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롱 워크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3
스티븐 킹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평점 :
전체주의 국가가 된 가상의 미국에서 엄청난 경쟁을 통해 선발된 100명의 소년들이
단 1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무한정 걷고 또 걷는 서바이벌 게임 ‘롱 워크’에 참여합니다.
워커(Walker)라 불리는 그들은 먹는 것은 물론 용변과 잠까지 걸으면서 해결해야 합니다.
시속 6.5km 이하로 속도가 떨어지면 경고가 날아들고,
3번의 경고 이후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즉시 총살당합니다.
‘걷기와 총살’은 TV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고, 거리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권력자인 통령(統領)은 군중들의 환호 속에 워커들을 독려하며 독재의 카리스마를 발산합니다.
이 기상천외한 쇼 ‘롱 워크’에서 99명의 죽음 이후 홀로 살아남은 생존자는
평생 누구도 넘보지 못할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 ● ●
누구나 ‘배틀 로열’, ‘헝거 게임’을 연상할 수 있는 익숙한 줄거리입니다.
두 작품 모두 적극적인 투쟁, 즉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룰을 설정해놓았지만
‘롱 워크’에는 게임 참여자들 간에 살인도, 투쟁도, 사건도 없습니다.
물론 며칠 동안 수백km의 고통스러운 걷기 속에 갈등도, 다툼도, 왕따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모인 집단이라면 반드시 존재할 법한 일상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걷기만 잘 하면 우승할 수 있는, 하지만 잘 걷지 못하면 가차 없이 총살당하는,
10대 소년들에게는 아이러니하면서도 한없이 잔혹한 게임입니다.
이 작품에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의 일그러진 면모를 보이는 장치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뼛속까지 군인이며, 선글라스를 낀 채 부동자세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권력자 ‘통령’,
‘통령’에게 열광하고, 워커들의 걷기와 총살에 환호하는 획일적으로 세뇌된 군중들,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가 누적된 워커들에게 카빈소총을 발사하는 군인들,
권력의 명령에 거부하는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고 가는 비밀조직 등...
총살될 가능성인 99%인 무모한 걷기 게임에 참여한 워커들의 캐릭터와
전체주의 독재 권력이 빚어낸 공포심을 자극하는 장치들이 혼재되면서
이야기는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한 외양을 띠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특별한 사건도, 반전도 없이
그저 100명의 소년들의 심리적 변화(자신감 또는 자만심, 후회, 공포 등)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 갈등만으로 400여 페이지의 분량이 채워집니다.
이 작품의 가장 극단적인 설정은 롱 워크에 지원한 대부분의 소년들이
자신이 왜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걷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설정입니다.
각자 나름의 동기를 품곤 있지만, 그것이 진짜 동기인지 본인들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라는 체념은 그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먹은 중년들의 몫입니다.
이제 겨우 20년도 못 채운 소년들을 롱 워크로 등 떠민 것은 무엇일까요?
독자마다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지만, 아마 일종의 광기가 아닐까요?
스티븐 킹이 리차드 바크만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을 집필한 것은 1966년이며,
당시 그의 나이는 롱 워크에 참가한 소년들과 비슷한 만 19세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은 미국 사회가 여러 가지 사건으로 극단적인 대립과 혼란을 겪던 시기입니다.
어쩌면 그는 10대만의 시선으로 미국 사회의 비극적인 단면을 그려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성세대와 사회가 조장한 광기는 10대들이 소화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들이었고,
그들은 남은 삶을 무모한 도박에 걸 만큼 절박하거나, 패닉에 빠졌거나, 멍청했을 것입니다.
설령 목숨을 건 롱 워크에 자원하지 않았더라도
광기에 휘말린 10대들의 선택지는 마약에 절은 히피나 미래가 안 보이는 패배주의자,
아니면 잘 해야 반전 시위대의 끄트머리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수백km를 걸으며 몸과 정신이 피폐해지는 소년들을 지켜보는 것은,
또, 한계에 부딪혀 쓰러진 채 카빈소총에 맞아 참혹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또, 경쟁자가 줄어들수록 안심과 다행, 욕심과 공포가 교차하는 소년들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어이없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일입니다.
차라리 ‘배틀 로열’이나 ‘헝거 게임’처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이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마음 편하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롱 워크는 어쨌든 마무리가 됩니다.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이 우승의 영예를 안고 브라스밴드의 연주와 군중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미래가 남게 될까요?
그가 걸은 수백km는 아마 그가 평생 바라보며 살아야 할 심연의 깊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스티븐 킹이 독자에게 던진 화두 역시 그만큼의 깊이와 무게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요즘의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는 불편하고 부당한 기운들 때문에
더욱 그 깊이와 무게가 오래 전 바다 건너 남의 이야기처럼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좀 쓴 소리를 하자면...
솔직히 책읽기가 많이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만 19세의 나이에 리차드 바크만이라는 이름으로 첫 장편을 쓴 스티븐 킹의
어딘가 정제되지 못한, 조금은 겉멋이 든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매끄럽지 못한데다 몇 번을 되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게 만든,
또한, 명백히 직역 또는 오역의 느낌을 줬던 번역자의 문장들 때문일 것입니다.
스티븐 킹의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이 훨씬 더 많은 편이지만,
지금껏 읽은 작품 중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설정과 서사의 힘 때문에 ‘이상한 문장들’ 속에서도 작품 자체의 미덕은 맛볼 수 있었지만
스티븐 킹 특유의 디테일의 매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으니, 다른 분들의 서평도 지속적으로 찾아볼 생각입니다.
출판사에서 선물로 받은 책이라 장점 위주의 서평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쓴 소리 몇 줄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