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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 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3
미우라 시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평점 :
크고 작은 운하가 동네 구석구석을 흐르며 아직도 관광객이나
직인(職人)의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를 목격할 수 있는 도쿄 스미다 구의 Y동네.
이곳에는 도쿄 대공습 무렵부터 반세기를 훌쩍 넘게 우정을 나눠온 두 노인이 살고 있습니다.
전직 은행원으로 지금은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채 홀로 노년을 살아가는 구니마사와
쓰마미 간자시(전통비녀)의 명인으로 젊은 제자를 키우고 있는 겐지로가 그들입니다.
직업만큼이나 뚜렷이 대비되는 성격을 지닌 덕분에
두 사람은 시샘과 질투, 사랑과 우정을 골고루 품어가며 수십 년의 우정을 지켜왔습니다.
황혼기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그들의 투닥거림은 그칠 줄 모르지만,
두 사람은 찬란했던 젊은 날을 함께 회상하는가 하면,
눈앞에 닥친 소소한 문제들에 함께 대처하며 평생의 단짝을 위로하고 보듬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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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로 둘러싸인 Y동네를 무대로 두 노인과 그들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소동, 애틋함과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사 & 겐’은
딱히 어떤 특징이나 기억에 각인될 만한 개성이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는 내내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게 되거나, 괜히 울컥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두 노인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쉽고 평범한 문장이지만 따뜻하고 소박하게 그려낸
작가 미우라 시온의 필력 덕분입니다.
재작년, 그러니까 2013년 여름에 읽은 그녀의 ‘배를 엮다’ 역시 비슷한 느낌을 준 작품인데,
그때의 서평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문구는 ‘진정성’, ‘아날로그’, ‘꾸밈없고 티 없음’입니다.
‘배를 엮다’가 디지털 사전과 인터넷에게 밀려난 종이 사전 편집부 멤버들의
15년에 걸친 진심어린 노력과 그들 사이의 우정과 갈등을 그렸다면,
‘마사 & 겐’은 좀더 일상 속으로 파고든,
좀더 우리 가족과 이웃에 가까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부터 올림픽과 버블 경제 등 다사다난한 시절을 함께 헤쳐 나왔지만,
대학 졸업 후 은행원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구니마사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채 전통 비녀 직인의 길을 걸었던 겐지로의 대비는
전쟁 세대의 페이소스와 인생역전이라는 묘한 재미를 주는 설정입니다.
젊은 시절, 경제부흥의 주체라는 자부심과 함께 모든 면에서 겐지로를 앞섰지만,
지금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지독한 요통과 고독사의 공포에 시달리는 처지가 된 구니마사가
여전히 술집 마담들의 환호를 받으며 젊은 제자와 함께 활기찬 노년을 보내는
겐지로에게 느끼는 이중적인 감정은 때론 웃음을, 때론 안쓰러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 외에, 겐지로의 제자인 뎃페와 연인 마미는 요즘 세대답지 않은 고전적인 사랑법과 함께
전통을 이어가는 일본의 직인 정신을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침묵하며 살아왔지만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남편을 버리고 떠난 구니마사의 아내 기요코는 시종 긴장감을 조성하는 역할과 함께
더는 현실에서 낯설지 않은 당당한 노부인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정이나 인물만 놓고 보면 심각한 드라마 한 편이 나올 수도 있는 구도지만
작가는 지독한 극성이나 강한 양념 대신 따뜻하고 차분한 소품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배를 엮다’의 서평에 “누군가는 뻔하다고, 상투적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면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에 감동받고, 울컥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본능을 스스로 일깨우게 됩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마사 & 겐’ 역시 일상 속의 상투적인 에피소드가 더 많이 보이는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작품 곳곳에 묘사된 일본의 문화와 생활양식만 걷어내고 보면
나의 이야기, 내 부모의 이야기, 내 조부모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마사 & 겐’은
미우라 시온이 왜 “일본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받는지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 덥고 습한 날씨마다 그녀의 작품을 읽게 된 셈인데,
이번에는 머릿속에 또렷이 그려지는 Y동네를 둘러싼 수로와 그곳을 다니는 배의 정취 덕분에
감동과 함께 청량함마저 느낄 수 있어 더 기분 좋은 책읽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합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름을 또 이 녀석과 나란히, 나고 자란 동네에서 보내고 있다.
나쁠 것 없잖아. 수없이 반복된 나날 끝에 얻은 것이 이거라면,
이렇게 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