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검은 선’, ‘미세레레’, ‘늑대의 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읽은 그랑제의 작품입니다.
꽤 오래 전, ‘검은 선’에 열광한 이후 뒤로 갈수록 만족도가 떨어진 바람에
그랑제의 최신간(비록 현지 출간은 2009년이지만)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이나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을 연상시키는
극도로 잔혹한 파리 연쇄살인 사건이 오프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을 보곤
‘검은 선’ 이상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느껴졌고, 남은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올랐습니다.
● ● ●
원시의 식인 풍습을 모방한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이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집니다.
심각한 우울증과 실연의 후유증으로 약에 의존하고 있는 낭테르 지법 수사판사 잔 코로바는
각각의 살인이 자폐, 생식(유전), 원시라는 ‘주제’에 따라 이뤄진 점을 파악하곤
피살자들의 주변을 샅샅이 탐문하며 그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던 중 한 정신과 의사의 도청 파일 속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서 잔 코로바는 수사팀에서 제외 당하게 됩니다.
잔 코로바는 명백히 자신을 노린 용의자의 치명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수사를 위해 사건의 진원지로 드러난 중남미를 향해 무모한 여정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신분석과 신화, 중남미의 잔혹한 현대사, 원시의 비밀이 얽히고설킨
끔찍한 진실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그 모태인 악의 숲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그랑제의 방대한 지적 자산과 풍부한 서사, 거침없는 필력이 여지없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정신분석(자폐와 분열), 생식과 유전, 원시의 신화와 풍습에다가
독재정권이 고문과 학살을 일삼던 중남미의 현대사까지 버무려낸 덕분에
소설이라기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믹스된 종합선물세트를 읽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의 숲’은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야기’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리수가 확연한 우연의 남발, 개연성보다는 작위가 점령한 설정들,
(어느 분의 서평처럼) 달나라로 간 스토리와 다큐멘터리 같은 ‘강의’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야기는 연쇄살인에서 시작되지만 엔딩은 작가의 철학 강변으로 끝난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런 문제는 ‘늑대의 제국’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점인데,
잃어버린 기억, 국가의 폭력, 끔찍한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인간의 자유정신’과 ‘터키 역사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소설 대신 작가의 인문학 강의가 스토리의 주류를 차지한 끝에
결국엔 주인공은 사라지고 엉뚱한 인물들이 엔딩을 장식하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악의 숲’은 다행히(?) 그런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여러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와 설정들, 과도한 우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종합선물세트’를 통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지식을 주입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의 캐릭터나 범행 동기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범인의 과거사는 부족한 개연성을 보충하기 위해 수시로 동어반복의 설명이 덧칠 됐고,
범행 동기 역시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고생스런 살인’을 저질렀는지 모호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모호함은 자폐-생식(유전)-원시라는, 아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코드들을
살인자의 주요 동기로 설정한 덕분에 더욱 그 심오함을 더해갑니다.
초반에 장황하게 묘사된 잔 코로바의 우울증과 실연 후유증은
결국 정신과 의사를 도청하게 만든 뒤 범인과 ‘우연히’ 만나게 하기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당초 자신의 사건도 아닌 끔찍한 연쇄살인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 참혹하게 살해된 언니 스토리를 트라우마처럼 부여하는가 하면,
무력과는 거리가 먼 30대 여자 수사판사가 홀로 중남미로 날아가는 무모함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그녀가 과거 1년 동안 중남미를 단독 여행했다는 이력을 설정해줍니다.
군인이 지키는 혈액원,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국의 건물을 기막힌 요행으로 출입하는 장면이나
마치 등장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나타나주는 조력자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받는 장면은
가끔은 조악한 수준까지 느껴져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심플한 권선징악 액션과 함께 어, 하는 순간에 속전속결로 마무리됩니다.
자폐와 생식과 원시와 중남미 현대사 등 앞서 500여 페이지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온 토대가
그 존재감이 의심될 정도로 허망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모든 것은 이해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이해하라.” 식의
작가의 해명이 환청처럼 들리면서 ‘늑대의 제국’의 엔딩에서 느낀 당혹스러움이 밀려옵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이 많았는데,
어쩌면 그랑제에 대한 롤러코스터 같은 열광과 불신을 겪은 저만의 선입관이
‘악의 숲’을 이토록 혹평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광대한 지식과 신비주의를 발산하는 픽션의 조합이라는 그랑제만의 주특기가
이제 더는 저에겐 먹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젠 줄거리조차 잘 기억 안 나지만 ‘검은 선’에 열광했던 이유가 스스로도 궁금해집니다.
만일 순수한 스릴러의 매력에 홀딱 반했던 것이라면
그랑제의 다른 작품들을 기대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이겠지만,
혹시라도 그 무렵 뭐에 씌운 듯 ‘그랑제만의 주특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라면
이제 더는 그랑제의 작품을 읽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책장에 ‘황새’와 ‘돌의 집회’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꽂혀있는데,
먼저 ‘검은 선’을 다시 한 번 읽어볼지,
아니면 못 읽은 두 작품부터 읽을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자라면, 어쩌면 그랑제의 초기작들이라 조금은 어깨에 힘이 덜 들어간,
그러니까 순수한 스릴러의 매력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작품들 (현지 출간년도)
황새 (1994)
크림슨 리버 (1998)
돌의 집회 (2000)
늑대의 제국 (2003)
검은 선 (2004)
미세레레 (2008)
악의 숲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