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죽이기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꿈속에서 본 살인사건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된다면?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연쇄살인처럼 계속 이어진다면?

더구나 자신이 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게 되고

정해진 시간 안에 진범을 찾지 못할 경우 꿈과 현실 모두에서 목숨을 잃을 상황에 처한다면?

그야말로 초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꿈속의 인물들이 현실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 나와 준다면 금세 진범을 찾겠지만,

만일 꿈속의 인물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캐릭터들이라면 문제는 정말 심각해지겠죠.

 

대학원생 아리는 자신의 꿈속에서 앨리스로 등장합니다.

꿈속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몰린 앨리스는 현실에서도 똑같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침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이모리(꿈속의 도마뱀 빌’)의 도움을 받게 된 아리(앨리스)

꿈과 현실 두 세계를 오가며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꿈에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이 현실 속의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캐릭터 그대로 괴팍하거나 엉뚱하거나 4차원을 헤매고 있어서

도저히 현실 속의 누구인지 판명해낼 수가 없습니다.

아리는 이모리와 함께 사건 관련자들을 하나씩 체크하며 꿈과 현실의 캐릭터들을 맞춰봅니다.

그와 동시에 정해진 시간 안에 꿈과 현실을 오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려 합니다.

 

엄청난 상상력과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구성이 필요한 이런 스토리를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언어유희와 캐릭터 플레이를 통해

맛깔나게 풀어냅니다. (때론 복잡하고 어지럽기도 하지만요..^^)

얄미울 정도로 냉소적이다가도 한편의 재미난 만담처럼 급변하는 꿈속의 분위기와

정해진 시간 안에 연쇄살인의 진범을 찾아내야만 하는 긴장감 넘치는 현실의 분위기가

적절한 타이밍마다 챕터를 바꿔가며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습니다.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아주 오래 전 동화 버전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앨리스 죽이기를 읽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론 굳이 재독 없이도 술술 읽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캐릭터와 사건들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면

앨리스 죽이기역시 좀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특유의 언어유희가 때론 말장난 같아서 약간의 짜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구성의 무리수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판타지가 끼어든 미스터리를 싫어하는 독자들에겐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간식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접한다면

이런 재미를 맛보기가 쉽지 않다는 의외의 만족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작가 다쓰미 쇼이치는 폐허가 된 호텔 촬영을 위해 쇠락한 소도시 다카하마를 찾았다가

공항건설 반대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다쓰미는 과거 잠시 탐정 일을 했던 경험을 발휘하여

현지 신문기자이자 피해자의 남편인 안비루와 함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하지만 공항건설을 둘러싼 찬반파의 갈등으로만 보이던 사건은 캐면 캘수록 복잡해졌는데,

폐쇄적인 소도시 특유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속내를 알 수 없는 관련 인물들의 태도는 물론,

살인사건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이는 5년 전의 호텔 방화사건, 조직폭력단의 은밀한 개입 등

사건의 외연을 키우는 변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쓰미의 조사가 장벽에 막혀 지지부진할 무렵,

또 다른 희생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소도시 다카하마는 패닉에 빠집니다.

 

● ● ●

 

환상의 여자이후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가노 료이치의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얼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주인공(변호사, 사진작가)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가 하면,

폐쇄적이고 쇠락한 소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과거의 사건이 마치 나비 효과처럼 현재의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젠 곳곳에 폐허만 남은 바닷가의 소도시에서

유년기부터 함께 성장해온 주민들은 공항건설 계획을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이들은 복잡한 애증 관계로 얽혀있지만 동시에 비밀을 공유한 사이이기도 합니다.

다쓰미는 공항건설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에 주목하면서도

5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호텔방화사건이 사건해결의 열쇠라고 확신하지만

소도시 주민 누구도 그에게 당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밀은 치명적인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다쓰미처럼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사건해결에 앞장 설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외부인 다쓰미에게 소도시의 비밀을 쉽게 털어놓지 않습니다.

 

창백한 잠이 독자를 끝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스터리도 미스터리지만 가노 료이치는 폐쇄적인 소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도시 주민들 사이의 애증과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비밀을 공유하는 일그러진 유대감 등을

살인, 실종,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사건 속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다쓰미의 탐문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 역시

이런 다카하마의 특별한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환상의 여자와 비슷한 얼개를 지녔다고 언급했는데,

공교롭게도 아쉬운 점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노 료이치는 다쓰미의 개인사, 즉 일찌감치 붕괴된 가족의 트라우마를 비중 있게 다루는데

이 대목을 다카하마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연결 짓는 과정에서

조금은 무리하게, 또 약간은 과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건에 휘말린 다쓰미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개인사를 소개한 것인데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환상의 여자에서는 주인공의 개인사가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이 아쉬웠는데,

창백한 잠은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이라 크게 거슬리진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인공의 천재적이고 비약적인 추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부분입니다.

환상의 여자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서평을 인용하면,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합니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채 방대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왜 저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이해하기 힘들 만큼 홀로 앞서갑니다.

 

다쓰미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습니다.

물론 작가는 다쓰미가 어떤 근거로 그런 추리에 이르렀는지 부연 설명을 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탐정 일을 경험했을 뿐, 본업은 사진작가라는 다쓰미가

어지간한 명탐정보다 더 뛰어나게 느껴진 것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가노 료이치의 가장 큰 미덕은 도저히 풀 수 없어 보이는 복잡한 실타래를

주인공이 끈질기고 집요하게 한 가닥씩 풀어가도록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폭주와 비약만 아니라면 그 정교한 설계에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늘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그의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설정 속에 개인의 욕망을 녹여내는 가노 료이치의 공식이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형식과 스토리로 발휘될지 궁금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2010년 뉴욕. 해럴드 화이트는 젊은 나이에 셜로키언 모임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에 가입합니다.

하지만 가입의 기쁨도 잠시, 해럴드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립니다.

피살자는 홈스의 최고 권위자로 다음 날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사라진 190010월부터 3개월간의 일기는 셜로키언 모두에게 성배와도 같은 존재인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에게 극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럴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사라진 일기를 찾고자 분투합니다.

 

7년 전인 1893, 허구의 캐릭터임에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사랑받고 추앙받는 것은 물론

창조주인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감에 질려 소설 속에서 셜록 홈스를 죽게 만든코난 도일은

이후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고,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에 매진해왔습니다.

190010월 어느 날, 익명의 발신자가 보낸 소포 폭탄을 받은 코난 도일은

런던 경찰을 찾아가지만 그들의 무능함에 질려 직접 사건 해결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건은 점차 커져 연쇄살인사건으로 확대되고 코난 도일은 용의자로 몰리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3개월 간 코난 도일은 숱한 위기를 겪으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100년 후 셜로키언들의 성배가 된 사라진 일기에는 이 3개월 동안의 일이 담겨 있습니다.

 

● ● ●

 

뭐랄까.. “, 이 작가는 정말 뼛속까지 셜로키언이구나..”라는 느낌이랄까요?

셜록 홈스는 물론 그들을 창조해낸 아서 코난 도일과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엄청난 상상력과 필력을 통해 거대한 팩션으로 빚어낸 작가의 광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읽은 셜록 홈스 또는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체로 직설적인 방법, 즉 셜록 홈스의 냄새가 너무 강하거나, 거의 그대로 인용하거나,

심지어 분위기만 모사한 1차원적인 서사를 택해왔다면,

셜로키언은 셜록 홈스와 코난 도일에 관한 모든 것을 펄펄 끓는 솥에서 제대로 우려낸 뒤

그것들을 재료 삼아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 말하자면, 차원이 다른 작품입니다.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물론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돼버린 셜록 홈스를 증오한 나머지

소설 속에서 그의 최후를 그린 뒤 희희낙락하는 코난 도일의 모습은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홈스의 죽음에 경악한 런던 시민과 언론의 격한 반발을 겪으며 혼쭐이 난 코난 도일이

우연한 계기로 연쇄살인사건의 탐정 노릇을 하게 된 설정도 재미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창조한 셜록 홈스를 흉내 내며 사건의 진상을 찾는 에피소드들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재미와 함께 긴장감까지 담뿍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셜록 홈스의 지적이고 논리적이지만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이고 여성적(?)인 성격이

실은 창조주인 코난 도일의 유전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습니다.

 

2010, 뉴욕과 런던을 무대로 셜록 홈스에 빙의된 채 살인사건을 쫓는 해럴드 화이트는

셜로키언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이 상황에서 셜록 홈스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현대의 기술을 이용한 과학수사보다는 아날로그 식 탐정 역할을 자처합니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사건에 임하는 자세나 논리적인 추리 능력은 셜록 홈스 그 자체입니다.

 

코난 도일과 해럴드 화이트 못잖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두 명의 왓슨’, 즉 브램 스토커와 세라라는 캐릭터입니다.

소설 드라큘라의 작가이자 코난 도일의 절친인 브램 스토커는

폭주하는 코난 도일을 적절히 통제하는가 하면 사건 해결에 결정적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어딘가 의뭉스러운 해럴드의 왓슨세라는

위기에 빠진 해럴드를 여러 번 구해주지만 정작 속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여인입니다.

100년의 시차를 둔 채 활약하는 두 쌍의 셜록 홈스-왓슨

그 캐릭터만으로도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인물들임에 분명합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두 명의 셜록 홈스가 펼치는 추리의 향연은

작가의 정교한 설계도 위에서 기가 막히게 맞물리며 전개됩니다.

해럴드의 챕터가 살인사건의 계기가 된 사라진 코난 도일의 일기를 찾는 이야기라면,

코난 도일의 챕터는 바로 그 일기의 내용인 셈인데,

한 번의 엇박자도 없이 나란히 달려가는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해져 도저히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주말에 날을 잡아 한 번에 완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건이나 캐릭터 못잖게 작가가 공들여 묘사한 것은 1900년 런던의 모습과 정서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는 어수선한 런던의 풍광이 있는가 하면,

희미한 가스등에 의존한 채 고유의 낭만을 발산하는 근대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집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낯선 문명이 전광석화처럼 일상을 잠식하는 와중에도

런던은 시간이 가도 죽지 않는, 한갓 모더니티가 죽일 수 없는, 그 세기만의 힘을 지닌 채

두 시대의 뒤섞임을 당당하면서도 차분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셜로키언은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독자로 하여금 셜록 홈스와 그의 시대를 그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다 보면 문득문득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워낙 극적이면서도 리얼한 상황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과 픽션의 경계가 무척 모호하다보니 수시로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검색하거나 알려고 들 필요 없이 그냥 즐기면서 읽으면 됩니다.

그래야 이 작품의 묘미를 더욱 진하게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궁금한 독자는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설명해주고 있으니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에 천천히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셜록 홈스라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단칼에 날려버리는 책이라는 찬사는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작품에 다소 실망했던 독자라도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이라면 그동안의 실망과 갈증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셜로키언을 기대하는 것은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이 작품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셜록 홈스의 창조자계승자의 구도를 이루는 듯 나란히 늘어선 두 이야기는

100년의 간극을 지닌 주인공들이 각기 홈스의 의미를 되새기며 막을 내린다.

창조자는 한때 홈스를 증오했지만 결국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그를 인정하게 되고,

계승자는 자기 삶에서 홈스가 지닌 가치와 의의에 대해 깨우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스트 케어
하마나카 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3명의 노인을 살해한 <>4년의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희대의 연쇄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법정 안팎의 분위기는 사뭇 특이합니다.

<>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중 일부는, 아니, 대다수는 <>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 살인을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유가족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4년 전으로 돌아가, <>가 오랜 기간에 걸쳐 저지른 연쇄살인,

일명 로스트 케어 사건의 전말을 여러 인물의 시각을 통해 세세히 묘사합니다.

<>는 과연 무기력한 노인들을 상대로 살인을 즐긴 사이코패스였는가?

<>가 수십 명의 노인을 살해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를 기소한 검사도, <>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도 <>를 증오하지 않는가?

 

● ● ●

 

수십억의 돈으로 고급 실버타운에서 극진한 서비스를 받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자식의 전 재산을 탕진시키고도 병과 노화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인이 있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부모를 안전지대에 모셔놓곤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병들고 치매에 걸린 부모를 돌보는 하루하루가 지옥 그 자체인 자식이 있습니다.

국가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쓸모없는 시스템을 만들기만 했을 뿐 참담한 현실은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왔습니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 더 이상 미풍양속이 아닌 고통스런 참극이 된 현실에서

<>는 죽음을 통해 부모와 자식 양쪽을 모두 구원하는 길에 나섭니다.

과연 누가 <>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번역자인 권일영 님은 이 소설을 옮기며 전체적으로 느낀 것은 절망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생로병사 현상이 이 참극의 배경이라는 점,

, 누구나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지금은 병든 부모 때문에 고통 받는 자식의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스스로가 자식에게 고통을 줄 병든 부모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포에 가까운 절망감 그 자체란 뜻입니다.

 

과거와 달리 현대는 장수(長壽)가 더 이상 축하할 일도, 축하받을 일도 아닌 세상입니다.

초고령사회의 부작용은 장수 선진국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낯익은 현상입니다.

로스트 케어는 그런 부작용 가운데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비극을 그립니다.

 

로스트 케어는 노인 연쇄살인을 다룬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정면으로 초고령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다큐멘터리의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서 발간된 침묵의 절규를 통해 초호황기와 버블시대, 동일본 대지진 등을 거치며

불행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삶을 살았던 한 여자의 일생을 비판적으로 그렸던 작가답게

하마나카 아키는 로스트 케어를 통해 일본 사회의 또 다른 그늘진 단면을 진단합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를 초반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나

약간은 목적극의 냄새가 풍기는 점, 또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인공적인 캐릭터의 설정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합니다.

때문에 침묵의 절규에 비해 미스터리의 밀도나 반전의 충격은 느슨한 것은 사실이지만,

피부에 와 닿는 리얼리티만큼은 압도적인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가 현실에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놀랄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하마나카 아키가 그려낸 지옥은 생생하고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비슷한 소재지만 좀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픽션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203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초고령사회의 문제를 파격적으로 그린

소네 케이스케의 결국에...’ (단편집 열대야에 수록)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사라바는 아쿠스 아유무라는 한 남자의 30여년에 걸친 성장기이자

동시에 한 가족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해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매인 탓에 깊은 사랑과 더 깊은 증오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네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심, 진지, 정직, 포용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어딘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아버지,

이기심과 허영, 강고한 의지로 똘똘 뭉친 대찬 성격의 어머니,

모두에게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유년기부터 온갖 엽기적인 행동과 가출, 등교 거부 등으로 온 가족을 힘들게 만들었던 누나,

그리고 좋게 말해서 중용, 실제로는 눈치와 방관이라는 처세술을 통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하며 살아온 나, 아쿠쓰 아유무.

 

네 사람이 이룬 아쿠쓰 가()30여년의 스토리는 사실 막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쉼 없이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자신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느닷없는 균열로 무너지기 시작했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고,

엽기적인 누나와 자존감 강한 어머니 간의 극단적인 충돌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머니는 이혼한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무위도식하면서도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에 빠졌고,

시한폭탄 같던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종교에 귀의하면서 더욱 기괴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유무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적당히 방관자 역할을 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임을 유년기부터 깨닫습니다.

필요에 따라 귀여움과 애교를 떨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자신의 우군이 돼준다는 것을,

상황에 따라 갈등의 한복판에서 슬그머니 도망치면 누구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갈등에 휘말려도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 자신에겐 피해가 없다는 것을

아유무는 본능처럼 터득하고 자신의 삶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좋아하는, 남들이 싫어하지 않는 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의지대로 나의 삶을 설계할 생각 같은 건 해보지도 않은 채 성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성인이 된 아유무는 한때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유년기부터 취해온 그의 삶의 방편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옵니다.

시간은 괴물처럼 흘러 그를 30대라는 연배에 올려놓았으며,

타고난 외모는 망가지고, 자신만의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은 좌표를 상실합니다.

특히 자신의 존재감을 지탱해줬던 친구들, 언제까지 자신과 함께 할 거라 믿었던 그들이

실은 다들 자신만의 인생을 견고히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아유무는 패닉에 빠집니다.

덧붙여 이미 해체됐던 가족의 공습이 다시 시작되면서

아유무는 문득 지나온 자신의 30여년의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라바는 가족 이야기지만 끝내 모든 것이 가족으로 귀결되는,

그러니까 가족만이 모든 미덕의 정점이라고 미화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가족의 이면 때론 추악하고, 때론 남들보다 못한 면모 -

아유무라는 한 남자의 성장기와 함께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물론 아유무의 가족은 고통스런 여정을 겪은 후에 나름의 방식으로 봉합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할 뿐입니다.

아유무의 가족에겐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으며

새로운 고통과 갈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유무와 그의 가족의 30여년을 지켜본 감회는 독자가 어떤 세대냐에 따라 퍽 다를 것입니다.

10, 20, 30, 그리고 그 이상의 세대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읽힐 작품이란 뜻입니다.

내게 다가올 시간,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 내가 떠나보낸 시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공감과 저항, 회한과 외면 등의 감정이 세대마다 특별하고 색다르게 떠오를 것이고,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시선도 세대마다 달리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1,2권에 걸쳐 9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 담긴 아유무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극적인 재미나 속도감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담담한 작품이라

자극적인 이야기에 길든 독자에겐 때론 지루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론 작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약간은 강요처럼 느껴지는 대목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누군가의 가족의 이야기를 엿봄으로써

지금 나의, 내 가족의 민낯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사라바의 가장 큰 미덕이자 주제가

제겐 오히려 부담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오히려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라는 컨셉과

그것을 담담하게 풀어간 서사 그 자체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이야기가 내내 아유무의 1인칭 시점으로만 전개됐다는 점인데,

개인적으론 한 챕터씩 번갈아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기술됐다면

훨씬 더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워낙 극과 극의 정서들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라 그들 역시 할 말이 무척 많았을 것이라는,

그래서 같은 상황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설명됐더라면

아유무 가족의 이면을 좀더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 사라바(サラバ).

안녕을 뜻하는 아라비아어 맛살라마와 일본어 사라바(さらば)’

아쿠쓰 아유무가 이집트에서 살던 유년 시절의 절친 야곱과 함께 멋대로(?) 조합한 단어.

내일도 만나자’, ‘약속이야’, ‘굿럭’, ‘갓 블레스 유’, ‘우리는 하나야등의 의미를 가졌지만

단순히 그 의미를 넘어 힘들 때나 그리울 때, 기쁨을 공유하거나 슬픔을 나눌 때,

타인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무심결에 입에 담게 되는 일종의 주문 같은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