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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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방 소도시의 대형 슈퍼마켓 보안책임자 히라타 마코토는

어느 날 물건을 훔치는 이십대 여성 스에나가 마스미를 붙잡는다.

평소라면 이유 불문하고 바로 경찰에 넘기겠지만,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웬일인지 마음이 움직여 좀도둑을 눈감아주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서로의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잇는 운명의 실타래는 잔혹한 결말로 치닫는데...

(출판사 책소개를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우타노 쇼고의 작품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많은 선입관을 줍니다.

아마 그중에서도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라는 기대 섞인 선입관이 가장 클 것입니다.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의 일본 원서 띠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있다고 합니다.

우타노 쇼고의 반전 섞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킬 대목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기대감에 고양된 독자들에겐 약간의 배신감(?)만 던져줄 뿐입니다.

중후반부까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허무감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의 자조 섞인 독백 같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디쯤인가부터는 우타노 쇼고의 진면목이 등장할 것 같은데

분량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까지도 도무지 반전과 미스터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원서의 띠지대로 마지막 5페이지를 남겨놓고서야 우타노 쇼고 식 반전이 급전개됩니다.

다만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라면 깔끔하게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니라,

마음을 무척이나 착잡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 같은 반전을 선사했다는 점입니다.

우타노 쇼고 스스로도 인터뷰를 통해 이 특이한 반전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어느 쪽일 수도 있는 결말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저의 감정 역시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합니다.

저는 즐거운 것일까요, 두려운 것일까요?”

 

과거의 비극에 얽매여 현재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딸 또래의 여자를 만나 잠시 온기를 회복하지만,

그 애틋한 인연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악연으로 변질된다는 스토리는

사실 상투적이다 못해 평범하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클리셰입니다.

하지만 우타노 쇼고는 거기서 딱 한발을 더 나아갑니다.

, 독자들이 .. 그렇게 된 스토리군.’하며 마음을 놓을 즈음

예상 밖의 전개를 통해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어느 쪽도 옳다고 할 수 없는 딜레마를 툭 던져놓은 채 이야기를 마무리함으로써

독자에게 깊고 진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그제야 , 우타노 쇼고답군!’이라는 안도(?)가 천천히 밀려들어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책을 막 덮었을 때보다 하루나 이틀쯤 지난 뒤에

진짜 여운과 먹먹함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비밀과 거짓말, 오해와 회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등

히라타와 스에나가를 힘들게 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내 가까운 사람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 중 집의 살인 시리즈밀실살인게임등의 미스터리보다

늘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을 좋아하는데,

담백하거나 또는 심연 같이 어두운 사람의 마음을 잘 포착한 서사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역시 좋아하는 목록 상단에 오르긴 하겠지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앞부분의 장황하고 중복되는 묘사를 줄여

중편 정도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더 단단한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꽤 오랫동안 책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마침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지는 가을에 읽은 덕분에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우타노 쇼고의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을 위해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 대한 아무 선입견 없이, 작품에 대한 희망사항 없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태에서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띠지의 카피 따위 당연히 무시하고.

나는 (중략) 우타노 쇼고에 대해 아직 그닥 정통하지 않아서인지,

뭐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다 있나 하며 진심으로 즐겁게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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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의 탄환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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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자들의 하소연 들어주기가 주된 업무인 도조대학병원 신경내과의사 다구치 고헤이는 언제나처럼 다카시나 원장의 꼬임에 넘어가 신설되는 Ai(사후 화상 진단)센터의 센터장으로 임명된다. 방사선을 통한 사체 훼손 없는 해부 방식인 Ai를 도입하자는 취지로 설립되는 Ai센터.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은 도조대학병원에 위협을 가하며 음모를 꾸민다. 그러던 중 병원 내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다카시나 원장이 뇌물 수수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다구치의 초대로 Ai센터 옵서버로 참여한 후생노동성 서기관 시라토리는 다구치를 도와 Ai센터를 무력화하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은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에 앞장선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일본출간 기준)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은 (이 시리즈가 아닌) ‘나니와 몬스터였는데, 관료체제와 사법기관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증오심과 의료입국에 관한 혁명적이고 무모한 이상론에 심하게 질렸던 터라 도조대학병원 무대로 한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신작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이팅게일의 침묵’, ‘제너럴루주의 개선으로 이어진 시리즈는 메디컬과 미스터리가 매끄럽게 조합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이 가장 기대된 게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작품은 기존의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에 나니와 몬스터의 주제인 의료입국사법에 대한 의료의 우위가 혼재된 이야기입니다. , 가이도 다케루는 의료체계를 자신들의 발밑에 두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사인 검사를 위해 Ai라는 독립된 시스템을 강조합니다.

양측의 입장을 요약하면, 경찰과 사법기관은 자신들이 관장하는 메스를 이용한 사법 해부가 최우선이며, 도조대학병원의 Ai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되 반드시 경찰이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하지만 도조대학병원은 사법 해부가 경찰의 입맛에 맞게 조작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메스 없이도 사인을 밝힐 수 있는 Ai를 병원이 독립적으로 관할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그 과정에서 도조대학병원과 Ai시스템을 붕괴시킬 계획을 세운 경찰 내 과격파는 Ai센터 준비위원회에 부센터장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음모를 진행시킵니다. 한편, Ai센터장인 다구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라토리를 비롯하여 Ai시스템의 능력자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이지만 병원 내에서 연이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의료와 사법의 갈등과 대립이 전반부라면, 시라토리가 이끄는 미스터리 해법이 후반부인데 분량상으로도 딱 1/2씩 할애됐습니다. 말하자면 전반부는 나니와 몬스터의 재판(再版) 같았고, 후반부는 앞선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전형이었습니다.

경찰의 통제 하에 이뤄지는 메스를 통한 사법 해부와 의료진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Ai 간의 논쟁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정의에 가까운지 판정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작가의 노선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경찰과 사법기관을 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독자 입장에선 때론 경찰과 사법기관의 주장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때론 경찰의 통제를 벗어난 Ai가 정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속도감과 긴장감을 겸비했고, 밀실과도 같은 MRI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끝까지 진상을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 다구치가 상대적으로 무력해 보인 점만 빼곤 캐릭터의 매력 역시 생생했습니다. 시라토리의 괴물 같은 추진력과 추리는 전광석화와도 같았고, 다구치가 끌어들인 Ai 진영은 소위 능력자들로 구성된 지구방위대같았습니다. 덕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한나절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니와 몬스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 의료 사법의 과도한 갈등 묘사 때문에 애초의 기대감이 제대로 충족되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물론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나 갈등에 머물지 않고 첨예한 사회적 문제를 끌어들인 가이도 다케루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딘가 다분히 작위적인, 그래서 목적극 같은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입니다. , 앞서 언급한대로 Ai 시스템이 왜 필요하며, 왜 사법 해부보다 정의로운 방법인지에 대해 독자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한 점은 초반부의 책읽기를 난해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그 캐릭터가 왜소해진 다구치가 안쓰러웠고, 시라토리의 추리는 슈퍼울트라 급으로 폭주한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두 주인공이 너무 극과 극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끌어갔다고 할까요?

 

아마도 가이도 다케루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면 여지없이 찾아 읽을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조대학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병원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이젠 가이도 다케루가 경찰 및 사법기관과 더는 각을 세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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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사는 저택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2
황태환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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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왜소증 환자인 성국은 좀비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 뒤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 건물에 갇힌 채 1년째 힘겹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사방이 좀비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엇보다 식량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어느 날, 추락한 구조 헬기의 생존자들이 병원 건물로 들어오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좀비보다 더욱 큰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빚졌으면서도 사람들은 작은 체구의 성국을 무시하고 깔보지만

이내 그가 식량의 루트인 좁은 통로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걸 파악하곤

그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복종하게 된다.

하지만 점차 먹는 입이 늘어 가고, 생존자들의 갈등이 원시적인 폭력으로 발현되면서

식량을 움켜쥐고 있던 성국의 권력은 위태로워진다.

 

● ● ●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좀비 자체보다는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민낯,

즉 공포에 잠식당한 상태에서 권력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로 자신만의 생존을 갈구하는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본능의 밑바닥을 그린 작품입니다.

물론 병원 건물에 갇힌 인물들을 공포와 위기로 몰아넣은 외부의 적은 좀비였고,

좀비를 상대로 한 처절한 싸움이 간간이 그려지긴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식량을 구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좀비에게 먹히기 전에 굶어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먹는 문제가 인간을 본능의 수준에서 서로 투쟁하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주인공인 성국은 왜소한 체구 때문에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나 현재나

주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인물입니다.

그 덕분에 소심하고 내향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선의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지만

막상 좀비의 이빨에서 벗어난 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성국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체구 덕분에 유일하게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인물로 판명나자

사람들은 성국 앞에 무릎 꿇게 되고, 그는 일약 권력자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수시로 요동치면서 성국에게 안락함과 위기를 번갈아 전해주곤 합니다.

 

처음엔 왜 주인공 성국을 굳이 왜소증 환자로 설정했는가, 싶었는데

작가는 여러 국면을 통해 성국의 왜소증을 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왜소증은 성국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유일한 생존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 소심하고 내향적이던 그가 식량을 매개로 권력을 쥔 뒤

복수심에 사로잡힌 캐릭터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왜소증 덕분에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그가 상대하는 인물들은 모델처럼 잘 빠진 바람둥이, 신체 건장한 군인,

자기 살 길만 모색하는 엘리트, 간호사였던 미녀 등 왜소증과는 대척점에 선 인물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국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은

통쾌하면서도 때론 애틋한 마음까지 갖게 만들곤 합니다.

 

영상이든 문학이든 좀비라는 소재와 별로 친하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와 반전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그린 매력적인 설정 덕분에

(분량도 길지 않아서) 책을 편 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약간은 거칠고 투박한 문장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점입니다.

성국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은 때론 너무 쉽고 안이하게 처리되고,

일부 인물의 캐릭터가 변하는 장면 역시 개연성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뼈대만 있고 살집은 허약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을 보면

작가의 문학적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매력적인 소재와 뛰어난 구성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깊이는 얕고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영상화의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좀비에게 둘러싸인 채 폐허가 된 병원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인물이 본능에 따라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듯한 설정은

비주얼 면에서 꽤나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부산행의 성공을 비춰보면

조만간 이 작품의 영상화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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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었던 소녀 스토리콜렉터 41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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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은 전작인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자신이 관여한 사건으로 인해 현재 가족과 별거 중입니다. 파킨슨병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조를 사랑했던 아내 줄리안이지만 가족의 목숨까지 경각에 빠뜨린 그의 오지랖 넓은 정의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는 어떻게든 가족들과 재결합하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지만, 또다시 치명적인 사건이 운명처럼 조를 찾아옵니다. 조의 큰딸 찰리의 절친인 시에나가 전직 경찰인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심리적 불안 상태에 빠진 시에나를 상담한 조는 경찰의 주장과 달리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 누군가 시에나를 조종하여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망쳤으며, 바로 그 누군가가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믿습니다.

 

내 것이었던 소녀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2005년에 출간된 용의자1, 미출간작인 ‘The Drowning Man’2, ‘산산이 부서진 남자3편입니다. 마이클 로보텀과 처음 만난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는 크게 못 느꼈던 점인데,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글빨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의 위기와 지독한 심리전 등 피와 살이 튀는 잔혹한 스릴러 이상의 다양한 코드들을 너무나도 잘 버무려 놓았습니다. 비유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적절하고, 유머는 촌철살인에 가깝습니다. 캐릭터도, 구성도, 사건의 전개도 매력적이고 절묘합니다. 딱 한 가지,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사건들을 한 줄의 실에 꿰기 위해 이야기 막판에 약간의 무리수를 둔 점은 다분히 작위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었던 소녀는 전작보다 확실히 진화한 작품임에 분명했습니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여타 스릴러 시리즈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임상심리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의 서평에서 범인은 사람의 마음을 부수는 반면, 조는 부서진 사람의 마음을 이어 붙여 온기가 되돌아오게끔 도와줍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내 것이었던 소녀에도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움켜쥔 채 마음껏 조종하며 유린하는 희대의 악마가 등장하고, 조는 그의 심리를 파악하여 과거와 현재의 행동의 양태를 밝혀냅니다.

물리적 수사만으론 밝혀내기 힘든 범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과 행동의 양식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희생자들의 무너진 마음이 재건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때론 그런 과정들이 빠르고 독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마이클 로보텀은 사건과 심리를 적절히 안배하여 그런 지루함을 사전에 차단해놓습니다.

 

가족의 문제역시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인데, 조는 매력적인 사건 해결사지만 동시에 가족을 잃은 가장, 큰딸에게 단절감을 느끼는 아버지, 그리고 파킨슨병과 중년의 위기로 심신을 다친 무력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단순히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조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와 솔직하게 대면하게 함으로써, 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아내와 딸과의 간극을 통렬히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공감과 연민을 이끌어냅니다. 어쩌면 스릴러 자체보다 조의 인간적인 갈등에 더 매력을 느끼는 독자가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두 개의 사건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부분은 앞서 얘기한대로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움입니다. 아무래도 단선적인 스토리를 극복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도 이런 작위성이 살짝 엿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로보텀의 신작들이 계속 기대되는 이유는 매력적인 글빨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조의 캐릭터, 그리고 개성 강한 그의 도우미들 여경감 베로니카와 퇴직 경찰 빈센트 때문입니다. 절판됐거나 아직 소개되지 않은 시리즈 첫 두 편은 물론 해외에서 출간된 신작들도 빠른 시일 안에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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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럭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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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5년 전쯤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서였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소년범죄에 관심이 있어 찾아본 작품이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차분한 문장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솜씨 역시 현란하진 않지만 무척 리얼했던 것 같구요.

 

하드 럭은 야쿠마루 가쿠와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받은 인상은 천사의 나이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감 넘치는 사회파 스타일의 소재,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주인공의 상황,

정통 미스터리이면서 사건 못잖게 인물들의 심리를 지켜보게 만드는 서사의 힘 등

미스터리에 문외한이라도 한번 잡으면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하는 필력을 갖춘 작품입니다.

 

● ● ●

 

주인공 아이자와 진은 그야말로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절망적인 청춘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 한탕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자들을 동료 삼아 범죄를 기획합니다.

하지만 거사(?) 당일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맙니다.

실명도 모르던 동료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라졌고,

눈앞에서는 세 구의 시신과 함께 저택이 불타오릅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계획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유일하게 실명과 얼굴이 노출된 자신은 살인강도에 방화범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이자와 진은 경찰에 쫓기게 되지만, 끝까지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 ● ●

 

전형적인 사기부터 음험한 범죄중개, 개인정보 매매 등 다양한 범죄가 등장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그 현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 빈부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을 교훈적이거나 선언적인 투로 강요하진 않습니다.

즉 사회적인 병폐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범죄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강조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 하나하나의 행동과 심리와 동기에 천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그래서인지 (경찰 외에) 선한 인물이라곤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악인들마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한때는 선한 시민이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결국엔 남의 돈을 탐낸 명백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면서

구조의 문제개인의 문제라는 두 가지 차원의 담론을 혼돈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탈출구는 범죄밖에 없었다는 참혹한 구조적현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캐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개인의상황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발 잡히지 말고 진범을 찾아내줘!”라고 응원하다가도,

, 이 친구는 어쨌든 범죄를 저질렀잖아?’라는 자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한 축으로 등장하는 경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좀 심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애초부터 주인공의 진실 찾기를 위한 조연으로 설정된 바,

그 나름대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점에서는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분량 속에 현실적인 소재와 미스터리 구성을 잘 버무린 하드 럭

재미와 함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좀더 현란한 문장과 자극적인 설정을 갖고 왔다면

야쿠마루 가쿠는 진작에 더 큰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담담한 느낌이 들면서도 알차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은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악당어둠 아래등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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