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사적 잭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4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몇몇 대학의 시설에서 여대생들이 잇달아 살해당한다.

옷이 벗겨지고 복부에는 칼로 그은 상흔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살인 현장은 문과 창문 모두 안에서 잠겨 있는, 이른바 밀실 상태.

한편, 니시노소노 모에는 N대학 학생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록 가수 유키 미노루의 ‘Jack the Poetical Private (시적 사적 잭)’이라는 곡의 가사가

연쇄 살인사건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또 다른 이유로 유력 용의자로 유키 미노루를 지목한 경찰 역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인터넷 서점 소개글 요약, 편집)

 

● ● ●

 

N대학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그를 흠모하는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가 활약하는

이른바 S&M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이번 역시 다수의 기괴한 밀실이 등장합니다.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복부에 특이한 자상을 남긴 채 발견된 희생자들,

특별한 기교 없이 현실적으로 설계됐지만 도무지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정교한 밀실들,

경찰 수사를 혼선으로 몰고 가는 랜덤하기 짝이 없는 현장 상황과 단서 등

모리 히로시는 앞선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난해함으로 가득 찬 발단부를 선보입니다.

 

수년 전, 우발적으로 찾은 고립된 섬에서 연쇄살인과 마주치고(모든 것이 F가 된다),

견학 갔던 연구소에서 밀실살인에 휘말렸던(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사이카와와 모에 콤비는

이번에도 이런저런 우연이 겹치면서 사건의 중심부에 서게 됩니다.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 셈인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대학 내에서 벌어진 연쇄 밀실살인사건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됩니다.

사이카와가 우연히 출강하게 된 타 대학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알고 보니 사이카와를 초빙한 교수가 그 사건 현장의 최초 목격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N대학 제자이자 세간의 인기를 얻고 있는 록스타가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하고,

록스타의 형과 매니저는 모에가 속한 N대학 미스터리 연구회의 대선배들입니다.

우연치곤 좀 과한 설정이지만 어쨌든 사건 마니아이자 현경 본부장을 숙부로 둔 모에가

적극적으로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이카와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밀실의 트릭이라든가 희생자들의 복부에 새겨진 기이한 자상의 비밀은

그리 까다롭지도 않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식 수준에서 밝혀지지만

사이카와를 끝까지 애먹인 것은 범인의 의도입니다.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고 보기엔 너무 치밀하게 준비된 범행이고,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보기엔 굳이 필요 없는 밀실을 지나치게 공들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경찰과 모에가 밀실 트릭의 비밀과 현장의 단서들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는 동안

사이카와는 의도를 가졌을 법한 사건 관련 인물들에게 더 집중합니다.

어떻게?’보다 ?’가 더 중요한 요인이 된 덕분에

시적 사적 잭은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조금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사건에는 관심 없다는 듯 귀차니즘과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던 사이카와는

예의 천재적인 추리와 발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모에 역시 자꾸만 사건에서 도망치려는 사이카와를 꽁꽁 붙잡아두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명탐정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냅니다.

그와 함께 사이카와를 향한 모에의 연모가 적잖은 분량에 걸쳐 노골적으로 묘사되면서

이후 시리즈부터는 사건 해결 이외에 알콩달콩한 재미까지 기대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지극히 필수적인 인간관계만 유지한 채 보통 사람들에겐 선문답처럼 들리는 대화를 나누며,

시끄러운 소음과 불필요한 오지랖을 혐오하는, 이른바 자폐적인 천재 캐릭터인 사이카와는

그 어떤 장르물의 주인공보다 특별하고 매력적인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때론 그 도가 지나친 경우가 종종 보이고,

무엇보다 천재적 발상과 추리력이 독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비약이 심해

심정적으로 공감하거나 이입하기엔 좀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물론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인 모에가 사이카와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보완해주고 있지만

시마다 소지의 천재 캐릭터 미타라이 기요시를 연상시키는 사이카와의 비약적 추리는

앞으로도 내내 따라가기 어려운 대목일 것 같습니다.

 

10편의 시리즈 가운데 이제 4편까지 나왔는데,

남은 작품들에서 모리 히로시가 또 어떤 밀실과 트릭, 어떤 해법과 결말을 선보일지,

사이카와와 모에의 파트너쉽은 어떻게 롤러코스터를 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공계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독특함과 사이카와의 천재적 캐릭터 때문에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묘한 중독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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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19195, 본격적인 여름을 앞둔 뉴올리언스에서 참혹한 도끼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희생자들이 이탈리아 마피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탓에

사건을 맡은 형사 마이클 탤벗은 유력 마피아 가문인 마트랑가 일가를 주목합니다.

또한 수년 전 마이클의 밀고로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모범수로 석방된 전직 형사 루카는

마트랑가 가문의 협박에 가까운 요청으로 본의 아니게 진범 찾기에 나서게 됩니다.

한편, 혼혈에 여성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탐정이 되고 싶은 꿈을 억눌렸던 아이다 데이비스는

우연히 도끼 살인마에 관한 정보를 접하곤 친구 루이스와 함께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마이클-루카-아이다는 거의 접점 없이 각자의 방향대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진실을 향한 그들의 노력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점차 한곳으로 수렴되기 시작합니다.

 

● ● ●

 

1918년부터 1919년에 걸쳐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났던 실제 도끼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대하급 스릴러이자 당시의 뉴올리언스를 생생하게 그려낸 역사소설이기도 한 작품입니다.

현실에서는 영국의 잭 더 리퍼처럼 뉴올리언스의 도끼 살인마 역시 미제 사건으로 남았지만,

작가는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뒤섞은 것은 물론 뛰어난 캐릭터 플레이를 통해

묵직하면서도 재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수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스토리나 캐릭터 등 작품 속의 모든 극적 요소들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디테일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1919년의 뉴올리언스라는 배경 덕분입니다.

미국이지만 미국 같지 않은 도시, 흑백은 물론 혼혈과 이민자까지 가세한 팽팽한 인종 갈등,

마피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자 재즈의 흥이 골목골목까지 만연한 곳,

만성화된 부패와 은밀한 폭력이 판을 치고 이제 곧 금주법 시행을 목전에 둔 불안정한 거리,

거기에 거대한 태풍과 불벼락 같은 혹서가 번갈아 도시를 휘갈기는 잔인한 자연환경 등

말 그대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약고 같은 뉴올리언스라는 무대는

도끼 살인마의 공포를 극대화시키기에 제격인 곳입니다.

 

그에 덧붙여 이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뛰어든 세 명의 주인공 역시

뉴올리언스라는 배경의 영향을 톡톡히 받은 것으로 설정돼있습니다.

마이클은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자신의 멘토 경찰 루카를 고발한데다

당시 뉴올리언스에서는 불법이었던 흑인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합니다.

온 도시가 흑인이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마이클은 거꾸로 백인 마피아에 주목합니다.

루카는 석방 후 뉴올리언스에 대한 미련을 접고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려 하지만

한때 자신을 후원했던 유력 마피아에게 발목을 잡혀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뉴올리언스는 유능한 형사이자 향수병에 사로잡힌 루카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흑백 혼혈인데다 여성이라는, 당시로서는 약자 중의 약자인 아이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핸디캡을 이겨내고 셜록 홈즈의 마니아답게 명탐정이 되려는 꿈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한 뉴올리언스는 그런 그녀를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경로는 달라도 세 주인공이 치명적인 위기를 수차례 넘기면서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은

뉴올리언스의 5월의 끈끈한 공기나 느릿한 재즈의 리듬을 닮았습니다.

속도 빠른 현대의 미국식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전개를 보이고 있어서

그런 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만연체 같은 지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뉴올리언스의 분위기나 재즈에 대한 디테일하고 친절한 설명은

정통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기대한 성미 급한 독자에겐 쉽게 읽히지 않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늦추고,

완벽할 정도로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깔끔한 스토리에 대한 미련을 조금만 버린다면,

, “누가 진범이냐?”보다 주인공들의 기구한 삶과 뉴올리언스의 특별한 정서에 집중한다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의외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큰 여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도시 전체를 궤멸시킨 태풍 카트리나로만 기억됐던 재즈의 고향의 100여 년 전의 과거,

, 본문의 표현대로 폭력적이고 용서가 없고 서로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의심을 놓지 않는

범죄자와 이민 사회가 넘쳐나는 곳. 하지만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눈부시게 빛나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곳이기도한 뉴올리언스의 1919속살을 맛보기 위해

이만한 텍스트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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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 죽은 자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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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시()의 유력한 차기 시장 후보인 강호성의 집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교살당한 그의 어머니와 투신자살한 그의 아내 주미란이 그들입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데다 여당의 스타정치인인 강호성의 신분 때문에

경찰은 말기암이던 주미란이 남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짓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형사팀장 서동현은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화감 때문에 단독수사를 강행합니다.

정치권과 상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주미란의 행적을 집요하게 탐문하던 서동현은

강호성의 치부와 추악한 비밀, 그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주미란의 일기장을 발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압력으로 인해 정의를 구현할 기회는 오히려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 ● ●

 

더블로 처음 만났던 정해연 작가의 신작입니다.

독특한 구성과 캐릭터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던 더블에 비해

악의는 거의 돌직구 스타일의 정통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파헤칠수록 수상쩍은 거물 정치인의 당일 행적과 평소 사생활,

의문투성이인 사건 현장, 뭔가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가정부의 묘한 태도,

그리고 거대 악에 맞서 무모한 전쟁을 펼치는 중년의 형사팀장의 분투 등

이야기와 캐릭터는 전형적인 형사물 공식대로 설정돼있습니다.

 

이야기는 세 가지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수사를 진행하는 형사팀장 서동현의 시점이 메인이고

그의 수사를 방해하며 진실을 은폐하려는 강호성의 시점,

그리고 일기를 통해 남편에 대한 악의를 폭로하는 죽은주미란의 시점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진실을 파헤치는 쪽과 그것을 묻으려는 쪽이 맞대결을 펴는 가운데,

죽은 자의 일기가 진짜 진실의 편린들을 조금씩 흘려가는 구도입니다.

범인은 초반에 공개되지만 이런 구성 덕분에 이야기는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경찰과 언론을 쥐락펴락하는 거물 정치인의 폭주와 추악함은 독자들을 열 받게 만들고

그런 거물을 상대하는 일개(?) 형사팀장의 분투는 애처로워 보일 정도라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이나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일방적이고 도식적인 정의의 승리만을 풀어놓진 않습니다.

때론 권력은 현실이고 정의는 이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강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회파 미스터리의 냄새가 물씬 풍기곤 하는데

엔딩을 보면 그런 점을 감안한 작가의 의도가 확실히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작인 더블에서 느낀 아쉬움들 - 내공이 부족한 문장과 캐릭터 등 아마추어적인 풋풋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악의는 안정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만큼 더블에서 보여줬던 신선함이나 도전적인 패기는 사라졌습니다.

이야기는 공식대로 흘러가고,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캐릭터는 공식에 맞춰 의도적으로 과대포장되기도 하고

(특히 사악한데다 무한권력을 휘두르는 강호성 캐릭터는 좀처럼 이입이 어려운 경우였습니다.)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무리한 해프닝과 설정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리얼리티가 현저히 떨어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악을 응징하기 위한 트릭은 가볍고 어설퍼 보였고

어딘가 멋부린 듯한 엔딩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독자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단선적인 사건에 풍성함을 얹기 위해 여러 인물과 장치들이 동원됐지만

결과적으론 그것들이 조화롭게 믹스됐다고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평하자면 기대에는 조금은 못 미친 작품이었지만,

풋풋하지만 새롭고 독특했던 더블과 안정적이지만 상투적인 악의를 거쳤으니

이젠 두 작품의 미덕만 고루 갖춘 정해연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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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 - 밀실 살인이 너무 많다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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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코믹한 형사 듀엣의 좌충우돌 밀실살인사건 해결 일지를 담은 작품집입니다.

추리소설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평범한 사건까지 과대 해석하다 번번이 놓친 탓에

미궁 경감이라는 별명과 함께 시라오카라는 벽촌으로 좌천된 구로호시 히카루 경감과

툭하면 큰일 났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면서도

구로호시보다 먼저 밀실사건을 해결하는 3년차 젊은 형사 다케우치 마사히로가 그들입니다.

 

존 딕슨 카의 작품에 푹 빠져 마니아의 경지에 오른 구로호시 경감은

그가 창조한 밀실트릭의 대가 기드온 펠 박사나 헨리 메리베일 경처럼

기괴한 밀실살인의 비밀을 멋지게 해결하려 애쓰지만 매번 헛다리만 짚고 맙니다.

구로호시 경감의 실수를 짚어내며 대부분의 사건을 해결하는 다케우치 역시

명민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우연과 계시(?) 덕분에 명탐정이 되는 캐릭터라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말 그대로 덤 앤 더머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처음엔 오리하라 이치의 유쾌 발랄 미스터리 단편집이라는 홍보카피가 무척 낯설었는데

대체로 무겁거나 서술트릭이 빛나는 그의 작품들만 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개글을 더 보니 그의 출발점을 알 수 있는 작품집이라는 부연설명이 눈에 띠었고,

갑자기 그의 초기 성향을 맛볼 수 있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사건이라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라오카에서 벌어진 7건의 밀실살인을 다루고 있는데

밀폐된 체육관, 폐허가 된 저택, 미스터리 작가의 서재, 공중의 리프트 등

사건의 무대인 밀실도, 동원된 소재도 다양하고 그 해법도 흥미진진합니다.

다만, 오리하라 이치의 초기작이 대부분이다 보니 어딘가 좀 억지스럽기도 하고

더 이상 새로움을 추구하기 어려운 밀실 설정의 한계도 곳곳에서 눈에 띠곤 합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명성 때문에 기대감을 가졌던 독자들은 100% 만족하긴 어렵겠지만,

몇몇 작품은 나름의 반전을 통해 오리하라 이치다운 매력을 발산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들와키혼진 살인사건이 마음에 들었는데

전자가 존 딕슨 카에 대한 오마주가 은근히 깔려있는 작품이라면

후자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을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그 외의 수록작들도 대부분 밀실트릭을 다룬 특정 작품의 패러디라는 인상이 짙은데

이 작품을 읽은 뒤 원작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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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04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ㅡ잘 읽고 갑니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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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버지의 나이에 이른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담담하게 기록한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첫 수록작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소도시 트랑을 배경으로

부모와 레몽의 10명의 형제의 행복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겪던 1960년대 후반을 무대로

파리, 퀘벡, 로마, 알제리에서 요동치는 삶을 살았던 레몽의 청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전적인 회고록이지만 소설만큼이나 롤러코스터 같은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일정 부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자신이 태어날 시대, 자신과 함께 성장할 형제, 생명의 원천이자 갈등의 상대인 부모 등

어느 하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누군가는 혹독한 시대, 잔인한 형제들, 남보다 못한 부모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풍요의 시대, 다정한 형제들, 애정과 존경을 공유하는 부모를 만나기도 하겠죠.

누군가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크게 모나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한탄하고 자책하고 반성하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운명에 맞서기도 합니다.

 

레몽에게 있어 운명은 별로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맑고 순수했던 유년기의 행복은 부모의 반목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고,

웃음으로 가득 찼던 트랑의 2층집은 언젠가부터 낯선 냉기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저 두렵고 낯선 존재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뒤늦은 자책과 한탄을 불러왔고,

기숙학교에서의 고립된 삶은 레몽의 삶의 방향을 크게 흔들어놓는 계기가 됩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레몽은 신부가 되는 수업을 받으며 세계를 돌아다니던 중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혼돈의 1960년대 후반을 살아갑니다.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은 물론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자성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했던 그 나이에 이른 레몽은

모든 기억의 원천이던 트랑의 집과 낡은 흑백사진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폭풍 같은 성장과 구도의 길을 기록하게 됩니다.

 

번역자의 해설대로 이 작품은 소설을 구성하는 이야기보다

삶의 진실에 대한 의문과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분류처럼 세차게 달려온 그 젊은이의 내면적 에너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입니다.

딱히 극적이지도, 충격적이거나 반전이 있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하나의 인격이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선택과 결정을 통해

어떻게 극적으로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나름 흥미진진한 맛이 있습니다.

문화적 차이와 조금은 멀리 떨어진 시대적 배경 때문에

한국의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거나 공감대가 떨어질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시대와 지역을 떠나 누구나 겪게 되는 젊은 날의 통과의례에 관한 자전적 회고록이란 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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