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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심판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8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오르드벡에는 특별한 환영(幻影)을 보는 신기(神氣)를 지닌 인물이
오래 전부터 세대가 바뀔 때마다 대물림돼왔습니다.
그들이 보는 환영은 성난 군대, 또는 대규모 색출단, 메니 엘르켕이라 불리는 기마부대로
‘말들도 기마병들도 전부 해골 같고 팔다리가 일부 떨어져나갔으며,
사납게 울부짖으며 이승을 떠도는 반쯤 썩어 문드러진 죽은 자들로 편성된 군대’입니다.
천 년 전부터 전설 아닌 전설로 오르드벡의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뿌려온 성난 군대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벌을 피해간 현실 속 인물들을 참혹하게 심판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환영을 보는 인물은 성난 군대에게 끌려가는 현실 속 인물도 함께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 속 인물들은 3주 안에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파리의 강력계 서장 아담스베르그는 우연과 운명이 겹친 인연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됩니다.
현재의 영매인 리나 방데르모는 3명의 남자와 정체불명의 한 사람이
성난 군대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하는데,
그들이 차례로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수사는 진전은커녕 막다른 골목을 향할 뿐입니다.
‘옮긴이의 말’대로 “반송장의 모습을 한 기마병들이 정말 죄 지은 사람들을 데려간 것인가?
아니면 성난 군대의 전설 뒤에 숨어 누군가 끔찍한 음모를 꾸미는 것인가?”라는 의문 속에
독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채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모호한 분위기입니다.
호러물에나 나올 법한 성난 군대는 공포와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건은 명백히 현실 속에서, 그것도 분명한 인간의 소행으로 벌어집니다.
그 어떤 명탐정이라도 도대체 어디부터 파헤쳐야 할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이 모호한 사건을 수사하는 파리 경찰들의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인 아담스베르그 서장은 성난 군대만큼이나 특이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수사에 관한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세워본 적도 없거니와
금방 들은 지명이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곳에서 추리를 시작하는 4차원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구름에 대고 삽질하는, 추리의 ‘추’자도 모르는 무식한 허깨비!”라고 비난받을 정도로
그의 추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조차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의 휘하에 있는 형사들도 하나같이 괴짜 같은 개성을 자랑하는데,
백포도주를 입에 달고 사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갑자기 픽 쓰러져 잠드는 수면 과다 환자,
거구를 자랑하는 여자 경위, 비상식량을 사러 슬그머니 사라지는 허기증 환자 등
각 경찰서에서 너무 튄다는 이유로 왕따 당한 인물들만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수사 활동까지 기행에 가까울 정도로 특이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름의 장점들을 모아 아담스베르그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괴짜 같다고 가볍게만 여겨졌던 개성들은 어느새 각자만의 특별한 무기가 되어
사건 현장에서 빛을 발하곤 합니다.
이들의 캐릭터를 더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낯선 프랑스 식 문장과 표현들입니다.
한참 사건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니 어깨에 말벌이 앉았어.”라는 식으로
정말 맥락도, 뜬금도 없는 이야기를 툭툭 던지곤 합니다.
수시로 곁길로 빠져 코미디 같은 엉뚱한 수다를 잠시 늘어놓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본 이야기로 돌아오는 능청맞음은 처음엔 낯설고 혼란스럽게 느껴지지만
점차 적응하고 나면 영국식 유머와는 또다른 프랑스 소설 특유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집중을 필요로 하는 후반부에서도 여지없이 이런 ‘곁길’이 나타나곤 하는데,
아무래도 자주 마주치다 보면 좀 가벼운 짜증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작가는 “꿈에서 가능한 것들이야말로 내 소설의 영토 안에서 현실이 된다.”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성난 군대의 존재가 좀더 부각된,
그러니까 미쓰다 신조 식 호러로 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이 진하게 남았던 작품입니다.
사실 제일 궁금하고 기대했던 것은 성난 군대의 존재와 역할이었는데,
제 바람만큼 분량이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해서인지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그보다 더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 아담스베르그 서장의 수사 기법입니다.
어딘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외형도 좋고,
자신만의 독특한 추리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은 다 좋은데,
그 방식이 직감이라든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벼락같은 깨달음’을 통해 이뤄진다든가,
앞뒤 맥락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거의 비약에 가까운 상상력을 통해 추리를 완성하는 점은
독자를 꽤나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전 역시 ‘벼락같은 깨달음’과 ‘비약에 가까운 상상력’에 의해 설명되다 보니
나름 힘과 매력을 지닌 반전임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장황할 정도로 사건의 배경과 동기, 수법과 비밀 등에 대해 자신의 추리를 설명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런 추리가 가능했는지 몇 번을 되읽어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점이 특징이고 매력인 캐릭터인가보다.”라든가,
또는 “성난 군대 자체가 환영이니까 이런 수사법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습니다.
최근 읽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개인적인 취향을 많이 탈 수 있는 작품인 것 같고,
호불호도 극명하게 나뉠 것 같은 작품입니다.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지만, 현실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는 독자에겐
프랑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작가의 필력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