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소도중
미야기 아야코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2006년 제5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제가 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는 작품 중 하나인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에 실린 단편 '미쿠마리' 역시 2009년에 이 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이나 선정기준이 아무래도 저와는 궁합이 잘 맞는 문학상 같아 앞으로도 이 상의 수상작에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연작 형태로 구성돼있는데 표제작인 화소도중(花宵道中)’'아름답게 차려입은 유녀가 꽃이 핀 밤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나머지 다섯 편 역시 모두 이 작품집의 애잔한 정서에 어울리는 소제목들을 갖고 있습니다.

 

에도의 대규모 유곽 요시와라에 자리 잡은 작은 기루 야마다야는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좋게 말하면 아담하고 정이 가는, 나쁘게 말하면 가난하고 어정쩡한 느낌의 유곽입니다. 간혹 납치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가족들의 손에 의해 팔려온 소녀들이 계약이 끝나는 20대 후반 즈음까지 유녀로서 몸과 웃음을 팔며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녀들의 일은 낮과 밤도 없이, 여름과 겨울의 구분도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부르면 늘 달려가야 하고, 누군가가 지목하면 그가 야차라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녀들은 자유의 신분이 될 때까지 유곽 요시와라의 대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예외라고는, 죽어서 관에 실려 나가거나 목숨을 걸고 몰래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가라고 해도 그녀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요시와라 유곽 외에 그녀들이 아는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과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그녀들을 주저앉히고 맙니다.

 

이렇듯 막장 같은 삶을 감내해야 하는 유녀들이 모여든 곳이지만 그곳에도 사랑과 증오, 미운 정과 고운 정, 시기와 질투, 욕망과 절망 등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들과 복잡한 감정들이 산재해있습니다. 누군가를 절절히 사모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화려한 기모노와 머리 장식을 만끽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캐릭터도 종종 등장합니다. 진상 같은 손님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가 하면, 오래 전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손님으로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유곽에서는 유녀들이 정부(情夫)를 두는 일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지만 누구나 한 명쯤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두고 사모하는 남자를 갖고 있습니다. 금지된 사랑이기에 오히려 더 절절하고 애틋하지만 그 끝은 대부분 비극입니다. 유곽에 불을 질러 사람들의 이목을 끈 뒤 운 좋게 동반 도주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자살을 하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하거나, 지키지 못할 공수표만 믿고 있다가 배신당한 끝에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가 요시와라에서 출세한다.”는 말이 금언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그녀들은 기꺼이 열병과 후유증을 감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에게 돈을 지불한 남자와 첫날밤을 치러야만 하는 동생 유녀에게 언니 유녀는 이런 말을 건네줍니다.

 

“(첫날밤은)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으로 생각하며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거야.”

 

그렇게라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키우려는 것이 유녀들의 작은 소망입니다. 언니나 동생이 죽어나가도 몸을 팔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소망만이 그녀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무모한 희망이나마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화소도중은 아주 노골적인 성애소설이 맞습니다. 하지만 민망할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 은 오히려 그녀들을 애잔하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몸을 섞든, 구역질나는 남자에게 농락당하든, 참혹하게 능욕당하든 그녀들의 몸과 행위를 묘사한 상스러운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흥분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애틋해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또는 그녀들의 무력함에 분노가 치밀 뿐입니다. 19금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 작품에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더 강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저릿할 정도로 섬세한 심리묘사와 찰나의 화려함을 잘 포착한 문장들을 보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게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절묘한 구성이나 캐릭터를 만들고 포장하는 힘도 매력적입니다. ‘화소도중이 호응을 얻어 미야기 아야코의 다른 작품들도 빠른 시간 안에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특수부대 출신의 LA 연방법원 부집행관 티모시 랙클리(이하 팀)7살 된 딸 지니를 잃은 후

윌리엄 라이너 교수가 이끄는 소위 위원회에 초대받습니다.

전직 폭약전문가, 전직 FBI 과학수사원, 전직 경찰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재판기록과 수사 자료를 토대로 회의를 거쳐 유죄라고 판단된 범죄자를 처단합니다.

팀은 이런 방식의 사적인 복수에 대해 회의와 갈등을 겪지만 딸 지니를 살해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법과 제도의 허점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간 범인을 응징하기 위해

위원회의 사형집행인 역할을 수락합니다.

실제로 처단은 집행되고 LA 시민들의 열광과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팀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위원회의 태도,

일부 멤버들의 광기에 서린 복수심 등으로 인해 점점 위원회의 방식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결국 위원회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팀은 오히려 경찰에 쫓기는 처지에 이르고 맙니다.

 

● ● ●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에 대한 개인의 복수는 장르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재입니다.

철저히 개인의 힘으로 복수하는 경우도 있고, 교차살인이라는 방식도 종종 봤지만

가족을 잃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출중한 능력자들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범죄자를 처단한다는 형식은 제 기억으론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배심원이 되어 범죄자의 재판 기록과 수사 자료를 토대로 판정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보통 자경단은 법 테두리 밖에 있지만 자신들은 법과 함께 한다.”,

법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모르타르 역할을 자청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참혹하게 딸을 잃은 팀의 입장에서 이들의 룰은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복수를 다룬 이야기들이 대체로 그렇듯

주인공 팀은 전지전능함을 표방하며 사형을 집행하는 위원회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위원회가 유죄를 선언한 범죄자의 눈빛 속에서 진정한 참회를 엿보거나

살인을 위한 살인을 저지르는 광기에 사로잡힌 멤버들을 지켜보면서

팀은 정의란 무엇인가?’ 또는 정당한 살인이란 존재하는가?’라는 정답 없는 화두와 함께

깊은 갈등에 빠지고 맙니다.

 

어쩌면 제대로 된 개인의 복수를 맛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겐 아쉬운 대목일 수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이나 시즈쿠이 슈스케의 검찰 측 죄인

개인의 복수를 다룬 작품들은 심정은 이해하나 당신의 행동은 잘못이라는 판정을 내리거나

잘 해야 오픈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곤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말 속이 시원한 개인의 복수 이야기를 선호하는 취향 때문인지

사회적 규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엔딩을 보면 아쉬움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위원회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외양과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의 뛰어난 필력 때문입니다.

자식을 잃은 대다수의 부부들처럼 갈등과 화해, 상처주기를 반복하는

팀과 그의 아내 드레이의 모습은 절절할 정도로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제각각 나름의 정의를 간직한 위원회 멤버들 하나하나의 고통과 상처, 복수심에 대한 묘사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한 사실감 있는 설정과 문장들 덕분에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리얼리티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덧붙여 긴장감과 밀도를 지닌 액션 스릴러로서의 미덕까지 잘 배합한 덕분에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도중에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한대로 전개되고, 엔딩은 어정쩡한 타협으로 포장됐지만

개인의 복수라는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작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잘 끌어나갔습니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액션물의 재미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두 가지 맛을 함께 맛보고 싶은 독자들에겐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촉매살인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파리인간’, ‘위성인간에 이은 크리스티안-파트리시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각각 작중 배경이 1968, 1969, 1970년으로 설정돼있는데

정치와 역사를 전공한 작가의 방대한 지적 자산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무대입니다.

특히 촉매살인에는 나치주의의 잔재,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

국가정보원의 비밀 스파이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서사들과 함께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진 사랑, 비극적인 가족사 등 다양한 코드들이 복잡하게 버무려져 있어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더 볼륨감이 두터워진 느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 ●

 

197085, 젊은 공산주의자 마리에가 전철역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녀의 연인이자 그룹의 리더 팔코가 행방불명된 지 꼭 2년째 되는 날에 벌어진 일입니다.

마리에와 팔코 사건을 동시에 수사하기로 한 크리스티안 경감은

두 연인이 속해있던 공산주의 그룹의 멤버들에 대한 탐문은 물론

실종되기 전 팔코가 쓴 논문에서 거론된 나치주의 네트워크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하지만

두 사람의 피살-실종이 단순한 치정극인지, 정치적 갈등의 산물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크리스티안의 비공식 파트너인 천재 장애 소녀 파트리시아는

마리에의 죽음이 또 다른 사건을 야기할 촉매살인이 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살인사건이 잇따르지만 마리에의 죽음과의 접점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크리스티안은 사건해결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 ● ●

 

2차 대전 종전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노르웨이의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나치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유지한 채 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고,

소비에트와 중국을 장악한 공산주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들끓게 하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은 찬반으로 갈려 끝없는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을 무대로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구성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 상대의 피와 항복을 요구하는 냉혹한 대결,

가족, 연인, 친구 사이마저 갈라놓은 역사의 상흔과 이념의 차이,

사상적 동지지만 엇나간 사랑으로 인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청춘들...

 

꽤나 묵직한 서사를 바탕으로 작가는 촉매살인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선보입니다.

, 하나의 사건이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또 다른 사건들을 촉발한다는 것인데,

이 작품에선 마리에의 죽음이 선행하는 촉매살인이고,

뒤이어 벌어지는 복수의 죽음들이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들로 설정돼있습니다.

또한 2년 앞서 벌어진 팔코의 실종은 촉매살인을 잉태시킨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엔딩까지 모두 읽은 뒤 이 씨앗으로 인해 양산된 수많은 비극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명의 아이러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허망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안-파트리시아 콤비의 수사가 여느 때보다 고전을 거듭한 가장 큰 이유는

사건의 형태가 남녀 간의 단순 치정극처럼 보이기도,

, 정치적 음모에 의한 계획된 사건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상적 동지를 자처했던 이들이지만 경찰의 탐문 앞에서는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폭로합니다.

특히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지저분해 보일 정도로 얽히고설킨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런 치정의 관계는 말초적인 재미에 그치지 않고 보다 큰 그림의 일부로 작동하면서

마지막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꾸준히 자극합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설정들 때문에 촉매살인은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후반부의 반전이나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정서적 충돌을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속도감만큼이나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전작에 비해 재미라는 부분에 작가가 꽤 신경 썼다는 점도 확연히 눈에 보이는데

그런 점들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호평을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몇몇 지점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이 작품의 제목이자 이 작품만의 독특함을 상징하는 촉매살인이라는 설정이

개연성이라든가 선명함에 있어 많이 부족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엔딩에 가서 마리에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촉매 역할을 했는지,

, 그녀의 죽음이 촉발시킨 살인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 등이 설명되긴 하지만

어딘가 개연성도 부족하고 인과관계는 작위적으로 끼워 맞춰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파리인간이나 위성인간에서도 지적했던 부분이지만

크리스티안이 파트리시아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그 존재감이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촉매인간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파트리시아에게 기댈 생각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으로서의 미덕이나 매력이 많이 훼손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스 올라브 랄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에게도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다룬 굵직한 미스터리 서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너무나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소재라서인지

어딘가 정곡을 피해가는, 순문학적인 정서만 강조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통해서도

불행하지만 기억해야만 할 현대사를 조망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골든애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7
마리 유키코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3주 전쯤 마리 유키코의 여자 친구를 읽곤

이 작가의 작품은 절대 연이어 읽으면 안 되겠군,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이 작가의 작풍을 가리켜 일컫는 이야 미스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싫은 기분이 든다기보다는 어딘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답답함과 무거움이 부담스러웠고,

한 번 읽어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 탓에

기어이 두 번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난감함 역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은 직후 제목과 표지만 보고 달달한 로맨스 소설인가보다 여겼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좀 오버하자면)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또 이 여자야...?^^

더구나 ふたり라는 원제 덕분에 책을 읽기도 전부터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리 유키코는 정말 제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원제 ふたり는 한 사람의 정신이상 증세가 주변인에게도 전염되는 것을 뜻하는

감응정신병의 동의어 ‘2인정신증에서 파생된 말이 아닐까, 막연하게 추정(?)해봅니다.

이 작품에 수록된 8편의 에피소드에는 각종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망상은 주변의 인물들에게 전염 또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곤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소설 속 남자주인공 이름으로 설정한 여류소설가를

나를 사랑하는 여자로 여기곤 집요하게 스토킹하다가 끝내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도 있고,

온 사방에 설치된 도청기와 카메라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도 있습니다.

금지된 일에 더욱 집착한 나머지 불행을 자초하는 인물도 있고,

나를 제외한 세상사람 모두가 집단최면에 걸렸다고 확신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8편의 에피소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광분 또는 광란이라는 뜻을 가진 ‘Frenzy’라는 제목의 여성패션잡지입니다.

잡지 모델의 헤어스타일에 열광하여 너도나도 그 스타일을 추종하는가 하면,

그 잡지에 연재된 소설 때문에 참극에 참극이 거듭되기도 합니다.

또한 몇몇 에피소드는 인물과 사건이 서로 얽혀있는 연작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편에선 멀쩡하던 인물이 다른 편에선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앞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이 뒤에 등장한 에피소드에서 해결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물, 사건, 소품이 서로 얽히고 엮이면서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고나면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대체 누가 제정신이고, 누가 미쳐버린 사람인가?” 헷갈리게 될 정도입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어떤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에 대해

순간순간 확신이나 판단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는 한 번쯤 되짚어 보셨으면 합니다.

과연 그 확신과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책의 서문에 실린 마리 유키코의 출간 기념 인터뷰입니다.

그 사람이 제정신인 것 같지? 하지만 잘 봐. 정말 그럴까?”라는,

어딘가 독자를 도발하는 듯한 거만한(?) 말투입니다.

이 서문대로 독자의 확신과 판단은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흐릿해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정말 제정신인 사람과 미친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단서를 찾고 싶은 마음에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지만,

따옴표 속의 대사가 진실인지, 속마음을 서술한 평서문이 진실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서술트릭처럼 문장 속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에피소드 별로 줄거리를 정리하려다가 결국은 정리 불가를 외치고 자폭(?)하고 말았습니다.

 

애초 마리 유키코는 이 작품을 광기의 전염에 대한 소설이라고 칭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광기의 전염 자체가 작품 속 인물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독자가 작가로부터(혹은 작품 속 인물로부터) 강요받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싫다, 무겁다, 부담스럽다의 차원을 넘어 당혹감과 패닉의 책읽기라고 할까요?

 

에피소드 가운데 에로토마니아’, ‘클레이머’, ‘골든 애플’, ‘핫 리딩

비교적 깔끔하고 선명한 전개, 미스터리와 반전 덕분에 쉽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나머지, 특히 후반에 배치된 에피소드들은 정말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기억은 뭉텅이로 사라지고, 망상과 착각은 임계점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애써 누가 제정신인지, 누가 미쳤는지, 뭐가 진실인지 알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좋은 의미에서) ‘이야 미스의 절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정말 너무나도 기분 나쁜 나머지 마리 유키코를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 서평도 거의 극과 극으로 나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카페나 블로그, 인터넷 서점에서 이 작품의 서평들을 꼼꼼히 챙겨볼 예정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접한 후에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읽는다면

(‘여자 친구때 그랬던 것처럼) 첫 책읽기에서 발견 못한 마리 유키코의 속내를

일부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자신은 없지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드니!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의 한 스포츠매거진의 시드니 올림픽 특별취재원 자격으로

호주를 방문하고 쓴 여행기이자 올림픽 관전기라고 해서

처음엔 하루키 비즈니스가 이젠 그의 여행기나 스포츠 관전기까지 확장됐나, 라는

약간의 의구심(?)과 얄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눈으로 본 호주는 막연하게 상상하던 낭만적인 여행지와는 확연히 달랐고,

올림픽 관전기 역시 개성과 현장감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묘사들 덕분에

여느 여행기나 스포츠 해설보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지루하고 재미없는 개막식에 대한 비판,

다국적 기업들과 돈에 의해 움직이는 올림픽의 상업주의적 행태,

TV중계에선 맛볼 수 없던 경기 전후의 여백이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단상을 읽다 보면

, 올림픽을 이렇게 경험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인류의 본능인 투쟁심을 다스리기 위한 김 빼기를 위한 대리 투쟁의 장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평화의 제전으로 불리는 올림픽의 양면성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가 하면,

메달이라는 속세적 목표를 위해서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의 구현을 위해서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전력을 다하는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존경심을 갖고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상업적인 흥밋거리, 잔혹한 승부의 세계, 의외의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감동,

거기에 올림픽의 이면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각까지 골고루 갖춘 하루키 식 에세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박동희 기자의 스토리와 감동을 지닌 프로야구 기사를 읽는 느낌이랄까요?

 

그의 호주 여행기는 좀더 특별했습니다.

평범한 여행객들은 웬만해선 발길을 들이지 않는 호주의 양지와 그늘을 골고루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호주의 속살을 공짜로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여행기의 철칙이 남들 가는 곳에 가지 말고, 남들 하는 것을 하지 말자.”라는데

읽다 보면 그 철칙이 엄격할 정도로 지켜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풍광 소개에 그치지 않은 그의 문장은

몹시 젊다 싶다가도 동시에 신비하게도 노쇠한 분위기가 도는 나라의 여러 면을 비춥니다.

때론 돌직구 같은 톤으로 이질적이거나 불편해 보이는 관습과 문화,

정크푸드로 가득한 먹거리 등을 대놓고 까기도 하지만,

때론 가도 가도 끝없어 보이는 광활한 호주의 규모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담대함에 대한 순수한 놀람을 거듭 언급하기도 합니다.

특히 후반부에 특별코너라는 부제로 실린 무라카미 사관에 의한 호주 역사

짧은 분량이지만 호주의 시작과 성장기, 그리고 현재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던 대목입니다.

 

호주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느긋함과 열정, 올림픽의 여러 단상들로 채워진 시드니!’

어떤 작가도 시도하기 쉽지 않은 낯선 장르의 작품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겠어?”라는 선입견을 주기 쉬운 형식이지만

하루키는 다분히 반골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만의 따뜻한 시각을 통해

남반구의 이국에서 보낸 스무날 가까운 특별한 날들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에서 또다시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하루키가 그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개인적으로 하루키가 한국에서 열리는 (다른 형식이라도 좋으니) 대형 이벤트를

이런 형식으로 집필한다면 어떤 글들이 쏟아져 나올까, 무척 궁금해집니다.

 

여전히 출간 소식이 기다려지는 그의 작품은 소설이 분명하지만

2014년에 출간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에 이어

하루키의 특별한 에세이를 읽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