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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은총 ㅣ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평점 :
크리스마스 카드에나 등장할 법한 그림 같은 마을 스리 파인스를 무대로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른바 ‘범죄 없는 마을’로 꼽힌다면 캐나다에서 1,2등을 다툴만한 평화로운 곳이지만
스리 파인스는 1년 만에 또다시 끔찍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만, 1년 전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슬픈 마음들이 온 마을을 우울하게 잠식했었다면,
이번에는 마치 희생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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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가이자 디자이너인 CC 드 푸아티에는 스리 파인스에 터를 잡은 이후
거의 물과 기름처럼 스리 파인스 사람들과 격리된 채 살아왔습니다.
괴팍하고 사나운 악녀의 기운을 내뿜는데다 어리바리한 남편과 고도 비만의 10대 딸을
쥐 잡듯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며 스리 파인스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컬링 대회장 한복판에서 사망합니다.
관객과 컬링 선수로 가득했지만 정작 아무도 그녀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사고가 아닐까 했지만, 가마슈 경감은 치밀하게 준비된 살인임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가마슈 경감은 단서를 모으고, CC의 정체와 인간관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오히려 수사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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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쉽지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풍경과 개성 넘치는 착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마을,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임에도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따뜻한 느낌을 전해줬던 독특한 맛,
이웃집 아저씨 같은,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진심어린 멘토링으로 존경을 받는 가마슈 경감 등
‘스틸 라이프’가 남겨준 좋은 기억 덕분에 꽤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은총’은 제겐 산만하고, 난해하고, 지루한 느낌만 남겨줬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피살된 CC의 캐릭터가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는데,
그녀의 정체는 물론, 그녀가 왜 스리 파인스에 정착했는지,
그녀가 사이비 냄새가 진동하는 명상론을 기반 삼아 펼치려던 비즈니스의 실체는 무엇이며,
멍청한 남편과 뚱뚱한 딸에게 저지르는 악행의 근거는 무엇인지 등
독자를 납득시키고 공감시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끝까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언급되긴 했지만, 저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리 파인스의 괴팍한 시인인 루스 자도의 시(詩)를 비롯해서
몇 번을 되읽어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는 어려운 시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어떤 때는 그저 현학적인 수사 이상으로 읽히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렵고 귀찮아서 다시 읽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정말 그 시 안에 단서가 있다면, 그건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스 자도는 시인이니 그렇다 쳐도, 가마슈 경감을 비롯한 스리 파인스의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고전과 현대의 시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곤 합니다. 이 점도 납득 불가..)
단서들은 모두 암호처럼 모호했고, 사건 주위에는 형이상학적인 상징들이 넘쳐나는데,
문제는 가마슈 경감이 그 암호와 상징들을 꿰어 맞춰 해결점에 이르는 과정들 역시
객관적인 논리와 명료한 추리보다는 ‘계시’를 받은 듯한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지하곤 합니다.
덕분에 사건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해결됐지만,
엔딩은 깔끔하지도, 여운을 남겨주지도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건가’라는 생각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봤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남긴 호평을 보곤 또 한 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취향의 문제라고 마음 편하게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스틸 라이프’를 떠올려보면 작가와의 궁합 자체가 저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악평’에 가까운 서평을 쓰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루이즈 페니의 필력이 여전히 빛나는 지점들도 많았습니다.
뛰어난 능력과 따뜻한 마음씨를 소유한 가마슈 경감의 멋진 캐릭터라든가,
감성적인 가마슈를 든든하게 보좌하는 이성적인 경찰 보부아르와 라코스트의 매력,
민폐만 저지르다가 쫓겨났던 이베트 니콜이 재등장하면서 야기한 묘한 위기감,
가마슈에게 인정받아 꿈에 그리던 살인반 멤버가 된 로베르 르미외의 향후 행보 등
다양한 경찰 캐릭터는 ‘스틸 라이프’에 못잖게 강한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가마슈 경감을 향한 퀘벡 경찰청의 은밀한 정치적 공격이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졌는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가마슈 경감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그 음모를 주도한 세력들을 어떻게 박살낼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스틸 라이프’에서 빛나는 주, 조연으로 활약했던 스리 파인스의 주민들은
이번에는 사건의 외곽에 머무른 나머지 상대적으로 왜소한 역할만 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것처럼 느끼게끔,
그래서 그들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그들이 만든 크루아상을 먹고 싶게 만드는,
친근한 이웃으로서의 역할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시 문제는 피살된 의문의 여인 CC 드 푸아티에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좀더 선명한 캐릭터였다면, 또, 작가가 좀더 친절하게 그녀를 설명했더라면,
‘치명적인 은총’이 제게 이런 평을 받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세 번째 시리즈인 ‘가장 잔인한 달’을 비롯해서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모두 읽을 작정입니다.
루이즈 페니가 펼쳐놓은 스리 파인스의 매력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2의 CC 드 푸아티에를 만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