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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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2006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은 도조대학 부속병원을 무대로 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현직 의사 가이도 다케루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2014년까지 여덟 편의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됐지만 한국에 소개된 건 단 네 편뿐이고, 시리즈 외의 작품이 간간히 소개된 바 있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내놓은 나전미궁은 일종의 외전으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포함되진 않습니다.)

2010년 즈음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하곤 새로운 차원의 메디컬 미스터리에 흠뻑 빠졌지만, 한국에 마지막으로 소개된 아리아드네의 탄환’(시리즈 6)을 읽고 크게 실망한 뒤로 가이도 다케루를 잊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는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가 더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인상 깊게 읽은 시리즈인데다 초반에 읽은 작품들은 서평을 남겨놓지 않아서 오랜만에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재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도조대학 부속병원에는 미국에서 초빙한 외과의사 기류 교이치가 이끄는 바티스타 수술 팀이 있습니다. 바티스타 수술이란 확장형 심근증을 치료하기 위한 방식 가운데 하나로 난이도는 높고 리스크는 큰 수술입니다. 그러나 도조대학의 바티스타 수숱 팀은 성공률 100%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세 차례 연속 수술 실패로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위기감을 느낀 다카시나 병원장은 외래 책임자인 다구치에게 내부 조사를 의뢰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난이도 높은 심장수술 현장에서 연이어 발생한 사망사고의 진상을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내과의사 다구치 고헤이와 후생노동성 관료 시라토리 게이스케가 조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연속된 불운이거나 피할 수 없었던 의료 사고이거나 최악의 경우 누군가의 악의에 의한 사태, 즉 살인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진행되는 조사는 바티스타 수술 팀 전원에 대한 면담과 수술 현장 관찰로 이뤄집니다. 애초 내과의사 다구치 홀로 진행하던 조사가 벽에 부딪히자 병원장은 후생노동성 관료인 시라토리를 투입하고, 그때부터 견원지간마냥 사사건건 충돌하던 두 사람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진상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다구치는 출세 경쟁과 권력투쟁이 난무하는 대학병원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지금은 건물 한 구석에 자리한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에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직 중의 한직에 근무하는 내과의사입니다. 피를 보기 싫어해서 수술실과 가장 인연이 없는 신경내과를 선택한 그가 심장수술 현장에서 벌어진 사망사고를 조사한다는 건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그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시라토리 게이스케는 거창한 명함 속 직함과는 반대로 후생노동성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료 시스템에 반발하다가 한직으로 내쳐진 그는 의료과실 사망 관련 중립적 제3자 기관 설립 추진 준비실장이라는 허울뿐인 직책을 갖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직책 때문에 도조대학 부속병원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망사고 조사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바닥을 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입니다. 다구치가 다소 순진하고 소극적인 반면 시라토리는 안하무인에 지독한 독설로 중무장한 인물입니다. 이들은 조사 과정 내내 충돌과 반목을 거듭하면서도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여정을 겪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은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미스터리 가운데 유독 사회파 기질이 진하게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대학병원의 낡고 고루한 시스템, 질 좋은 논문이나 진정한 의료행위보다는 출세와 권력투쟁에 몰두하는 노회한 의사들, 후생노동성의 관료 시스템이 일으키는 부작용, 만성적인 의료인력 부족으로 인한 과부하, 소아 장기이식을 불법으로 규정한 모순적인 일본의 의료현실 등 병원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말하자면 미스터리 자체도 흥미롭지만 병원을 둘러싼 각종 사회적 문제를 돌직구처럼 비판하는 대목들 역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뜻입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망사고의 진실은 대단한 반전이나 충격적인 전개를 보이진 않지만, 두 주인공의 독특한 캐릭터와 사회파 메디컬 미스터리 서사가 매력적으로 결합돼있어서 출간 당시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서사는 처음 읽었을 때만큼 쫄깃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캐릭터 플레이는 역시나 기억 속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읽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한 두 사람이 도조병원에서 겪게 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소아병동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본격적인 살인사건까지 등장하는 작품이라 벌써부터 기대와 호기심이 부풀어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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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면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4
헬렌 라일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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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의 나탈리 플라벨은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은 백만장자다.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그녀의 부에 기생하는 반면 이복언니 이브는 나탈리의 재산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독립함으로써 가족과 의절한다. 이브가 오랜 의절 끝에 나탈리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과 불안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브는 자신을 미워하고 나탈리를 편애하던 이모 샬럿의 눈길이 무섭다. 그런데 플라벨 가족의 사유지 공원에서 샬럿이 총에 맞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이브를 비롯한 플라벨 가족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문이 열리면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리슐리외 호텔 살인’(아니타 블랙몬)을 재미있게 읽어서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 작품을 쓴 헬렌 라일리 역시 대단한 이력을 지녔지만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작가라서 읽기 전부터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특히 맨해튼 살인 수사반의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고 해서 놀랐는데, ‘문이 열리면은 그 중 열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시리즈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무렵에 나온 작품으로 보입니다.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1940년대 초반, 겨울 안개에 뒤덮인 을씨년스러운 뉴욕의 부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당일 오후에서 저녁까지 저택에 모였던 가족 중 한 명이 범인이 틀림없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범행 동기를 파악할 수 없어 애를 먹던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은 연이은 탐문과 철저한 조사로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 이면에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동기가 숨어있는 것 같아서 진범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비공식적인 연장 수사에 돌입합니다.

 

경찰 미스터리라고 하면 간결하고 쉬운 문장과 빠른 전개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이 열리면은 심리 스릴러로 분류해도 괜찮을 만큼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쉽게 섞이기 어려운 두 장르가 미묘하게 혼합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한 전시체제 하의 뉴욕, 사방을 둘러싼 지독한 겨울 안개,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저택 등 풍경 묘사에 있어서도 작가는 다소 과도해 보일 정도로 공을 들이는데, 그 때문인지 초반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라는 한 독자의 서평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은 딱히 특징적인 캐릭터는 없지만 성실하고 모범적인 경찰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인성, 교과서 같은 수사 기법, 진실을 가리기 위해 끝까지 매진하는 열정 등 장점밖에 없어 보이는 경찰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조금은 무색무취해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30여 편이나 되는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면 뭔가 하나쯤은 모난 데도 있고 괴짜 같은 구석도 있을 만한데 너무 얌전한 범생이처럼 그려졌다고 할까요?

 

플라벨 집안을 잠식하고 있는 불안과 불온, 그리고 살인사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비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살인사건 외에도 연이어 플라벨 집안의 인물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서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고, 막판에 밝혀진 뜻밖의 범인과 범행 동기는 기대 이상의 반전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고전미를 발산하는 갖가지 설정도 오감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요소들입니다.

 

다만, 인물 심리와 풍경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세밀한 묘사가 개인적인 취향과 잘 맞지 않았고, 유능하지만 특징이나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 역시 다소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인데, 저와 반대로 헬렌 라일리의 스타일이 잘 맞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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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시간의 법정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천감재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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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연상되듯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법정 미스터리에 타임 슬립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5년 전 의붓딸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버지의 무고함을 연이은 타임 슬립을 통해 밝히는 것이 법원서기관인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의 미션인데, 문제는 그가 미션에 성공하여 과거를 바꿔버린 탓에 현재가 심각하게 뒤틀어지는 것은 물론 아버지마저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입니다. 과거를 그대로 두면 아버지는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되고, 과거를 바꾸면 아버지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딜레마 속에서 우구이 스구루는 제대로 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거듭 타임 슬립을 감행합니다.

 

원래 타임 슬립 이야기에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는 규칙이었습니다. 현재가 뒤틀어지기도 하거니와 평행세계 같은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나 독자 모두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금기를 깬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뒤틀린 시간의 법정의 경우 아예 돌직구처럼 정면으로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은 나름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과거를 바꿀 수도, 안 바꿀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별 3개의 평점에 그친 이유는 중반 이후 새로운 설정이 추가되는 대목에서부터 도저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따라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하고 난해한 작가의 설계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나쁜 머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속도감도, 긴장감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우구이 스구루가 딱히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도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시점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전히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 보니 솔직히 후반부는 거의 스킵하듯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법정유희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그보다 한국에 9개월 정도 앞서 출간된 이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별 4.5개를 준 법정유희는 읽을 생각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저처럼 뒤틀린 시간의 법정에 적응하지 못한 독자라도 법정유희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뜻입니다.

천재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독자라고 욕먹을 가능성이 높지만 제겐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너무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서평을 쓰기 전에 일부러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지 않았는데, 인터넷서점과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고 나면 다른 독자들의 생각을 꼭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혹시나 제가 성급하게 오판을 저지른 게 확실하다면 (고통스런 책읽기가 되겠지만) 다시 한 번 도전해볼 생각도 조금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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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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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충격과 여운이 다시 생각나네요. ‘십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유키 하루오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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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리스트
재키 캐블러 지음, 정미정 옮김 / 그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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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전문 프리랜서 기자인 메리 엘리스는 자기 이름이 포함된 살인 예고장을 받습니다. 범인이 보낸 예고장에는 매월 1일 한 명씩, 넉 달에 걸쳐 네 명이 살해될 거라고 적혀있는데, 문제는 버밍엄의 제인이나 카디프의 데이비드처럼 대도시에 사는 흔한 이름이라 피해자를 특정할 수도, 미리 대처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살인 예고장엔 마지막 타깃으로 첼트넘의 메리를 지목했는데, 메리는 부디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범죄전문 기자 특유의 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사건 조사에 나서기로 합니다. 한편 예고장에 적힌 대로 석 달에 걸쳐 세 명이 살해당하지만 경찰은 희생자들 간의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해 궁지에 몰립니다.

 

독특한 예고살인을 소재로 한 심리스릴러입니다. 넉 달에 걸쳐 매월 1일마다 한 명씩 살해하겠다고 선언한 범인은 예고장에 희생자의 이름과 주거지를 공개했지만, 말하자면 서울에 사는 김씨식이라 경찰 입장에선 무용지물이나 없는 단서일 뿐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앞선 세 명의 희생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해된 것과 달리 마지막 타깃인 첼트넘의 메리는 살인 예고장을 직접 전달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메리와 경찰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 입장에선 스스로 불리한 상황을 자초한 셈인데,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경찰도, 메리도 대혼란에 빠집니다.

 

희생자들 간에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없고, 합동수사를 한다고 해도 관할서가 전부 달라 화상회의 이상의 수사를 할 수도 없으며, 한 달 단위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사건 자체가 주목받기는 어려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메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스런 과거사나 그녀가 겪는 의심과 공포 그리고 그녀 주변 사람들의 수상쩍은 언행 등입니다. 살인 예고장을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스릴러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8살 때 메리의 아버지와 절친을 앗아간 대형 화재의 비밀, 애인 있는 남사친피터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벌이는 위험한 사랑, 공유오피스의 동료지만 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한 두 남자에 대한 의심 등이 살인 예고장의 공포와 함께 메리의 일상을 잠식합니다.

 

중반부와 막판에 터지는 연이은 반전도 흥미롭고, 페이지도 술술 넘어가는 편이지만 후한 평점을 주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살인 리스트가 제가 심리스릴러를 기피하는 이유를 모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거듭된 심리묘사는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고, 뭔가 있을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상 별로 영양가가 없을 게 확실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도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서 4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과도하게 보였습니다.

초반에는 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출발하지만, 사건 자체가 임팩트가 없는 상태에서 심리스릴러 서사마저 느슨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중반부쯤부터 동력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터진 첫 번째 반전이 새 연료 역할을 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출판사 자체 스포일러때문에 미리 짐작하고 있던 바라 잠시 맥이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소개글과 띠지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은 나름 출판사의 홍보 포인트였겠지만, 눈썰미 있는 스릴러 독자라면 아마 저처럼 스포일러로 받아들였을 거란 생각입니다.)

 

살인 리스트퍼펙트 커플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재키 캐블러의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의 심리스릴러는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퍼펙트 커플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리스트의 경우 살인사건과 범인 찾기라는 미스터리 서사가 병행돼서 딱 한 번만 더!”라며 읽어보기로 했던 건데, 실은 미스터리 요소들 대부분이 허술한 편이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마저 너무 실망스러워서 혹시 재키 캐블러가 정통 미스터리 스릴러를 내놓는다고 해도 더는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심리스릴러 마니아라면 재미있게 읽을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 소재나 설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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