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의 7일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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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민간 보안업체에서 일하지만 한때 경시청의 지명수배자 전담 형사였던 쓰키자와 가쓰시가 익사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목격자와 단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합니다. 정의감 넘치는 젊은 형사 와키사카는 쓰키자와의 죽음이 17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과 연관 있음을 감지하지만 상부의 함구령 때문에 단독 수사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중 쓰키자와의 아들인 중학교 3년생 리쿠마와 가이메이 대학 수리학 연구소 직원 우하라 마도카가 범행 장소를 특정해내자 와키사카와 경찰은 놀람과 함께 곤혹스런 처지가 됩니다. 와키사카는 민간인인 마도카와 리쿠마의 위험한 조사에 반대하지만 이내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을 직접 목격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라플라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마녀와의 7은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라플라스의 마녀마도카가 주인공이 아니라 피해자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려는 중학교 3년생 리쿠마와, 전직 형사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17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젊은 형사 와키사카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해내는 신비로운 소녀우하라 마도카가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은폐됐던 진실을 폭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타이틀 롤을 리쿠마와 와키사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범죄 미스터리가 주된 서사이고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이 필수적인 양념으로 곁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마녀와의 7은 경찰의 수사 영역에까지 깊이 파고든 AI의 양면성, 개인의 DNA 정보까지 확보하려는 극단적 감시 시스템에 대한 논쟁,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의 뇌와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론 등 근미래에 닥칠 것이 분명한 현실적인 주제를 그리기도 합니다. 살해당한 전직 형사 쓰키자와 가쓰시는 이 주제들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인데, 그는 일명 미아타리 수사원’, 즉 전국의 지명수배자의 얼굴을 기억한 뒤 길거리에서 무작정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기억 속 지명수배자가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체포하는 특이한 형사였습니다. 인간의 뇌와 기억과 감각을 최대치로 연마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AI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능력들은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촘촘하게 설치된 CCTV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찍어서 전송하면 AI는 사전에 입력된 지명수배자 사진과 대조하여 즉시 체포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쓰키자와 가쓰시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을 통해 이 민감하고도 양면적인 주제들을 심도 있게 그려냅니다.

 

라플라스의 마녀마도카의 맹활약을 기대했던 터라 그녀의 비중이 조연으로 축소된 건 무척 아쉬웠지만, 대신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제대로 된 범죄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쫓으며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리쿠마의 사연은 긴장감 속에서도 애틋함을 느끼게 했고, 모두가 판도라의 상자라고 여기는 위험천만한 비밀을 오로지 정의감 하나로 과감하게 뒤쫓는 와키사카의 행동력도 흥미진진했습니다.(어쩌면 이 작품을 계기로 와키사카 시리즈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AI의 양면성과 극단적 감시 시스템의 폐해는 묵직하면서도 생생한 묘사 덕분에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우하라 마도카와 쓰키자와 가쓰시가 입증한 인간의 뇌와 정신의 위대함은 그에 못잖은 안도감을 전해주면서 나름 단단한 격려의 메시지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는 당분간 후속작이 나오기 어려워 보입니다.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더는 식상한 시도일 테고, 조연으로서 맹활약하는 것도 마녀와의 7의 동어반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속작이 나온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이고,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저의 근거 없는 우려 따위는 아주 쉽게 털어내며 더 멋진 이야기를 자아낼 게 분명합니다. 아주 긴 시리즈까진 바라지 않지만, 마도카가 새로운 레벨에서 새로운 테마로 맹활약하는 걸 적어도 두세 편 정도는 더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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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태동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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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태동은 시리즈 첫 편인 라플라스의 마녀의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앞의 네 편이 주인공 우하라 마도카의 프리퀄이고 마지막 한 편은 전작에서 마도카와 함께 맹활약을 펼쳤던 지구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의 프리퀄입니다. 전작이 온천지대에서 벌어진 기이한 황화수소 중독사를 소재삼아 SF, 메디컬, 가족의 비극, 복수, 미스터리 등 여러 장르를 혼합시킨 대작이었다면, ‘마력의 태동은 주인공 마도카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와 함께 치유와 구원을 중점적으로 그린 휴먼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의 제목이자 마도카를 가리키는 별명이기도 한 라플라스의 마녀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플라스가 창조한 초월적 존재 라플라스의 악마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 초월적 존재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낸 뒤 물리학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초월적 존재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지의 영역인 뇌의 세계와 물리학의 난제들을 지렛대 삼아 세상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해내는 신비로운 소녀우하라 마도카를 만들어냈습니다.

 

마도카의 프리퀄을 그린 네 편의 단편은 30대의 침구사(鍼灸士) 구도 나유타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스키점프 선수 치료 차 출장을 떠났던 나유타는 우연한 기회에 유체역학 교수의 소개로 마도카와 인연을 맺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우연인 듯 운명인 듯 여러 차례 접점을 가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성적을 내지 못해 은퇴를 고민하는 노장 스키점프 선수, 베테랑 투수의 마구를 받아내지 못해 좌절한 젊은 포수, 아들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절망의 날들을 보내는 노교사, 그리고 동성 연인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는 유명 작곡가 등이 마도카와 나유타 덕분에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갈 희망을 품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마도카가 라플라스의 마녀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건 맞지만 치유와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던 본인들의 의지와 노력에게 맡긴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만줄 뿐,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을 거듭 목격하며 놀라움-믿을 수 없음-믿을 수밖에 없음의 단계를 거쳐 끝내 그녀를 신뢰하게 된 침구사 나유타의 진심 어린 응원 역시 치유와 구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는 마도카와의 인연 덕분에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던 자신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마도카와 나유타는 띠동갑 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치한 다툼에서부터 진지한 갈등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지구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의 프리퀄은 라플라스의 마녀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사건과 함께 그가 그로부터 3년 전에 겪은 또 다른 온천지대에서의 황화수소 중독사를 다룹니다. 마도카와 나유타가 등장하진 않지만 후속작을 위한 흥미로운 떡밥을 남겨놓기도 해서 곧이어 읽을 시리즈 3마녀와의 7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줬습니다.

 

패러독스 13’ 이후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 미스터리를 외면해왔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덕분에 오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과도한 이과 미스터리는 여전히 기피 대상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읽을 생각도 안 했던 작품들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서라도 한두 편씩 알아볼까 고민 중입니다. 혹시라도 저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 미스터리에 거부감이 있던 독자라면 라플라스 시리즈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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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의 마녀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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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곳의 온천지대에서 황화수소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불행한 우연이자 자연재해로 여겨졌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 두 사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애초 사건성이 없는 자연재해라고 단정했지만 의심스런 정황들을 연이어 발견하면서 사건에 휘말리는 지구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 두 사고 중 하나는 사망자의 아내가 재산을 노리고 벌인 살인사건이라고 확신하는 관할서 형사 나카오카, 그리고 두 사고현장에 나타나 한 젊은 남자의 행적을 조사하는 18살 소녀 우하라 마도카가 그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꽤 읽은 편이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는 그동안 관심목록에 올린 적조차 없었는데, 그건 히가시노의 이과 미스터리는 싫다!”라는,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레오 시리즈가 나름 소화 가능한 재미있는 이과 미스터리였던 반면, ‘패러독스 13’히가시노의 이과 미스터리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준 작품입니다.

라플라스 시리즈를 읽기로 결심한 계기는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마녀와의 7서평단에 뽑혔기 때문인데, 새로 접한 시리즈는 무조건 첫 작품부터 읽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 때문에 이과 미스터리에 대한 두려움(?)을 접고 라플라스의 마녀부터 찾아 읽기로 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플라스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라는 가설을 세웠고, 존재는 후일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근대 물리학에서 가상한 일종의 초월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창조한 18살 소녀 우하라 마도카는 바로 이 초월적 존재의 능력을 갖춘 라플라스의 마녀인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철저한 보호대상이자 연구대상인 마도카는 아버지가 뇌신경외과 박사로 재직 중인 가이메이 대학 수리학 연구소에 머물던 중 한 온천지대에서 벌어진 황화수소 중독사고를 알게 된 뒤 그곳을 탈출하여 한 젊은 남자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지구화학 전문가인 아오에 교수는 첫 사고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소녀 마도카를 두 번째 사고현장에서도 목격하자 그녀는 물론 그녀가 찾는 젊은 남자가 두 건의 사고에 연루돼있음을 확신합니다. 아오에 교수는 두 사고 모두 자연재해가 분명하다며 전문가로서 의견을 피력했지만, 사건성을 의심하는 관할서 형사 나카오카가 찾아오고 마도카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대학 관계자와 경호원까지 등장하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사건의 한복판으로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물리학을 통해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SF 미스터리지만, 그 외에도 다채로운 서사들이 한데 녹아든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입니다. 뇌 의학을 다룬 메디컬 스릴러, 한 가족이 몰살된 비극적인 사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집요한 복수극, 진범의 정체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등 히가시노 게이고가 즐겨 구사했던 장르들이 먹음직스런 비빔밥처럼 잘 섞여있다는 뜻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스포일러가 될 부분들이 워낙 많아서 자세한 줄거리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SF 중심의 이과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타고난 문과생조차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것만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마도카를 비롯하여 주요 조연들과 단역들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니고 있고, 사건 역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긴장감과 속도감을 잃지 않아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도 있겠지만, 나름 친절하고 생생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명 덕분에 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프리퀄이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마력의 태동에 대한 궁금증에 빠져들었는데, ‘마녀와의 7서평 마감일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곧이어 두 편을 연달아 읽을 생각입니다. 더불어 그동안 외면했던 히가시노의 이과 미스터리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물론 소재만 보고 겁부터 먹게 될 작품도 분명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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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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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리에는 아빠 오무로와 함께 생전의 큰아빠가 소유했던 에다우치지마섬을 방문합니다. 관광회사, 부동산회사, 건축사무소 등 섬에 리조트 시설을 건설하려는 시찰단에 소유주 가족 자격으로 동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착과 함께 일행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5년 넘게 방치됐던 섬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물론 엄청난 양의 폭탄이 적재돼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패닉에 빠진 탓에 경찰 신고마저 다음날로 미뤘지만, 일행 중 한 명이 다음날 아침 참혹한 사체로 발견되면서 섬의 상황은 돌변합니다. 범인은 일행들이 지켜야 할 열 개의 계율을 종이에 적어 남겼는데, 그걸 어겼을 때 당하게 될 보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2023년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클로즈드 서클물 방주에 이은 유키 하루오의 일명 성서 3부작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종교적 색채가 깃든 작품이 아닐까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십계, 즉 열 가지 계율은 연쇄살인범이 일행들에게 내린 기이하면서도 엄격한 지시사항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지시사항들 때문에 십계는 클로즈드 서클물과는 정반대의 규칙을 품게 됩니다. 즉 외부와 단절된 밀실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서로를 의심하며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려는 팽팽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전개되는 것이 클로즈드 서클물의 규칙이지만, ‘십계는 배경 자체가 전화와 인터넷이 잘 터지는 섬이란 점부터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밀실이면서 동시에 밀실이 아닌 느낌이랄까요? 또한 범인이 내건 계율에 따르면 일행들이 살아남으려면 경찰 신고는 물론 사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범인을 추리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계율을 어긴 대가는 섬에 설치된 대량의 폭탄에 의한 떼죽음이기 때문에, 일행들은 “3일 후엔 섬을 떠나게 해주겠다.”라는 믿기 어려운 범인의 메시지에만 의지한 채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범인이 실수로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거나 단서를 남겨서 일행들이 진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도 폭탄에 의한 떼죽음이라는 대가는 똑같다는 점입니다. 결국 일행들은 부디 범인이 성공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뒤 자신들을 섬 밖으로 내보내주길 바라게 됩니다. 말하자면 폭탄에 통제당한 상황에서 범인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물론 필요한 경우 그의 범행에 협력까지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셈입니다. ‘방주가 밀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미스터리였다면, ‘십계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심지어 범인을 도와야 하고, 범인이 실수하지 않기를 기원해야만 하는 특이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정말 등장인물 전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야기 자체로 실격인 셈이고, 당연히 십계에는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만 계율에 의한 제약이 너무 심한데다 일행 중 그 누구도 탐정의 등장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탐정 역할을 맡은 인물의 동선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지금껏 맛보지 못한 독특한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로를 의심하며 범인을 찾아내려 분투하는 클로즈드 서클물에 비하면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살짝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방주가 시종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면 십계는 탐정 역의 인물이 진상을 폭로하는 장면에서도 흥분과 열감이 기대치만큼 높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유키 하루오의 진가는 바로 그 대목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끝났나, 싶으면 반전이 뒤통수를 치고, 이번엔 진짜 끝났나, 싶으면 ? 이거 뭐지?”라는 엄청난 위화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은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할 독자들이 꽤 있을 텐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옮긴이의 말까지 읽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100% 이해가 안 돼서 결국 다른 텍스트까지 뒤적이는 수고를 감당한 독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방주때문에 한없이 기대치가 높아졌던 탓에 살짝 아쉬움이 남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십계는 유키 하루오의 정교한 미스터리와 반전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유키 하루오는 방주십계에 이어 낙원이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랍니다. ‘성서 3부작이란 명칭에 어울리는 라인업인데, 문득 낙원의 탈을 쓴 밀실 지옥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반전 파티라는 카피가 떠오를 정도로 전작들을 능가하는 작품이 아닐까, 기대하게 됩니다. 머잖아 유키 하루오의 신작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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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팅게일의 침묵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2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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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망막아종(어린이의 안구에 발생하는 암)으로 도조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14세 소년 미즈토는 안구 적출수술을 거부하여 의료진을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개망나니인 아버지는 미즈토를 내팽개친 채 연락도 안 되는 상태였고, 결국 간호사 사요가 수술승낙서를 받기 위해 그를 만나러 나섭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미즈토의 아버지가 토막 시체로 발견됩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미즈토를 유력한 용의자로 단정하면서 동시에 알리바이가 모호한 사요를 공범으로 의심합니다. 한편 유명 여가수 사에코가 심각한 간경변으로 긴급 입원하는데, 그녀의 매니저 시로사키는 사에코 못잖은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간호사 사요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의사 같지 않은 의사 다구치와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 시라토리를 앞세운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피를 보기 싫어해서 내과를 선택한 다구치는 병원 내 권력투쟁이나 승진 경쟁이 싫어서 건물 한 구석에 자리한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에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직 중의 한직에 근무하는 내과의사입니다. 안하무인에 지독한 독설가인 시라토리는 후생노동성의 꽉 막힌 관료 시스템에 반발하다가 한직으로 내쳐진 인물이지만 각종 의료면허는 물론이고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까지 갖춘 이른바 로지컬 몬스터입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캐릭터대로 두 사람은 무수한 충돌을 겪으면서도 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도조대학 부속병원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사건들을 해결하곤 합니다.

 

10여 년 전 시리즈 첫 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을 무척 재미있게 읽고 푹 빠져든 게 사실이지만, 후속작인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그 당시에도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입원환자의 아버지가 토막 시체로 발견되고 아들은 물론 담당 간호사까지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메디컬 미스터리가 아닌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좀더 비중 있게 그려진 건 천상의 가릉빈가라 불리는 유명 여가수 사에코와 그녀 못잖게 특별한 목소리와 가창력을 지닌 간호사 사요가 이끄는 미묘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공감각이란 어떤 감각에 자극이 주어졌을 때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감각 간의 전이 현상을 말합니다. 즉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의 침묵에 등장하는 공감각은 노래에 의해 자극된 청각이 시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말하자면 노래를 듣는 순간 눈앞에 어떤 영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처음 읽었을 때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유는 타인의 공감각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능력자들인 사에코와 사요의 이야기와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머릿속에서 좀처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10여 년이 흘러 다시 읽은 이번에도 그 갸웃거림은 여전했습니다. 공감각이란 게 분명 과학적으로 입증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제겐 황당한 SF 판타지 장치처럼 보일 뿐이었고, 그 현상을 이용하여 살인사건 미스터리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설정 역시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공감각은 공감각대로 난해하기만 했고, 살인사건 수사는 경찰 캐릭터들이 전담하고 있다 보니 정작 주인공인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존재감은 미미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막판에 히드 카드로 반전을 일으키는 건 두 사람의 몫이었지만 계속 짙은 안개 속을 헤매듯 페이지를 넘겨온 탓에 쾌감이나 짜릿함 같은 건 느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밖에도 굳이 이 이야기에 등장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캐릭터들도 적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산만하게 읽힌 점도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10여 년 전에 느꼈던 실망감을 고스란히 다시 한 번 맛봐야 했던 책읽기였지만, 그래도 시리즈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한 탓에 나름 완곡한 악평으로 마무리하려 애써봤습니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후속작인 제너럴 루주의 개선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부디 나이팅게일의 침묵의 아쉬움을 넉넉하게 보상해주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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