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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애플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7
마리 유키코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3주 전쯤 마리 유키코의 ‘여자 친구’를 읽곤
이 작가의 작품은 절대 연이어 읽으면 안 되겠군,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이 작가의 작풍을 가리켜 일컫는 ‘이야 미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싫은 기분이 든다기보다는 어딘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답답함과 무거움이 부담스러웠고,
한 번 읽어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 탓에
기어이 두 번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난감함 역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은 직후 제목과 표지만 보고 달달한 로맨스 소설인가보다 여겼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좀 오버하자면)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또 이 여자야...?^^
더구나 ‘ふたり狂り’라는 원제 덕분에 책을 읽기도 전부터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리 유키코는 정말 제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원제 ‘ふたり狂り’는 한 사람의 정신이상 증세가 주변인에게도 전염되는 것을 뜻하는
감응정신병의 동의어 ‘2인정신증’에서 파생된 말이 아닐까, 막연하게 추정(?)해봅니다.
이 작품에 수록된 8편의 에피소드에는 각종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망상은 주변의 인물들에게 전염 또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곤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소설 속 남자주인공 이름으로 설정한 여류소설가를
‘나를 사랑하는 여자’로 여기곤 집요하게 스토킹하다가 끝내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도 있고,
온 사방에 설치된 도청기와 카메라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도 있습니다.
금지된 일에 더욱 집착한 나머지 불행을 자초하는 인물도 있고,
나를 제외한 세상사람 모두가 집단최면에 걸렸다고 확신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8편의 에피소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광분 또는 광란이라는 뜻을 가진 ‘Frenzy’라는 제목의 여성패션잡지입니다.
잡지 모델의 헤어스타일에 열광하여 너도나도 그 스타일을 추종하는가 하면,
그 잡지에 연재된 소설 때문에 참극에 참극이 거듭되기도 합니다.
또한 몇몇 에피소드는 인물과 사건이 서로 얽혀있는 연작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편에선 멀쩡하던 인물이 다른 편에선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앞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이 뒤에 등장한 에피소드에서 해결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물, 사건, 소품이 서로 얽히고 엮이면서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고나면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대체 누가 제정신이고, 누가 미쳐버린 사람인가?” 헷갈리게 될 정도입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어떤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에 대해
순간순간 확신이나 판단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는 한 번쯤 되짚어 보셨으면 합니다.
과연 그 확신과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책의 서문에 실린 마리 유키코의 출간 기념 인터뷰입니다.
“그 사람이 제정신인 것 같지? 하지만 잘 봐. 정말 그럴까?”라는,
어딘가 독자를 도발하는 듯한 거만한(?) 말투입니다.
이 서문대로 독자의 확신과 판단은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흐릿해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정말 제정신인 사람과 미친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단서를 찾고 싶은 마음에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지만,
따옴표 속의 대사가 진실인지, 속마음을 서술한 평서문이 진실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서술트릭처럼 문장 속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에피소드 별로 줄거리를 정리하려다가 결국은 ‘정리 불가’를 외치고 자폭(?)하고 말았습니다.
애초 마리 유키코는 이 작품을 ‘광기의 전염에 대한 소설’이라고 칭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광기의 전염 자체가 작품 속 인물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독자가 작가로부터(혹은 작품 속 인물로부터) 강요받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싫다, 무겁다, 부담스럽다의 차원을 넘어 당혹감과 패닉의 책읽기라고 할까요?
에피소드 가운데 ‘에로토마니아’, ‘클레이머’, ‘골든 애플’, ‘핫 리딩’은
비교적 깔끔하고 선명한 전개, 미스터리와 반전 덕분에 쉽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나머지, 특히 후반에 배치된 에피소드들은 정말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기억은 뭉텅이로 사라지고, 망상과 착각은 임계점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애써 누가 제정신인지, 누가 미쳤는지, 뭐가 진실인지 알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좋은 의미에서) ‘이야 미스의 절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정말 너무나도 기분 나쁜 나머지 마리 유키코를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 서평도 거의 극과 극으로 나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카페나 블로그, 인터넷 서점에서 이 작품의 서평들을 꼼꼼히 챙겨볼 예정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접한 후에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읽는다면
(‘여자 친구’때 그랬던 것처럼) 첫 책읽기에서 발견 못한 마리 유키코의 속내를
일부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자신은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