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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2010년 뉴욕. 해럴드 화이트는 젊은 나이에 셜로키언 모임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에 가입합니다.
하지만 가입의 기쁨도 잠시, 해럴드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립니다.
피살자는 홈스의 최고 권위자로 다음 날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사라진 1900년 10월부터 3개월간의 일기는 셜로키언 모두에게 성배와도 같은 존재인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에게 극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럴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사라진 일기를 찾고자 분투합니다.
7년 전인 1893년, 허구의 캐릭터임에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사랑받고 추앙받는 것은 물론
창조주인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감에 질려 소설 속에서 셜록 홈스를 ‘죽게 만든’ 코난 도일은
이후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고,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에 매진해왔습니다.
1900년 10월 어느 날, 익명의 발신자가 보낸 소포 폭탄을 받은 코난 도일은
런던 경찰을 찾아가지만 그들의 무능함에 질려 직접 사건 해결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건은 점차 커져 연쇄살인사건으로 확대되고 코난 도일은 용의자로 몰리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3개월 간 코난 도일은 숱한 위기를 겪으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100년 후 셜로키언들의 성배가 된 ‘사라진 일기’에는 이 3개월 동안의 일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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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아, 이 작가는 정말 뼛속까지 셜로키언이구나..”라는 느낌이랄까요?
셜록 홈스는 물론 그들을 창조해낸 아서 코난 도일과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엄청난 상상력과 필력을 통해 거대한 팩션으로 빚어낸 작가의 ‘광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읽은 셜록 홈스 또는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체로 직설적인 방법, 즉 셜록 홈스의 냄새가 너무 강하거나, 거의 그대로 인용하거나,
심지어 분위기만 모사한 1차원적인 서사를 택해왔다면,
‘셜로키언’은 셜록 홈스와 코난 도일에 관한 모든 것을 펄펄 끓는 솥에서 제대로 우려낸 뒤
그것들을 재료 삼아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 말하자면, 차원이 다른 작품입니다.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물론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돼버린 셜록 홈스를 증오한 나머지
소설 속에서 그의 최후를 그린 뒤 희희낙락하는 코난 도일의 모습은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홈스의 죽음에 경악한 런던 시민과 언론의 격한 반발을 겪으며 혼쭐이 난 코난 도일이
우연한 계기로 연쇄살인사건의 탐정 노릇을 하게 된 설정도 재미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창조한 셜록 홈스를 흉내 내며 사건의 진상을 찾는 에피소드들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재미와 함께 긴장감까지 담뿍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셜록 홈스의 지적이고 논리적이지만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이고 反여성적(?)인 성격이
실은 창조주인 코난 도일의 유전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습니다.
2010년, 뉴욕과 런던을 무대로 셜록 홈스에 빙의된 채 살인사건을 쫓는 해럴드 화이트는
셜로키언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이 상황에서 셜록 홈스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현대의 기술을 이용한 과학수사보다는 아날로그 식 탐정 역할을 자처합니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사건에 임하는 자세나 논리적인 추리 능력은 셜록 홈스 그 자체입니다.
코난 도일과 해럴드 화이트 못잖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두 명의 왓슨’, 즉 브램 스토커와 세라라는 캐릭터입니다.
소설 ‘드라큘라’의 작가이자 코난 도일의 절친인 브램 스토커는
폭주하는 코난 도일을 적절히 통제하는가 하면 사건 해결에 결정적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어딘가 의뭉스러운 ‘해럴드의 왓슨’ 세라는
위기에 빠진 해럴드를 여러 번 구해주지만 정작 속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여인입니다.
100년의 시차를 둔 채 활약하는 두 쌍의 ‘셜록 홈스-왓슨’은
그 캐릭터만으로도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인물들임에 분명합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두 명의 셜록 홈스’가 펼치는 추리의 향연은
작가의 정교한 설계도 위에서 기가 막히게 맞물리며 전개됩니다.
해럴드의 챕터가 살인사건의 계기가 된 ‘사라진 코난 도일의 일기’를 찾는 이야기라면,
코난 도일의 챕터는 바로 그 일기의 내용인 셈인데,
한 번의 엇박자도 없이 나란히 달려가는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해져 도저히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주말에 날을 잡아 한 번에 완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건이나 캐릭터 못잖게 작가가 공들여 묘사한 것은 1900년 런던의 모습과 정서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는 어수선한 런던의 풍광이 있는가 하면,
희미한 가스등에 의존한 채 고유의 낭만을 발산하는 근대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집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낯선 문명이 전광석화처럼 일상을 잠식하는 와중에도
런던은 ‘시간이 가도 죽지 않는, 한갓 모더니티가 죽일 수 없는, 그 세기만의 힘’을 지닌 채
두 시대의 뒤섞임을 당당하면서도 차분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셜로키언’은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독자로 하여금 셜록 홈스와 그의 시대를 그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다 보면 문득문득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워낙 극적이면서도 리얼한 상황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과 픽션의 경계가 무척 모호하다보니 수시로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검색하거나 알려고 들 필요 없이 그냥 즐기면서 읽으면 됩니다.
그래야 이 작품의 묘미를 더욱 진하게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궁금한 독자는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설명해주고 있으니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에 천천히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셜록 홈스라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단칼에 날려버리는 책”이라는 찬사는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작품에 다소 실망했던 독자라도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이라면 그동안의 실망과 갈증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셜로키언’을 기대하는 것은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이 작품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셜록 홈스의 ‘창조자’와 ‘계승자’의 구도를 이루는 듯 나란히 늘어선 두 이야기는
100년의 간극을 지닌 주인공들이 각기 홈스의 의미를 되새기며 막을 내린다.
창조자는 한때 홈스를 증오했지만 결국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그를 인정하게 되고,
계승자는 자기 삶에서 홈스가 지닌 가치와 의의에 대해 깨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