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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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버지의 나이에 이른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담담하게 기록한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첫 수록작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소도시 트랑을 배경으로

부모와 레몽의 10명의 형제의 행복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겪던 1960년대 후반을 무대로

파리, 퀘벡, 로마, 알제리에서 요동치는 삶을 살았던 레몽의 청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전적인 회고록이지만 소설만큼이나 롤러코스터 같은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일정 부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자신이 태어날 시대, 자신과 함께 성장할 형제, 생명의 원천이자 갈등의 상대인 부모 등

어느 하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누군가는 혹독한 시대, 잔인한 형제들, 남보다 못한 부모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풍요의 시대, 다정한 형제들, 애정과 존경을 공유하는 부모를 만나기도 하겠죠.

누군가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크게 모나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한탄하고 자책하고 반성하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운명에 맞서기도 합니다.

 

레몽에게 있어 운명은 별로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맑고 순수했던 유년기의 행복은 부모의 반목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고,

웃음으로 가득 찼던 트랑의 2층집은 언젠가부터 낯선 냉기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저 두렵고 낯선 존재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뒤늦은 자책과 한탄을 불러왔고,

기숙학교에서의 고립된 삶은 레몽의 삶의 방향을 크게 흔들어놓는 계기가 됩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레몽은 신부가 되는 수업을 받으며 세계를 돌아다니던 중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혼돈의 1960년대 후반을 살아갑니다.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은 물론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자성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했던 그 나이에 이른 레몽은

모든 기억의 원천이던 트랑의 집과 낡은 흑백사진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폭풍 같은 성장과 구도의 길을 기록하게 됩니다.

 

번역자의 해설대로 이 작품은 소설을 구성하는 이야기보다

삶의 진실에 대한 의문과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분류처럼 세차게 달려온 그 젊은이의 내면적 에너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입니다.

딱히 극적이지도, 충격적이거나 반전이 있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하나의 인격이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선택과 결정을 통해

어떻게 극적으로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나름 흥미진진한 맛이 있습니다.

문화적 차이와 조금은 멀리 떨어진 시대적 배경 때문에

한국의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거나 공감대가 떨어질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시대와 지역을 떠나 누구나 겪게 되는 젊은 날의 통과의례에 관한 자전적 회고록이란 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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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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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선’, ‘미세레레’, ‘늑대의 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읽은 그랑제의 작품입니다.

꽤 오래 전, ‘검은 선에 열광한 이후 뒤로 갈수록 만족도가 떨어진 바람에

그랑제의 최신간(비록 현지 출간은 2009년이지만)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이나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을 연상시키는

극도로 잔혹한 파리 연쇄살인 사건이 오프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을 보곤

검은 선이상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느껴졌고, 남은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올랐습니다.

 

● ● ●

 

원시의 식인 풍습을 모방한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이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집니다.

심각한 우울증과 실연의 후유증으로 약에 의존하고 있는 낭테르 지법 수사판사 잔 코로바는

각각의 살인이 자폐, 생식(유전), 원시라는 주제에 따라 이뤄진 점을 파악하곤

피살자들의 주변을 샅샅이 탐문하며 그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던 중 한 정신과 의사의 도청 파일 속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서 잔 코로바는 수사팀에서 제외 당하게 됩니다.

잔 코로바는 명백히 자신을 노린 용의자의 치명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수사를 위해 사건의 진원지로 드러난 중남미를 향해 무모한 여정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신분석과 신화, 중남미의 잔혹한 현대사, 원시의 비밀이 얽히고설킨

끔찍한 진실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그 모태인 악의 숲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그랑제의 방대한 지적 자산과 풍부한 서사, 거침없는 필력이 여지없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정신분석(자폐와 분열), 생식과 유전, 원시의 신화와 풍습에다가

독재정권이 고문과 학살을 일삼던 중남미의 현대사까지 버무려낸 덕분에

소설이라기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믹스된 종합선물세트를 읽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의 숲은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야기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리수가 확연한 우연의 남발, 개연성보다는 작위가 점령한 설정들,

(어느 분의 서평처럼) 달나라로 간 스토리와 다큐멘터리 같은 강의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야기는 연쇄살인에서 시작되지만 엔딩은 작가의 철학 강변으로 끝난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런 문제는 늑대의 제국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점인데,

잃어버린 기억, 국가의 폭력, 끔찍한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인간의 자유정신터키 역사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소설 대신 작가의 인문학 강의가 스토리의 주류를 차지한 끝에

결국엔 주인공은 사라지고 엉뚱한 인물들이 엔딩을 장식하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악의 숲은 다행히(?) 그런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여러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와 설정들, 과도한 우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종합선물세트를 통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지식을 주입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의 캐릭터나 범행 동기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범인의 과거사는 부족한 개연성을 보충하기 위해 수시로 동어반복의 설명이 덧칠 됐고,

범행 동기 역시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고생스런 살인을 저질렀는지 모호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모호함은 자폐-생식(유전)-원시라는, 아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코드들을

살인자의 주요 동기로 설정한 덕분에 더욱 그 심오함을 더해갑니다.

 

초반에 장황하게 묘사된 잔 코로바의 우울증과 실연 후유증은

결국 정신과 의사를 도청하게 만든 뒤 범인과 우연히만나게 하기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당초 자신의 사건도 아닌 끔찍한 연쇄살인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 참혹하게 살해된 언니 스토리를 트라우마처럼 부여하는가 하면,

무력과는 거리가 먼 30대 여자 수사판사가 홀로 중남미로 날아가는 무모함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그녀가 과거 1년 동안 중남미를 단독 여행했다는 이력을 설정해줍니다.

군인이 지키는 혈액원,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국의 건물을 기막힌 요행으로 출입하는 장면이나

마치 등장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나타나주는 조력자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받는 장면은

가끔은 조악한 수준까지 느껴져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심플한 권선징악 액션과 함께 어, 하는 순간에 속전속결로 마무리됩니다.

자폐와 생식과 원시와 중남미 현대사 등 앞서 500여 페이지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온 토대가

그 존재감이 의심될 정도로 허망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모든 것은 이해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이해하라.” 식의

작가의 해명이 환청처럼 들리면서 늑대의 제국의 엔딩에서 느낀 당혹스러움이 밀려옵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이 많았는데,

어쩌면 그랑제에 대한 롤러코스터 같은 열광과 불신을 겪은 저만의 선입관이

악의 숲을 이토록 혹평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광대한 지식과 신비주의를 발산하는 픽션의 조합이라는 그랑제만의 주특기가

이제 더는 저에겐 먹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젠 줄거리조차 잘 기억 안 나지만 검은 선에 열광했던 이유가 스스로도 궁금해집니다.

만일 순수한 스릴러의 매력에 홀딱 반했던 것이라면

그랑제의 다른 작품들을 기대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이겠지만,

혹시라도 그 무렵 뭐에 씌운 듯 그랑제만의 주특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라면

이제 더는 그랑제의 작품을 읽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책장에 황새돌의 집회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꽂혀있는데,

먼저 검은 선을 다시 한 번 읽어볼지,

아니면 못 읽은 두 작품부터 읽을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자라면, 어쩌면 그랑제의 초기작들이라 조금은 어깨에 힘이 덜 들어간,

그러니까 순수한 스릴러의 매력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작품들 (현지 출간년도)

황새 (1994)

크림슨 리버 (1998)

돌의 집회 (2000)

늑대의 제국 (2003)

검은 선 (2004)

미세레레 (2008)

악의 숲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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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 인간실격.제로자키 히토시키, Faust Novel 헛소리꾼 시리즈 2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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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첫 편인 잘린 머리 사이클이 기이한 캐릭터들로 가득 찬 독특한 작품이긴 했어도

절해고도에서 벌어진 밀실살인사건의 진상 밝히기를 다룬 제대로 된미스터리였다면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는 화자인 나, 헛소리꾼 이짱의 정신세계 해부에 중점을 둔 반면

연쇄교살사건이라는 미스터리 코드는 상대적으로 서브 스토리처럼 다뤄진 작품입니다.

 

이짱의 주변에서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제로자키라는 길거리 살인마에 의한 무차별 토막 살인사건이 하나이고,

같은 과 여학생 미코코를 통해 알게 된 동급생들이 연이어 교살되는 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사실 이짱이 진실 찾기에 나서는 메인 스토리는 후자이고,

제로자키라는 잔혹한 살인마는 이짱의 정신세계 해부를 위한 소품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처음 등장한 잘린 머리 사이클에서의 이짱은 제법 평범한 캐릭터였던 걸로 기억하지만,

이 작품 속의 이짱은 그야말로 소시오패스의 전형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실천합니다.

소시오패스라고 해서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이짱은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도 이입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애정은 말할 것도 없고 혐오는 할지언정 증오는 하지 않는,

즉 타인과의 그 어떤 커뮤니케이션이나 감정적 교류도 거부하는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또 여기저기서 모순된 사고와 행동을 하면서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자기변호를 하거나, 심할 정도로 자학에 빠지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니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다며 염세주의의 극단을 달리기도 하고,

매사에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때론 자기도 모르게 사건에 깊이 개입하기도 합니다.

외진 곳에서 만난 길거리 살인마와는 격투 중에 근거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가 하면,

심지어 거울 속의 자신 같다는 공명까지 주고받으며 긴밀한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울증 캐릭터라고 할까요?

 

미스터리에 비해 턱없이 많은 분량이 할애된 이짱에 대한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묘사들 때문에

독자들은 무수한 현학적 표현과 쓴 사람만 알 수 있는 모호한 표현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면 그동안 묘사된 이짱의 정신세계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굳이 그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길거리 살인마를 소품으로까지 등장시키면서까지

이짱의 소시오패스적인 기질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회의도 듭니다.

 

오히려 연이어 교살된 이짱의 동급생들의 미스터리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잘린 머리 사이클은 그런 부분에서 제대로 된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잘린 머리 사이클에 비해 상대적으로 혹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이 비슷한 이유를 근거로 한 내용들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7년에 제다이 님이 네이버 카페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에 올린 서평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세상천지의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고독하기만 한 이짱의 심리와 헛소리는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사는 십대에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을 거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난 본인 같은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나는 철저하게 미스터리의 관점에서만 이 작품을 보았고, 사용된 트릭에 충분히 만족했다.

사실은 만화 같은 인물들이나 헛소리를 아예 빼고,

250페이지 내외의 콤팩트한 추리소설로 만들어졌으면 더욱 열광하겠지만...

(http://cafe.naver.com/mysteryjapan/3567)

 

물론 제다이 님은 여전히 헛소리꾼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표하면서 글을 마쳤지만,

저는 다음 작품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입니다.

동급생 연쇄교살사건은 동기는 좀 억지스러웠지만 트릭은 나름 신선했고,

이짱 주변의 기이한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매력들을 맛보기 위해 기나긴 헛소리를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고로 구매한 헛소리꾼 시리즈를 다시 중고시장에 내놓을지, 어떻게든 계속 읽을지는

다음 작품인 목매다는 하이스쿨100페이지까지 읽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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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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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모델로 한 인권증진위원회를 무대로

개성 강한 각양각색의 조사관들이 때론 갈등을 겪으며, 때론 협력을 통해

인권지킴이로 분투하며 감춰진 사실을 밝혀내는 5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얼핏 책 소개만 보면 논픽션의 맛이 나지 않을까, 선입견이 들 수도 있지만

송시우 작가는 조사관들의 고민과 활약을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 속에 잘 버무렸습니다.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공권력의 남발,

증거보다 진술에 의존하는 후진적인 사법체계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주제에 잘 어울리는 미스터리 픽션으로 포장하여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전해줍니다.

도처에 숨겨놓은 덫과 복선을 이용하여 막판 반전을 꾀하는 에피소드도 있고,

명쾌하게 답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정의감에 사로잡힌 슈퍼울트라 능력자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한군데씩 부족함을 지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인물들입니다.

조사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인권위 일이 적성이 아니라고 여기는 한윤서,

40대의 아줌마 조사관으로 귀가 얇은 단점은 있지만 추진력만큼은 일품인 이달숙,

막내 조사관임에도 다혈질에, 성차별에, 내심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문제 조사관 배홍태,

사명감 때문에 로펌 대신 인권위에 왔지만 기대한 것처럼 일이 안 풀려 고민 중인 부지훈 등

어느 조직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드라마로 치면 조연에 가까운 캐릭터들입니다.

 

전형적인 구성이라면 이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멋진 결론을 내리는 보스가 나올 법도 한데,

작가는 지시와 보고에만 충실하거나 또는 결정 자체를 떠미는 무력한 상사만 등장시킵니다.

말하자면 조사관들 사이의 갈등을 독자 앞에 고스란히 노출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서든 작가의 입을 통해서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독자 스스로 각자의 결론을 고민하게끔 만드는 여지를 꽤 많이 남겨 놓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지점이 달리는 조사관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인권위의 정체성과 본분을 놓고 벌어지는 조사관들 사이의 갈등을 지켜보고 있자면

현장도 모르고 법도 모르는 비전문가에 의한 조사와 판단은 신뢰할 수 있는가?”

과연 국가기관은 당연히 감시받아야 할 수상하고 사악한 존재인가?”

악인의 인권도 보호돼야 하는가?” 등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도 이런 대화들이 숱하게 오갑니다.

인권은 개잡놈들에 의해 발전돼왔고, 그 혜택은 주로 그 개잡놈들이 누리고 있다.”라든가,

“(엄격한 증거가 없어도) 약자의 편에서 인권침해라는 판단을 팍팍 내려줘야지.”라든가,

우리 일이 결국 나쁜 사람들 좋자고 하는 일이었네요.”라는 자조 등이 그것인데,

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답 없는 딜레마의 답답함과 고민이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미스터리로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의미들을 곱씹어가면서 읽는다면 훨씬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책읽기가 돼줄 것입니다.

 

이미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통해 크지 않지만 촘촘한 서사의 힘을 보여준 송시우 작가가

기대대로 훌륭한 두 번째 작품을 내줘서 반갑고 또 반갑습니다.

인권 문제와 미스터리의 조합이라는 발상도 신선했고

이야기의 전개나 엔딩 모두 상투적이 않은 방식이라 (개운하진 않지만) 마음에 들었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이후 15개월 만에 신작이 나온 셈인데,

시공사 블로그에 실린 다음 작품은 더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인터뷰 내용대로라면

빨라야 2017년 하반기나 돼야 신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sigongbook/220547694116)

독자 입장에선 기다린 시간만큼 알찬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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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미싱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2
체비 스티븐스 지음, 노지양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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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납치된 후 1년여 동안 악몽 같은 감금의 날들을 보낸 애니 오설리번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망가져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비극을 선정적으로 포장하여 세상에 퍼뜨리는 중이었고,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는 집요하게 그녀의 스토리를 사겠다며 수시로 연락해옵니다.

 

한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납치 전후의 상황,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되짚어가며

애니는 왜 자신이 납치돼야 했는지, 왜 악몽 같은 감금을 당해야 했는지를 반추해봅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분명 자기 주위 사람이 연루됐다는 확신을 갖게 된 애니는

아직도 자신의 사건을 집요하게 수사하는 형사 개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하지만 개리는 전혀 상상도 못한 수사결과를 애니에게 알려줍니다.

 

● ● ●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고통스런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은 애니의 진술이 하나이고,

납치 전후의 상황과 1년 동안의 감금 생활에 대한 묘사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후에는 그녀를 향한 언론과 이웃의 횡포, 주변 사람들과의 불안정한 관계,

왜 자신이 납치됐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추리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애니 오설리번은 납치 피해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합니다.

폭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그녀의 모든 일상은 범인에게 지배당합니다.

입어야 할 옷, 화장실에 가는 시간, 먹는 음식 등등...

1년 동안 그녀를 지배한 범인의 규칙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그녀의 의식을 점령했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고통의 무대였던 침대는 여전히 공포 그 자체여서

애니는 좀처럼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옷장 속에서 겨우 잠을 청하곤 합니다.

 

사실 납치와 감금이라는 소재는 미스터리 마니아인 저로서도 조금은 불편한 소재입니다.

차라리 피가 난무하는 살육극은 감당할 수 있어도

산 채로 매장당하는 듯한 공포를 안겨주는 납치와 감금은

그것이 아무리 픽션이라도 피하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납치 직전, 납치와 감금 기간, 탈출 후의 패닉 등

애니의 심리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디테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작가 자신이 여성이라서 그런 묘사가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캐릭터에 대한 끈질긴 연구와 정교한 설계, 캐릭터와의 동일시의 노력이 없었다면

애니의 불행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픽션 속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책 읽는 내내 가시를 삼킨 것처럼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엔딩의 반전과 충격이 그만큼 크게 다가왔겠지만요.

 

억지로라도 아쉽게 느껴진 점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분량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왜 작가가 사소한 디테일에까지 충실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1/4정도는 동어반복 또는 과도한 디테일에 소모됐다는 느낌입니다.

좀더 이야기를 슬림하게 만들었다면 중간중간의 피해갈 수 없는 지루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납치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미약하게 느껴진 작위성인데,

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조금은 우격다짐으로 맞춰놓은 느낌이랄까요?

나름 납득이 가면서도 범인의 의도나 범행 계획이 100% 공감되거나 이해되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사건보다 심리에 좀더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작품들이 훨씬 더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여운도 짙은 것 같습니다.

체비 스티븐스의 네버 노잉을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스틸 미싱을 먼저 봐야 된다는 강박에 계속 뒤로 미뤄두고만 있었는데

작가의 필력까지 제대로 확인했으니 조만간 네버 노잉을 책장에서 꺼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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