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 1 - 경시청 특수범수사계(SIT)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약간의 스포일러 성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3부를 합쳐 1,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 안에 방대한 서사가 펼쳐진 경찰소설입니다.

크게 보면 경찰 대 범인이라는 장르물의 전형적인 서사가 한 축이고,

경찰 대 경찰이라는, 내밀하지만 폭발력 강한 갈등이 또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년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연이은 유괴사건과 그에 이은 유혈총격전,

집단 인질극 현장에서 벌어진 폭발로 인해 특수부대가 몰살당하는 사건,

도심을 봉쇄한 채 무차별 살육을 벌이며 치외법권을 주장하는 희대의 테러(?) 집단 등

경찰이 상대해야 하는 사건들은 규모나 잔혹성에 있어 전대미문의 것들입니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 자리한 소위 신세계 질서라는 집단은

기존의 가치와 법, 제도 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살인, 폭력, 마약 등 사회적 합의에 의해 금지된 모든 것을 해방시키려 합니다.

그 정점에는 유년시절부터 살인, 난교, 마약에 둘러싸여 성장한 미야지가 있고,

그 중심에는 가공할 전투력과 신비한 캐릭터로 무장한 금발의 미소년 지우가 있습니다.

 

한편, 대립과 갈등, 경쟁과 비방이 공존하는 경찰 내부의 양상은

고위급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묘사됩니다.

두 주인공 가도쿠라 미사키와 이자키 모토코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인격을 지닌 여경입니다.

가도쿠라가 설득과 대화로 피의자 스스로 무기를 버리게 만드는 경찰이라면,

이자키는 위험한 상황을 즐기며 가차 없는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경찰입니다.

가도쿠라는 한때 동료였던 이자키에게 다가가고자 나름 친밀함을 표현해보지만,

이자키는 가도쿠라가 발산하는 여성미나 친절함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두 사람은 미야지와 지우가 일으킨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결국 적으로 만나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지우에서 묘사된 경찰 내부의 갈등의 큰 축은 세 부서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수사와 탐문으로 실적을 내야 하는 형사부, 무력진압으로 공을 세우려는 경비부,

은밀한 정보전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 공안부 등이 그들인데,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은 물론 서로를 비방하거나 음해하기도 하면서

수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노골적이고도 아슬아슬한 대립이 사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동시에, 일단 흥분부터 하고 보는 다혈질 부장, 얼음처럼 차갑고 냉철한 중간 간부,

인간미와 능력을 겸비한 이상적인 현장 수사관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적절히 포진돼있어

경찰 조직의 단면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경찰 대 범인구도만큼이나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미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를 통해 혼다 테쓰야의 팬이 된 터라

지우역시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고, 기대한 만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두세 가지 점에서 큰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미야지가 이끌고 지우가 중심에 서있던 신세계 질서라는 그룹의 정체성인데,

여러 인물을 통해 그룹이 지향하는 바가 설명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해설에서 지적한대로) 약간은 황당무계하게 느껴진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 즉 사상적으로 제대로 무장된 무정부주의 단체도 아니고,

미래나 지속성을 염두에 둔 치밀하고 계획적인 혁명도 아니며,

고작 3일 천하도 보장할 수 없는, 다분히 무모하고도 충동적으로 보이는 거사

그들의 정체성과 지향점에 공감하기 힘들게 한 것은 물론,

이야기 전체의 사실감도 현저히 떨어뜨린 대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세컨드 주인공인 이자키 모토코의 행적에 관한 것인데,

중요한 지점마다 그녀가 내린 선택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애초 도덕적 동기와는 무관하게 경찰이 된 그녀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가 신세계 질서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나

도심 봉쇄 후 무차별 살상에 가담하는 정황, 신세계 질서와의 절연을 결심하는 계기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갑작스럽고 개연성 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지우의 캐릭터에 관한 것인데,

사실 판타지라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함을 앞세워 그려진 인물이다 보니

모호하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더라도 큰 거부감 없이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신세계 질서를 배신하는 장면이나

그가 저지른 모든 행동의 근원을 설명한 엔딩의 몇 페이지에서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넌센스에 가까운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또 그를 동정하는 듯한 에필로그 역시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1~3부까지의 서평을 한꺼번에 쓰다 보니 아무래도 매크로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는데

디테일을 이야기하자면 세 편의 작품마다 각각의 장편의 서평이 필요할 것입니다.

혼다 테쓰야의 팬이라 약간의 아쉬움이 있더라도 대체로 좋은 쪽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라 시작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호불호에 관계없이 순식간에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혹시 지우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독자라도

혼다 테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는 한번쯤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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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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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편집한 줄거리입니다.)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 포경선 유키마루가 해군 식량 조달을 목적으로 출항한다.

배에는 일본인 선원뿐 아니라, 자원하거나 차출되어 끌려온 조선인, 대만인들이 승선한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할당된 어획량을 채우기 위해 조업을 하는 동안

유키마루의 선원들은 기본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환경에서 허기와 갈망에 시달린다.

미군의 폭격으로 엔진이 고장 난 유키마루는 논란 끝에 엔진을 교체하기 위해

똑같은 모델의 배가 버려져 있는 남극으로 타륜을 돌린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버티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추악한 감정들이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결국 사투 끝에 도착한 남극해에서 모든 선원에게 치명적인 사건이 발발한다.

증오와 욕망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 유키마루에서 결국 살아남는 자는 누구일까?

 

● ● ●

 

문근영은 위험해라는 눈에 띄는 제목만 기억할 뿐 임성순 작가와는 처음 만나는 작품입니다.

극해의 서평을 찾아보니 2010년 세계문학상 수상 후 많은 독자에게 주목받던 작가였습니다.

새삼 외국의 장르물에만 몰두하던 책읽기 습관이 부끄럽더군요.

 

극해역시 제목에 꽂혀 작년부터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욕망과 본능의 충돌을 다루고 있었는데,

시대 배경이 1944년이라는 설정은 의외였습니다.

광란의 바다를 떠다니는 포경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묵인된 폭력과 착취,

죽음마저 쉽게 감춰지는 공간이라는 설정만으로도 긴장감을 충만시키기에 충분할 텐데,

거기에 식민지 시대의 착취와 피착취의 대립 구도까지 갖춰진 덕분에

이야기는 첫 출발부터 독자에게 평범하지 않은 무게감을 던져줍니다.

 

극해는 오감 가운데 특히 후각을 많이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남자들의 땀 냄새, 포경선을 뒤덮은 비린내, 폭력의 부산물인 피와 고름의 냄새 등...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바다 위의 유키마루는 열린 밀실 그 자체입니다.

그 밀실을 부유하는 갖가지 불쾌한 냄새들은 억압되고 짓눌린 자들의 분노를 고양시킵니다.

그것은 포경선의 지배자가 일본인이고, 고통스러운 노동의 주역이 조선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는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할 뿐, 핵심은 인간의 욕망과 본능입니다.

그래서, 증오와 갈등은 일본인 사이에서도, 조선인 사이에서도 똑같은 힘으로 증식해갑니다.

 

하늘에서는 미군의 폭격기가, 바다 밑에서는 연합군의 잠수함이 유키마루를 위협하는 가운데

선상에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갈등이 한없이 격화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겠다는 본능은 자연히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욕망을 낳기 마련입니다.

포경선 유키마루는 이런 비인간적인, 또는 거꾸로 너무나 인간적인 기운이 날뛰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이미 폭력의 화신으로 완성된 인격체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고운 천성을 잃어버린 채 끔찍한 도살자로 변신합니다.

 

사람을 전율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말이죠. 힘이죠.

손안에 상대방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그건 거의 사정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설득과 대화는 사라지고 선한 의지와 공동체적 협력은 아무 쓸모도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위태로운 균형은 결국 파괴되고, 유키마루에서는 살육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선징악도 아니고 이야기의 행복한 종결도 아닙니다.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변신하며, 폭력은 더욱 강화되어

유키마루를 휩쓰는 역한 냄새를 더욱 고약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저지르는 죄악,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던 자의 광기,

시대와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생에 대한 환멸은 인간이라는 참담한 심연을 더욱 들끓게 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들여다본다.“라는 소개글은 극해의 미덕을 단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재미있지만 불편한 책읽기를 감수해야 하고, 이야기가 끝이 나도 결코 개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연을 들여다본 후의 후회와 먹먹하기만 한 여운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캐릭터라든가 미스터리가 풀리는 지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크고 굵직한 서사를 대중적인 재미와 함께 잘 녹여낸 필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 재기발랄함, 그리고 부조리함을 직시하는 시선을 갖췄다는 평가 때문에라도

극해를 통해 처음 만난 임성순 작가의 전작들을 꼭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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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맨 그레이맨 시리즈
마크 그리니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전설적인 킬러 코트 젠트리, 일명 그레이맨에게 동생을 잃은 나이지리아 독재자 아부바커는

천문학적인 천연가스 개발권을 미끼로 거대 재벌 로랑그룹에게 그레이맨 제거를 요구합니다.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엄청난 규모의 부와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로랑그룹은

미국인 변호사 로이드와 독일인 킬러 리겔을 앞세워 그레이맨 제거에 혈안이 됩니다.

로이드는 그레이맨의 후원자이자 은인인 스파이계의 대부 피츠로이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고,

리겔은 로랑그룹이 내건 상금을 통해 수십 명의 다국적 킬러들을 끌어들입니다.

노르망디에 인질로 잡힌 피츠로이와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그레이맨은 사방에 깔린 킬러들과 혈투를 벌이며 한걸음씩 노르망디로 다가갑니다.

 

● ● ●

 

자신을 제거하려는 로이드와 리겔, 그리고 수십 명의 뛰어난 다국적 킬러들을 상대하면서

노르망디까지 진격하는 그레이맨의 48시간 동안의 여정은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가는 곳마다 거리의 아티스트라 불리는 감시원들이 깔려있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엄청난 현상금에 눈먼 다국적 킬러들이 대낮 도심에서 총을 갈겨댑니다.

안 그래도 한때 몸담았던 CIA마저 눈에 불을 켜고 그레이맨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

그의 행보는 마치 눈이 가려진 채 지뢰밭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그레이맨은 최고의 스파이물 본 시리즈를 연상시킵니다.

무엇보다 코트 젠트리의 이력이나 살인기계를 능가하는 뛰어난 능력이 그렇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무수한 능력자 킬러들이 떼로 등장하는 점도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배신과 위기, 기대하지 않은 조력자의 등장,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악의 존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코트 젠트리는 냉혈동물 같은 킬러이면서도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제라도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인간미와 정의감입니다.

그는 아무리 큰돈이 걸려있더라도 명백한 악이 아니라면 일을 맡지 않습니다.

반대로, 정의감 하나 때문에 무모해보일 정도의 상황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코트 젠트리의 노르망디 작전역시 그런 무모한 상황 중의 하나입니다.

한때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피츠로이는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며,

나이지리아의 독재자와 로랑그룹의 하수인들은 누가 봐도 명백한 악 그 자체라는 사실이

코트 젠트리의 인간미와 정의감을 부추긴 원동력입니다.

조금은 인공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은 액션물 주인공이 갖춰야 할 당연하면서도 기본적인 매력이긴 하죠.^^

 

액션물은 영상이 이라고 생각하는 취향 탓에 자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몇몇 작품을 통해 소설이 주는 남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중입니다.

그레이맨이후 발표된 시리즈들이 연이어 배리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보면

노르망디 작전 이후 코트 젠트리의 거취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암시된 그의 다음 미션을 보니 역시 짜릿한 재미를 줄 것 같네요.

그레이맨의 성공으로 마크 그리니의 다음 작품들도 무사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족으로...

펄스에서 지난 여름 출간한 아파치는 재미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여러 독자들이 편집에 관해 아쉬운 반응을 많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랬구요.

그레이맨의 경우 판형은 마음에 들었지만

페이지를 줄이려 한 탓인지 너무 작은 글씨 때문에 첫인상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야기에 빠져들고나면 글씨 크기야 전혀 의식할 수 없게 되긴 하지만요...

 

글씨 크기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적잖은 오타와 무수한 띄어쓰기 오류였습니다.

일일이 찍어놓긴 했는데, 서평에 나열하기엔 양이 너무 많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별 5개의 작품이지만, 오타와 오류 때문에 별 1개를 뺐습니다.)

저처럼 약간의 결벽증에 걸린 독자가 아니라도 자주 발견되는 오타는

작품과 출판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입니다.

그레이맨의 후속작은 편집 과정에서 좀더 신경 쓴, 옥의 티 없는 결과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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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는 벽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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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 윌마가 멕시코 호텔에서 추락사하자 에이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남편 루퍼트에게 의지하여 미국으로 돌아온 에이미는 윌마의 죽음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 늘 타의에 의해 통제되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집을 나갑니다.

하지만 에이미의 오빠 길은 동생의 가출을 묵인했다고 진술하는 루퍼트를 의심합니다.

에이미의 재산을 노린 루퍼트가 내연 관계인 비서 버턴과 짜고 에이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사립탐정 도드를 고용하여 루퍼트의 뒤를 캐게 만듭니다.

도드에게 주어진 원래 미션은 에이미를 찾는 것이지만,

그는 윌마의 죽음에도 의혹을 가지면서 전방위로 탐문을 진행합니다.

그 와중에 도드는 루퍼트가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루퍼트에 대한 의심이 고조되던 시점에, 도드는 그로부터 모종의 거래를 제안 받습니다.

 

● ● ●

 

가끔씩 고전 미스터리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무선 통신이라든가 컴퓨터가 없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진실 찾기 게임

현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빛나곤 합니다.

일일이 발품을 팔면서 엄청난 종이자료들을 상대로 씨름을 해야 하는 기술적인 면도 그렇고,

트릭이나 사건의 흉악함보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동기에 중점을 두는 서사 덕분에

게임 오버와 함께 기억에서 사라지는 현대물과 달리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참극이 벌어지긴 했지만,

엿듣는 벽에 등장하는 사건은, 규모만 놓고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반 사건입니다.

하지만 가정 스릴러의 대가라 불렸던 마거리 밀러는

사건에 연루된 가족 또는 가족에 버금가는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를 정교하게 설계하여

그들이 벌이는 맹목적인 믿음과 사랑, 이전투구와 의심, 탐욕과 질투 등

다채로운 감정과 관계를 긴장감 있게 그려냅니다.

 

언제나 제멋대로 화려하고 도드라진 삶을 살아온 윌마,

그와는 반대로 오빠의 강압 속에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에이미,

누구보다 에이미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실종에 관해 가장 큰 의심을 받고 있는 남편 루퍼트,

성년에 이른 에이미를 꼬마라 부르며 엄중한 보호 아래 놓으려는 오빠 길,

미스터리와 함께 사라진 시누이 에이미가 영원히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길의 아내 헐린,

에이미의 오빠로부터 루퍼트의 불륜 상대로 의심받을 만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비서 버턴 등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애증을 가진 가족(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대치하거나 의심하거나 몰래 거래하면서 사라진 에이미의 행방을 놓고 제각각 움직입니다.

 

이렇듯 어딘가 의심을 살 만한 구석들이 충분한 인물들이 산재해있다 보니

독자는 누구를 범인으로 추정해야할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등장인물 모두 하나같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독자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에이미는 정말 자신의 의지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지?

그렇다면 남편 루퍼트는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잔혹한 살인범인지?

에이미는 남편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을 만큼 정말 여리고 착한 여자인 건 맞는지?

루퍼트를 에이미 살인범으로 여기며 탐정까지 끌어들인 오빠 길의 진심은 무엇인지?

 

작가는 이렇듯 안개처럼 희미하고 불확실한 정황 속에서 자유자재로 독자를 쥐고 흔듭니다.

이쪽으로 몰아가는가 하면, 어느 새 반대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모두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모두를 혐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양면성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우아하면서도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다.

특히 히스테리와 광기의 경계에 선 위태로운 심리를 묘사하는 능력과,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클라이맥스에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수법이 대단하다.”는 소개대로

마거릿 밀러는 캐릭터 플레이를 통해 독자를 미혹하는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입니다.

 

느지막이 등장한 사설탐정 도드는 전현직 경찰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모아들이고,

날카로운 추리와 집요한 탐문,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매력을 발휘합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 될 만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인물에게 양보해야 했던 점은 아쉬웠지만,

고전적인 노력하는 천재형 탐정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막을 내린 엔딩 부분입니다.

후반부에 거의 비약처럼 이야기가 점프하는 지점이 나오는데,

물론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지긴 하지만,

어쩐지 챕터 하나가 통으로 빠졌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틈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런 탓에 마지막 50여 페이지는 마감이나 분량에 쫓겨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 모든 것을 실은 이러이러했다.”라는 누군가의 고백으로 대체한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도 꽤 충격적인 대목인데,

급작스런 마무리 때문에 제대로 그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고전은 말 그대로 고전의 맛을 기대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화려하고 복잡다단한 현대 미스터리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마거릿 밀러의 작품은 어쩌면 올드하고 단순한 치정극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추하든 아름답든 인간 본연의 감정들에 대한 묘사라든가

답답할 정도로 아날로그적이지만 오히려 진실의 이면까지 파악해내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어쩌면 가볍고 속도만 빠른 일부 현대물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진미일 것입니다.

 

부록의 마거릿 밀러 장편소설 목록을 보니 엿듣는 벽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입니다.

1950년대 중반에 최전성기를 보냈다는 마거릿 밀러의 최상급 작품들을

앞으로도 꾸준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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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팽창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3
구보 미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로 처음 만난 구보 미스미의 인상은 정말 강렬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으며 파격적인 성애부터 뭉클한 감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인연과 감정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120% 공감하게끔 풀어낸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전 장르를 통틀어 베스트 중 하나로 꼽는 작품입니다.

 

그녀의 신작 밤의 팽창한심한~’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형제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게이스케와 유타,

그리고 두 형제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미히로 등 세 명의 주인공이 번갈아 화자를 맡아

코흘리개 시절부터 30대를 앞둔 지금까지의 10여 년간 서로가 주고받은 애증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과 전쟁그 자체입니다.

게이스케와 유타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다가 폐암으로 쓸쓸히 죽어갔고,

미히로의 어머니는 12살 연하의 남자와 눈이 맞아 3년간 집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고교 시절, 동생 유타가 미히로를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고백을 한 게이스케는

결국 미히로와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에 들어가지만 현재는 섹스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배란기가 올 때마다 발정하는 기계처럼 몸이 달아오르는 미히로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어머니의 더러운 피를 저주하면서도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는 게이스케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형과 결혼할 미히로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유타는

어느 날 자기 앞에 나타난 돌싱녀와 사랑을 나누지만 마음까지 주진 못합니다.

 

세 남녀 사이의 애증을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섹스입니다.

게이스케는 아이가 태어나 가족이 완성된다면 섹스란 없어도 무방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여자가 성욕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반대로 미히로는 섹스 없는 결혼이란 불가능하다고, 인공적인 임신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그렇게 이룬 가족이란 것은 모래위에 지은 성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발적으로 딱 한번 미히로와 섹스를 한 유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때 미히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세 사람의 이런 차이는 실은 좀더 근원적인 곳에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미히로가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그래서 더 기복이 큰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게이스케는 계획과 관리에 의한 어긋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캐릭터입니다.

유타는 두 사람의 중간쯤에 위치했다고 할까요?

구보 미스미는 주어진 삶에 대처하는 세 사람의 차이를 유년기부터 꼼꼼하게 설계했고,

그 설계도 위에 부모나 친구, 또 다른 연인 등 다양한 조연을 포진시켜

세 사람의 극적인 인생항로를 정교하지만 감성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애증을 섹스를 매개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면

언뜻 과격하고 다혈질적인 캐릭터, 흥분으로 가득 찬 문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구보 미스미는 한심한~’에서도 그랬듯 직설과 담담함을 절묘하게 섞은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사실감을 높이는 필력을 선보입니다.

섹스에 관해서는 옆 사람이 책을 들여다볼까 신경 쓰일 정도로 직설적인 묘사를 동원하지만,

가족이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희로애락이나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쿨한 것 이상의 건조함이 느껴질 정도로 담담한 묘사에 집중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수시로 에쿠니 가오리가 떠올랐는데,

아마 불륜 또는 어긋난 인연을 자주 그린 그녀의 작품 세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가 (상대적으로) 예쁘고 가녀린 문장들로 독자의 감성에 호소했다면,

구보 미스미는 좀더 현실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공감의 폭을 넓힙니다.

 

다만, 전작인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에 비해서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연애소설이라고 단정 짓기엔 나름 다양한 인격과 감정을 폭넓게 표현한 작품이긴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고 아프게만드는 서사의 깊이는 기대에 비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앞선 두 작품이 짙은 여운, 또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을 남긴 것에 비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왠지 인공미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고백하자면,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의 서평에서 다음 작품에서는 가끔씩 웃을 수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해놓고는 또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 마음속에 품어봤을 법한, 또는 한번쯤 눈 딱 감고 과감하게 저질렀던,

하지만 상식과 통념, 도덕이라는 굴레 때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평생의 비밀로 간직했을 날것 같은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는 덕분에

밤의 팽창은 구보 미스미의 독특한 매력이 발산된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갓 나온 따끈한 신간을 끝냈지만, 또다시 그녀의 작품을 기다리게 됩니다.

다음엔 또 어떤 파격을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그저 궁금하고 기대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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