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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F가 된다 ㅣ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1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외딴 섬의 최첨단 연구소에서 3중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지가 절단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마카타 시키는
14세 때 이미 세계 최고의 공학자로 인정받았지만,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다중인격으로 판명되어 풀려난 후
외딴 섬 연구소의 완벽한 밀실에서 15년째 격리된 채 연구에 몰두하며 살아왔습니다.
천재공학자 마가타 시키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세미나 여행 차 외딴 섬을 찾은
N대학 건축학과 사이카와 소헤이 교수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는
본의 아니게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덕분에 사건의 한복판으로 휘말립니다.
CCTV와 경비들의 완벽한 감시망,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과 함께 연구소에 머물던 모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정기적인 배편도 없는데다 연구소의 최첨단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외부와의 연락마저 두절되자
사이카와와 니시노소노 콤비는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트릭은 파헤칠수록 견고해보이고, 동기는 추정조차 곤란해지는데다,
범행은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하다는 암담한 결론만 반복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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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으로만 듣던 ‘명작’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솔직한 느낌은
멍하다... 당혹스럽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나...? 등이었습니다.
대학입시 때 받은 수학과 과학의 참담한 점수가 떠올랐고,
노리즈키 린타로의 ‘녹스머신’을 읽은 후의 엄청난 두통도 새삼 기억났습니다.
‘이공계 미스터리’라는 별명답게 이 작품 속엔 수많은 공학 지식이 등장합니다.
살해된 마카타 시키는 어린 나이에 천재 공학소녀로 인정받았었고,
외딴 섬 연구소는 1995년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주인공 사이카와는 건축학과 조교수면서 해박한 이공계 지식을 갖춘 모차르트적 인간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의 발단이나 추리, 그리고 해결과정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과적 지식이
철저하게 문과적 인간인 저에게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대목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이과적 지식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작품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미스터리라는 골격만 따지고 보면 독자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
모리 히로시의 신본격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인간의 불행, 탐욕, 운명 등 다양한 삶의 서사도 파란만장하게 녹아있고,
4차원처럼 보이는 두 명의 천재적 주인공의 맛깔난 캐릭터도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정기적인 배편도 없는 외딴 섬, 출입자체가 완벽한 통제 하에 놓인 연구소,
CCTV와 경비들이 24시간 감시하는 단 하나의 출입문을 가진 격리실 등
3중 밀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아무리 봐도 뚫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에 등장한 비극의 섬 츠노시마는
난이도만 놓고 보면 마카타 시키가 살해된 3중 밀실보다 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14살 때 부모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고, 다중인격이라는 판정까지 받은 마카타 시키의 삶은
천재로 태어난 이들이 겪는 모든 불행과 비극적 운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 15년을 밀실에 갇힌 채 모니터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었던 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처럼 주어진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해야 했던 점,
결국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지가 절단된 몸으로 만인 앞에 공개된 그녀의 최후 등은
기괴함과 우울함, 동정심 등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설정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최고 매력은 역시 두 명의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지극히 냉소적이며,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혐오하는 것은 물론
때론 헤어날 수 없는 자뻑에 빠져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으로 무장한 사이카와는
의외로 띠동갑보다 어린 니시노소노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귀여운 캐릭터입니다.
그의 추리 방법은 일면 지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면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엘러리 퀸이나 미타라이 기요시처럼 ‘순간의 깨달음’을 통한 비약적 해결이라는,
조금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면모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치밀한 추리’와 ‘순간의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사이카와는 방대하고 난해한 이과적 지식을 동원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독자들의 호불호를 갈리게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추리-깨달음-이과적 지식의 연결고리가 어쩐지 모호하다는,
필연적인 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이카와를 대놓고 흠모하는 스무 살 여대생 니시노소노 모에 역시 드라마틱한 캐릭터입니다.
명문가의 딸이지만, 어릴 적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단지 사이카와가 건축학과 조교수라는 이유만으로 건축학도가 된 특이한 인물입니다.
참혹한 사건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나름의 추리를 펼치는 강단 있는 면모도 매력적이고,
지칠 줄 모르고 사이카와에게 대시하는 사춘기 소녀 같은 귀여움도 눈길을 끄는 부분입니다.
10권까지 출간된 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에서 그녀가 어디까지 성장할지도 궁금하고,
사이카와와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을지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은 후의 당혹감이 너무 강해서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보니
예상대로 극과 극의 평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공계 미스터리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고,
어떤 분은 모호한 범행 동기나 애매한 마무리에 화가 난 분도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모리 히로시의 진가를 발견했다는 극찬을 한 서평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이야기가 모두 수긍이 가는 지적들입니다.
트릭과 캐릭터는 뛰어나지만, 모호하거나 납득하지 못한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읽은 입장에서 조언하자면, 어렵고 골치 아픈 이과적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미스터리 그 자체에 유의하면서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리 할 것이지만, 반드시 두 번은 읽어야
외딴 섬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의 진상을 좀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책읽기는 여전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