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2 - 시크릿 스피치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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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53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무대로 한 시리즈 첫 작품 차일드 44’에서 냉혹하고 가차 없는 임무수행으로 일찍이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정보기관 요원 레오는 소년소녀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반역자로 낙인찍힐 위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고, 그 공을 인정받은 레오는 시크릿 스피치의 시간적 배경인 1956년 현재, 비공식 조직이긴 해도 살인수사과에서 당당히 범죄수사를 맡고 있습니다.

 

1956년은 소련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스탈린 사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20차 공산당 대회 비공식 석상에서 스탈린을 정면 비판하는 충격적인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의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소련 내부의 치열한 권력 갈등은 물론 동유럽에서의 끔찍한 유혈사태까지 초래했습니다. ‘시크릿 스피치는 바로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을 지칭하는 제목인데, 스탈린 집권 시절 국가에 의해 자행된 체포, 고문, 처형 등 구체적인 정황이 적힌 문서가 연설문과 함께 누군가에 의해 여기저기 배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연설문의 배포와 함께 과거 폭압적인 독재에 희생됐던 자들의 복수로 추정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권력집행자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는데, 당시 유능한 정보기관 요원이었던 레오 역시 그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7년 전, 레오로 인해 남편과 태아까지 잃었던 한 여자가 레오 앞에 나타나 그의 가족을 위협하며 수용소에 갇혀 있는 자신의 남편을 구해올 것을 요구합니다.

 

흐루쇼프 연설이 초래한 사회적 혼돈과 복수의 퍼레이드, 그리고 거기에 레오와 그의 가족들이 숙명처럼 말려든다는 설정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아무리 레오가 과거를 청산했다고 해도 그가 남긴 상처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를 향해 복수하려는 자들을 악당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좋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자매를 입양하여 죄책감을 보상받고 싶었지만 오히려 부모를 죽인 원수로 낙인찍힌 채 증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레오의 처지는 안쓰러움과 함께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을 고조시킨 설정입니다.

 

하지만 시리츠 첫 편인 차일드 44’의 후광이 너무 커서였을까요? 매력적인 초반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 않았고, ‘차일드 44’에서 만났던 카리스마 넘치는 레오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탓에, 개인적으로 시크릿 스피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또 유일한) 이유는 현실감 부족한 사건과 인물들입니다. 레오가 지키려는 가족은 절대 그에게 협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오와 불신을 지닌 채 그를 죽일 생각까지 품습니다. 갈등 자체가 수긍 가능한 선을 넘어서자 뭐 하러 자신을 증오하는 가족을 구하러 저렇게까지 애를 쓸까?”라는, 반발심 섞인 의문이 수시로 들곤 했습니다.

, 평범한 인물들이 갱단 보스 혹은 치명적인 살수(殺手)가 된다는 설정도 레오의 가족 지키기만큼이나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작위적이었던 건 역시 부자연스러운 해피엔딩입니다. 수백 페이지에 걸쳐 눈덩이처럼 불어난 갈등을 억지로 봉합한 것은 차일드 44’얼음 속의 소녀들에서 봤던 작가의 필력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가족을 찾기 위해 레오가 뛰어들어야 했던 무수한 난관들 역시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탈출해도 주변의 냉혹한 자연환경 때문에 살아남을 길이 없는 최악의 수용소, 그곳으로 가기 위해 차가운 폭풍과 끔찍한 폭력에 맞서야 했던 수송선에서의 여러 날들, 전운이 감도는 헝가리까지 날아가 벌이는 가족 찾기와 복수극의 공허한 하이라이트 등 스케일과 액션을 위해 무리하게 시공간을 확장시킨 듯한 설정들은 장면 하나하나는 매력적이었지만, 정작 앞뒤 맥락까지 고려해서 되읽어보면 이야기의 쫀쫀함과 사실감을 떨어뜨린 과대포장일 뿐이었습니다. 캐릭터나 사건에서 과대포장만 걷어냈다면 전작인 차일드 44’ 못잖은 매력을 유지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은 더 배가됐습니다.

 

시크릿 스피치자체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전작이 남긴 기대감 때문에 더 큰 실망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톰 롭 스미스의 필력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닌 만큼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에이전트 6’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진짜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레오의 마지막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서라도 당장 에이전트 6’를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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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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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비틀어진 신념, 평범하지 않은 가치관, 집착에 가까운 자기애(自己愛)...

 

조금이라도 임계점을 넘어가버리면 그런 마음을 지닌 주인을 폭발시키거나

절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게 만들어버리는 위험한 요소들입니다.

야경에 수록된 6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때로는 스스로, 때로는 타인에 의해 임계점을 넘어간 신념과 가치관과 자기애로 인해

자신을 파괴하거나, 타인을 망가뜨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하게 됩니다.

 

소심하지만 무모하고, 거기에 총에 관한 집착까지 겸비한 신참 경찰,

뛰어난 미모의 유전자와 파괴적인 속성까지 공유한 아름다운 어머니와 두 자매,

도시에서 종적을 감춘 뒤 자살로 유명해진 외딴 산속 온천여관의 종업원이 된 여자,

실적과 집념에 사로잡힌 채 거대한 도박을 감행하는 해외주재원,

추락사고가 빈발하는 절벽 근처의 인적 없는 휴게소를 홀로 지키는 할머니,

어딘가 고풍스러운 면모를 지녔지만 결국 살인범이 된 하숙집의 젊은 여주인 등

설정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이나 광기를 내뿜는 인물들이 6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야경을 읽은 뒤끝은 마치 결론 없는 괴담을 읽은 것처럼 기묘할 따름입니다.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 벌어질 이야기가 더 궁금해집니다.

수록된 작품마다 미스터리의 요소를 품고 있어 나름의 반전과 충격을 전하기도 하지만,

이런 애매한 독후감이 드는 이유는

작가의 방점이 미스터리 이면에 있는 평범하지 않은 심리에 찍혀있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딱히 사이코패스도,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볼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마음의 모양새와 행로는 꽤나 파격적입니다.

마음만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철저히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때론 공감이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수시로 ()는 왜?”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지만,

한두 작품 외엔 대부분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뭐야?”라는 의문은 들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작품만 빼고..^^)

작가는 답을 알려주진 않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독자에게 던져줍니다.

등장인물과 비슷한 모양새의 마음을 지닌 독자라면 공감을 넘어 열광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증오 또는 혐오감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명성에 비해 직접 읽어본 작품이 1~2권밖에 없어

야경이 요네자와 호노부의 전공 분야인지 일시적 외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전부 시리즈에 앞서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이 어떤 내용일지 급 궁금해졌습니다.

야경에서 느낀 기묘함을 다시 맛볼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더욱 반가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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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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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메르세데스 차량으로 군중들을 덮치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최악의 소시오패스와

이 사건을 미결로 남긴 채 퇴임한 전직 경찰과의 대결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일그러진 가족사에 타고난 소시오패스 기질까지 갖춘 브래디 하츠필드는

자신이 일으킨 사건을 수사하다 퇴직한 형사 호지스에게 조롱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냅니다.

당초 목적은 그의 우울증과 적막감을 부추겨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꺼져가던 호지스의 에너지를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

 

노련함과 경험으로 중무장한 호지스는 거꾸로 브래디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경찰에 알리지 않은 채 전도유망한 흑인 청년 제롬,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지만 IT 능력자인 홀리의 힘을 빌려 비밀수사를 벌입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압박당하던 브래디는 미련 따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 원대한 계획, 즉 수천 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희대의 사건을 기획함으로써

호지스를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 ● ●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라지만 주인공의 직업이 전직 형사라는 점을 제외하곤

폭발 직전의 긴장감, 냉소적인 유머감각, 능청맞을 정도로 물 흐르듯 굴러가는 문장들,

그리고 후반부에 폭주하며 급가속 되는 스릴감 등

그의 전작들이 보여준 미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낯익은 작품입니다.

 

사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업계 최고수인 스티븐 킹이

왜 진작 그만의 개성이 녹아있는 명탐정 캐릭터를 탄생시키지 않는지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그의 첫 탐정 캐릭터가

60을 훌쩍 넘긴데다 심장이 갑자기 멈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고도 비만의 퇴직 경찰이라는 점은 작은 충격과 함께 더욱 큰 의문을 던져줬습니다.

필립 말로나 해리 보슈나 패트릭 켄지처럼

좀더 하드보일드하고, 시크하고, 거칠지만 똑똑한 탐정을 기대했던 탓일까요?^^

 

킹은 그의 첫 탐정에게 슈퍼맨의 능력 대신 노련함과 통찰력이라는 미덕을 부여했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지나온 인생을 후회할 줄 아는 인간미를 얹어 놓음으로써

폼나는 탐정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는 배신했지만,

대신 그 어느 탐정보다 인간적이고, 응원해주고 싶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비주얼이나 나이 때문에 가끔 아쉽거나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호지스 형사의 수사는 잔꾀나 행운보다는 무모한 돌직구의 냄새가 더 강합니다.

또한 고집스런 원 맨 밴드가 아니라 남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가 하면,

잘 모르거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솔직함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부족한 점 투성이인 캐릭터 덕분에

소시오패스를 향한 그의 집념은 더 진정성 있게 그려졌고,

그가 수사과정에서 겪는 굴곡들은 환호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이 호지스 형사에게 준 너무나 큰 시련은

솔직히 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할 정도로 말이죠..)

 

킹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샤이닝닥터 슬립’, ‘조이랜드

읽은 작품마다 등장했던 일그러진 가족사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특히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나름의 핸디캡을 부여함으로써

호지스 형사 대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대결 구도 외에도 풍성한 읽을거리를 전해줍니다.

일에 전념한 덕분에 유능한 경찰은 됐지만 무정한 남편과 아버지가 돼버린 호지스 형사,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지만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청년 제롬,

자기 강박과 왕따라는 성장기 탓에 50이 다 되도록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홀리,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알코올중독자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화인(火印)같은 소시오패스 유전자를 자가발전 시킨 브래디 하츠필드 등

모두가 평범하지 못한 개인사 또는 가정사를 보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런 설정은 킹만의 독특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상투적인 느낌이 강한 설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과 차이점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킹의 화려한 비유와 표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뜻함과 시니컬함이 공존하는 문장들, 비속어를 전혀 비속하지 않게 만드는 표현들,

날이 잔뜩 선 유머와 덫이 숨겨진 해학 등을 통해

캐릭터들은 더 세심하게 묘사되고, 현장의 사실감은 고조됩니다.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싶어서 되돌아가 천천히 재독하다보면

빠른 계곡물처럼 흐르는 그의 문장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스티븐 킹답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엔딩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보니

호지스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네요.

60이 넘은 은퇴형사, 술 마실 나이도 안 된 파릇하고 똑똑한 흑인 청년,

그리고 어딘가 불안정한 폭탄 같은 40대 여인으로 구성된 호지스와 외인구단

후속작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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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의 시선
서미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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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디까지 내용을 소개하는 게 적당한지 가늠할 수 없어서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보니

스포일러가 아닐까?’라고 우려했던 내용이 전부 노출돼있어서 그 수준에 맞춰 서평을 씁니다.

조금이라도 찜찜한 분들은 제 서평은 물론 책 소개글도 건너뛰고 작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20년 전, 살인범의 만행으로 가족은 몰살당하고 본인도 27곳의 자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이제 서른이 된 여자 최아린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꿈을 통해, 또는 환시를 통해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서 아무 때나 불쑥불쑥 일어나곤 합니다.

그 능력은 때론 지독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지만,

때론 그 자체가 독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미쳤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진술이었지만 최아린의 특별한 느낌에 끌린 오성준 형사는

그녀가 언급한 장소에서 토막 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곤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의 특별한 능력을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야 할지,

숱하게 봐온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다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결국 최아린의 특별한 능력에 계속 의지하게 된 오형사의 수사는 나름 진전을 보이지만

어느 순간 오형사는 오히려 최아린이 유력한 용의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 ● ●

 

어떤 여자가 경찰서 강력반 형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꿈에, 살인사건 피해자가 암매장 된 곳을 봤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현실이라면 바로 여경들에게 끌려 나가거나 심하면 병원으로 직행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픽션에서는 심심찮게 다뤄지는 캐릭터이기도 하죠.

공교롭게도 유사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본 장르물을 본 직후에 이 작품을 보게 돼서

저도 조금은 얼떨떨한 느낌이었는데,

어쨌든 비현실적인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서미애 작가는 나름의 근거와 사례를 통해

아린의 특별한 능력을 제법 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이야기는 단순해보이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데,

그것은 현재의 토막 살인사건과 20년 전 아린이 겪은 사건이

현실과 꿈, 환시를 수시로 오가며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형사의 수사에 도움을 주는 현실의 아린이 있는가 하면,

꿈을 통해 20년 전 사건 당시의 참상을 낱낱이 지켜보는 아린도 있고,

길을 가다 문득 환시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보는 아린도 있습니다.

세 명의 아린은 챕터가 바뀔 때마다 예고도 없이 툭툭 나타나

독자로 하여금 시점과 화자가 제멋대로 달라진다고 느끼게 만드는데,

이는 당혹감과 호기심,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기 위해 적절한,

즉 작품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 구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미애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서평을 찾아보니 대체로 뛰어난 구성에 대해 호평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아린의 시선역시 그런 점에서 미덕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현실의 사건에 적절히 몰입하면서도

아린이 겪은 20년 전 사건의 비밀과 그녀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도

조금도 쉴 틈 없는 호기심을 갖고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나란히 병행되는 두 개의 서사가 그만큼 잘 교차하며 녹아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전직 심령술사이자 현재 아린을 돕는 루나의 캐릭터가

조금은 필요에 따라 설정된 것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진 점인데,

그 외엔 꿈이나 환시 능력에 대해 원초적인 거부감을 가진 독자만 아니라면

누구나 서미애 작가가 펼쳐놓은 정교한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절한 조연들의 배치와 무리하게 설정되지 않은 형사 캐릭터들,

반전은 물론 상처투성이 아린에게 희망의 끈을 남겨놓은 엔딩 등

많지 않은 분량에 여러 가지 미덕을 채워 넣은 서미애 작가의 필력 덕분에

그녀의 전작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린의 시선의 후속작, 그러니까 아린 시리즈가 출간될 수도 있다는,

조금은 이른 기대감도 갖게 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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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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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임에 따른 우울증과 폭음으로 알코올중독이 된 채 남편에게 버림받은 레이첼은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매일 기차를 타고 이미 해고된 직장으로 거짓 출퇴근을 합니다.

창밖으로는 전 남편 톰과 새 아내 애나가 살고 있는 자신의 옛집이 보이는가 하면,

늘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 찬 이웃집의 메건과 스콧 부부도 보입니다.

어느 날 메건이 낯선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곤 레이첼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알려야 된다는 강박에 빠집니다.

하지만 경찰도, 메건의 남편 스콧도 알코올중독에 빠진 레이첼의 진술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건 발생 당시 인근에서 피투성이가 된 레이첼을 봤다는 증언이 나오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이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자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 이릅니다.

기차 안에서 목격했던 메건 곁의 낯선 남자는 누구인지?

만취한 채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것 같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날 밤의 진실은 무엇인지?

혹시 자신이 메건의 실종에 관여된 것은 아닌지?

레이첼은 끝없이 자문하지만 알코올에 의해 사라진 기억은 전혀 되돌아올 줄 모릅니다.

 

● ● ●

 

이야기는 세 여자 레이첼, 메건, 애나가 번갈아가며 화자를 맡으며 전개됩니다.

시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세 명의 와 그녀들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구성은

독창적이면서도 궁금증과 긴장감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이야기는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는 미스터리의 구도를 갖췄지만

세 여자의 집착, 욕망, 기억, 거짓말 그리고 일그러진 사랑법을 그린 심리물에 가깝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망쳐버린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수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레이첼,

멈추지 않는 욕망의 화신이자 일그러진 사랑을 통해서만이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메건,

불륜을 통해 레이첼의 남자를 쟁취했지만 그녀의 광기 서린 집착이 두렵기만 한 애나 등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 여자의 삶은 폭발 직전의 불안정한 화합물처럼 위태롭고,

어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위화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 여자의 남자들 역시 비슷한 톤의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딘가 음험해 보이기도 하고, 거침없는 욕망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의혹을 사게 됩니다.

 

인간미나 사회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집착하고 욕망하는 가치관은 사랑과 가족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행복한 가족을 지키고 완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사랑과 가족의 결정체인 아기가 세 여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레이첼의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은 전 남편 톰과의 불임에서 기인했고,

애나의 행복과 불행은 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아기 때문이며,

메건의 집착과 욕망은 아기를 잃었던 비극적인 기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욕망은 소박했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고,

그 아이러니는 읽는 내내 목 안의 가시처럼 안쓰럽거나 불편하게 여겨졌습니다.

 

기찻길 옆에 자리 잡은 똑같은 모양의 집에 살며

운명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어야만 했던 세 여자의 무겁고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것도,

또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의문의 실종 사건의 진실을 캐는 일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비슷한 상황과 전개가 반복되면서 약간은 피곤한 책읽기가 됐다는 점입니다.

460여 페이지는 어지간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비하면 약소한 분량이지만

걸 온 더 트레인에 담긴 이야기의 규모에 비하면 조금은 과한 분량이라는 느낌입니다.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와 객관적인 판매량 지표를 보면서

한번쯤 고개를 갸웃했던 것도 동어반복과 분량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영미권 서평가들이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와 이 작품을 비교하며

어느 작품이 더 매력적인가, 라는 논쟁을 벌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미스터리와 반전에 관한 한 나를 찾아줘가 한 수 위라고 판단되지만,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을 살린 심리물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 작품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대등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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