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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 ㅣ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육중한 메르세데스 차량으로 군중들을 덮치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최악의 소시오패스와
이 사건을 미결로 남긴 채 퇴임한 전직 경찰과의 대결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일그러진 가족사에 타고난 소시오패스 기질까지 갖춘 브래디 하츠필드는
자신이 일으킨 사건을 수사하다 퇴직한 형사 호지스에게 조롱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냅니다.
당초 목적은 그의 우울증과 적막감을 부추겨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꺼져가던 호지스의 에너지를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
노련함과 경험으로 중무장한 호지스는 거꾸로 브래디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경찰에 알리지 않은 채 전도유망한 흑인 청년 제롬,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지만 IT 능력자인 홀리의 힘을 빌려 비밀수사를 벌입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압박당하던 브래디는 미련 따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 원대한 계획, 즉 수천 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희대의 사건을 기획함으로써
호지스를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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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라지만 주인공의 직업이 전직 형사라는 점을 제외하곤
폭발 직전의 긴장감, 냉소적인 유머감각, 능청맞을 정도로 물 흐르듯 굴러가는 문장들,
그리고 후반부에 폭주하며 급가속 되는 스릴감 등
그의 전작들이 보여준 미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낯익은 작품’입니다.
사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업계 최고수’인 스티븐 킹이
왜 진작 그만의 개성이 녹아있는 명탐정 캐릭터를 탄생시키지 않는지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그의 첫 탐정 캐릭터가
60을 훌쩍 넘긴데다 심장이 갑자기 멈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고도 비만의 퇴직 경찰이라는 점은 작은 충격과 함께 더욱 큰 의문을 던져줬습니다.
필립 말로나 해리 보슈나 패트릭 켄지처럼
좀더 하드보일드하고, 시크하고, 거칠지만 똑똑한 탐정을 기대했던 탓일까요?^^
킹은 그의 첫 탐정에게 슈퍼맨의 능력 대신 노련함과 통찰력이라는 미덕을 부여했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지나온 인생을 후회할 줄 아는 인간미를 얹어 놓음으로써
폼나는 탐정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는 배신했지만,
대신 그 어느 탐정보다 인간적이고, 응원해주고 싶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비주얼이나 나이 때문에 가끔 아쉽거나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호지스 형사의 수사는 잔꾀나 행운보다는 무모한 돌직구의 냄새가 더 강합니다.
또한 고집스런 원 맨 밴드가 아니라 남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가 하면,
잘 모르거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솔직함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부족한 점 투성이인 캐릭터 덕분에
소시오패스를 향한 그의 집념은 더 진정성 있게 그려졌고,
그가 수사과정에서 겪는 굴곡들은 환호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이 호지스 형사에게 준 너무나 큰 시련은
솔직히 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할 정도로 말이죠..)
킹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샤이닝’과 ‘닥터 슬립’, ‘조이랜드’ 등
읽은 작품마다 등장했던 일그러진 가족사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특히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나름의 핸디캡을 부여함으로써
‘호지스 형사 대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대결 구도 외에도 풍성한 읽을거리를 전해줍니다.
일에 전념한 덕분에 유능한 경찰은 됐지만 무정한 남편과 아버지가 돼버린 호지스 형사,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지만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청년 제롬,
자기 강박과 왕따라는 성장기 탓에 50이 다 되도록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홀리,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알코올중독자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화인(火印)같은 소시오패스 유전자를 자가발전 시킨 브래디 하츠필드 등
모두가 평범하지 못한 개인사 또는 가정사를 보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런 설정은 킹만의 독특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상투적인 느낌이 강한 설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과 차이점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킹의 화려한 비유와 표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뜻함과 시니컬함이 공존하는 문장들, 비속어를 전혀 ‘비속’하지 않게 만드는 표현들,
날이 잔뜩 선 유머와 덫이 숨겨진 해학 등을 통해
캐릭터들은 더 세심하게 묘사되고, 현장의 사실감은 고조됩니다.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싶어서 되돌아가 천천히 재독하다보면
빠른 계곡물처럼 흐르는 그의 문장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스티븐 킹답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엔딩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보니
호지스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네요.
60이 넘은 은퇴형사, 술 마실 나이도 안 된 파릇하고 똑똑한 흑인 청년,
그리고 어딘가 불안정한 폭탄 같은 40대 여인으로 구성된 ‘호지스와 외인구단’이
후속작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정말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