얼마나 비극적이거나 허망할지를 떠올려보는 일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세쓰코의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간간이 몸을 섞는 중년남자 사와키는

독자들의 이런 편치 않은 감정들을 대신 발산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쓰코와 인연을 맺어온 사와키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서도

결국 자신은 그녀에게 버스정류장이나 주유소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위성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켜볼 뿐입니다.

살은 섞지만, 마음은 절대 섞지 않는 두 사람의 평행선 같은 관계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소재나 캐릭터, 사건만 놓고 보면 막장 드라마의 완결판처럼 느껴지지만,

사쿠라기 시노는 섬뜩할 정도의 담담한 문장들로 이 난감한 막장의 요소들을 요리합니다.

무엇보다 간결한 표현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고 적확하게 묘사한 대목들은

막장마저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연작단편집 호텔 로열’ (149회 나오키상 수상작)에서도 비슷한 대목들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이런 묘사의 힘이야말로 사쿠라기 시노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스산하게만 느껴지던 구시로 습원의 이미지와 호텔 로열의 풍경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여운처럼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의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돼있는 광대한 습원이었습니다만,

잠깐이라면 모를까, 낮밤으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면,

(더구나 바다에서 몰려온 안개까지 곁든 풍경이라면)

누구나 세쓰코처럼 자신을 유리 갈대나 모래처럼 여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집 호텔 로열과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같은 무대이되 전혀 다른 히스토리를 지닌 것으로 설정되어 무척 아쉬웠습니다.

다만 기시감 같은 묘한 공통점이 일부 있는데,

호텔 로열을 세운 남자가 모두 간판과 관련 있는 일을 했다든가,

본처와 이혼한 뒤 자신의 절반밖에 안 되는 나이의 젊은 여자와 재혼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유리 갈대를 인상 깊게 읽은 독자라면

호텔 로열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의 단편의 매력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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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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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책장에 외딴 섬 악마가 꽂혀있지만 매번 다음에 읽어야지하면서 뒷전으로 밀리는 바람에

몇 년째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결정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그의 선집을 만나게 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편의 단편과 1편의 장편으로 구성된 결정판 1’

저처럼 에도가와 란포에 입문하는 독자에겐 더없이 좋은 텍스트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코드들,

즉 극단적인 고통과 쾌락, 엿보기, 성적 도착, 괴기와 잔학, 환상 등이 골고루 녹아있는데다

20세기 초반의 날것 같은 정서들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머지 액자 속 인형이 돼버린 남자의 이야기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전쟁으로 인해 목소리와 청각은 물론 사지까지 잃어버린 전직 군인과

그의 곁에서 자학과 욕정에 번민하며 살아가는 젊은 아내의 이야기 (애벌레),

엿보기에 심취한 끝에 죄의식 없는 살인에 이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천장 위의 산책자),

그리고 49명의 여자를 일시에 납치, 살해하려는 희대의 소시오패스 이야기 (거미남)

현대를 배경으로 했을 때는 도저히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기이한이야기들이 실려있습니다.

 

요즘의 눈높이로 보면 사건이나 캐릭터가 조금은 거칠고, 덜 세련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에도가와 란포가 살던 시대의 원시성에 기인한 것이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 1920년대의 100% 아날로그적인 원시성이 투사된 사건과 캐릭터들은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질 여지가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낯섦투박함이야말로 에도가와 란포의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치 요코미조 세이시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에도가와 란포가 선호하는 코드들 역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데,

원색적인 나머지 호러 또는 엽기의 느낌까지 나는 그의 코드들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누구나 의식 혹은 무의식 속에 조금씩은 갖고 있는 본능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쾌락, 엿보기, 성적 도착, 괴기, 잔학 등 나만의 내밀함이라 여긴 본능들이

활자를 통해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을 지켜보며

마치 거울을 보는듯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할까요?

 

클래식으로서의 품격이나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큰 기대를 한 입문 독자라면

약간의 아쉬움과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좋아하는 제 입장에선

좀더 다양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접하고 싶다는 기대를 갖게 해준 결정판 1’이었습니다.

물론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외딴 섬 악마도 빨리 구출(?)해줘야할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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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0
도진기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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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으로 만나는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묘미는 소재의 의외성과 응집된 이야기의 힘입니다.

, 널리 알려진 기성작가에게는 장편에서 보지 못한 참신한 서사를 기대하게 되고,

새로 만나게 되는 신인작가에게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도전적인 서사를 기대하게 됩니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에는 모두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도진기, 송시우, 정해연, 박하익 등 익숙한 이름들과 함께

이력이 없는 신인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인업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참신한 서사와 도전적인 서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로 정평이 난 도진기 작가는

타임루프라는 의외의 소재를 통해 장편에서 맛보지 못한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통해 가족 같던 이웃들이 숨겨온 어두운 진실을 그린 송시우 작가는

이번에도 가족과 이웃들을 등장시킨 잔혹동화로 그녀만의 매력을 발휘합니다.

더블악의로 만났던 정해연 작가는 정통 미스터리 속에 애틋한 심리를 잘 녹여냈는데

새 작품을 만날 때마다 점점 진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아직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박하익 작가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았는데

원래 성향을 잘 몰라서 그런지 조금은 낯선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는 거의(혹 단편이라도 읽은 적이 있을지 몰라서) 처음 만난 작가들의 작품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치명적인 멜로와 미스터리를 엮은 네일리스트’(이경민),

안개 속에 잠긴 해무 마을을 배경으로 구원(舊怨)의 이야기를 다룬 해무’(전건우),

짧은 분량 속에 극단적인 공포심을 잘 버무린 그렇게 밤은 온다’(김주동)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외의 작품들도 나름 미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높아진 국내 장르물 독자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사실 장르물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 시장에서

단편집을 낸다는 것 자체가 비즈니스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로를 통해 새로운 작가의 진가가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또 그를 발판 삼아 좀더 완성도 높은 장편 작품의 출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큰 기대는 오히려 실망감만 안겨줄 수도 있지만,

약간의 애정과 따뜻한 응원의 마음으로 한 작품씩 읽어나간다면

그리 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각자 취향에 맞는 의외의 수작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성작가들 외에 아직은 낯설기만 한 작가들이

다음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든 아니면 완성도 높은 장편을 통해서든

다시 한 번 저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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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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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암살자들이 CIA의 지부인 미국문학사협회를 습격한다.

이 협회에서 말콤과 동료들은 현실 세계의 외교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르는 단서를 찾아

미스터리 소설들을 샅샅이 검토한다.

말콤의 동료가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알게 되었고,

CIA에 침투한 사악한 음모 세력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대학살을 자행한다.

우연히 샌드위치를 사러 외출했다가 대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말콤은

구조를 청하기 위해 CIA 본부에 전화를 걸지만

오히려 그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음모에 휘말린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신한 말콤, 코드네임 콘돌

인생 최대의 고비인 6일 동안의 위험 속으로 질주하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책과 영화를 통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스파이나 비밀요원을 접해온 21세기 독자에게

1974년에 탄생한, 그것도 백면서생 같은 주인공을 앞세운 첩보물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극한의 냉전기였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치열함과 긴장감은 지금보다 훨씬 강했겠지만

아무래도 첩보 픽션을 이끄는 힘은 멋있고 능력 있는 원톱 주인공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독자의 기대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그레이디가 창조한 주인공 로널드 말콤(코드명 콘돌)

미국문학사협회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위장된 CIA 지부에서

하루 종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소설을 읽고 분석한 뒤 보고서를 쓰는 먹물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이 살해당하고, 스스로도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콘돌은 CIA, FBI, 워싱턴 경찰 등 온갖 공권력의 사냥감이 되고 맙니다.

 

사격훈련은 물론 현장요원 훈련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콘돌이지만,

그는 거의 본능과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헤쳐 나갑니다.

이런 아날로그적인 캐릭터와 추격전은 단순하다는 단점은 있어도

독자의 오감을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는 오늘날의 세련된 최첨단 서사보다 강점이 있습니다.

본 시리즈의 쫓고 쫓기는 도심 추격전이라든가,

몸뚱아리 하나 믿고 거친 싸움에 뛰어드는 다이 하드 시리즈의 명장면이 그렇듯 말입니다.

 

도주 중인 콘돌 못잖게 독자의 눈을 끄는 부분은

콘돌을 (죽이기 위해서든, 돕기 위해서든) 쫓는 정보기관들의 두뇌 싸움입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

정보기관들은 거침없이 의심과 배신, 비밀과 거짓말, 쉴 새 없는 반전을 주고받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액면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의적이거나 덫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무기는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동지이던 자의 몸을 산산조각 내기도 합니다.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콘돌의 6은 비록 까마득한 1974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위기를 극복해가는 주인공의 캐릭터, 매력적인 조연, 극적으로 전개되는 사건 등

첩보전의 미덕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견이지만, ‘본 시리즈에서 디지털의 이기(利器)와 싸움꾼으로서의 능력만 덜어낸다면

바로 콘돌의 이야기와 (재미나 긴장감 면에서) 비슷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어딘가 올드한 느낌이 드는 번역입니다.

물론 원작 자체가 1974이다 보니 구조적으로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 고지식하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 번역 문장들이 수시로 눈에 거슬린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1974년의 작품을 1974년의 문장으로 번역했다고 할까요?

어쩌면 버티고 시리즈의 작은 글씨 크기도 그런 올드함에 한몫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1975년에 제작된 영화의 줄거리는 원작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제목도 ‘6이 아니라 ‘3로 줄었더군요.

이왕 원작도 재출간됐으니 영화로도 리메이크된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21세기에 맞게 각색되더라도 캐릭터나 스토리가 워낙 좋아서

이 작품 고유의 맛은 그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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