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절규
하마나카 아키 지음, 김혜영 옮김 / 문학사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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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츠코라는 한 여자의 롤러코스터 같은 비극적인 삶을 그린 드라마였는데,

누구의 삶이든 몇 시간 분량으로 압축해놓고 보면 파란만장하지 않은 경우가 없겠지만,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로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그녀의 인생을 보면서

개인과 사회의 문제, 운명과 선택의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침묵의 절규의 주인공인 스즈키 요코는 언뜻 마츠코를 떠올리는 인물입니다.

좀 가볍게 표현하자면 이 세상 모든 불행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인생이라고 할까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에게 무시당하며 성장했고,

아버지의 빚과 동생의 죽음으로 가족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도쿄로 가고 싶은 갈망이 좌절되면서 소도시에서의 그녀의 삶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독립여성의 행복이란 꿈을 이루기 위한 그녀의 모든 선택은 최악의 결과만을 낳습니다.

잠시 맛본 달콤한 순간을 잊지 못해 몸과 마음까지 망쳐가며 욕망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끝에 연쇄살인에 연루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내용만 얼핏 봐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전형적인 사회파 미스터리의 룰에 충실합니다.

초 호황기에서 버블 시대를 거쳐 동일본 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현대사에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요코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버블 경제의 몰락은 요코의 인생과 가치관을 뒤흔드는 가장 큰 계기가 되고,

평범한 소도시 출신의 소녀를 나락으로 떠밀어 극단적인 욕망의 화신이 되게끔 만듭니다.

돈으로 자아를 선택할 수 있고, 돈으로 미래를 마음껏 설계할 수 있다는,

그럼으로써 숙명처럼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요코의 신념은

그녀의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좀더 구조적인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시대적 산물입니다.

 

작가는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한 돌직구 식 미스터리 대신 무척 독특한 서술방식,

즉 세 가지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다가 엔딩에서 통합시키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메인 이야기는 라는 2인칭 시점의 서술로 요코의 일생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동시에, 고독사 사체로 발견된 요코의 죽음을 추적하는 여형사 아야노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 요코와는 무관해 보이는 듯한 미제 살인사건의 관련자 진술을 막간처럼 등장시킵니다.

이런 구성은 단지 독특한 형식미 또는 무의미한 멋 부림이 아니라

막판 반전을 위한 절묘한 장치로 활용되어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데,

아동문학작가 출신인 중고 신인의 저력과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세 가지 시점의 서술이 번갈아 진행된 탓에

가끔 같은 상황에 대한 중복 묘사가 등장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사회적 이슈와 재미를 잘 결합시킨 완성도 높은 대중 미스터리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좀 과한 폭력성과 선정성에 불편한 독자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작가의 불가결한 선택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일본에서도 주목받는다는 하마나카 아키의 신작을 곧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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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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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다운 리버이후 두 번째로 만난 존 하트의 작품입니다.

워낙 이야기의 스케일도 크고, 인물들 사이에 얽힌 관계들도 복잡해서

줄거리를 정리하기 쉽지 않은 대작이지만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 ● ●

 

버려진 아이들의 집, 아이언 하우스에서 동생 줄리앙을 대신해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그곳을 도망쳤던 마이클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돼있습니다.

그는 조직을 떠나 연인 엘레나와의 새롭고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조직은 엘레나는 물론 오래 전 헤어진 동생 줄리앙까지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줄리앙을 구하기 위해 그를 입양했던 상원의원의 저택을 찾은 마이클은

줄리앙의 새어머니 아비게일과 그녀의 보디가드 제섭을 통해

아이언 하우스의 악몽이 아직도 줄리앙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저택에서 연이어 의문의 변사체가 발견되고,

조직의 손길이 줄리앙 가까이까지 다가오면서 마이클은 위기에 빠집니다.

연인 엘레나와 동생 줄리앙을 지키기 위해 마이클은

조직과의 전쟁은 물론 줄리앙의 살인혐의를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상도 못했던 자신과 줄리앙의 출생-입양-성장기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마이클은 크나큰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 ● ●

 

그 어느 작품보다 폭력에 관한 묘사가 끔찍하고 디테일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이후

이만큼 피와 살과 뼈가 날아다니는 장면들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폭력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폭력, 약한 또래에 대한 악의적인 집단 폭력,

탐욕에 기인한 마피아 식 조직폭력 등이 그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이언 하우스가 그저 오락용 폭력으로 포장된

선정적이고 속된 작품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분명 폭력은 독자에게 불쾌한 느낌이 줄 정도로 날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위험할 정도로 폭력과 밀착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마이클에게 폭력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고,

줄리앙에게 폭력은 세상에게 소통 당하는일방적이고도 유일한 방식이었습니다.

마이클이 조직의 킬러가 되어 몸과 마음에 깃든 폭력의 힘으로 살아왔다면,

줄리앙은 상원의원의 양자가 되어 저택의 후계자가 돼서도

여전히 유년기의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분열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 있는 인물들 역시 온통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

또는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됐거나, 가해자였다가 피해자가 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때론 스릴감을, 때론 불쾌감을 느끼며 폭력의 서사를 읽어나가다가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막연하게만 짐작했던 폭력의 진짜 위력,

즉 인간 자체를 망가뜨리고, 인간성을 변이시키고, 의식을 분열시킨 끝에

주변을 완벽하게 오염시켜버리는 물리적 현상 이상의 힘을 인식하게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완치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폭력의 가공할 힘과 함께

폭력을 통해서만이 맛볼 수 있는 광기에 가까운 쾌감의 정체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폭력물에 가까운 스토리지만

아이언 하우스는 픽션을 이용한 폭력에 관한 르포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더불어 아이언 하우스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앞서 읽은 존 하트의 다운 리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마이클과 줄리앙의 유년기를 둘러싼 비밀들은

작품 속 인물들은 물론 독자들까지 혼란을 느낄 정도로 복잡하고 참혹합니다.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들,

또 알게 됐지만 새로운 트라우마를 만들어낼 만큼 고통스러운 내용이라

당사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알려서는 안 될 진실들이 잇따라 밝혀집니다.

이 모든 짐을 오롯이 혼자 짊어지게 된 마이클의 고뇌는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계속 됩니다.

 

적잖은 분량이지만 워낙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기 때문에

주말이라면 하루 안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생생한 폭력의 힘과 등장인물들이 겪는 상처들로 인해 마음이 수시로 무거워지다 보니

어쩌면 중간에 한 번쯤 휴식을 취하는 책읽기가 더 바람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하트를 좋아한다는 것은 스스로 마조히스트 취향이라고 고백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안 읽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작가랄까요?

아직 그의 대표작 라스트 차일드를 읽지 못 했지만,

왠지 제목만으로도 아이언 하우스의 충격이 몇 배는 느껴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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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집 스토리콜렉터 33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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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오역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집에도 무서운 것은 있다정도로 번역되는 원제 (どこのにもいものはいる)대로

이 작품에는 무서운 것이 존재하는’ 5개의 집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집에는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서로 다른 괴이 현상과 그 주체가 등장합니다.

2000년 전후, 새로 지은 단독주택의 벽지 속에 존재하는 괴존재,

1930년대, 인적 없는 외딴 대저택에서 목격된, 아이들만 납치한다는 여인 와레온나,

1970년대 말, 밤마다 연립주택 지붕을 기거나 날뛰는 괴노파 또는 비어있는 옆집의 주민,

1990년대, 사이비종교의 근거지인 단독주택을 장악한 마력의 코우시 님,

그리고 메이지 말기, 지방 유력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일종의 초능력자 요치 등

공포를 자아내는 괴이 현상과 괴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일기, 속기록, 체험담 등 다양한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괴담의 집은 앞서 출간된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의 총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나 분위기, 소품이나 도구, 괴이 현상과 괴존재 등 거의 전 분야에서

노조키메는 물론 사관장백사당을 비롯한 작가 3부작의 향기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미쓰다 신조는 팬이자 편집자인 미마사카 슈조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어쩐지 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두 가지 괴담을 접합니다.

이후 미마사카로부터 두 개의 괴담을 더 받아보게 되는 한편,

스스로 앞의 괴담들과 비슷한 느낌을 발산하는 한 개의 괴담을 찾아냅니다.

모두 5개의 괴담이 차례로 전개되는 가운데,

미쓰다 신조와 미마사카 슈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막간에 등장하여

5개의 괴담 사이의 비슷한 점, 그러니까, 시간이든 장소든, 괴이 현상이든 괴존재든,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유사한 공포를 자아내는 공통점을 찾기 위해 토론을 벌입니다.

 

미쓰다 신조는 전작인 노조키메프롤로그에서 이런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는 중에 평소에는 느끼지 않을 시선을 빈번하게 느끼게 된다면,

거기서 이 책을 덮기를 권합니다. 단순한 기분 탓이겠지만, 만일을 위해서입니다.”

 

이번에는 소리에 조심하라는 충고를 미리 던져줍니다.

읽는 동안 들은 적 없는 기묘한 소리가 들리면 일단 이 책을 덮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독자를 위한 작가의 서비스임을 알면서도, 마냥 무시하지만은 못할 섬뜩한 경고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사관장백사당을 읽은 지 얼마 안돼서 그렇겠지만,

소리로 전해지는 공포는 누군가의 엿보는 시선보다 더욱 두렵게 느껴졌고,

괴담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의성어들은 환청처럼 귓가에서 맴돌기도 했습니다.

 

미쓰다 신조와 미마사카 슈조는 괴담 애호가이자 수집가로서

자신들의 촉이 지시한대로 5개의 괴담 사이의 공통점, 유사점을 캐내려 애씁니다.

하지만 애초의 직감과는 달리 공통점이나 유사점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미쓰다 신조 식 호러+미스터리 하이브리드 서사가 등장합니다.

미쓰다 신조는 방대한 자료조사와 탐문을 통해 5개의 괴담을 꿰뚫는 공통점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갖췄음에도, 이 결론 역시 일정부분은 추론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고,

앞선 작품들에서처럼 이야기는 깔끔한 엔딩 없이 호러 그 자체로 마무리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른 뒤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애매하고 기분 나쁜(?) 엔딩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미쓰다 신조 호러물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데,

저의 경우, 공포나 호러 취향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미쓰다 신조의 작품에는 끌리는 편입니다.

오히려 깔끔한 엔딩이 아니라서 더 매력적이고,

호러 그 자체로서 마무리된 이야기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앞선 출간작들에서는 대부분 별 4~5개 정도의 만족감을 느끼곤 했는데...

 

이번 괴담의 집만큼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많이 느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힘이 노조키메사관장’, ‘백사당에 비해 약했던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비슷한 톤과 소재의 작품이 잇달아 출간된 것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괴담의 집노조키메사이의 유사성은 새로운 괴담을 기대했던 그의 팬들에게는

무척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론 작품 간의 유사성이 매력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자주, 과하게 반복되다 보니 아무래도 피로도가 높아졌다고 할까요?

여전히 그의 괴담이라면 다른 작품들보다 먼저 구해보고 싶어지겠지만,

다음에는 적어도 노조키메의 그림자에서는 벗어난 소재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작품 내내 미쓰다 신조는 다른 작품들의 집필 경위를 설명하곤 하는데,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인 도조 겐야 시리즈의 미출간작

유녀(幽女)처럼 원망하는 것에 대해 기획부터 완성까지 꽤 자주 언급한 부분을 보면서

(비록 국내 출판사는 다르지만) 하루라도 빨리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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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살인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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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이 집필된 90년대 초반은 한국에서도 천리안이나 하이텔

PC통신이 새로운 문명기의 시작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게 일으켰는데 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초반부터 정체가 공개된 범인 시나 도시오는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 중독에 히키코모리의 특징을 겸비한 예비 소시오패스입니다.

그는 가상공간에서 만난 닉네임 CAT O’NINE TAILS라는 존재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낍니다.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지만, 오직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친구이며,

그와 나눈 대화, 그와 함께한 체스 게임은 시나 도시오의 귀중한 보물이 됩니다.

CAT과의 만남을 통해 봉인돼있던 금지된 욕망을 발산하게 된 시나 도시오는

더 이상 위선적이기만 한 인간적 탈을 벗어던지고 쇠망치를 든 채 거리로 나섭니다.

시나 도시오와 CAT이 몰고 온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은

무차별 살인, 눈속임 살인, 정신이상자 범행, 비밀결사의 제재 등 숱한 추정만 불러일으킬 뿐

희생자들 간의 연관성도, 범행 목적도,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수사진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 ● ●

 

‘0의 살인을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코믹 코드가 섞인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취향이라

후속작인 뫼비우스의 살인의 출간 소식에도 관심이 덜 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서평과 카페 및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맛보기 식으로 훑다보니

이번에는 코믹 코드의 역할은 줄어든 반면,

범죄는 사악해지고 하야미 3남매는 진지해졌으며, 전대미문의 소시오패스가 등장하는데다,

살육에 이르는 병의 슬랩스틱 버전이라는 독특한 작품이라는 평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읽어보니 앞서 확인한 서평과 소개글 그대로였습니다.

‘0의 살인도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뤘지만 어딘가 연극적인 분위기가 지배했던 반면

뫼비우스의 살인은 훨씬 더 리얼하고 참혹한 연쇄살인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하야미 3남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추리는 여전하지만,

‘0의 살인에서처럼 독자들의 웃음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도쿄 일대를 공포에 몰아넣은 연쇄살인마를 잡으려는 진지한 수사의 일환으로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코믹 코드가 곳곳에서 터지고 있어

이런 종류의 재미를 기대한 독자에게도 충분한 만족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신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하야미 교조가

수사1과 최초의 여성 주임 후보인 기지마 레이코와 좌충우돌 엮이는 장면들은

‘0의 살인에 못잖은 재미를 주는 대목입니다.

 

이 작품이 살육에 이르는 병의 슬랩스틱 버전으로 불린 이유는

살인마 시나 도시오의 소시오패스적인 캐릭터와 참혹한 살인행각 때문입니다.

반전이나 구성 등 큰 틀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시나 도시오라는 인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살육에 이르는 병의 향기(?)가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신체훼손을 일삼던 살육에 이르는 병의 범인에 비하면 시나 도시오는 얌전한 편에 속하지만

작가 스스로 뫼비우스의 살인을 쓰면서 살육에 이르는 병의 플롯을 구상했다고 한 걸 보면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나 도시오의 캐릭터를 진화시킴으로써

작가의 대표작이자 반전의 명작을 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시나 도시오와 그의 파트너 CAT O’NINE TAILS의 연쇄살인의 실체는

살육에 이르는 병과 비교해도 그렇고, 요즘의 눈높이로 봐도 신선한 반전에는 못 미치지만

이 작품이 출간된 90년대에는 충격과 함께 논란의 여지를 많이 남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시나 도시오의 스토리가 하야미 3남매 시리즈가 아니라

살육에 이르는 병의 톤으로, 그러니까 정색하고 19금 판정 수준으로 적나라하게 집필됐다면

훨씬 더 파괴력이 큰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취향이 코믹 코드보다는 잔혹한 미스터리 쪽에 있다 보니

그런 아쉬움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하야미 3남매 시리즈 중 일본에서 제일 먼저 출간됐지만

국내에는 아직 소개 안 된 ‘8의 살인은 어떤 톤의 작품일지 궁금해집니다.

아무래도 코믹 코드가 짙겠지만, 3남매의 첫 데뷔라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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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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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과 십자가에 이은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당초 시리즈 집필 계획이 없던 이언 랜킨은 매듭과 십자가에서

존 리버스의 끔찍한 트라우마를 사건과 직결시킨 탓에

사건 전개보다 그의 과거사나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결과적으로 영국에서 매년 팔리는 범죄소설 중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엄청난 시리즈

존 리버스 시리즈의 첫 작품은 좀 밋밋한 스릴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숨바꼭질은 존 리버스를 소개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탓인지

좀더 스릴러의 본령에 충실한 미덕들을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 ● ●

 

폐가로 전락한 주택단지 필뮤어에서 마약중독자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리버스는 새로운 파트너 홈스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단서들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랜덤함 그 자체입니다.

독극물이 든 마약을 투여하고 죽은 시신, 오컬트 의식에 따라 배치된 시신과 소품들,

벽에 그려진 오각별과 그 곁에 붙어있는 에든버러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

남창이면서 사진작가를 꿈꿨던 희생자의 이력,

그리고 숨어! 그들이 오고 있어! 그들이 날 죽였어!”라는 여친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 등

리버스는 수많은 단서 속에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아득할 따름입니다.

끈질긴 탐문과 거듭되는 현장 방문, 희생자의 흔적에 대한 추적 등을 통해

리버스는 누군가 희생자를 의도적으로 살해한 정황을 찾아냄과 동시에,

때맞춰 날아든 제보를 통해 에든버러를 충격 속으로 몰고 갈 끔찍한 사실을 알아내게 됩니다.

 

● ● ●

 

숨바꼭질은 자신이 나고 자란 에든버러에 대한 작가의 애정으로 똘똘 뭉친 작품입니다.

첫 장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언 랜킨은 에든버러를 타락시킨 런던에서 온 외지인들과

그들이 실어 나른 추악한 변화들 가령, 부동산 개발이라든가 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씁쓸함을 표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애정을 넘어 이언 랜킨은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이야기 전반에 투사하고 있습니다.

마약은 어느 새 아름답고 깨끗하던 에든버러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게 됐고,

길거리엔 남창들이 공공연히 호객행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한때 재개발로 각광받았지만 지금은 폐가가 된 곳입니다.

이런 에든버러의 타락을 배경으로 숨바꼭질은 존 리버스가

한 마약중독자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전형적인 스릴러 공식을 따라 전개됩니다.

 

매듭과 십자가에서 어딘가 해리 보슈나 해리 홀레를 연상시키는

암울하고 회복불능의 상처투성이 캐릭터로 묘사됐던 존 리버스는

숨바꼭질에서는 훨씬 더 유연해졌을 뿐 아니라 조금은 뻔뻔스러운 캐릭터로 진화했습니다.

진급도 했고, 상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를 줄도 알고, 부하를 쥐락펴락 다룰 줄도 압니다.

물론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외톨이 기질까지 버리진 못했지만

어쨌든 전작에 비해 꽤 매력적인 캐릭터로 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매듭과 십자가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어느 정도 해소됐음에도 불구하고,

숨바꼭질은 여전히 엄청난 시리즈의 진면목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마약, 오컬트, 남창, 수상한 경찰 등 일관성 없는 많은 단서들이 존 리버스 앞에 던져지고,

그로 인해 그의 수사는 다방면으로 전개되지만, 찔러본 곳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새 파트너인 브라이언 홈스가 던진 한마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군요.”처럼

사건을 복잡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작가는 무리한(또는 과한) 설정을 펼쳐놓았지만

사실 이 설정들이 적절한 효과나 반전의 기반을 만들어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말하자면, 심플한 사건의 구도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재료를 보충했지만

그 재료들 가운데 후반부에 가서 제 역할을 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매듭과 십자가에서도 그랬듯,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계기는

뜻하지 않은 깨달음과 때맞춰 날아드는 외부의 제보였습니다.

작가가 너무 많은 일들을 벌인점은 오히려 납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반면,

깨달음과 제보는 사실 아쉬움을 넘어 실망감을 안겨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쉬움은 저만의 특별한 느낌일 수도 있고,

엄청난 시리즈의 진면목에 대한 과한 기대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에든버러에 대한 애증, 사회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재미와 속도감이 붙은 서사 등

숨바꼭질만의 미덕은 두루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어쩌면 올해 안에 볼 수 있다는 세 번째 시리즈 이와 손톱에서는

저의 기대감이 제대로 충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의 서평을 보니 이와 손톱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존 리버스에 관한 충분한 예습까지 마친 이상

엄청난 시리즈의 진면목을 발견할 때까지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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