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2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외딴 섬에서 벌어진 3중 밀실 사건을 해결한지 1.

N대학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는

이번에는 교내 연구소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이한 밀실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성공적인 실험의 뒤풀이를 하는 실험실 부속공간에서 두 구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뒤풀이 참석자들이 지켜보고 있어 남의 눈을 피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은

수많은 가설과 추리 속에서 미제 사건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견학 차 실험실을 찾았다가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덕분에 사건 관계자가 되긴 했지만

사이카와는 애초부터 수사에 끼어들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흠모하는 니시노소노 모에가 물불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면서

사이카와 역시 불가능한 밀실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특히 니시노소노 모에가 끔찍한 위기에 빠지는가 하면

또다른 사체가 실험실에서 발견되자 사이카와의 추리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 ● ●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가 이끄는

이공계 미스터리’ S&M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보통 모든 것이 F가 된다S&M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모리 히로시가 처음 집필한 작품은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입니다.

 

모든 것이 F가 된다의 해설을 맡았던 세나 히데아키가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은 중요한 작품이지만

본 작품과 비교하면 수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라고 평한 반면,

이 작품의 해설을 맡은 오타 다다시는

“‘F’에 비해 이번 작품은 조금 놀라울 만큼 정통적인 본격 미스터리다.

그렇지만 얕잡아 볼 수는 없다. 그 논리성은 지극히 뛰어나다.

‘F’가 입맛에 맞지 않았던 독자도 이 작품은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순도 99%의 강렬한 자극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두 사람의 평은 각자 자신이 맡은 작품에만 충실한 해설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양쪽 평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차가운~’‘F’에 비해 외양이나 트릭의 수준에서 수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 미스터리의 본령에 가까운 뛰어난 논리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분명 ‘F’보다 확실하고 공감하기 쉬운 대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F’를 시리즈의 첫 편으로 결정한 작가와 출판사의 선택은

신선한 소재와 이공계 미스터리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개성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그에 비하면 차가운~’은 같은 밀실 트릭을 다루고 있지만

소재의 신선함보다는 추리의 논리적 전개에 더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고,

그러다 보니 독자들에게 가해지는 파괴력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기에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 영예를 ‘F’에게 양보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선함과 기발함도 좋지만 공감력을 좀더 중시하는 개인적인 기준 때문에

저의 경우 차가운~’에게 별 반 개 정도는 더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어딘가 심각하게 삐딱하고 4차원적이던 사이카와의 캐릭터는

차가운~’에서는 친근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캐릭터로 순화됐고,

띠동갑보다 어리면서도 사이카와에게 가열차게 대시하던 니시노소노 모에의 귀여움은

훨씬 더 적극적인 로맨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순간의 깨달음으로 비약적인 추리를 선보인 사이카와의 비현실적 천재성은 여전했고,

‘F’에서 사이카와에 필적한 추리를 보였던 니시노소노 모에는 약간 퇴보한 느낌을 보인 탓에

캐릭터의 진화라는 부분을 맛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마 애초 차가운~’을 첫 작품으로 썼다가 ‘F’ 이후의 작품으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오류(?)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이어 두 권의 작품을 읽은 탓에 본의 아니게 비교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읽고 모리 히로시에게 의문을 품은 독자에게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은 이후의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F’보다 좀더 고급스런 이공계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약간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선명한 논리와 현실적인 트릭, 비극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깔려있는 작품이기에

약간의 심심함을 넉넉하게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올해 안에 연이어 S&M 시리즈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두 작품을 통해 모리 히로시의 팬이 된 입장에서 후속작의 출간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철저히 문과적 인간인 제게 또다시 이과적 지식의 범람을 떠안기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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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F가 된다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1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외딴 섬의 최첨단 연구소에서 3중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지가 절단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마카타 시키는

14세 때 이미 세계 최고의 공학자로 인정받았지만,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다중인격으로 판명되어 풀려난 후

외딴 섬 연구소의 완벽한 밀실에서 15년째 격리된 채 연구에 몰두하며 살아왔습니다.

 

천재공학자 마가타 시키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세미나 여행 차 외딴 섬을 찾은

N대학 건축학과 사이카와 소헤이 교수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는

본의 아니게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덕분에 사건의 한복판으로 휘말립니다.

CCTV와 경비들의 완벽한 감시망,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과 함께 연구소에 머물던 모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정기적인 배편도 없는데다 연구소의 최첨단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외부와의 연락마저 두절되자

사이카와와 니시노소노 콤비는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트릭은 파헤칠수록 견고해보이고, 동기는 추정조차 곤란해지는데다,

범행은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하다는 암담한 결론만 반복될 뿐입니다.

 

● ● ●

 

소문으로만 듣던 명작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솔직한 느낌은

멍하다... 당혹스럽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나...? 등이었습니다.

대학입시 때 받은 수학과 과학의 참담한 점수가 떠올랐고,

노리즈키 린타로의 녹스머신을 읽은 후의 엄청난 두통도 새삼 기억났습니다.

 

이공계 미스터리라는 별명답게 이 작품 속엔 수많은 공학 지식이 등장합니다.

살해된 마카타 시키는 어린 나이에 천재 공학소녀로 인정받았었고,

외딴 섬 연구소는 1995년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주인공 사이카와는 건축학과 조교수면서 해박한 이공계 지식을 갖춘 모차르트적 인간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의 발단이나 추리, 그리고 해결과정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과적 지식이

철저하게 문과적 인간인 저에게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대목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이과적 지식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작품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미스터리라는 골격만 따지고 보면 독자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

모리 히로시의 신본격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인간의 불행, 탐욕, 운명 등 다양한 삶의 서사도 파란만장하게 녹아있고,

4차원처럼 보이는 두 명의 천재적 주인공의 맛깔난 캐릭터도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정기적인 배편도 없는 외딴 섬, 출입자체가 완벽한 통제 하에 놓인 연구소,

CCTV와 경비들이 24시간 감시하는 단 하나의 출입문을 가진 격리실 등

3중 밀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아무리 봐도 뚫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에 등장한 비극의 섬 츠노시마는

난이도만 놓고 보면 마카타 시키가 살해된 3중 밀실보다 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14살 때 부모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고, 다중인격이라는 판정까지 받은 마카타 시키의 삶은

천재로 태어난 이들이 겪는 모든 불행과 비극적 운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 15년을 밀실에 갇힌 채 모니터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었던 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처럼 주어진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해야 했던 점,

결국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지가 절단된 몸으로 만인 앞에 공개된 그녀의 최후 등은

기괴함과 우울함, 동정심 등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설정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최고 매력은 역시 두 명의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지극히 냉소적이며,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혐오하는 것은 물론

때론 헤어날 수 없는 자뻑에 빠져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으로 무장한 사이카와는

의외로 띠동갑보다 어린 니시노소노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귀여운 캐릭터입니다.

그의 추리 방법은 일면 지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면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엘러리 퀸이나 미타라이 기요시처럼 순간의 깨달음을 통한 비약적 해결이라는,

조금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면모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치밀한 추리순간의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사이카와는 방대하고 난해한 이과적 지식을 동원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독자들의 호불호를 갈리게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추리-깨달음-이과적 지식의 연결고리가 어쩐지 모호하다는,

필연적인 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이카와를 대놓고 흠모하는 스무 살 여대생 니시노소노 모에 역시 드라마틱한 캐릭터입니다.

명문가의 딸이지만, 어릴 적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단지 사이카와가 건축학과 조교수라는 이유만으로 건축학도가 된 특이한 인물입니다.

참혹한 사건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나름의 추리를 펼치는 강단 있는 면모도 매력적이고,

지칠 줄 모르고 사이카와에게 대시하는 사춘기 소녀 같은 귀여움도 눈길을 끄는 부분입니다.

10권까지 출간된 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에서 그녀가 어디까지 성장할지도 궁금하고,

사이카와와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을지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은 후의 당혹감이 너무 강해서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보니

예상대로 극과 극의 평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공계 미스터리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고,

어떤 분은 모호한 범행 동기나 애매한 마무리에 화가 난 분도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모리 히로시의 진가를 발견했다는 극찬을 한 서평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이야기가 모두 수긍이 가는 지적들입니다.

트릭과 캐릭터는 뛰어나지만, 모호하거나 납득하지 못한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읽은 입장에서 조언하자면, 어렵고 골치 아픈 이과적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미스터리 그 자체에 유의하면서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리 할 것이지만, 반드시 두 번은 읽어야

외딴 섬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의 진상을 좀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책읽기는 여전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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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6
나카마치 신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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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세계의 편집자 아스코는 추리작가 야규 데루히코로부터 독특한 기획을 제안 받습니다.

자신이 사건 정황을 다룬 문제편을 쓰고, 다른 작가가 탐정 역할을 맡아 해결편을 쓰면,

마지막에 자신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최종 해결편을 쓰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규의 원고가 실제 벌어졌던 살인사건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을 알게 된 아스코는

그가 왜 이런 원고를 자신에게 보냈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최종 해결편을 쓰겠다며 온천으로 간 야규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아스코는 그의 원고를 바탕으로 지금껏 미제 상태인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야만 야규가 자신에게 이런 이상한 원고를 보낸 목적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의외의 뜻이 설명돼있습니다.

천계(天啓) : 천지신명의 계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제목인데,

마지막 장을 덮고 보니 일면 이해가 되기도, 일면 아리송한 느낌이 더 강해지기도 했습니다.

운명 같은, 저지를 수밖에 없는, 누구도 거역하거나 알아챌 수 없는 살의랄까요?

막판의 강렬한 반전과 트릭을 맛보고 나면

살인자의 살의 자체가 정말 신이 허락한 것처럼 기가 막히게 구현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 출간된 나카마치 신의 모방살의가 깔끔하고 선명한 서술트릭을 선사했다면,

천계살의는 조금은 복잡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야 큰 그림이 이해되는 작품입니다.

트릭의 전모가 드러난 후에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책을 덮어놓고 앞서 벌어진 상황들을 찬찬히 되돌아봐야 했는데,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아하~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곤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플롯을 짜는데 다대한 시간을 들였다.”라고 고백했는데,

적잖은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살인사건 등을 감안하면,

이토록 복잡하면서도 완벽하게 조합된 설계도를 위해

작가가 얼마나 몸과 마음으로 고생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작가가 아무리 완벽하게 트릭을 꾸며놓았더라도

작품을 읽다 보면 반드시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 있기 마련입니다.

천계살의역시 제가 겪은 것만 치면 - 힌트나 다름없는 단서가 두 번 등장하는데,

명백한 위화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꼼꼼히 따지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후반부에 제가 느낀 위화감의 이유가 자세하게 설명되는 대목에서는

괜히 억울한(?) 느낌마저 들었는데,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트릭 자체가 워낙 견고하게 설정돼있어 정작 내용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못했는데,

실제 작품을 읽어 보면 내용을 언급 못 하는 서평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시 만나고 싶은 복간 희망도서로 선정되어 수십 년 만에 재출간된 것은 물론

각종 베스트셀러 차트를 석권한 나카마치 신의 저력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두 작품 밖에 못 읽었지만 나카마치 신이 쳐놓은 미스터리의 그물과 트릭의 향연을

아직 출간 안 된 나머지 살의 시리즈에서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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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 봐야겠다는^^

하나비 2015-10-20 22:03   좋아요 1 | URL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그장소] 2015-10-20 22:06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점찍어놓고....침 흘리는 ..중.^^
 
엠브리오 기담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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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브리오 기담은 오츠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괴담 전문지 ’()에 발표했던 단편 9편을 모은 작품집입니다. 이 작품에 부제를 붙인다면 로안과 미미히코의 기이한 여행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온천이나 식당을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를 집필하는 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조수(?)인 미미히코가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나선 길에 겪은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경험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즈미 로안은 직선으로 난 외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타고난 길치로 유명한데, 그를 따라가다 보면 같은 자리에서 며칠이고 계속 맴돌거나 산을 오르다가 바다에 이르는가 하면, 숲을 헤치다가 남의 집 마당에 이르곤 합니다. 로안의 조수인 미미히코는 어딘가 덜 떨어지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데다 조수 일로 번 돈은 전부 노름판에 갖다 바치는 대책 없는 한량입니다. 로안과의 여행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들 때문에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지만 노름빚을 대신 갚아주는 로안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로안의 불치병 같은 길치 증상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겐 공포심마저 자아내지만 로안을 잘 아는 미미히코에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괴이한 경우는 늘 있는 일이라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라든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런 건 늘 있는 일이다.”는 식으로 웃어넘길 뿐입니다.

 

물과 기름 같지만 미운 정까지 푹 들어버려 오래된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위험천만한 여행길에 겪은 경험들은 특별하다 못해 기이하고 끔찍합니다. 낙태전문병원에서 내다버린 한 낙태아의 기구한 운명(엠브리오 기담), 영원한 환생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의 파란 돌(라피스 라줄리 환상), 밤마다 죽은 자가 나타나는 온천(수증기 사변), 나무, 생선, , 벽지 등 모든 것이 사람 얼굴로 보이는 마을(끝맺음), 여행자의 눈에 착시를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40년 전에 무너진 다리(있을 수 없는 다리), 극한의 공포와 인육의 참상이 함께 한 여행담(지옥), 빗과 머리카락에 얽힌 섬뜩한 괴담(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등 결코 현실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경험들이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문장들 속에 녹아있습니다.

 

내용만 요약해놓고 보면 분명 잔인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인데, 읽는 내내 깃든 정서는 정반대로 슬프거나 따뜻한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오츠이치의 ‘ZOO’, ‘GOTH’, ‘암흑동화등에서도 그런 역설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있지만, ‘엠브리오 기담은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 공포와 애틋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록작이자 이즈미 로안의 프리퀄 에피소드인 ,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뒤섞인 구성 속에 첫사랑 이야기의 정서까지 녹아있어 괜히 울컥하고 뭉클한 느낌까지 건네줬습니다.

 

오츠이치의 천재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엠브리오 기담은 무궁무진한 그의 상상력과 매력적인 필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번역가는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오마주 형식으로 후기를 써봤다.”라고 격찬하면서 특별한 능력자 이즈미 로안과의 재회를 기대한다는 평을 남겼습니다. 저 역시 오츠이치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도 격하게 애정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야마시로 아사코의 새로운 작품을 꼭 다시 한 번 만날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혹시 오츠이치의 전작들이 불편하게 느껴진 독자라 하더라도 엠브리오 기담은 오츠이치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계기가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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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포수 이야기 낭만픽션 2
구마가이 다쓰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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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든 영상물이든 역사물 또는 시대물을 무척 좋아합니다.

거기엔 문명의 편리함도 없고 그저 느리고 무모한 일상만 잔뜩 있을 뿐이지만,

바로 그런 점이 인간의 날것 같은 감정이나 행위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품 가운데 인상 깊게 접한 작품들은 두고두고 몇 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곤 하는데,

전 장르를 통틀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가 그랬고,

김훈, 조정래, 임철우의 소설이나 20세기 초중반의 황량함을 그린 영미권 소설이 그랬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1914년부터 약 20여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일단 제가 좋아하는 시대물이라는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캐릭터, 감정, 스토리 등의 날것 같은 원시성만 놓고 보자면

앞서 언급한 어떤 작품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잔혹하면서 동시에 따뜻함을 지닌 작품입니다.

 

● ● ●

(약간 상세한 줄거리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호쿠 지방의 사냥꾼 마타기로 살아가던 마쓰하시 도미지는

지주의 딸 후미에와 사랑에 빠지지만 얼마 못가 마을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 몰립니다.

마타기로서 성공하겠다는 꿈까지 잃어버린 채 도미지는 광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숱한 우여곡절과 사건을 통해 다양한 인연들을 맺으며 살아가던 도미지는

결국 광부의 삶을 접고 다시 마타기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지만

자신을 내쫓은 자들이 여전히 쌍심지를 켜고 있는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광산에서 알고 지낸 고타로의 마을에서 사냥패를 꾸려 정착하기로 한 도미지는

한때 유곽에서 몸을 팔던 고타로의 누이 이쿠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온 어느 날, 첫사랑인 후미에의 편지가 날아들고,

도미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젊은 날 떠났던 고향을 찾아가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리고 평생을 천직으로 여겨온 마타기로서의 삶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됩니다.

 

● ● ●

 

비록 문명의 이기인 총을 사용할 때도 있지만, ‘마타기라 불리는 도호쿠 지방의 사냥꾼들은

기본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선사시대(?)의 원시 사냥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산신(山神)에 대한 경외심, 가족의 생사를 짊어진 의무감, 다른 사냥꾼들과의 경쟁과 충돌 등

그야말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연 속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생존을 위해 짐승의 피와 고기를 필요로 하는 냉혹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감정은 있습니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그리워하고, 질투하는...

하지만 섬세한 감정들조차 공격적이고, 직설적이고, 때론 폭력적으로 발산되곤 합니다.

요바이(밤중에 성교를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는 일본의 옛 풍습)가 횡행하고,

업둥이를 비롯한 숱한 출생의 비밀에 동성애와 근친상간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부모와 자식이, 또는 형제가 서로에게 날선 시선을 날리기도 하고,

그 시대에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진하고 깊은 사랑과 우정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감정의 원시성은 가혹한 도호쿠 지방의 자연환경에 기인합니다.

농사지을 땅조차 부족하고, 겨울엔 혹한과 폭설로 고립되는 그곳에서

남자는 마타기 외엔 달리 선택할 직업이 없고, 여자는 봉건적인 지위를 못 벗어납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좁디좁은 마을에서 집단의 폐쇄성은 강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부모자식간의 애증은 에두르지 않고 표현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근현대의 경계라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도미지의 일생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그 자체에 다름 아닙니다.

난산으로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마타기가 되고자 했지만,

한 여자와의 운명 같은 만남은 그의 평생을 쉴 새 없이 뒤흔들어놓고 맙니다.

잠시 원치 않는 광부의 삶을 살기도 했지만,

그곳에서도 도미지는 타고난 성실함과 사냥꾼으로서의 기질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여자와의 극적인 만남은 위태롭던 그의 삶을 안정시켜줍니다.

마지막에 마타기로서의 삶의 기로에 선 그가 산신을 만나기 위해 설산에 오르는 시퀀스는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압도적인 서사를 풀어냅니다.

 

뛰어난 사냥꾼 마타기사랑에 충실한 남자로 살아온 도미지의 삶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고 편안한 책읽기와는 거리가 먼 일이지만 가볍고 인스턴트 같은 이야기에 질린 독자라면

피부에 와 닿는 묵직한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줄 것입니다.

특히 남자 독자라면 이 책은 (현대의) 거세된 남자들을 위한 회복과 각성의 묘약이다.

남자가 본래 어떤 동물인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라는 아사다 지로의 해설의 의미가

오랫동안 각인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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