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부서진 남자 스토리콜렉터 36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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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의 제목 산산이 부서진 남자는 두 남자를 가리킵니다. 두 남자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상대하는 일을 합니다. 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부순 끝에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반면, 또 한 사람은 부서진 사람의 마음을 이어 붙여 온기가 되돌아오게끔 도와줍니다.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은 자신의 눈앞에서 알몸 상태로 강물에 몸을 던진 한 여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거칠지만 유능한 여경 베로니카, 퇴직한 런던경찰 빈센트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던 조는 같은 패턴의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오자 누군가 희생자들의 마음을 통제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확신합니다. 사소한 단서에서 진실을 추적하고 범인의 심리를 읽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조는 집요한 탐문과 분석 끝에 결정적인 단서를 알아내지만, 아무런 흔적도 안 남긴 범인을 찾는 일은 요원할 따름입니다. 문제는, 정작 조는 범인의 다음 목표가 자신임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올해 들어 유독 상대의 마음을 통제하는 범죄자이야기를 많이 읽게 됐습니다. 저우하오후이의 사악한 최면술사’,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영혼파괴자등이 그것인데, 두 작품의 범인이 각각 최면과 각성혼수라는 특이한 능력을 통해 희생자를 장악했다면, ‘산산이 부서진 남자의 범인은 좀더 리얼하고 현실감 있는 방법으로 희생자를 농락합니다. 상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또는 상대의 가장 취약한 곳에 치명적인 덫을 숨겨놓고 사악함이 깃든 능수능란한 화법으로 상대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놓습니다. 결국 희생자는 가장 치욕적인 모습을 스스로 만천하에 내보인 채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부수는 범인과 대결하는 조 올로클린은 임상심리학자이자 동시에 뛰어난 탐정의 재능을 가진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5년 전에는 살인사건에 말려들었다가 범인으로 몰리기까지 한 끝에 자신의 힘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낸 전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경찰과는 반대로 피해자를 알아감으로써 용의자를 알아낸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파킨슨병 때문에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으며, 아내 줄리안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도 점점 커질 뿐입니다. 특히 예전의 사건에서도 가족의 위기를 초래했던 조가 또다시 남의 사건에 끼어들려고 하자 아내 줄리안은 걱정을 넘어 조에게 원망까지 느끼게 됩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예전 사건이란 건 아마도 앞의 두 편에서 다뤄진 사건을 뜻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절판 상태지만 2005년에 출간된 용의자가 시리즈 첫 편이고, ‘The Drowning Man’이 두 번째 작품입니다.)

 

조에게 부여된 파킨슨병이라는 치명적인 핸디캡은 독자의 응원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자신의 핸디캡에 대한 저주와 체념, 그것이 가족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크고 작은 영향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남을 위해 기꺼이 발휘하는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조의 캐릭터와 활약에 대한 묘사는 기꺼이 응원해주고 싶은 그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켜 줍니다.

 

마음을 부수는 자마음을 봉합하는 자의 대결은 익숙한 액션스릴러의 서사를 따라가지만 동시에 고도의 심리전에 가깝기도 해서 그저 부수고 때리는단순한 액션물과는 차별되는 고급스런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조를 돕는 개성 넘치는 두 캐릭터 베로니카 경위와 퇴직경찰 빈센트, 또 첫 희생자의 딸이자 조를 추종하는 다아시, 조와의 갈등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내 줄리안 등 맛깔난 조연들의 활약도 만점이어서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마음먹고 달리면 하루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아쉬운 점을 하나만 꼽자면, ‘마음을 부수는 자의 범행 동기가 좀 모호했다는 점 정도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그의 내면과 폭주하는 증오심이 충분히 설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그녀들의 마음을 부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제 이해도가 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럭저럭 연상을 통해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보긴 했지만, 그래도 작가의 설명을 통해 딱 떨어지는 명료한 결론을 얻지 못한 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처음 만난 작가지만 그의 시리즈가 대단한 성과를 냈다는 소문을 듣고 보니 이 작품을 시작으로 계속 후속작들이 출간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듭니다. 파킨슨병에 걸린 심리학자가 이끄는 스릴러와 희로애락이 가득한 가족 서사가 잘 믹스된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시장에서 좋은 결과를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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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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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추리소설의 마니아라면 대도 아르센 뤼팽과 명탐정 셜록 홈즈의 대결이라는 말만 들어도

누구나 가슴이 설레고 그 결과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영국과 프랑스라는 배경 역시 세기의 라이벌전을 더 뜨겁게 달구는 설정입니다.

본명 대신 헐록 숌즈와 윌슨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변신해야 했던 셜록 홈즈와 왓슨은

두 편의 중편을 통해 아르센 뤼팽과 대결을 벌입니다.

 

첫 번째 사건인 금발 여인이 전형적인 대도 대 탐정의 대결을 그렸다면

두 번째 사건인 유대식 등잔은 도둑이면서도 로맨티스트인 뤼팽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뤼팽과 숌즈는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며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예상 못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맞기도 하면서 승부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만듭니다.

 

때론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상대의 자존심을 무참히 깎아내리는 야유 섞인 비아냥으로 치열한 설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밀실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뤼팽 때문에 숌즈의 추리는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갖은 위협과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뒤를 쫓는 숌즈 때문에

뤼팽은 두 번째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는 등 대도와 탐정의 대결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입니다.

또한, 프랑스 경찰 가니마르 경감과 숌즈의 조수 윌슨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두 거장 사이에서 생고생만 거듭하며 안쓰러움과 웃음을 자아냅니다.

 

최고의 도둑과 최고의 탐정이라는 캐릭터만으로도 독자의 오감을 한껏 자극하고 있고,

반전과 트릭을 통해 고전 추리소설의 풍성한 맛을 전해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문난 잔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리스 르블랑이 그린 헐록 숌즈와 윌슨은

아무래도 베이커 가의 셜록 홈즈와 왓슨과는 여러 면에서 이질감이 느껴졌고,

대결의 무대가 된 사건의 해결과정이나 동원된 트릭은

거장들의 명성에 비해 많이 취약하거나 허술해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진행도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돼서 그런지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전집 1편인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잠시 스치듯 지나가면서

곧 벌어질 세기의 대결을 예고하는 장면이 훨씬 더 압도적인 긴장감을 줬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기대를 너무 크게 가졌던 탓에 그만큼 실망이 커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에 이은 뤼팽 전집의 세 번째 작품 기암성

어릴 적 뤼팽과 홈즈에 빠져있을 때도 못 읽은 작품이라 더 기대가 됩니다.

스페셜 게스트 없이 자신만의 무대를 펼칠 뤼팽의 활약을 만나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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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 1 - 경시청 특수범수사계(SIT)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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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 성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3부를 합쳐 1,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 안에 방대한 서사가 펼쳐진 경찰소설입니다.

크게 보면 경찰 대 범인이라는 장르물의 전형적인 서사가 한 축이고,

경찰 대 경찰이라는, 내밀하지만 폭발력 강한 갈등이 또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년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연이은 유괴사건과 그에 이은 유혈총격전,

집단 인질극 현장에서 벌어진 폭발로 인해 특수부대가 몰살당하는 사건,

도심을 봉쇄한 채 무차별 살육을 벌이며 치외법권을 주장하는 희대의 테러(?) 집단 등

경찰이 상대해야 하는 사건들은 규모나 잔혹성에 있어 전대미문의 것들입니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 자리한 소위 신세계 질서라는 집단은

기존의 가치와 법, 제도 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살인, 폭력, 마약 등 사회적 합의에 의해 금지된 모든 것을 해방시키려 합니다.

그 정점에는 유년시절부터 살인, 난교, 마약에 둘러싸여 성장한 미야지가 있고,

그 중심에는 가공할 전투력과 신비한 캐릭터로 무장한 금발의 미소년 지우가 있습니다.

 

한편, 대립과 갈등, 경쟁과 비방이 공존하는 경찰 내부의 양상은

고위급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묘사됩니다.

두 주인공 가도쿠라 미사키와 이자키 모토코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인격을 지닌 여경입니다.

가도쿠라가 설득과 대화로 피의자 스스로 무기를 버리게 만드는 경찰이라면,

이자키는 위험한 상황을 즐기며 가차 없는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경찰입니다.

가도쿠라는 한때 동료였던 이자키에게 다가가고자 나름 친밀함을 표현해보지만,

이자키는 가도쿠라가 발산하는 여성미나 친절함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두 사람은 미야지와 지우가 일으킨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결국 적으로 만나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지우에서 묘사된 경찰 내부의 갈등의 큰 축은 세 부서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수사와 탐문으로 실적을 내야 하는 형사부, 무력진압으로 공을 세우려는 경비부,

은밀한 정보전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 공안부 등이 그들인데,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은 물론 서로를 비방하거나 음해하기도 하면서

수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노골적이고도 아슬아슬한 대립이 사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동시에, 일단 흥분부터 하고 보는 다혈질 부장, 얼음처럼 차갑고 냉철한 중간 간부,

인간미와 능력을 겸비한 이상적인 현장 수사관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적절히 포진돼있어

경찰 조직의 단면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경찰 대 범인구도만큼이나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미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를 통해 혼다 테쓰야의 팬이 된 터라

지우역시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고, 기대한 만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두세 가지 점에서 큰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미야지가 이끌고 지우가 중심에 서있던 신세계 질서라는 그룹의 정체성인데,

여러 인물을 통해 그룹이 지향하는 바가 설명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해설에서 지적한대로) 약간은 황당무계하게 느껴진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 즉 사상적으로 제대로 무장된 무정부주의 단체도 아니고,

미래나 지속성을 염두에 둔 치밀하고 계획적인 혁명도 아니며,

고작 3일 천하도 보장할 수 없는, 다분히 무모하고도 충동적으로 보이는 거사

그들의 정체성과 지향점에 공감하기 힘들게 한 것은 물론,

이야기 전체의 사실감도 현저히 떨어뜨린 대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세컨드 주인공인 이자키 모토코의 행적에 관한 것인데,

중요한 지점마다 그녀가 내린 선택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애초 도덕적 동기와는 무관하게 경찰이 된 그녀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가 신세계 질서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나

도심 봉쇄 후 무차별 살상에 가담하는 정황, 신세계 질서와의 절연을 결심하는 계기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갑작스럽고 개연성 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지우의 캐릭터에 관한 것인데,

사실 판타지라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함을 앞세워 그려진 인물이다 보니

모호하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더라도 큰 거부감 없이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신세계 질서를 배신하는 장면이나

그가 저지른 모든 행동의 근원을 설명한 엔딩의 몇 페이지에서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넌센스에 가까운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또 그를 동정하는 듯한 에필로그 역시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1~3부까지의 서평을 한꺼번에 쓰다 보니 아무래도 매크로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는데

디테일을 이야기하자면 세 편의 작품마다 각각의 장편의 서평이 필요할 것입니다.

혼다 테쓰야의 팬이라 약간의 아쉬움이 있더라도 대체로 좋은 쪽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라 시작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호불호에 관계없이 순식간에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혹시 지우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독자라도

혼다 테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는 한번쯤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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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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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편집한 줄거리입니다.)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 포경선 유키마루가 해군 식량 조달을 목적으로 출항한다.

배에는 일본인 선원뿐 아니라, 자원하거나 차출되어 끌려온 조선인, 대만인들이 승선한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할당된 어획량을 채우기 위해 조업을 하는 동안

유키마루의 선원들은 기본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환경에서 허기와 갈망에 시달린다.

미군의 폭격으로 엔진이 고장 난 유키마루는 논란 끝에 엔진을 교체하기 위해

똑같은 모델의 배가 버려져 있는 남극으로 타륜을 돌린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버티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추악한 감정들이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결국 사투 끝에 도착한 남극해에서 모든 선원에게 치명적인 사건이 발발한다.

증오와 욕망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 유키마루에서 결국 살아남는 자는 누구일까?

 

● ● ●

 

문근영은 위험해라는 눈에 띄는 제목만 기억할 뿐 임성순 작가와는 처음 만나는 작품입니다.

극해의 서평을 찾아보니 2010년 세계문학상 수상 후 많은 독자에게 주목받던 작가였습니다.

새삼 외국의 장르물에만 몰두하던 책읽기 습관이 부끄럽더군요.

 

극해역시 제목에 꽂혀 작년부터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욕망과 본능의 충돌을 다루고 있었는데,

시대 배경이 1944년이라는 설정은 의외였습니다.

광란의 바다를 떠다니는 포경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묵인된 폭력과 착취,

죽음마저 쉽게 감춰지는 공간이라는 설정만으로도 긴장감을 충만시키기에 충분할 텐데,

거기에 식민지 시대의 착취와 피착취의 대립 구도까지 갖춰진 덕분에

이야기는 첫 출발부터 독자에게 평범하지 않은 무게감을 던져줍니다.

 

극해는 오감 가운데 특히 후각을 많이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남자들의 땀 냄새, 포경선을 뒤덮은 비린내, 폭력의 부산물인 피와 고름의 냄새 등...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바다 위의 유키마루는 열린 밀실 그 자체입니다.

그 밀실을 부유하는 갖가지 불쾌한 냄새들은 억압되고 짓눌린 자들의 분노를 고양시킵니다.

그것은 포경선의 지배자가 일본인이고, 고통스러운 노동의 주역이 조선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는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할 뿐, 핵심은 인간의 욕망과 본능입니다.

그래서, 증오와 갈등은 일본인 사이에서도, 조선인 사이에서도 똑같은 힘으로 증식해갑니다.

 

하늘에서는 미군의 폭격기가, 바다 밑에서는 연합군의 잠수함이 유키마루를 위협하는 가운데

선상에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갈등이 한없이 격화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겠다는 본능은 자연히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욕망을 낳기 마련입니다.

포경선 유키마루는 이런 비인간적인, 또는 거꾸로 너무나 인간적인 기운이 날뛰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이미 폭력의 화신으로 완성된 인격체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고운 천성을 잃어버린 채 끔찍한 도살자로 변신합니다.

 

사람을 전율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말이죠. 힘이죠.

손안에 상대방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그건 거의 사정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설득과 대화는 사라지고 선한 의지와 공동체적 협력은 아무 쓸모도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위태로운 균형은 결국 파괴되고, 유키마루에서는 살육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선징악도 아니고 이야기의 행복한 종결도 아닙니다.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변신하며, 폭력은 더욱 강화되어

유키마루를 휩쓰는 역한 냄새를 더욱 고약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저지르는 죄악,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던 자의 광기,

시대와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생에 대한 환멸은 인간이라는 참담한 심연을 더욱 들끓게 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들여다본다.“라는 소개글은 극해의 미덕을 단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재미있지만 불편한 책읽기를 감수해야 하고, 이야기가 끝이 나도 결코 개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연을 들여다본 후의 후회와 먹먹하기만 한 여운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캐릭터라든가 미스터리가 풀리는 지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크고 굵직한 서사를 대중적인 재미와 함께 잘 녹여낸 필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 재기발랄함, 그리고 부조리함을 직시하는 시선을 갖췄다는 평가 때문에라도

극해를 통해 처음 만난 임성순 작가의 전작들을 꼭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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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맨 그레이맨 시리즈
마크 그리니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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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킬러 코트 젠트리, 일명 그레이맨에게 동생을 잃은 나이지리아 독재자 아부바커는

천문학적인 천연가스 개발권을 미끼로 거대 재벌 로랑그룹에게 그레이맨 제거를 요구합니다.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엄청난 규모의 부와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로랑그룹은

미국인 변호사 로이드와 독일인 킬러 리겔을 앞세워 그레이맨 제거에 혈안이 됩니다.

로이드는 그레이맨의 후원자이자 은인인 스파이계의 대부 피츠로이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고,

리겔은 로랑그룹이 내건 상금을 통해 수십 명의 다국적 킬러들을 끌어들입니다.

노르망디에 인질로 잡힌 피츠로이와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그레이맨은 사방에 깔린 킬러들과 혈투를 벌이며 한걸음씩 노르망디로 다가갑니다.

 

● ● ●

 

자신을 제거하려는 로이드와 리겔, 그리고 수십 명의 뛰어난 다국적 킬러들을 상대하면서

노르망디까지 진격하는 그레이맨의 48시간 동안의 여정은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가는 곳마다 거리의 아티스트라 불리는 감시원들이 깔려있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엄청난 현상금에 눈먼 다국적 킬러들이 대낮 도심에서 총을 갈겨댑니다.

안 그래도 한때 몸담았던 CIA마저 눈에 불을 켜고 그레이맨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

그의 행보는 마치 눈이 가려진 채 지뢰밭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그레이맨은 최고의 스파이물 본 시리즈를 연상시킵니다.

무엇보다 코트 젠트리의 이력이나 살인기계를 능가하는 뛰어난 능력이 그렇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무수한 능력자 킬러들이 떼로 등장하는 점도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배신과 위기, 기대하지 않은 조력자의 등장,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악의 존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코트 젠트리는 냉혈동물 같은 킬러이면서도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제라도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인간미와 정의감입니다.

그는 아무리 큰돈이 걸려있더라도 명백한 악이 아니라면 일을 맡지 않습니다.

반대로, 정의감 하나 때문에 무모해보일 정도의 상황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코트 젠트리의 노르망디 작전역시 그런 무모한 상황 중의 하나입니다.

한때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피츠로이는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며,

나이지리아의 독재자와 로랑그룹의 하수인들은 누가 봐도 명백한 악 그 자체라는 사실이

코트 젠트리의 인간미와 정의감을 부추긴 원동력입니다.

조금은 인공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은 액션물 주인공이 갖춰야 할 당연하면서도 기본적인 매력이긴 하죠.^^

 

액션물은 영상이 이라고 생각하는 취향 탓에 자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몇몇 작품을 통해 소설이 주는 남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중입니다.

그레이맨이후 발표된 시리즈들이 연이어 배리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보면

노르망디 작전 이후 코트 젠트리의 거취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암시된 그의 다음 미션을 보니 역시 짜릿한 재미를 줄 것 같네요.

그레이맨의 성공으로 마크 그리니의 다음 작품들도 무사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족으로...

펄스에서 지난 여름 출간한 아파치는 재미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여러 독자들이 편집에 관해 아쉬운 반응을 많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랬구요.

그레이맨의 경우 판형은 마음에 들었지만

페이지를 줄이려 한 탓인지 너무 작은 글씨 때문에 첫인상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야기에 빠져들고나면 글씨 크기야 전혀 의식할 수 없게 되긴 하지만요...

 

글씨 크기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적잖은 오타와 무수한 띄어쓰기 오류였습니다.

일일이 찍어놓긴 했는데, 서평에 나열하기엔 양이 너무 많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별 5개의 작품이지만, 오타와 오류 때문에 별 1개를 뺐습니다.)

저처럼 약간의 결벽증에 걸린 독자가 아니라도 자주 발견되는 오타는

작품과 출판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입니다.

그레이맨의 후속작은 편집 과정에서 좀더 신경 쓴, 옥의 티 없는 결과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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