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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요정 ㅣ 베루프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1월
평점 :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인데다 인터넷 서점 대부분이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하고 있고,
원래 고전부 시리즈의 한 편으로 집필된 이력 때문에 당연히 미스터리 작품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담긴 내용은 18살 소년 모리야의 성장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물론 일상 속의 추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을 추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좀 애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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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고3이던 모리야와 그의 친구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17살 소녀 마야와 만납니다.
마야는 눈에 띄는 사소한 소품이나 이국적인 관습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으며
매번 “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묻곤 합니다.
짧은 두 달 동안의 만남 속에서 모리야는 마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미처 들여다본 적 없는 새로운 바깥세계에 대한 갈망에 휩싸입니다.
마야가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내전 소식이 들려옵니다.
모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야는 일본을 떠났고 그 뒤로 소식이 끊깁니다.
1년이 지난 오늘, 모리야는 일기장에 적힌 마야와의 추억을 하나씩 되짚어가며
그녀가 유고슬라비아의 어느 곳으로 돌아간 것인지, 지금도 안전하게 잘 지내는지,
또 약속했던 편지는 왜 안 쓰는 것인지 알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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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부 시리즈로 집필됐던 원고를 크게 고쳐 출간한 작품이라 그런지
캐릭터나 이야기의 톤에서 고전부 시리즈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특히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가 많이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고전부 시리즈의 주인공인 오레키 호타로가 그 작품에서 겪은 성장통 스토리,
즉 자신의 능력과 취향, 장단점에 대한 진지한 성찰,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그리고 그것들이 좌절됐을 때 겪게 되는 고통과 성장의 스토리가
이 작품의 주인공 모리야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모리야는 대학 입시를 앞둔 평범한 18살 청소년입니다.
음악이든 운동이든 공부든 딱히 뭔가에 빠져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는데다
호화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곤란하지도 않은 생활 속에 안주해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유고슬라비아의 17살 소녀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특별한 외모와 성격을 지닌 이국의 소녀에게 반했다는 점 외에도
17살에 어울리지 않는 원대하고 도전적이며 안주하지 않는 그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과 모방심 덕분입니다.
정치가를 꿈꾸는 마야는 아버지를 따라 세계를 다니며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각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집요할 정도로 메모하며 공부합니다.
처음엔 이국 소녀의 순진무구한 호기심이라 여기며 웃음 짓곤 하던 모리야는
점차 마야의 열정과 삶을 대하는 방식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결국엔 안이하고 평범할 뿐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야는 내 좁은 세계에 숨구멍을 내준 방문자였다.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교육도 받고, 몸에 탈난 곳도 없이 이렇게 살고 있지만,
이건 그냥 사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바보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오레키는 F반의 카리스마 여제 이리스 후유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 즉 능력이나 취향, 장단점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면서
잠시 자만에 빠지기도 하고, 잠시 좌절하기도 하는 통과의례를 겪습니다.
‘안녕 요정’의 모리야 역시 마야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꿈꾸지만
결과는 자신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유고슬라비아로 떠난 마야로 인해 상심과 좌절을 맛본 모리야지만
그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추억을 바탕으로 마야의 ‘현재’를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면서
좀더 과격한 방법으로 마야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더 큰 성장통만 안겨줍니다.
‘18살’은 우연히 만난 누군가로 인해 꿈, 미래, 이상이 전혀 달라질 수 있는 나이입니다.
자기애(自己愛)가 폭증할 수도, 자기혐오가 폭증할 수도 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층층이 쌓인 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장을 겪게 됩니다.
사실 ‘안녕 요정’은 바로 이런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굳이 요약하자면,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마야라는 요정을 통해 꿈꾸는 나의 이상향과
그것이 좌절됨에 따른 상실감을 유고슬라비아 분쟁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좀 낯선 책읽기가 되겠지만(제가 꼭 그랬습니다^^;),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카리스마와 추리 재능을 겸비한데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여학생 다치아라이,
또, “난 자기 손이 닿는 범위 밖에 관여하는 건 거짓이라고 생각해.”라며
모리야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보여준 후미하라가 무척 인상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성인이 된 모리야와 다치아라이가 등장하는 단편은 물론
기자가 된 다치아라이가 주인공인 장편(왕과 서커스)이 일본에서 출간됐다고 하는데
빠른 시일 안에 한국에서도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안녕 요정’에서 ‘보틀넥’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어떤 분의 서평을 발견했는데,
고백하자면 ‘보틀넥’은 1/4도 못 가서 중도 포기했던 작품입니다.
‘안녕 요정’ 역시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에 중간에 좀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엔딩의 여운을 맛보고 나니 ‘보틀넥’에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