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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평점 :
3권으로 분권된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에 비하면 검소한(?) 편이지만
그래도 9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만으로 일단 독자들을 압도하는 작품입니다.
더구나 원제인 ‘베드로의 장렬(ペテロの葬列)’도, 번역제목인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도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 물심양면으로 기대와 부담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누군가’, ‘이름 없는 독’에 이은 행복한 탐정 시리즈라는 것을 몰랐고,
또 두 작품 모두 읽지 못한 터라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습니다.
물론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어 앞선 작품들을 못 읽은 독자에게도 전혀 문제는 없었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시리즈 순서대로 읽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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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지방도로에서 권총을 든 노인에 의한 버스납치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이 지목한 세 사람을 찾아내라’고 요구할 뿐 인질들을 겁박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인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노약자나 버스기사는 풀어주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남은 인질들에게는 사건 종료 후 위자료를 보내겠다는 약속까지 합니다.
인질로 잡혀있던 스기무라 사부로는 노인의 말솜씨가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 챕니다.
상대방을 휘어잡으면서도 동시에 공감과 안심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화술은
인질들로 하여금 도리어 동정심이나 돕고 싶은 마음까지 갖게 만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경찰이 버스에 진입하자마자 그는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인질들에게 위자료가 든 봉투가 날아듭니다.
신고하자는 측과 그냥 받자는 측의 갈등이 확대되는 가운데
스기무라는 승산 없는 인질극을 벌인 노인의 목적, 그가 지목한 세 사람의 정체,
그리고 죽은 노인 대신 돈을 보내온 자는 누구인지 등에 대해 조사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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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인질극 이야기는 200페이지도 되기 전에 마무리됩니다.
이후로는 스기무라와 인질들의 ‘진실 찾기’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덧붙여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복잡하게 병행됩니다.
평범한 출판사 편집자였다가 재벌의 서녀(庶女)와 결혼하면서 재벌가의 일원이 된 스기무라가
부모, 아내, 처가, 회사 중역 등과 겪는 복잡다단한 갈등들,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스기무라가 과거 신세진 적이 있는 사립탐정의 가족과 얽히는 사건,
인질극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사람들의 죄와 상처 등
따로 한 권의 작품이 될 만한 굵직한 이야기들이 메인 이야기만큼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인질극 이후에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출판사의 북 트레일러에서 대놓고(?) ‘다단계 사건의 뿌리를 파헤친다’라고 홍보한 덕분에
서평에서도 마음 편하게 납치극의 배경에 다단계 사기가 있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미 여사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밝힌 기획의도를 (약간 편집해서) 정리하면,
“‘깨끗한 피부를 갖고 싶다’, ‘건강해지고 싶다’ 같은 우리 일상생활의 사소한 소망을,
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다단계 사기 경제 범죄가 싫은 거예요.
생활에 밀착된 악랄하고 치사한 수법이 싫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작품 중에 “악은 전염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역병처럼 퍼지는 다단계 사기의 추악한 양상에 딱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다단계 사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신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성취합니다.
또한 전염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이 정점에 선 먹이사슬을 공고히 만들고 맙니다.
인질극의 배후에 다단계 사기의 이런 추악한 고리가 숨어있음을 알아낸 스기무라가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말하자면 악의 전염경로를 추적하는 일입니다.
어떤 달콤한 언변과 화술로 어떻게 사람들을 전염시켰는지,
또 전염된 자들이 또 다른 희생자들을 낳게 만드는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전염은 어떻게 파국을 맞이하는지 등...
미미 여사의 엄청난 필력과 서사의 힘이 꽉꽉 채워진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몰입이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다단계의 폐단과 후유증에 대해 지나치게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 점이 거슬렸습니다.
좀 과하게 얘기하자면, 말재주 좋은 사기꾼과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거기에 ‘베드로의 장렬’이라든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같은
철학과 윤리의 뉘앙스를 담은 제목을 붙인 것도 자연스럽지 못했고,
사기꾼의 화려한 언변을 ‘타인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능력’으로 승화(?)시킨 점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가 됐지만, 너무 과대 포장된 나머지 현실성이 떨어졌습니다.
노인의 정체와 그가 지목한 세 사람의 죄, 위자료의 목적 등도
자연스럽게 와 닿지 못하고 왠지 기획의도를 위해 이야기가 짜맞춰진 느낌만 남았습니다.
또한 스기무라는 과도한 우연을 통해 비슷한 성격의 사건들,
즉,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는 범죄’와 동시다발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역시 작품의 주제를 돋보이기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분량임에도 워낙 페이지를 넘기는 힘이 강해서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처럼 미미 여사의 광팬이라면 위화감이 느껴지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달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중간중간 남은 분량을 자꾸 확인하게 되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가
어떤 사건을 다루게 될지 내심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아직 읽지 못한 스기무라의 과거사를 다룬 두 작품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저래 미미 여사의 사회파 미스터리는 안 읽고는 못 버티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