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걸스
로렌 뷰키스 지음, 문은실 옮김 / 단숨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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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의 대공황 시대, 시카고에서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가던 하퍼 커티스는

우연히 찾아들어간 낡은 집 더 하우스에서 낯설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더 하우스는 하퍼에게만 들리는 특별한 목소리를 통해

각자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9명의 빛나는 소녀를 살해하라고 지시합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명령에 순종한 하퍼는 더 하우스의 출입문을 통해 시간여행을 하며

멀리는 1993년까지 날아가 소녀 9명을 잔혹하게 살해합니다.

하지만 단 한 명, 커비 마즈라치에 관한 한 그는 미션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우연과 행운 덕분에 하퍼가 남긴 치명적인 상처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이제 신문사 인턴기자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가 연쇄살인범임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뒤늦게 커비의 생존을 알게 된 하퍼는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또다시 1993년으로 돌아오고

커비는 자신의 멘토인 왕년의 사건기자 댄과 함께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 ● ●

 

시간여행을 하는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설정만으로도 기대를 갖게 만든 작품입니다.

더구나 일반적인 연쇄살인범의 설정과는 달리 하퍼 커티스는 어떤 영적인 힘,

더 하우스가 내뿜는 기괴한 힘에 이끌려 목적과 이유도 모른 채 소녀 살해에 나섭니다.

더 하우스는 제목도 비슷한 스티븐 킹의 샤이닝에 등장하는 오버룩 호텔을 연상시킵니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전지전능한 신처럼 존재하며 하퍼를 조종하는 더 하우스

악마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섬뜩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범행의 대상이 된 소녀들은 샤이닝 걸스, 즉 빛나는 소녀들이라 지칭되지만

그녀들이 빛나는 이유에 대해 더 하우스는 특별히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하퍼 역시 왜 하필 그녀들을 죽여야 하냐고 더 하우스에게 묻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더 하우스가 제공한 시간여행 속에서 그녀들을 난자하고 훼손할 뿐입니다.

마치 신 내림과 비슷한 과정이라 할까요?

 

유일한 생존자인 커비가 자신의 사건을 취재했던 왕년의 사건기자 댄의 인턴이 되어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탐문과 자료조사를 통해 범행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전형적인 스릴러 공식을 따르고 있어 나름의 재미를 전해줍니다.

하지만 무려 60년 이상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하퍼의 꼬리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 하퍼의 비현실적인 시간여행 연쇄살인을 알아낸다고 해도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스스로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파트너인 댄은 물론 세상에게 어떻게 납득시킬지 등

커비 앞에 놓인 난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현실 속 수사와 판타지 속 연쇄살인이 병행되면서 결말에 대한 궁금함은 최대한 증폭됩니다.

 

목차를 보면 1929년부터 1993년까지의 에피소드가 무질서하게 배치돼있는데,

처음엔 꽤나 혼란스러운 책읽기가 되겠다고 생각됐지만,

읽다 보면 그런 배치가 의외의 재미를 준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끔 목차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며 연대를 확인하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그런 행위 자체가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의 관계를 되새기게 만들면서

색다른 긴장감은 물론 독자의 주의를 수시로 환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더 하우스라는 신비로운 존재, 그로부터 부여받은 하퍼의 욕망이 배제된 연쇄살인,

그리고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단서들을 쫓는 커비와 댄의 콤비 플레이 등

여느 스릴러와도 차별화되는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뭔가 모호하고 설명되지 않는 더 하우스의 존재와 범행 동기는

장점이면서 동시에 아쉬운 점으로 남은 것이 사실입니다.

스티븐 킹이 오버룩 호텔의 캐릭터를 위해 적잖은 분량과 에피소드를 준비한 반면,

로런 뷰커스는 더 하우스의 캐릭터를 독자들의 상상력에 전적으로 맡겼다고 할까요?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린다면 아마 이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처음 만난 작품이지만 그래픽노블과 시나리오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을 해온

작가 로런 뷰커스의 독특한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이 돋보였고,

그녀의 또 다른 판타지 역시 기대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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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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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카일러 굿윌과 머시 스톤 사이에서 태어나

80여 년의 삶을 살다 간 데이지 굿윌 플렛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다이어리라는 제목을 갖고 있지만, 일기, 편지, 독백, 3인칭 서술 등

각 챕터마다 내용에 어울리는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산업과 과학, 사회와 문화 등 전 분야에서 격변을 겪던 20세기의 시작 무렵에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출발한 한 여자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지금의 시대를 사는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에피소드들 부부, 가족, 친구, 사랑, 애증 등 이 등장합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보이는 엄청난 가계도(家系圖)가 암시하듯

이야기는 데이지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평범한 채석꾼에서 최고의 석공 자리에 올랐지만 딸에게는 가깝고도 먼 존재였던 아버지,

데이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줬지만 정작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고 숨을 거둔 어머니,

오갈 데 없던 데이지를 보살피며 키워준 양어머니,

2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이지의 인연이 된 남편,

그리고 늦은 나이에 얻은 좌충우돌 세 자녀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고,

동시에 데이지의 평생의 절친들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맛깔난 조연 역할을 해줍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거나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여자의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서 더 공감과 이입의 폭이 넓었던 것 같습니다.

, 나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 이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맞이하겠구나, 라는 공감,

, 딱히 본받거나 존경할만한 미덕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어머니, 아내, 딸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이입이

잔잔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꾸준히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 바커 플렛이 식물과 정원을 사랑했던 사람이라 당연한 결과겠지만

자연과 식물에 관한 상세하고 꼼꼼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녀가 태어난 캐나다 작은 마을이나 삶의 터전을 잡은 여러 곳의 자연 풍광,

또 남편을 잃은 뒤 그녀의 삶을 빛나게 해줬던 꽃과 식물에 대한 애정은 특히나 각별한데

그것들은 단지 소품이 아니라 데이지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들이 돼줍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성실한 자료조사의 결과라고만 볼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작가의 애정 어린 묘사들이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깊게 음미하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르물의 빠른 책읽기에 익숙해져서 처음엔 좀 곤혹스러웠지만,

일부러 읽는 속도를 줄이자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느린 책읽기가 어려운 독자들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롤러코스터 같은 진폭이나 극적인 갈등보다는 제목처럼 다이어리에 충실한 내용인데다,

20세기 초반의 올드함 또는 고전미를 연상시키는 아날로그 식 문장들로 쓰인 탓에

폭풍 같은 서사와 어느 정도 막장스러운 가족사를 기대한 독자들이나

쉽고 간결한 현대의 문장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겐 자칫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잔잔한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듯 차분하게 데이지의 삶을 지켜볼 준비가 돼있다면,

또 작심하고 안전속도이하로 읽어갈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 가운데 삶에 대한 긍정과 찬미라는 찬사가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평이라는 생각입니다.

데이지는 아주 찰나의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결코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삶에 대해 긍정하거나 찬미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자신 앞에 주어진 고난과 고비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며

그 결과에 대해 때론 웃기도, 때론 눈물짓기도 하면서 8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녀는 낙관주의자도, 희망론자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한 것은 작가의 말처럼 슬픔의 정서였고,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아주 많이 닮아있습니다.

만약 데이지가 고난 속에서도 삶을 예찬하는 인간극장의 주인공으로 미화됐더라면

아마 이 작품의 미덕은 상당 부분 훼손됐을 것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언젠가는 이만한 깊이와 굴곡까지 지니진 못하더라도

내 곁을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다이어리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기억을 파내려가다 보면 스스로도 깜짝 놀랄 별의별 해프닝들이 많이 떠오를 것이고

거기에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들과 나눴던 희로애락을 평범한 문장으로라도 엮어놓고 두고두고 읽어볼 수만 있다면

그저 미미한 삶일지라도 나름의 의미를 찾고 잠시나마 빙긋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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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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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번역하신 양윤옥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일본 블로거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이 작품의 제목이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그런 생각일랑 접게 해줄 테니.”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기꺼이 도와줄 테니.”

 

저 역시도 그랬지만,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후자 쪽의 이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역시 읽는 내내 등장인물이나 줄거리 모두 기대한 대로 전개됐지만,

마지막까지 읽은 후에는 전자와 후자가 절묘하게 섞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훤칠한 외모와 달리 굼뜨고 요령 없고 덤벙대는 결점을 지닌 데다

친구도 없고, 똑똑하고 잘난 가족들과는 절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며,

입시를 코앞에 둔 삼수생이면서 아르바이트로 생계까지 챙겨야 하는 도쿠야마 히사시는

머리도 나쁘고, 인내심도 없고, 게을러터지기만 한 내 인생은 절망적이야.”라고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21살 청년입니다.

 

그런 도쿠야마가 우연히 들른 단란주점에서 19살의 야마나카 하쓰미를 만납니다.

그녀가 준 명함에는 힘들거나 죽고 싶어지면 전화주세요. 언제든지.”라고 적혀있습니다.

도쿠야마는 대량학살, 고문, 강간 등을 다룬 책들과 호러DVD를 좋아하는 하쓰미가

처음엔 낯설고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금세 그녀에게 마음을 사로잡히고 맙니다.

 

죽음을 지상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온통 악의로 둘러싸인 염세주의의 화신인 하쓰미는

조금씩 도쿠야마의 몸과 마음을 잠식해갑니다.

거절하는 법도, 자신의 생각이나 소신을 당당히 밝힐 줄도 모르던 도쿠야마는

어느 순간인가부터 인격을 짓밟는 화법으로 상대방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가 하면,

희망이나 노력 등 긍정적인 가치관이란 그저 맹목적이고,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식욕과 성욕 등 모든 욕구는 그저 짜증나고 꼴사나운 일이라는 하쓰미의 지론에 동조합니다.

, 죽음만이 고통과 상처,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에 물들어갑니다.

 

하쓰미가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기꺼이 도와줄 테니.”라고 말하는 인물이라면,

직장 상사인 가타오카는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그런 생각일랑 접게 해줄 테니.”라고 말하며,

도쿠야마를 밝은 쪽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인물입니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두 여신을 연상시키는 하쓰미와 가타오카 사이에서

도쿠야마는 어느 쪽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렇듯 이야기는 한없이 어둡고, 엽기적이고, 파국을 향해서 치닫기만 하지만,

약해진 사람이 베갯머리에 놓고 되풀이해서 읽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변()

책 내용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 떠올라서 잠시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은 뒤에 저만의 방식으로 내린 해석을 풀어놓자면,

작가의 변은 여러분에게 파멸의 끝을 보여주겠지만 오히려 거기에서 희망을 찾아내라.”

속뜻이 담긴 역설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래 전 스무 살 무렵,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중 마지막 수록작 그해 겨울을 읽고 비슷한 경험을 했었는데,

한겨울 눈 덮인 산맥을 넘어 바다에 뛰어든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은 뒤

죽음에의 동경과 삶에 대한 애착이 동시에 몰려와 혼란스러운 한때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혼란을 종식시킨 것은 결국 역설의 힘이었는데,

말하자면 제대로 된 바닥을 쳐야 비로소 올라갈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조금 성격은 다르지만, 작가는 파멸의 끝 또는 진짜 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희망이라는 자신의 의도를 역설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하쓰미 식 염세주의도, 가타오카 식 희망론도 믿지 않는 나이가 된 탓에

19살의 하쓰미와 21살의 도쿠야마의 절박함 또는 확신이 크게 와 닿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그들의 파멸과 죽음에 대한 지론은 제법 솔깃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깨달음을 얻는 독자가 있을까봐 은근히 걱정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독자에 따라 하쓰미의 캐릭터나 신념, 가치관에 대해 공감 못하는 경우도 꽤 있을 것입니다.

, 부연 안개 속을 걷는 느낌으로 마지막 장에 이른 독자도 적잖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나름의 성찰과 고민 끝에 하쓰미의 몸과 마음이 죽음과 염세주의에 녹아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19살의 치기처럼 읽힌 점은 꽤나 아쉬웠습니다.

그녀의 천재성과 심오한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소품들은 조금은 작위적이었고,

그녀를 막다른 벽까지 몰아붙인 죽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에너지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가 내린 최종 선택의 이유도 쉽게 이해하긴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곳곳에서 ?”라는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특성 상 왠지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강박도 느껴졌고,

또 그에 대한 선명한 대답이란 존재해서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창조적 발상과 도전 정신이 깃든 완전한 신인을 대상으로 한 문예상 수상작이기에

일부 아쉬운 점들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용인하면서 차기작을 기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일 한국인 3세 작가라 좀더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싶은 작가입니다.

다음엔 발상과 도전을 넘어 한 단계 성장한 작품으로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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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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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부부를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잠적합니다. 그의 이름과 사진이 언론과 인터넷에 공개되고

전방위적인 수사가 진행되지만 범인은 성형수술까지 받으며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갑니다.

그리고 세 남자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어촌 마을에 흘러들어와 불우한 이력을 지닌 소녀 아이코와 인연을 맺는 청년 다시로,

게이들이 모이는 사우나에서 광고회사 직원 유마를 만나 그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는 나오토,

그리고 엄마의 바람기로 오키나와로 도망 온 이즈미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다나카.

 

하나같이 본명도, 이력도 분명치 않은 존재들이라 그들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습니다.

우연처럼 그들의 이미지는 공개수배 프로그램에 등장한 범인의 인상과 비슷합니다.

의심은 사소한 데서 출발하게 되고,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포는 의심을 무한대로 증폭시키고, 증폭된 의심은 예상치 못한 파국을 초래하고 맙니다.

 

● ● ●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항간에 떠도는 살인사건 수배범과 비슷한 인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가 의심스럽고 무섭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작품의 제목은 부부 살인범이 현장에 피로 남긴 두 글자 분노에서 따온 것이지만,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상대방에게 드는 분노라는 감정,

그런 상대방을 계속 의심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부부 살인범을 쫓는 미스터리의 골격을 지니고 있지만

주된 서사는 이처럼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가출을 밥 먹듯 하며 몸과 마음을 망쳐버린 아이코의 아버지 요헤이는

딸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는 다시로를 믿고 그가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지만

과거를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 그에 대한 의심이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살인범이라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딸의 인생은 복구불능이 되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몸을 내맡기고 살던 유마는 겉으론 당당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게이입니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어진 나오토를 만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나오토가 살인범이라면, 그래서 그가 체포된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기득권은 물론 삶 자체가 파탄날 수도 있습니다.

엄마의 바람기 때문에 야반도주하듯 오키나와로 흘러들어온 이즈미에게

외딴 섬에서 만난 다나카는 신비하면서도 의지처가 되는 인물입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보이지만 이즈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머물던 외딴 섬에 남겨놓은 흔적은 이즈미를 큰 혼란에 빠뜨립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야기하는 딜레마는 거의 도박에 가깝습니다.

어중간한 타협이란 없으며 전적으로 도 아니면 모인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세 남자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은 결과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게임 앞에서

때로는 무력감을, 때로는 자기혐오감을 느끼며 선뜻 베팅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세 남자의 이야기는 제각각의 궤도를 위태롭게 달리다가

마지막에 살인범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각각의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범인을 쫓는 형사에게도 비슷한 딜레마를 던져줌으로써

세 남자의 이야기와 병행하는 또 다른 긴장감을 제공합니다.

유기 고양이 때문에 인연을 맺은 여자와 점차 깊은 관계에 빠져들지만

그는 그녀에 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찰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도 있지만 그녀를 믿어보기로 결심합니다.

세 남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채 수사에 참여하는 그를 지켜보는 것은

한편으론 그 끝이 궁금해지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워 견딜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시다 슈이치가 펼쳐놓은 설정은 이해하기 어렵지도, 예상하기 힘들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짐작한 대로 흘러가지만,

막상 엔딩에 이르러 마음에 와 닿는 무게감은 짐작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수배범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특별한 설정이지만

그로 인해 겪는 딜레마나 갈등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그런 감정들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으면서도 120%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분노를 다루되 분노 자체를 문장 속에 우겨넣지 않습니다.

분노는 고스란히 독자 스스로 느낄 몫으로 남겨놓습니다.

마음이 느끼는 무게감이 짐작 이상으로 묵직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역시 요시다 슈이치, 라는 평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의 고유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날이 조금 서늘해졌을 때 읽었다면 엔딩에서 느낀 묵직함이 조금은 덜 부담스러웠겠지만

고온다습한 날씨 덕분에 분노라는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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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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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편혜영과 한강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완독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첫 작품을 읽은 것이

1년 전, 그러니까 아오이 가든이 작년 8, ‘여수의 사랑이 작년 10월의 일입니다.

편혜영의 두 번째 작품집인 사육장 쪽으로를 끝내는데 무려 1년이 걸렸습니다.

장르물에 대한 편식과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어쩌면 읽고 싶은 욕망과 피하고 싶은 무의식의 충돌이 진짜 이유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를 찾아보면 아오이 가든은 말할 것도 없고,

사육장 쪽으로역시 극과 극을 달리는 서평들이 게시돼있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체, 악취, 피와 뼈로 범벅이 된 불편한 풍경 속에 지어진 아오이 가든에 비해

사육장 쪽으로의 경우 평범한 일상을 무대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리적인 반발감과 문학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무의식 속 어딘가에 저 역시 그런 반발감과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하루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단편집을 1년을 끌어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썩은 저수지 인근의 폐가, 역병에 잠식된 채 하늘에서 개구리가 쏟아지는 도시 등

명백히 인공적이고 혐오감을 주는 아오이 가든의 공간들에 비해

사육장 인근의 전원주택, 도심 속 아파트 단지, 재개발 중인 소도시, 평범한 기업 사무실 등

사육장 쪽으로의 공간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또는 우리가 직접 머물고 있는 곳들입니다.

물론 늑대 사냥이 벌어지는 도시, 유적지로 둘러싸인 채 모든 것이 정체된 도시처럼

여전히 어딘가 불온한 기운이 깃든 연극무대 같은 공간도 일부 등장하긴 합니다.

 

등장인물 역시 검은 물과 붉은 피 속의 시체들과 뒹굴던 아오이 가든속의 별종들 대신

도시의 한복판에서 마음은 분열되고, 몸은 피로에 찌든 채 하루하루를 무력하게 살아가는,

주변에 흔하게 널린 평범한 인간들 또는 우리의 자화상 같은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몇 번씩 취소됐던 여행을 드디어 떠나게 된 청춘남녀,

감언이설에 속아 신작로 곁의 전원주택으로의 이사를 감행한 파산 직전의 가장,

도시의 유적지 때문에 집수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

인형의 탈을 쓰고도 늘 웃어야만 하는 동물원의 퍼레이드 요원들,

직장과 가정의 붕괴를 코앞에 둔 위기의 중년남자 등

대체로 일그러진 현대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겪는 사건도 아오이 가든에 비하면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물들은 제각각 희망에 들떠 모종의 일을 벌입니다.

미뤄뒀던 여행을 떠나고, 전원주택이라는 판타지를 쟁취하고, 망가진 집을 고치고,

난생 처음 겨냥할 목표가 생기고, 승진을 위해 불법적인 미션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치고,

닭장 같은 삶을 하룻밤이나마 잊게 만들어주는 게임 친구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이들의 희망은 어이없는 실수로 망가지거나

애초 그렇게 운명 지어진 것처럼 갈수록 진창을 헤매며 끝없는 늪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전원주택은 사육장을 탈출한 개들이 날뛰는 악몽의 무대가 되고,

여행은 불의의 사고로 엉망진창이 되며, 망가진 집은 고칠수록 더 망가지고,

상사의 기쁨과 자신의 승진을 위해 전력을 다한 서류는 졸음 덕분에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수록작까지 다 읽고 나면 왜 사육장 쪽으로를 표제작으로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우선, 등장인물 대부분이 처한 현실적 공간 고속도로, 전원주택, 동물원, 아파트 단지,

회사 사무실, 재개발 지역 은 하나같이 닭장이나 사육장과 닮은꼴들입니다.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친다고 해도 더 나은 현실과 만날 가능성이 없는 곳들입니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비좁은 닭장과 사육장에 갇힌 채,

삶과 죽음은 물론 희망과 고통, 감정마저 전지전능하게 통제하는 주인 밑에서

자신의 발을 쪼아대며 출구 없는 먹먹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심지어 그리고 그들은 그 뒤로도 여전히 불행할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절대 해소되지 못할 불편함만 잔뜩 남겨놓은 채 이야기는 막을 내려버립니다.

이 남겨진 불편함은 편혜영의 비호감 편에 선 독자들에게는 짜증과 찜찜함으로,

호감 편에 선 독자들에게는 그녀만의 특별한 미덕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아오이 가든의 충격을 한 번 더 맛보고 싶었던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과 실망감을 줬겠지만,

아마 두 번째 작품집에서도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보였다면,

개인적으론 그것이 편혜영의 한계라고 규정지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범한 인물과 일상 속의 이야기를 담은 사육장 쪽으로

전혀 모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처럼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 많았고,

다음 작품에서는 그녀가 또 어떤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까?”, 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줬기에

오히려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진 작품집입니다.

 

개인적인 선호작을 꼽아보자면,

아오이 가든의 후계자라는 면에서는 사육장 쪽으로밤의 공사가 기억에 남았고,

무심한 얼굴로 잔인한 현실을 풀어놓은 분실물금요일의 안부인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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