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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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의 한 스포츠매거진의 시드니 올림픽 특별취재원 자격으로

호주를 방문하고 쓴 여행기이자 올림픽 관전기라고 해서

처음엔 하루키 비즈니스가 이젠 그의 여행기나 스포츠 관전기까지 확장됐나, 라는

약간의 의구심(?)과 얄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눈으로 본 호주는 막연하게 상상하던 낭만적인 여행지와는 확연히 달랐고,

올림픽 관전기 역시 개성과 현장감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묘사들 덕분에

여느 여행기나 스포츠 해설보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지루하고 재미없는 개막식에 대한 비판,

다국적 기업들과 돈에 의해 움직이는 올림픽의 상업주의적 행태,

TV중계에선 맛볼 수 없던 경기 전후의 여백이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단상을 읽다 보면

, 올림픽을 이렇게 경험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인류의 본능인 투쟁심을 다스리기 위한 김 빼기를 위한 대리 투쟁의 장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평화의 제전으로 불리는 올림픽의 양면성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가 하면,

메달이라는 속세적 목표를 위해서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의 구현을 위해서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전력을 다하는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존경심을 갖고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상업적인 흥밋거리, 잔혹한 승부의 세계, 의외의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감동,

거기에 올림픽의 이면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각까지 골고루 갖춘 하루키 식 에세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박동희 기자의 스토리와 감동을 지닌 프로야구 기사를 읽는 느낌이랄까요?

 

그의 호주 여행기는 좀더 특별했습니다.

평범한 여행객들은 웬만해선 발길을 들이지 않는 호주의 양지와 그늘을 골고루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호주의 속살을 공짜로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여행기의 철칙이 남들 가는 곳에 가지 말고, 남들 하는 것을 하지 말자.”라는데

읽다 보면 그 철칙이 엄격할 정도로 지켜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풍광 소개에 그치지 않은 그의 문장은

몹시 젊다 싶다가도 동시에 신비하게도 노쇠한 분위기가 도는 나라의 여러 면을 비춥니다.

때론 돌직구 같은 톤으로 이질적이거나 불편해 보이는 관습과 문화,

정크푸드로 가득한 먹거리 등을 대놓고 까기도 하지만,

때론 가도 가도 끝없어 보이는 광활한 호주의 규모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담대함에 대한 순수한 놀람을 거듭 언급하기도 합니다.

특히 후반부에 특별코너라는 부제로 실린 무라카미 사관에 의한 호주 역사

짧은 분량이지만 호주의 시작과 성장기, 그리고 현재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던 대목입니다.

 

호주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느긋함과 열정, 올림픽의 여러 단상들로 채워진 시드니!’

어떤 작가도 시도하기 쉽지 않은 낯선 장르의 작품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겠어?”라는 선입견을 주기 쉬운 형식이지만

하루키는 다분히 반골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만의 따뜻한 시각을 통해

남반구의 이국에서 보낸 스무날 가까운 특별한 날들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에서 또다시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하루키가 그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개인적으로 하루키가 한국에서 열리는 (다른 형식이라도 좋으니) 대형 이벤트를

이런 형식으로 집필한다면 어떤 글들이 쏟아져 나올까, 무척 궁금해집니다.

 

여전히 출간 소식이 기다려지는 그의 작품은 소설이 분명하지만

2014년에 출간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에 이어

하루키의 특별한 에세이를 읽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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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블랙 로맨스 클럽
제인 니커선 지음, 이윤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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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화 푸른 수염은 웬만한 연쇄살인극에 못잖은 잔혹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지녔습니다.

이 동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역시

모티브가 된 동화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스토리로 짜인 작품입니다.

 

● ● ●

 

가난하지만 활달하고 그 또래에 어울리는 호기심과 욕망을 지닌 17살 소녀 소피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부이자 후견인인 드 크레삭의 초청으로 그의 저택을 방문합니다.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1855년의 미국 남부 미시시피에서

드 크레삭은 외부와 고립된 채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영국의 수도원을 통째로 옮겨 와 저택으로 삼을 만큼 엄청난 거부입니다.

소피아는 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드 크레삭의 매력과 그가 제공한 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그에게 네 명의 부인들이 있었고,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소피아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종잡을 수 없는 감정기복, 독재자 같은 절대 권력의 남발,

교회나 이웃 등 그 누구와도 접촉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무리한 요구 등

드 크레삭은 날이 갈수록 소피아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숲에서 만난 목사에게 특별한 감정까지 갖게 된 소피아는

자신에게 청혼한 드 크레삭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며 저택을 떠날 것을 선언하지만,

협박이나 다름없는 엄포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드 크레삭에게 벗어나기 위해 네 명의 전 부인들의 비밀을 캐기로 마음먹은 소피아는

절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폐허가 된 예배당을 찾으면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 ● ●

 

흠모, 집착, 열애 등 다양한 형태의 로맨스가 등장하는데다

비명에 간 네 명의 전 부인의 비밀을 파헤치는 후반부의 설정들 덕분에

로맨스 소설 또는 로맨틱 스릴러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잔혹동화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호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10대지만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착한 막내딸이기도 한 소피아,

한때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악마의 기운을 발산하는 듯한 엄청난 저택,

저택의 주인이자 외부와 고립된 채 자신의 영역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드 크레삭,

그리고 다국적 식구들 - 영국인 가정부, 중국인 집사, 인도인 수발하인, 프랑스인 요리사 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동화적 설정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전인 동화 때문에 드 크레삭의 네 명의 전 부인들의 비밀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녀들의 캐릭터는 제각각이어서 순종적인 여자도, 반항적인 여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붉은 빛을 띠는 머리카락의 소유자들이었고

자살, 병사, 실종 등 어딘가 미스터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소피아에게 처음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점차 자매들이라 여기고 싶을 만큼 공통분모를 가진 비극적인 동지애를 불러일으킵니다.

소피아는 저택에 남아있던 그녀들의 머리카락으로 팔찌를 만들고 벽걸이 융단을 수놓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 크레삭의 다중인격적이고 소시오패스적인 기질로부터 도망침과 동시에

소극적이지만 그녀 나름의 저항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던 저택의 주인이자 거부인 드 크레삭이

광기 어린 소시오패스라는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은 아주 천천히, 잔혹하게 묘사됩니다.

감정의 극심한 기복을 보이면서도 그는 소피아를 조근조근 짓밟기 시작합니다.

폭언을 퍼부었다가도 능숙하게 위로하는가 하면,

색욕을 드러냈다가도 어느 새 젠틀한 신사로 돌아옵니다.

옥탑에 갇힌 공주처럼 소피아를 외부와 철저히 단절시켜놓았다가도

곧 방문할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특별 외출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소피아는 드 크레삭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혐오하다가도 동정하게 되고, 도망치고 싶다가도 보살펴주고 싶어지고...

그리고 그러는 사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그것도 미시시피라는 미국 남부를 무대로 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쁘고 잔혹하고 폭력적인 느낌을 주곤 합니다.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는 그런 느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풍광이나 인물에 대한 작가의 디테일한 묘사들 덕분에 그런 느낌들이 더욱 고조되는데,

이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 가운데 디테일한 묘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다

소피아의 공포, 드 크레삭의 만행 등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되다 보니

어지간한 독자들이라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구조의 이야기입니다.

번역자 역시 좀 힘들더라도 1/3까지만 참으면 그 뒤론 진가를 맛볼 수 있다.”라는 내용의

번역 후기를 남겼을 정도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참아야 하는 지점이 1/3이 될 수도 있고, 2/3가 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심하게 디테일한 묘사는 이 작가만의 고유한 개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법 호불호가 갈린 책이긴 한데, 낯선 시대를 무대로 한 잔혹동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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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된 여자
엘리자베스 L. 실버 지음, 신상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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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살인죄로 사형수가 된 노아 P. 싱글턴은 6개월 후 사형집행이 예정돼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희생자의 어머니이자 거대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인 말린 딕슨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사형 반대청원을 넣겠다며 10년 전 사건 당일의 진실을 설명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말린 딕슨과 함께 온 신참 변호사 올리버는 노아가 감추고 있는 사실이 있음을 확신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아는 10년 전 법정에서도 그랬듯이 입을 굳게 다뭅니다.

노아는 올리버가 갖고 온 공판기록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전말을 회상하고,

동시에 나름의 회고록, 즉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진실을 한 줄씩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 ● ●

 

태어난 후 한시도 평탄한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된 한 여자의 드라마 같은 일생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사형수 노아의 회고,

죽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노아를 용서하려는 진짜 이유를 밝히는 말린 딕슨의 고백,

노아와의 거듭된 면회를 통해 1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캐려는 올리버의 노력이 그것입니다.

 

보통 사형수와 변호사가 만나는 이야기라면 극적인 반전을 통해 무죄를 입증하거나

최소한 사형제도에 관한 논쟁을 펼쳐 사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입니다.

사형수는 어떻게든 진실을 위한 단서를 기억하려 애쓰고,

사형수를 돕는 변호사는 거대한 권력이나 악에 맞서 사방팔방 노력을 경주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형수가 된 여자는 그런 비현실적이고 상업적인 전개 대신

죄와 벌이라는, 조금은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난해하거나 어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행한 출생과 성장, 한순간에 삶을 추락시킨 임신과 낙태,

23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와의 재회와 그 재회가 불러온 끔찍한 살인사건,

과잉보호 속에 키운 딸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비극 등

다분히 막장에 가까운 캐릭터와 사건들이 등장하여 내내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왜 사형수 노아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감형이나 사형중지를 애걸하지도 않느냐는 점입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분명 억울한 사연이 있을 법한데,

, 정말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왜 노아는 사형집행을 6개월 앞둔 지금도 저렇게 냉소적이고 쿨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만, 노아가 회고하는 자신의 일생은 조금은 지루하게 읽히는 지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최후까지 감춘 진실을 알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대목입니다.

 

딸을 살해한 노아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면서 실제로는 다른 속셈을 지닌 말린 딕슨의 계획도

독자에게 끝까지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안겨주는데,

후반에 노아의 회고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말린 딕슨을 한편으론 악녀로,

또 다른 한편으론 딸을 잃은 비극적인 어머니로 만듦으로써

독자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사형수가 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형제도에 관한 고지식한 논쟁을 다룬 이야기도 아니지만,

한 여자의 굴곡진 일생과 사형수가 되기까지 벌어진 기막힌 사연들에 대한 서사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다양한 여운을 남겨줍니다.

어딘가 모호하고 작위적으로 오픈된 듯한 엔딩이 아쉽긴 하지만

묵직한 비극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기억에 남을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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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옳다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 / 푸른숲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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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구걸을 하며 삶을 이어온

누구를 타깃으로, 어떤 말을 꺼내면 구걸에 성공하는지 정확히 아는 소녀였습니다.

어른이 되어 유사성행위로 생계를 꾸리게 됐을 때는

어떤 말과 어떤 표정, 어떤 분위기가 남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

그래서 그들을 단골로 확보할 수 있는지를 아는 유능한 창녀가 됐습니다.

3년의 유사성행위로 손목에 이상이 생긴 는 이번에는 사이비 점쟁이의 길에 나섭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일에 능숙하던 는 무난히 그 일에 적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의 고객 수전 버크를 만납니다.

빅토리아 풍의 저택에 살며 의붓아들과 트러블을 겪고 있는 여자.

는 그녀를 통해 큰돈을 도모하지만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불안한 기운을 느낍니다.

명백히 고의적인 악의와 소시오패스 기질을 내뿜는 의붓아들 마일즈의 언행은 물론,

꼬리가 잘린 고양이, 벽에 목 매달린 인형, 피가 배어나오는 벽,

게다가 100여 년 전 저택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기록 등으로 인해

더는 저택에 머무를 자신이 없어질 무렵, 마일즈는 에게 수전의 진실을 폭로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누가 사악한 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의외의 사태에 휘말리면서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가제본 서평단에 뽑혀 책을 받아보곤 화들짝 놀랐습니다.

너무 얇아서... 본문 내용이 정확히 83페이지...

가제본 서평단이라 단편집 가운데 한 편만 샘플로 읽어보라고 보내준 것인가, 했는데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봤더니 정말 그 한 편으로 된 작품이었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이라 큰 기대를 했는데 엽편소설 같은 한 편 뿐이라 정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83페이지의 분량에 이만한 이야기를 담아낸 그녀의 필력에 또한번 놀라기도 했습니다.

 

분량이 짧은 탓도 있지만, 처음 책읽기를 끝낸 후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분명 길리언 플린인데, 이 묘한 위화감은 뭐지?

그래서 딱 세 번을 더 읽었습니다. (그래봐야 2시간도 안 걸렸지만요.^^)

그랬더니 그제야 작품의 맛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말을 안 뒤에 더 생각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책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미스터리, 호러, 공포, 복수 등 다양한 장르물 코드는 물론

선과 악, 진실과 거짓말, 도덕과 부도덕 등 진지한 서사들이 함께 깔려있는 작품입니다.

길리언 플린답지 않은 영국식 블랙유머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 새 불길한 빅토리아 풍 저택으로 말려들어간 뒤 소시오패스 같은 캐릭터가 등장하자

마치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모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간결한 이야기는 마치 프롤로그만 보여주다 만 것처럼

딱히 엔딩이랄 것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끝나는데,

(말하자면 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 ‘몸을 긋는 소녀의 오프닝만 읽은 느낌이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이후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그를 통해 정직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온 ’,

저택의 불길한 기운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한 의문의 여인 수전 버크,

앞으로 소시오패스로 대성(?)할 자질을 갖춘 15살 소년 마일즈 등

매력적인 캐릭터와 설정들을 길리언 플린이 이대로 덮어두진 않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을 고작 83페이지 밖에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예상치 못한 특별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반가움이 교차한 작품입니다.

(별이 네 개밖에 안 된 이유는 순전히 분량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저 빠른 시일 안에 그녀의 장편 신간 소식이 들려오기를 고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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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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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한 노작가가 자신의 환갑을 기념하여 추리 문단의 제자들을 미로관으로 초대한다.

미로로 이루어진 괴이한 지하 저택으로 모여든 여덟 명.

그러나 노작가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그의 유언이 전해진다.

닷새 동안 미로관에 머물며 최고의 추리소설을 쓴 사람에게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것.

스승의 막대한 유산을 둘러싸고 작가들은 서로 경쟁자가 되어

각자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쇄살인사건.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에서 인용)

 

미로관의 살인은 액자소설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당시 연쇄살인사건 현장에 있던 누군가1년이 지난 후 그때 상황을 재구성하여

추리소설로 집필했고,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며 보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에필로그를 통해 누군가의 정체는 물론 사건의 진짜 진상을 밝혀냅니다.

위의 줄거리는 누군가가 집필한 추리소설의 내용입니다.

 

앞선 십각관의 살인이나 수차관의 살인에 비하면 사건은 빠르고 간결하게 벌어집니다.

범인이 누군지 추측해보기도 전에 희생자가 연이어 발견되고,

노작가의 초대로 미로관을 방문한 시마다 기요시는 발군의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합니다.

 

다음엔 누가 희생될 것인지, 범인은 과연 우리들 중 누구인지,

극단의 긴장감과 의문을 남기며 이야기가 전개됐던 앞선 두 작품에 비하면

사건의 발생 자체는 좀 싱겁다 싶을 정도로 심플합니다.

하지만 반전의 묘미라든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트릭의 맛만큼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으며, 어떤 부분에선 오히려 뛰어나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미로관의 살인은 독자에게 꽤 많은 힌트를 곳곳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놓고 힌트를 주는데,

그 중 진짜 힌트로 작동하는 것도 있지만, 한 번 더 꼬이는 힌트도 있습니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드는 대목은 후반부에 반드시 트릭의 열쇠로 활용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부분을 꼼꼼히 메모해놓는다면

어쩌면 시마다 기요시보다 먼저 범인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혔던 미노스 미궁을 모티브로 한 기괴한 미로관,

더구나 참극의 무대였던 십각관과 수차관을 설계한 나카무라 세이지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충격적인 살인방법, 밀실의 트릭, 다잉 메시지, 거듭되는 반전 등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서사의 크기는 작더라도 쫄깃함만큼은 앞선 두 작품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내용을 별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천천히 읽어도 하루면 완독할 수 있는 작품이니 직접 그 매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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