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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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야마 고교의 축제를 앞두고 2학년 F반에서 제작 중이던 미스터리 영화가

시나리오를 맡은 학생이 과로와 심리적 부담으로 쓰러지면서 촬영 중단사태를 맞이합니다.

신경 쓰여요.”라는 말을 달고 다니는 사건 수집가지탄다 에루는

F반의 이리스 후유미로부터 지원을 요청받고 호타루를 비롯한 고전부를 사건에 끌어들입니다.

고전부가 받은 미션은 그때까지 제작된 영화의 초반부, 즉 피살자가 발견된 장면까지만 보고

애초 작가가 구상했던 트릭과 범인을 추론해냄으로써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F반의 축제용 영화 제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작에 관여했던 학생들의 다양한 추론 밀실살인, 3의 인물 설 등을 들으며

나름의 추리를 전개시키지만 좀처럼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 ● ●

 

미스터리의 힘이라는 기준에서만 보면 좀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의 진짜 미덕은 작가의 상상력과 잘 짜인 형식의 힘에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만 보고 시나리오의 나머지 부문, 즉 범인과 트릭을 알아내야 한다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고교 1년생인 고전부 멤버들에게 어울리는 쉽고 단순한 미스터리 같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맡은 학생이 정작 미스터리에 문외한이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사건 현장이 계획적으로 준비된 완벽한 밀실이며

누구도 범인으로 지목하기 곤란한, 좀처럼 추론하기 어려운 트릭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호타루를 비롯한 고전부 멤버들을 꽤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상상력이 자아낸 재미있는 설정을 기반으로 작가는 한편으론 미스터리의 정석을,

다른 한편으론 고교 1년생의 성장통을 함께 다루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을 가진 호타루가

F반의 카리스마 여제이리스 후유미에게 말려들어 그답지 않게 진상 파악에 힘쓰는 모습은

빙과를 읽은 독자라면 어라~?” 소리가 나올 만큼 재미를 주는 대목입니다.

스스로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던 호타루는 이리스 후유미의 부추김

고전부 멤버들의 진심어린 칭찬덕분에 새삼 다른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오버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호타루가 자기애와 자만심의 냄새를 풍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또래라면 거쳐야 할 아프고 힘든 통과의례의 발단으로 작용합니다.

시리즈를 이끌어가야 하는 주인공이면서, 아직 채워야 할 여백이 많은 10대의 호타루에게는

언젠가 한번은 겪어야 할 자기 성찰의 시간이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펼쳐진 것입니다.

 

이런저런 장점과 미덕에도 불구하고 (‘빙과의 기억이 강렬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호타루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재미는 있었지만 어딘가 교과서적인 냄새도 좀 난 듯 했고,

미스터리는 독특하고 개성 있게 설정되긴 했지만

조금만 더 치밀했거나 복잡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호타루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덕분에 지탄다, 후쿠베, 이바라 등 다른 고전부 멤버들이

확연히 조연 역할에만 머물렀던 것도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일부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믿고 읽는 작가요네자와 호노부의 특별한 상상력을 맛보게 해준 것으로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는 나름의 존재감을 충분히 발휘했다, 정도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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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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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책소개에서 인용한 줄거리입니다.)

한밤중의 도메이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6중 추돌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트럭이 전복되고

뒤따르던 차량들이 연달아 추돌하며, 6명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는다.

근방에서 야경을 찍으려던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 교스케는 이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추돌한 차량에서 불길이 치솟아 어둠을 대낮처럼 밝힌 생동감 넘치는 사진은

'10만 분의 1의 우연'이 만든 셔터 찬스였다는 극찬과 함께

신문사의 사진 공모전에서 연간 최고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그 사고를 통해 약혼녀를 잃은 누마이 쇼헤이는 사고와 야마가의 사진 사이에

우연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는 필연적인 인과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야마가 교스케에게 접근한다.

 

● ● ●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매번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이라는 표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개인과 사회, 선과 악, 옳고 그름에 관한 논쟁거리를 남겨놓는 주제의식 때문에

출간된 지 한참이 지난 현재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10만분의 1의 우연은 무척 아이러니한 제목입니다.

아무리 촉이 뛰어난 보도사진작가라 하더라도

언제쯤, 어느 곳에서 끝내주는대형사고가 일어날 것을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10, 아니 100만 분의 1이라는 확률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약혼자를 잃은 누마이 쇼헤이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여기게 됩니다.

 

누마이는 사고 현장을 답사하고, 그곳에서 확보한 미미한 단서들을 바탕으로

너무나도 무모하고 막연한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동시에 사고 당시 생존자는 물론 사진가 야마가에게까지 접근하여

어떻게든 그날, 고속도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려 합니다.

누마이가 진실을 찾아낼 가능성 역시 10만 분의 1의 우연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돌사건을 찍은 야마가의 사진에 관한 독자와 신문사 간의 논쟁을

약간은 과하다 할 정도로 초반부에 서술합니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참혹한 사고 순간이 담긴 사진을 굳이 신문에 싣거나

연간 최고상이라며 그 사진가에게 상금과 상패까지 주면서 치켜 올려야 하느냐, 라는 비난과

경종을 울리기 위한 보도사진의 속성이라는 신문사의 반론이 공방을 벌입니다.

이런 초반부의 장황한 서술은 이 작품의 주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해설을 통해 그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해놓고 있습니다.

개인이 자기표현을 위해서 하는 행동을 사회는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이 작품 역시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답게

개인과 사회의 문제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해설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정리한 한 줄의 주제는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사진가 야마가의 행동에는 사회적인 영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명예욕이라는 개인의 야망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혼녀를 잃은 누마이의 진실 찾기 역시 개인의 복수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그 이유에 관해서는 더 언급하기가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어쩌면 ‘10만 분의 1의 우연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파의 묵직한 서사가 밑받침되지 못한데다, 엔딩 역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해서인지,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확실하게 개인적 수준의 순수한 미스터리, 그것도 중편 정도의 분량으로 완성됐다면

훨씬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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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은총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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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카드에나 등장할 법한 그림 같은 마을 스리 파인스를 무대로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른바 범죄 없는 마을로 꼽힌다면 캐나다에서 1,2등을 다툴만한 평화로운 곳이지만

스리 파인스는 1년 만에 또다시 끔찍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만, 1년 전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슬픈 마음들이 온 마을을 우울하게 잠식했었다면,

이번에는 마치 희생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 ● ●

 

명상가이자 디자이너인 CC 드 푸아티에는 스리 파인스에 터를 잡은 이후

거의 물과 기름처럼 스리 파인스 사람들과 격리된 채 살아왔습니다.

괴팍하고 사나운 악녀의 기운을 내뿜는데다 어리바리한 남편과 고도 비만의 10대 딸을

쥐 잡듯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며 스리 파인스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컬링 대회장 한복판에서 사망합니다.

관객과 컬링 선수로 가득했지만 정작 아무도 그녀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사고가 아닐까 했지만, 가마슈 경감은 치밀하게 준비된 살인임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가마슈 경감은 단서를 모으고, CC의 정체와 인간관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오히려 수사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 ● ●

 

솔직히 고백하자면, 쉽지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풍경과 개성 넘치는 착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마을,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임에도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따뜻한 느낌을 전해줬던 독특한 맛,

이웃집 아저씨 같은,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진심어린 멘토링으로 존경을 받는 가마슈 경감 등

스틸 라이프가 남겨준 좋은 기억 덕분에 꽤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은총은 제겐 산만하고, 난해하고, 지루한 느낌만 남겨줬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피살된 CC의 캐릭터가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는데,

그녀의 정체는 물론, 그녀가 왜 스리 파인스에 정착했는지,

그녀가 사이비 냄새가 진동하는 명상론을 기반 삼아 펼치려던 비즈니스의 실체는 무엇이며,

멍청한 남편과 뚱뚱한 딸에게 저지르는 악행의 근거는 무엇인지 등

독자를 납득시키고 공감시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끝까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언급되긴 했지만, 저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리 파인스의 괴팍한 시인인 루스 자도의 시()를 비롯해서

몇 번을 되읽어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는 어려운 시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어떤 때는 그저 현학적인 수사 이상으로 읽히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렵고 귀찮아서 다시 읽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정말 그 시 안에 단서가 있다면, 그건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스 자도는 시인이니 그렇다 쳐도, 가마슈 경감을 비롯한 스리 파인스의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고전과 현대의 시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곤 합니다. 이 점도 납득 불가..)

 

단서들은 모두 암호처럼 모호했고, 사건 주위에는 형이상학적인 상징들이 넘쳐나는데,

문제는 가마슈 경감이 그 암호와 상징들을 꿰어 맞춰 해결점에 이르는 과정들 역시

객관적인 논리와 명료한 추리보다는 계시를 받은 듯한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지하곤 합니다.

덕분에 사건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해결됐지만,

엔딩은 깔끔하지도, 여운을 남겨주지도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건가라는 생각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봤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남긴 호평을 보곤 또 한 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취향의 문제라고 마음 편하게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스틸 라이프를 떠올려보면 작가와의 궁합 자체가 저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악평에 가까운 서평을 쓰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루이즈 페니의 필력이 여전히 빛나는 지점들도 많았습니다.

뛰어난 능력과 따뜻한 마음씨를 소유한 가마슈 경감의 멋진 캐릭터라든가,

감성적인 가마슈를 든든하게 보좌하는 이성적인 경찰 보부아르와 라코스트의 매력,

민폐만 저지르다가 쫓겨났던 이베트 니콜이 재등장하면서 야기한 묘한 위기감,

가마슈에게 인정받아 꿈에 그리던 살인반 멤버가 된 로베르 르미외의 향후 행보 등

다양한 경찰 캐릭터는 스틸 라이프에 못잖게 강한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가마슈 경감을 향한 퀘벡 경찰청의 은밀한 정치적 공격이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졌는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가마슈 경감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그 음모를 주도한 세력들을 어떻게 박살낼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스틸 라이프에서 빛나는 주, 조연으로 활약했던 스리 파인스의 주민들은

이번에는 사건의 외곽에 머무른 나머지 상대적으로 왜소한 역할만 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것처럼 느끼게끔,

그래서 그들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그들이 만든 크루아상을 먹고 싶게 만드는,

친근한 이웃으로서의 역할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시 문제는 피살된 의문의 여인 CC 드 푸아티에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좀더 선명한 캐릭터였다면, , 작가가 좀더 친절하게 그녀를 설명했더라면,

치명적인 은총이 제게 이런 평을 받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세 번째 시리즈인 가장 잔인한 달을 비롯해서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모두 읽을 작정입니다.

루이즈 페니가 펼쳐놓은 스리 파인스의 매력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2CC 드 푸아티에를 만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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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나체들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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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파격적인 설정과 성()에 관한 직설적인 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이지만

사실 두 남녀의 8개월 동안의 만남과 그것이 파국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새삼 19금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2015년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진부한 스토리입니다.

 

● ● ●

 

평균보다 조금 못 미치는 외모를 지닌 덕분에 연애는 남 얘기처럼 알고 지내던 한 여자가

집단 괴롭힘의 트라우마, 열등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한 남자를 인터넷에서 만납니다.

8개월 동안 두 남녀는 파괴적이라 할 만큼 섹스에 집착하게 되고,

남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두 사람의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한 후 인터넷에 올립니다.

파국을 감지한 여자가 결별을 선언하려던 순간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두 남녀의 8개월의 치명적인 관계는 온 세상에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됩니다.

 

● ● ●

 

얼굴 없는 나체들은 스토리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모자이크 된 얼굴, 이름을 대체한 닉네임, 그리고 그를 통해 확보된 인터넷 상의 익명성

현실과 가상공간에서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에 관해서만큼은

충분히 주목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외모도 성격도 평균을 넘지 못하는 요시다 기미코는

평범한 수준의 연애조차 요원한 일이 돼버리자 미키라는 닉네임 뒤에 숨어 남자를 찾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얼굴은 어떻게 해도 그 근본을 뜯어고칠 수 없는 불행한 유전의 결과였고,

콤플렉스로 커져버린 뒤에는 그녀 자신을 익명성의 세계로 숨게 만든 단초입니다.

그녀는 나중에 남자가 인터넷에 올린 자신의 얼굴 없는 나체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조차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요시다 기미코인지, 미키인지, 어느 쪽이 진정한 자신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집단 괴롭힘의 트라우마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가타하라 미쓰루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여자의 얼굴에 투사함으로써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낍니다.

그는 여자는 남자의 변기라는 여성관을 가졌으며,

옷을 입은평범한 여자와의 사랑이 불가능한 남자입니다.

“(여자는) 사실은 누구나 암캐처럼 탐욕스러운 욕망의 노예이면서, 짐짓 시치미 뗀 얼굴로

그것을 은폐한다. 그런 낯짝이 나를 업신여기고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미치라는 닉네임 뒤에 숨어 자신의 성욕을 처리해줄,

마음껏 더럽힘으로써 수치심과 굴욕을 맛보게 해줄 여자의 얼굴을 찾아다닙니다.

 

모자이크와 닉네임 뒤에 숨었던 미키와 미치의 관계는 결국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지만

세상은 온통 관음증 환자처럼 수면 위에 드러난 그들의 섹스동영상에만 집착합니다.

그들은 미키와 미치가 숨기려고 했던 모자이크 속의 얼굴을 벗겨내고 싶었고,

닉네임이 아닌 그들의 실명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얼굴과 이름을 숨기려는 미키와 미치도 그렇고, 그들의 민낯을 확인하려는 세상도 그렇고,

모두 픽션이 아닌 현실 속에서, 인터넷 속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단지 19금이라는 딱지와 그를 초래한 선정성 때문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갖는다면

대략 기대치의 절반 정도는 만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미덕은 성애소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인터뷰는 이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미, 미덕 등을

잘 요약해놓았는데 그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얼굴이란 인간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얼굴로 어떤 사람인지가 구분되고, 얼굴을 통해 한 인간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 얼굴을 가릴 수 있기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바로 그것이 제가 이 책에서 쓰고 싶었던 것 중 하나입니다.

(야후 북스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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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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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두 개의 잘린 머리가 등장합니다.

전위예술가의 유작인 석고상 여인의 잘린 머리가 하나이고,

참혹하게 토막 난 채 택배상자에서 발견되는 여자의 잘린 머리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제목대로 사건의 진실과 비밀은 두 개의 잘린 머리를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는데,

추리소설가이자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그의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 경시는

꼬일대로 꼬인 이 난해한 사건을 집요한 추적과 추리로 해결해냅니다.

 

잘린 석고상의 머리를 통해 누군가는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게 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며,

누군가는 그 존재 자체를 감춰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입니다.

사라진 석고상의 잘린 머리의 행방과 범인을 찾기 위해 린타로가 동분서주하던 즈음

실제 여자의 잘린 머리가 등장하면서 노리즈키 경시를 비롯한 경시청이 나서게 됩니다.

린타로의 추리는 여러 번 좌절을 맛보며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미세한 단서에서 결정적인 추리를 끌어내는 특유의 재능을 무기삼아

아무도 예상 못한 진범을 찾아냅니다.

 

궁극의 SF녹스머신을 통해 노리즈키 린타로의 방대한 과학 지식에 질린 적이 있는데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미술, 신화, 심리학 등 인문-예술 분야에까지 이른

그의 지적 스펙트럼의 폭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조금은 어렵고 난해한 내용도 있어서 린타로는 물론 독자들에게도 두통을 유발하고 있지만

나름 소소한 재미도 있거니와 사건 전개와 절묘하게 맞닿아있는 내용들로 묘사돼있어

약간의 노력과 집중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현실에서나 픽션에서나 대부분의 범죄의 근원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인데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 그려진 탐욕은 아무리 픽션임을 감안한다 해도

그 흉악함과 수단, 방법에 있어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탐욕 자체가 일그러진 가족사와 결합될 때 그 악취는 몇 배로 강해지는데

노리즈키 린타로는 작정한 듯 출생의 비밀은 물론 가족 간의 불륜과 폭행 등을

거침없이 설정함으로써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석고상의 잘린 머리와 여자의 잘린 머리에 얽힌 비밀이 밝혀질 때쯤

독자는 미스터리가 해결되고 악이 응징됐다는 쾌감과 함께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무겁고 불편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풀기 어려울 정도로 꼬아놓았던 단서들을 후반부에 초고속으로 풀어내다 보니

이해하기 어렵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지점도 일부 있었지만,

어쨌든 노리즈키 린타로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동시에 아직 못 읽은 시리즈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여준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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