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추어 밴드 선다우너의 연습 스튜디오 창고에서 이 밴드의 전직 드러머이자

히메카와 료의 연인인 히카리가 대형 앰프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됩니다.

사건이라고도, 사고라고도 확신할 수 없는 히카리의 죽음에 대해

경찰은 물론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밴드 멤버들도 진상을 파악하려 애씁니다.

히메카와 료는 히카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23년 전에 겪은,

그러나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적인 가족사를 떠올립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과 히카리의 죽음은 어딘가 닮은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반전 끝에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히메카와 료는 23년 전의 누나의 죽음의 진실과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 ● ●

 

정교한 퍼즐처럼 빈틈없이 직조된 미스터리와

의식의 밑바닥을 훑는 듯한 조금은 관념적인 비극이 함께 섞여있는 작품입니다.

한쪽에선 밴드 연습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한쪽에선 히카리의 죽음으로 인해 23년 전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럽고 복잡한 회한에 대한 묘사가 진행됩니다.

 

사실 사건 자체도, 그 해결 과정도 대단한 트릭이나 복잡한 구도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후반부에 격하게 몰아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반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긴 하지만

사건이나 반전보다 랫맨의 개성과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는 진짜 미덕은

심리, 기억, 착각, 모방, 애증 등 다분히 관념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정교하게 결합시킨 작가의 완벽한 설계에 있습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에 관한 히메카와 료의 기억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다만 자신과 아버지, 어머니가 누나의 죽음에 관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데,

그 기억은 퇴색되기도, 변색되기도, 증폭되거나 축소되기도 하면서

지난 23년 동안 히메카와 료를 힘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은 누나의 죽음과 꼭 닮아있습니다.

아니, 히메카와 료는 두 죽음이 닮아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23년 동안 유기체처럼 제멋대로 자가발전해온 기억을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끝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히카리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히메카와 료는

파국을 맞이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반전을 겪으며 사건의 진상에 눈을 뜨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연의 힘을 통해 23년 전 누나의 죽음의 진상까지 깨닫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심리 상태를

현실의 두 사건과 빈틈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연결시킵니다.

그 때문에 사건의 해결 과정은 물리적인 단서나 자백, 목격담 등이 아니라

히메카와 료의 기억과 착각,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곤 합니다.

물론 경시청의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고, 물증을 찾아내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독자는 그 형사가 아니라 히메카와 료를 통해 사건을 들여다보게 설정돼있어

그가 혼란에 빠지거나, 기억과 착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되면

독자 역시 똑같은 혼란과 착각을 겪게 됩니다.

 

이런 설정 탓에 독자에 따라 쉽지 않은 책읽기를 겪은 경우도 적잖을 것입니다.

마치 한편의 복잡한 심리극을 읽는 듯한 느낌도 편하지만은 않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무리하게 연결시킨 지점에서는

정교함 대신 위화감이나 작위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방, 흉내, 카피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역할,

주요 인물들은 물론 조연들에게까지 부여된 불행한 가족사,

밴드가 연주하는 노래 가사 속의 다양한 상징 등은

때론 과한 인공미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최근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서평 쓰기가 곤란했던 작품입니다.

단순한 내용 언급조차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세히 묘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주관과 관념처럼 실체 없는 것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 속 사건들과 결부되다보니

서평 역시 무척이나 모호하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략하게 총평하자면,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대놓고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인간의 심리와 기억에 관한, 묵직하고 어딘가 불온해 보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치오 슈스케의 반전 섞인 정교한 설계도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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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돌연변이를 거쳐 탄생한 치사율 100%의 신종 바이러스로 고후 시 일대가 쑥대밭이 됩니다.

용뇌염혹은 드래건바이러스라 명명된 이 재난 속에서 기적적으로 네 사람만이 생존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심각한 후유증, 즉 상식 밖의 능력을 지니게 됐다는 점입니다.

마음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동력(念動力),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투시력,

그리고 회춘(回春)과 빙의의 힘 등 초현실적인 능력들이 그것입니다.

바이러스를 퍼뜨려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주범들로 낙인찍힌 가운데

병원이 제공한 거처에 머물며 바이러스의 연구에 일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초능력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받던 이들은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매스컴을 통해 자신들의 초능력을 선보이지만

그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참극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고 이들을 체포하려 하지만 오히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갑니다.

 

● ● ●

 

오래 전에 만화인지 영화인지 모르겠지만

번개를 맞고 초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이 등장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초능력까지는 아니지만 헐크 역시 연구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초인적인 육체와 힘을 갖게 되는 캐릭터지요.

 

마법사의 제자들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예전의 캐릭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슈퍼 울트라 급 능력자들입니다.

공중부양이나 과거를 투시하는 능력은 애교이고,

차를 탄 채 날아다니거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빙의를 통해 타인을 조종하거나 산허리를 잘라낸 뒤 공중에 띄우기도 합니다.

 

치사율 100%의 신종 바이러스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물들이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 마법사의 제자들

말 그대로 현실을 넘어선 판타지 오락물이지만

얼마 전 메르스를 겪은 한국 독자들에겐 남다른 섬뜩함을 느낄 수 있는 소재입니다.

 

염동력, 투시력, 빙의와 회춘 등 위험하지만 누구나 욕망하기 마련인 다양한 초능력,

인류의 멸망까지 초래할 만큼 극도로 위험한 바이러스,

어딘가 의심스런 병원의 태도, 경찰의 무리한 진압이 불러온 유혈참사,

매스컴의 흥분과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초능력에 대한 여론 등

블록버스터 급 설정들이 다채롭게 등장한 덕분에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갈수록 초현실성이 증폭되는 이야기들이 전개되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나 황당함은 전혀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사실 언뜻 봤을 때는 로빈 쿡의 감염이나 코마처럼 메디컬 스릴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내용이라고 하기엔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궁금함과 호기심이 일었는데,

막상 초능력이라는 소재가 튀어나오자 당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호러물도 좋아하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에 대해서는 약간의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향을 가진 독자나 기본적으로 판타지나 SF물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물 흐르듯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필력에 한 번 발을 담그면

단숨에 끝까지 끌려갈 정도로 이야기의 흡입력은 대단합니다.

이 뒤에 남은 분량을 무슨 이야기로 채우려고 하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작가는 생각지도 못한 시퀀스를 도입하면서 새로운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엔딩에 대해서는 아마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정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든 작가가 어떤 엔딩을 준비했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개인적으로 100% 만족할만한 엔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릴만한 엔딩도 아니었습니다.

 

이노우에 유메히토는 작년 여름 러버 소울로 처음 만났는데,

그때도 뛰어난 필력과 반전으로 기대 이상의 매력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러버 소울을 읽은 후 그와 도쿠야마 준이치가 콤비작으로 내놓은

클라인의 항아리에 큰 관심을 갖게 됐었는데

절판 상태라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야지, 해놓고 금세 1년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또 공수표가 될 수도 있지만, 읽는 건 나중이라도 어떻게든 구매라도 시도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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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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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취향 덕에

모처럼 만난 토속적 요소가 강한 한국의 호러물이 반가웠습니다.

제주의 김녕사굴 전설, 연이은 의문의 실종과 죽음, 상상만 해도 끔찍한 빙의 현상,

의대 출신의 출중한 퇴마사와 가공할 영적 힘을 지닌 악신(惡神)의 대결 등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골고루 포함돼있어 읽기 전부터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보통 악신의 존재는 복수나 원념에 기반을 두기 마련이지만

무녀굴속의 악신은 그 이상의 탐욕에 집착함으로써 더욱 오싹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복수를 넘어 운명 자체에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악신의 탐욕은 수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자들까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악신의 탐욕을 그저 사악하게만 그리지 않습니다.

물론 살인의 동기가 밝혀지지 않는 시점에서는 절대 악 그 자체로만 보일 뿐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묻혀있던 과거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오히려 절실함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됩니다.

마치 죄는 미워하되, 악신은 미워하지 말라는 듯한 메시지가 내재된 느낌입니다.

 

한편, 악신의 탄생의 배경으로 설정된 김녕사굴 전설과 4.3항쟁의 참혹한 역사는

제주도의 특성 많은 굴과 다양한 종의 뱀, 섬 특유의 토속문화 등과 함께 어우러져

영적 존재가 등장하는 공포물의 허구성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설정됐습니다.

제주에서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보고 들은 전설과 신화, 섬 전체를 아우르는 미묘한 정서가

작품 전반에 잘 녹아있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러물의 미덕과 다양한 공포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힙니다.

캐릭터도 잘 만들어졌고, 악신의 엽기적인 행태는 눈앞에서 보듯 사실감 있게 그려졌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결과만 놓고 보면 큰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것은 악신이 노리는 궁극의 목표에 비해 서론이 너무 길었다는 점입니다.

, 악신은 굳이 거추장스럽게 여러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었고,

또 자신을 방해하는 뛰어난 퇴마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그저 타이밍만 기다렸다가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룰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마지막 반전을 위해

앞서 차곡차곡 잘 쌓여온 서사가 희생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기나긴 일제 강점기의 탓이지만,

토속문화의 경우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승이나 보존, 현대적인 재조명이 부족하다보니

문학에서도 매력적인 소재로 쓰이는 일이 제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나 공포물 등 장르물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꼼꼼한 자료조사와 디테일한 묘사로 좋은 작품을 창작해낸 작가의 필력이

다음 작품에선 좀더 높은 수준의 이야기로 독자를 찾아줄 것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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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치
로렌조 카르카테라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멤버들 모두의 캐릭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현세 님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낙오된 자들이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이뤄낸다는 이야기로,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던 작품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퇴출된 야구선수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였다면,

아파치는 한때 최고의 능력자였으나 작전 수행 도중 심각한 부상을 당해

이제는 더는 쓸모없어진 경찰들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한판의 부활극입니다.

 

가장 빨리 금배지 형사로 진급한 기록을 갖고 있는 지오바니 부머프론티에리,

할렘 출신의 흑인으로 사격의 달인인 데이비드 데드아이윈스롭,

뛰어난 추리와 범인 검거율로 콜롬보 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실베스트리,

인디언의 피를 물려받은 폭발물 전문가 델가도 제로니모로페즈,

어릴 적부터 전자기기에 열광했던 도청전문가 지미 핀스라이언,

한때 지독한 마약중독자였으나 어머니를 잃은 뒤 경찰이 된 일명 짐 목사바비 스카포니 등

뉴욕 경찰국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던 6명의 경찰은

제각각 비극적인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뒤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강요받았고,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여생만을 끌어안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액션이 빠진 삶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총알 하나면 좌절과 고통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 하나.

 

무위도식하는 백수부터 컴퓨터 수리, 보험설계사, 아파트 문지기 등

예전의 명성과는 거리가 먼 불우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집니다.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부머는 예전의 파트너 데드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경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위험천만한 마약중독자와 소아성애자를 잡아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규모는 물론 흉악한 수법으로 유명한 마약 카르텔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부머는 최후의 일전에 목말라있는 산송장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안합니다.

경찰마저 쉽게 손댈 수 없는 철옹성 같은 마약 카르텔을 향해

자신들의 능력을 끌어모아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최후의 일격을 날리자고..

 

마약 카르텔을 박살낸다고 누가 메달을 내려줄 것도 아니었고,

실패할 경우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살아남아도 범죄자로 낙인찍혀야 했고,

오히려 성공할 경우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물론

FBI와 뉴욕 경찰이 그 공을 다 차지한다는 시나리오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딱한 영혼에 평화를 주기 위해미션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파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니다.

 

아파치는 쉽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된 전직 경찰들과 절대악인 마약 카르텔의 대결이라는 구도 하에

잔혹한 범죄 장면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뛰어난 반전이나 예상외의 범인처럼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은 없지만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들의 출중한 능력과 비극적인 사연,

재미 하나를 위해 끝까지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쉽고 간결한 스토리,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을 향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화력의 향연 등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좋아할만한 미덕을 모두 갖춘 블록버스터입니다.

안 그래도 더운 날, 작가가 꼬아놓은 미스터리 때문에 두뇌를 혹사시키기 싫은 독자나

속 시원한 액션물 한 편을 찾는 독자에겐 더없이 적당한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아파치가 텅 빈 서사에 오락성만 가득 채운 작품이란 뜻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 중 1/3 정도가 할애된 아파치 멤버들의 과거사는

이 작품을 다이 하드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경찰 영웅이야기와 차별시키는 대목입니다.

언제나 역경을 딛고 1100의 싸움에서도 의연히 살아남는 비현실적 영웅이 아니라

100% 리얼한 현실 속에서, 때론 어처구니없는 실수 하나로, 때론 범죄자의 악행으로 인해

경찰로서의 삶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되는 평범한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작가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경찰,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물론 후반부의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식 전개를 피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진정성이 독자에게 이입된 덕분에

흔한 액션물과는 차별화된 느낌과 여운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족히 5~600페이지는 나왔을 법한 분량을 300여 페이지에 우겨넣은(?) 편집 스타일입니다.

비용의 문제인지 취향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의 경향과는 다르게 글자 크기는 너무 작고, 줄 간격은 빡빡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읽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처음에 책을 받고 펼치자마자 저절로 헉~ 소리가 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10여 군데 발견된 오타도 아쉬웠지만 왠지 편집에서의 인색함(^^;)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대작답게 5~600페이지로 편집했다면 작품의 무게감도 훨씬 살아났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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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남이 아닌 자신을 죽여달라고 주문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주문을 받은 사람은 동갑의 남자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만 14세의 소녀 앤과 소년 도쿠가와입니다.

 

, 죽여주지 않을래?”

그래도, ?”

 

고바야시 앤의 일상을 점령한 두 공간, 학교와 집은

14살 소녀의 삶을 끔찍한 통과의례로 만듭니다.

배신과 밀약, 왕따와 서열이 판치는 계급사회 그 자체인 중학교 교실,

완벽한 화목과 빈틈없는 가족애를 꿈꾸는 엄마의 왕국이자 질식할 것만 같은 집...

 

성적도, 동아리 활동도, 외동딸로서의 역할도 무난하게 소화하던 앤이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고, 자살이나 살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며,

팔과 다리가 잘린 인형을 찍은 사진집에 집착하는 소녀이기도 합니다.

그녀에게 살해를 주문받은 도쿠가와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물을 죽이는가 하면,

어둠으로 꽉 채워진 배경 속에 붉은 꽃잎, 짐승의 이빨, 한 하늘의 달과 태양을 그려

미술대회에서 수상권에 들기도 한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소년입니다.

앤은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도록 전례 없는 패턴으로 자신을 죽여달라고 주문하고

도쿠가와는 기꺼이 그 주문을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비극의 기억이라는 노트에 살해날짜와 동기, 가능한 방법 등을 차곡차곡 적으며

전무후무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준비를 합니다.

 

오더 메이드 살인클럽은 고통스러운 성장기이며 특이한 미스터리입니다.

앤이 살인을 주문하는 계기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 또래의 뇌구조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성세대에게는 설명도 해석도 불가능한 일종의 불치병이거나 일탈행위입니다.

사실 14살의 행동 중 설명과 해석이 가능한 영역은 별로 없습니다.

앤에게 왜 죽음에 관한 기사나 팔다리가 잘린 인형의 사진집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답이 없는 우문일 뿐입니다.

그건 마치 저 남자(여자)를 왜 좋아해?”라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앤의 주문을 받아들여 죽여줄게.”라고 대답한 도쿠가와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불가지론만으로는 곤란하니 작가는 나름 두 소년, 소녀에게

그럴 듯한 물리적인 환경과 동기를 부여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아기의 트라우마나 불행한 가정사 같은 클리셰를 동원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에 가까운, 즉 겉으로는 너무나 평화롭게 보이는 환경들을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사실감을 확대시킵니다.

 

오더 메이드 살인클럽의 미스터리로서의 성격은 좀 모호합니다.

결국 독자의 관심은 앤의 주문이 성공할 것이냐, 에 쏠리게 되는데,

그 외에는 독자의 관심을 끌고 반전을 구사할 미스터리로서의 요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앤의 주문의 성패 여부는 몇 번씩 요동치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주문형 살인의 미스터리와 극적인 엔딩의 재미보다는

14살의 앤과 도쿠가와의 성장통에 좀더 주력하며 집필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계산하지 않고 써내려갔다.”는 작가의 고백을 보면

아무래도 그런 추측이 무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에 따라 비현실적이라거나 너무 극단적인 설정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북한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대한민국 중2’라는 그저 웃기만은 어려운 세태를 감안하면,

오더 메이드 살인클럽속의 앤과 도쿠가와의 살인거래가 당장 현실에 나타난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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