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는 이름이 없는 자
르네 망조르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런던을 무대로 엽기적인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이 희생 제물들이 이제는 이름이 없는 자의 혼령을 달랠 수 있기를”이라고 적힌 종이와 함께
개복된 상태에서 장기가 사라진 채 특정 종교의 의식에 따라 수습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문제는 범인이 다 제각각인데다, 피해자들의 가족이거나 연인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며,
사소한 전과조차 없고, 장기를 적출하는 외과적 기술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건 이후에는 극심한 불면증과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보입니다.
매케나 경감과 FBI요원인 달리아 라임스는 범인들을 조종한 배후인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아무런 단서도, 범행 동기도 알아내지 못한 채 연이은 희생자의 등장만 지켜볼 뿐입니다.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내 추격전까지 펼치던 두 사람은
뒤늦게야 희생자들의 공통점과 범인의 동기를 알아내곤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 ● ●
희생자들의 참혹한 시신이나 범인의 범행수법에 대한 초반부 묘사를 읽으면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를 비롯한 의사 3부작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잔혹함에 관한 한 그야말로 손에 꼽을만한 작품들인데,
이 작품 역시 그에 못잖은 엽기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비록 자신이 믿던 종교의 의식에 따라 경건하게 수습됐지만,
장기를 잃어버린 희생자들의 시신은 심연 같은 구멍만 남긴 채 처참히 버려져있습니다.
출발부터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서 작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비밀종교의 의식, 장기밀매단의 음모, 몽유병이나 최면에 의한 범죄 등...
하지만 희생자들은 물론 범인들 사이에도 아무런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매케나 경감과 달리아 요원의 수사는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중반부에 이르러 그들이 알아낸 범행수법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진 않겠지만
이미 그 지점에서 범인의 동기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
이후의 이야기 전개가 그리 새롭다거나 충격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갈등과 화해의 경로를 걷는 영국 경찰 매케나 경감과 FBI요원 달리아의 캐릭터,
두 사람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불행한 가족사,
범인의 윤곽을 잡아가면서 롤러코스터처럼 위기와 반전을 반복하는 구성 등이
적당한 냉소와 정곡을 찌르는 비유로 버무려진 맛깔난 문장들로 묘사된 덕분에
긴장감과 유쾌함을 겸비한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건은 전례 없이 참혹하게 설정됐지만, 정작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이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 겪는 극한의 절망감과 그리움’입니다.
반골 기질과 뛰어난 수사능력을 겸비한 매케나 경감이지만
그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아내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인물입니다.
아내의 방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채 그녀의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적출한 범인들이
뒤늦게 자신의 만행을 기억해내곤 오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매케나 경감은 더욱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하도록 범인을 조종한 배후인물에 대한 증오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미국 대사관의 입김으로 수사에 합류한 FBI요원 달리아 역시
아버지가 남긴 트라우마로 인해 감정 없는 육체적 관계만 고집해왔지만
런던에서 만난 멋진 변호사 덕분에 오랜만에 예상치 못한 감정의 흔들림을 맛봅니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그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면서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 겪는 절망감’과 ‘참혹한 연쇄살인’을 조합함으로써
작가는 사건의 진상과 범인을 쫓는 스릴러의 재미를 배가시킨 것은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독자의 기대를 벗어난(?) 엔딩을 위한 기초공사를 탄탄히 해놓았습니다.
독자는 사건이 해결됐다는 쾌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전혀 상반된 감정을 맞이해야 합니다.
중반부 이후 예상대로 이야기가 흘러간 탓에
엔딩마저 평범하고 밋밋했다면 실망감이 적잖이 들었겠지만,
작가가 제대로 준비해놓은 마지막 한 방 덕분에 묵직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범인의 동기에 관한 것인데,
이는 독자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충분히 공감한다’는 의견과 ‘좀 과장됐다’는 식으로 갈릴 것 같은데,
저의 경우에는 3:7 정도였습니다.
이 작품은 스포일러가 될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피하면서 쓰다 보니 무척이나 모호한 글이 돼버렸습니다.
재미와 여운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실망보다는 만족을 느낄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니 기회가 되면 읽어보실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