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내로라하는 작가라면 적어도 한 작품 정도는 대표작으로 갖고 있을 정도로

일본의 장르물 문단은 소년 범죄나 왕따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우타노 쇼고의 세상의 끝 혹은 시작’, 오리하라 이치의 침묵의 교실’,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 츠지무라 미즈키의 오더 메이드 살인클럽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0대들의 범죄나 왕따에 관한 이야기는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질 만큼 다양하게 출간되어 왔습니다.

 

침묵의 거리에서는 질풍과 노도의 정점에 서있는 중2 학생들의 왕따 이야기입니다.

왕따를 당하던 지역 유지의 아들이 학교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고,

왕따의 주범으로 알려진 4명의 학생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하지만 10대들의 범죄나 왕따를 다룬 일반적인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달리

침묵의 거리에서는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보다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딜레마에 집중합니다.

한쪽에선 왕따의 기운이 움텄던 학기 초부터 사건이 벌어진 현재까지의 디테일한 이야기를

교실과 동아리를 중심으로 전개시킵니다.

또 다른 한쪽에선 학교, 경찰, 검찰, 변호사, 언론, 유가족, 가해자 가족 등

사건과 관련된 어른들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갈등과 딜레마를 리얼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끈질긴 탐문과 추리, 예기치 못한 반전의 충격을 기대한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침묵의 거리에서는 늘어지거나, 동어반복이거나, 양비론에 불과하거나,

또는 막판의 한 방이 없는 심심한 작품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10대가 사건 중심에 놓인 이야기 가운데

이 작품만큼 딜레마에 대해 깊이 있고 리얼한 서사를 내놓은 작품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 역시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에 약간의 지루함과 동어반복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읽는 내내 어느 누구도 편들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혼란과 딜레마를 겪으면서

오히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공식과 미스터리 서사에만 충실했던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특별한 독후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가족은 동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무책임한 부모로서 비난의 대상으로 그려집니다.

학교는 단호하고 원칙적인 대응을 주장하는 세력과 봉합에 급급해 하는 세력으로 갈립니다.

경찰 역시 강경한 형사과와 온정적인 생활안전과가 보이지 않는 각을 세우고,

가해자 가족은 자기 자식만큼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주장을 펼치던 끝에

누가 주모자냐?’를 놓고 서로를 비난하는 형국에 놓입니다.

그저 신참 여기자를 앞세운 언론만이 양쪽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유일한 캐릭터입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학생과 추락사 한 피해자 역시

알고 보면 진실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양면성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실망감을 느낀 독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엔딩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는데,

아무래도 이야기 자체가 숨어있는 진실이나 충격적인 반전과는 거리가 먼 전개를 펼친 탓에

그런 식의 엔딩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30페이지도 채 남지 않았는데, 작가는 전혀 이야기를 수습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혹시 3권이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야기는 평범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작가가 무리해서 뭔가 예상치 못한 엔딩을 만들었다면,

그러니까 억지로 교훈을 준다든가, 작위적인 반전을 만든다든가 했다면,

오히려 그것은 이 작품의 결정적인 흠이 됐을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팬이다 보니 작품의 미덕만을 강조하고 싶은 사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침묵의 거리에서는 왕따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보다는

다양한 입장들을 간접경험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르포의 느낌으로 풀어냄으로써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매력을 갖췄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 역시 다른 독자들과 비슷한 지점에서 아쉬움을 느꼈기에

오쿠다 히데오가 조금만 더 대중적인 전개와 독자가 원하는 엔딩을 감안했더라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700여 페이지의 내용을 두 권으로 분권한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쉽고 명쾌한 오쿠다 히데오의 문장 탓에 하루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왕따나 10대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기존의 유사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시각과 입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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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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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으로 분권된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에 비하면 검소한(?) 편이지만

그래도 9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만으로 일단 독자들을 압도하는 작품입니다.

더구나 원제인 베드로의 장렬(ペテロの葬列)’, 번역제목인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 물심양면으로 기대와 부담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누군가’, ‘이름 없는 독에 이은 행복한 탐정 시리즈라는 것을 몰랐고,

또 두 작품 모두 읽지 못한 터라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습니다.

물론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어 앞선 작품들을 못 읽은 독자에게도 전혀 문제는 없었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시리즈 순서대로 읽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 ● ●

 

한적한 지방도로에서 권총을 든 노인에 의한 버스납치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이 지목한 세 사람을 찾아내라고 요구할 뿐 인질들을 겁박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인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노약자나 버스기사는 풀어주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남은 인질들에게는 사건 종료 후 위자료를 보내겠다는 약속까지 합니다.

인질로 잡혀있던 스기무라 사부로는 노인의 말솜씨가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 챕니다.

상대방을 휘어잡으면서도 동시에 공감과 안심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화술은

인질들로 하여금 도리어 동정심이나 돕고 싶은 마음까지 갖게 만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경찰이 버스에 진입하자마자 그는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인질들에게 위자료가 든 봉투가 날아듭니다.

신고하자는 측과 그냥 받자는 측의 갈등이 확대되는 가운데

스기무라는 승산 없는 인질극을 벌인 노인의 목적, 그가 지목한 세 사람의 정체,

그리고 죽은 노인 대신 돈을 보내온 자는 누구인지 등에 대해 조사하기로 합니다.

 

● ● ●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인질극 이야기는 200페이지도 되기 전에 마무리됩니다.

이후로는 스기무라와 인질들의 진실 찾기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덧붙여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복잡하게 병행됩니다.

평범한 출판사 편집자였다가 재벌의 서녀(庶女)와 결혼하면서 재벌가의 일원이 된 스기무라가

부모, 아내, 처가, 회사 중역 등과 겪는 복잡다단한 갈등들,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스기무라가 과거 신세진 적이 있는 사립탐정의 가족과 얽히는 사건,

인질극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사람들의 죄와 상처 등

따로 한 권의 작품이 될 만한 굵직한 이야기들이 메인 이야기만큼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인질극 이후에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출판사의 북 트레일러에서 대놓고(?) ‘다단계 사건의 뿌리를 파헤친다라고 홍보한 덕분에

서평에서도 마음 편하게 납치극의 배경에 다단계 사기가 있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미 여사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밝힌 기획의도를 (약간 편집해서) 정리하면,

“‘깨끗한 피부를 갖고 싶다’, ‘건강해지고 싶다같은 우리 일상생활의 사소한 소망을,

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다단계 사기 경제 범죄가 싫은 거예요.

생활에 밀착된 악랄하고 치사한 수법이 싫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작품 중에 악은 전염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역병처럼 퍼지는 다단계 사기의 추악한 양상에 딱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다단계 사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신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성취합니다.

또한 전염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이 정점에 선 먹이사슬을 공고히 만들고 맙니다.

인질극의 배후에 다단계 사기의 이런 추악한 고리가 숨어있음을 알아낸 스기무라가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말하자면 악의 전염경로를 추적하는 일입니다.

어떤 달콤한 언변과 화술로 어떻게 사람들을 전염시켰는지,

또 전염된 자들이 또 다른 희생자들을 낳게 만드는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전염은 어떻게 파국을 맞이하는지 등...

 

미미 여사의 엄청난 필력과 서사의 힘이 꽉꽉 채워진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몰입이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다단계의 폐단과 후유증에 대해 지나치게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 점이 거슬렸습니다.

좀 과하게 얘기하자면, 말재주 좋은 사기꾼과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거기에 베드로의 장렬이라든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같은

철학과 윤리의 뉘앙스를 담은 제목을 붙인 것도 자연스럽지 못했고,

사기꾼의 화려한 언변을 타인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능력으로 승화(?)시킨 점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가 됐지만, 너무 과대 포장된 나머지 현실성이 떨어졌습니다.

노인의 정체와 그가 지목한 세 사람의 죄, 위자료의 목적 등도

자연스럽게 와 닿지 못하고 왠지 기획의도를 위해 이야기가 짜맞춰진 느낌만 남았습니다.

또한 스기무라는 과도한 우연을 통해 비슷한 성격의 사건들,

,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는 범죄와 동시다발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역시 작품의 주제를 돋보이기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분량임에도 워낙 페이지를 넘기는 힘이 강해서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처럼 미미 여사의 광팬이라면 위화감이 느껴지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달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중간중간 남은 분량을 자꾸 확인하게 되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가

어떤 사건을 다루게 될지 내심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아직 읽지 못한 스기무라의 과거사를 다룬 두 작품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저래 미미 여사의 사회파 미스터리는 안 읽고는 못 버티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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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느와르 M 케이스북 - OCN 드라마
이유진 극본, 실종느와르 M 드라마팀.이한명 엮음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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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느와르 M’7편의 에피소드 중 2(살인의 재구성, 예고된 살인)밖에 못 봤지만

적잖은 제작비와 수준 높은 완성도가 눈에 띄었던 작품입니다.

실종사건 전담반을 그린 미드 ‘Without a Trace’를 워낙 좋아했던 덕분에 관심을 가졌는데

대본도 탄탄했고, 연출도 공을 많이 들여서 그런지 기대 이상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미 방송된 드라마를 대본, 영상, 제작진의 후기 등과 함께 책으로 낸 경우는 처음 접했는데

실제 봤던 에피소드를 꼼꼼히 읽어보니 드라마를 안 본 사람도 스릴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편집이나 구성 등 모든 면에서 공들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캡처 사진과 포스트 잇, 발췌한 대본 등을 이용한 레이아웃은

시각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실제 드라마를 보는 듯한 미묘한 맛을 전달해주기도 합니다.

 

아직 못 본 5편의 에피소드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대략의 서두만 읽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분량도 상당하고, 단순히 내용 정리 수준을 넘어 제작진이나 배우들의 뒷얘기도 실려 있어

나름 이 드라마의 마니아들에게는 큰 선물이 됐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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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의 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1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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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 즉 죽음의 그림자나 증상을 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바탕으로 탐정이 된 쓰루야 슌이치로의 활약을 그린 두 번째 장편입니다.

 

● ● ●

 

조호쿠 대학의 괴기 동아리인 백괴(百怪) 클럽멤버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기숙사 지하실에서 독특한 악마 소환 의식이자 강령술인

사우의 마의식을 치른 뒤 연이어 기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클럽 멤버들 중 일부로부터 유령 같은 검은 여자를 목격했다는 진술을 들은 슌이치로는

의식이 벌어졌던 기숙사 지하실의 음습한 분위기와 검은 여자의 정체에 주목합니다.

특히 기숙사 지하실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비극적 사건들 때문에

슌이치로와 클럽 멤버들은 그때의 원령(怨靈)이 검은 여자의 형체로 나타났다고 의심합니다.

슌이치로가 사건 조사를 시작한 이후에도 기이한 죽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슌이치로는 유명한 무녀인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아무도 예상 못한 범인의 등장에 클럽 멤버들과 경찰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 ● ●

 

백괴 클럽이 벌인 사우의 마라는 강령술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 때문에

사상학 탐정 슌이치로는 이야기 중반부쯤에야 등장합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을 뿐 아니라, 탐정으로서의 능력이나 매너도 향상된 슌이치로는

타인의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과 뛰어난 추리를 바탕으로

누가 봐도 원령에 의한 저주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냅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사우의 마라는 강령술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도 서서히 공포심을 고조시키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검은 여자의 모습으로 기숙사를 얼어붙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끝까지 정말 원령인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묘사됩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슌이치로의 능력 자체가 비현실적인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보니

모든 것이 원령의 소행이다라고 결론이 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독자는 설마그렇지 않을까?’의 경계에서 수시로 혼란을 겪게 됩니다.

 

여름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미쓰다 신조 식 호러라 순식간에 끝까지 달릴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슌이치로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호러 단편집 붉은 눈이나

첫 장편 사상학 탐정-13의 저주에 비해 호러물로서의 매력이나 진실을 밝히는 과정 등

여러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식의 슌이치로의 추리방식이 아쉬웠는데,

진범을 특정한 근거나 범행동기에 대한 설명은 어딘가 끼워 맞추기 식 해명의 느낌이 강했고,

거듭 이어지는 반전 역시 뒤통수를 치는 충격보다는 작위적인 설정에 가까웠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나 작가 시리즈를 통해 미쓰다 신조가 즐겨 사용해온

인간의 살의와 원령의 저주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왠지 사우의 마에서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어느 새 빨려 들어가고 마는 극한의 공포라든가,

인간의 살의와 원령의 저주를 자연스럽게 믹스시킨 탁월한 필력,

그리고 반전과 반전 끝에 드러난 진실이 전해주는 충격 등

미쓰다 신조 표 호러물만의 특별함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고 할까요?

 

오히려 단편이라면 슌이치로의 매력을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타인의 죽음을 내다보는 능력은 사건의 발단에서는 위력을 발휘하는 설정이지만,

장편의 이야기를 끌고 가려면 그 이상의 매력과 능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어쩌면 사상학 탐정이라는 캐릭터 자체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려면 지금의 슌이치로만으로는 조금 무리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입니다.

전작에서부터 언급된 치명적이고 엄청난 힘을 지닌 적이 언제쯤 등장할지 모르겠지만,

그 대결에서만큼은 슌이치로가 장편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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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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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밤새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맡을 수 있는 고유한 향기가 물씬 배어있지만,

동시에 일종의 위화감(?) 같은 것도 곳곳에 숨어있는 듯한 작품입니다.

 

● ● ●

 

자정을 코앞에 둔 도시의 밤.

마치 드론 같은 존재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 없는 의식이며, 어느 곳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일 뿐입니다.

자칭 우리라고 하는 그 시점은 어둠이 내린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찰합니다.

 

두꺼운 책과 담배와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밤을 새우는 19살의 아사이 마리,

아마추어 밴드에서 트럼본을 연주하며 사법고시에 관심을 둔 21살의 다카하시 데쓰야,

한때 잘 나가는 여자레슬러였지만 지금은 러브호텔의 매니저 일을 하는 가오루,

도망자 신세로 가오루의 러브호텔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특이한 이름의 고오로기,

마리와 동갑이지만 불법체류 신세로 매춘 조직에 얽힌 중국여자 궈돈리,

IT회사에 근무하며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수상쩍은 직장인 시라카와,

그리고 마리의 언니이자 무한 수면(睡眠) 상태에 빠져 있는 아사이 에리 등

도시의 이곳저곳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군상들이 우리의 눈에 비칩니다.

 

● ● ●

 

이야기는 인물 별로 토막토막 분절돼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고리들을 통해 정교한 원의 형태를 지닌 것 같기도 합니다.

밤이라는 특별한 시공간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들끼리 사소한 소품을 통해 촘촘히 연결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켜보는 사람은 크게 마리와 그녀의 언니 에리입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마리와의 하룻밤 인연 때문에 우리의 시점에 포착되지만,

에리는 조금은 차원이 다른, 판타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목격됩니다.

마치 별개의 이야기처럼, 그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영원히 잠든 백설공주입니다.

에리의 이야기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판타지에 가까워서

독자에 따라 공감과 이입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런 불편함은 이야기의 끝에 가서 마리와 에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밝혀지면서 해소됩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난 마리와 다카하시가 해가 뜰 무렵 나름 각별한 관계가 되는 것 외엔

일반적인 소설의 서사를 따르는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조연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이

밤에만 어울리는, 밤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낮에는 전부 사라질 것 같은

그런 특별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풀어놓습니다.

밤은 혼자서만 간직해온 비밀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훌쩍 털어놓게 해주기도 하고,

모두가 아는 이야기임에도 새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같은 사람에게라도 낮에는 결코 내보일 수 없는 표정이나 행동이

밤의 영역에서는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터져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프터 다크는 읽는 내내 왕가위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화려함과 빈곤, 타락과 쓸쓸함으로 가득 찬 밤의 도시 안에서

때론 무게감 없는 부유물처럼, 때론 폭발직전의 폭탄처럼 떠다니는 인물들을 그려냈던

‘2046’이나 중경삼림의 이미지들이 수시로 파편처럼 머릿속을 날아다녔습니다.

캐릭터나 스토리가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도시의 야누스 같은 밤 풍경과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이 깃든 인물들의 눈빛만큼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처럼 호불호가 갈릴 여지도 많고,

다 읽고 난 후에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야?’라고 자문할 독자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프터 다크는 어떤 교훈이나 특별한 인상,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마리와 에리를 지켜보는 우리의 시점처럼 독자는 그저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늦은 시간, 번화한 거리 속 외진 계단 같은 곳에 앉아서 네온사인과 자동차 불빛을 배경삼아

쾌락이나 고통, 사랑이나 슬픔 따위에 푹 빠진 다양한 군상들을 지켜보는 느낌이랄까요?

,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몰래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저 그렇게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다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을, 누군가에게는 한심함, 누군가에게는 애증을 느끼면 그만입니다.

어떤 때는 그런 무심한 바라보기 자체가 너무나도 매력적일 때가 있으니까요.

애프터 다크는 그런 식의 바라보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키는 집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이니시에이션 스토리라고 얘기했는데,

솔직히 읽으면서도 이니시에이션 스토리,

즉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고통스런 통과의례의 이야기라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고통은 성장통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진짜 어른으로 막 진입한 후에야 비로소 마주치게 되는 현실들 그것이 제도이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간에 때문에 파생된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좀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루키의 마니아는 절대 아니지만,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작품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음험하게 숨어있던 관음증의 일부가 묘한 방식으로 충족됐기 때문입니다.

소음과 음란함에 빠진 도시라도 좋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도시도 좋고,

그 어디에서든 우리같은 관찰자가 돼서 하룻밤쯤 차분히 이런저런 사람들을 지켜본다면

내 안에 숨어있던 건전한(?) 관음증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누구든 애프터 다크같은 이야기 한 편쯤 뽑아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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