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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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별난 철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특이한 캐릭터 진구가 첫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수학 천재 중학생이었지만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 이후 삶 자체가 제 길을 벗어났고,

시큰둥한 호기심에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했지만 그 역시 3년 만에 접었으며,

지금은 딱히 세상사는 목표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그가 연인인 주해미와 함께 맞닥뜨리는 7편의 사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경찰, 유족, 직장동료로 변신해가며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아파트 한 채 값의 수입까지 올리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표제작 순서의 문제’,

셜록 홈즈처럼 사소한 진술을 들은 것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눈앞에서 지켜본 듯 밝혀내는 대모산은 너무 멀다’,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자살로 결론 난 사건을 손바닥 뒤집듯 살인사건으로 변모시키지만,

인간의 너저분한 탐욕에 대해서만은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 중편 티켓 다방의 죽음’,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위장된 알리바이의 허구를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도진기 작가의 또 다른 히어로 고진 변호사와의 첫 만남을 그린 단편 뮤즈의 계시’,

그리고 진구와 해미의 프리퀄 격으로 첫 만남 때 마주친 살인사건을 그린 환기통

사이즈는 중단편이지만 각 편마다 뚜렷한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

진구라는 캐릭터와 처음 만나는 독자에겐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작품집입니다.

 

사실 진구는 그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정의감으로 뭉친 명탐정인가 하면, 법을 우습게 여기는 불량시민의 면모도 있고,

세상을 달관한 백수인가 하면, 돈에 관한 한 절대 뒤지지 않는 욕심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판사의 책소개에 나온 진구에 대한 설명은 100% 공감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도덕과 정의를 위해 재능을 쓰는 여타의 탐정과는 달리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범죄에만 반응하고,

법망의 허점을 찾아내어 이용하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는 진구는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비상한 두뇌와 마비된 모럴(moral)로 범죄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는

가끔은 범죄자만큼이나 악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아슬아슬한 이중성을 보완해주는 것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해미의 역할입니다.

때론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진구에게 있어 그녀는

그가 좋아할만한 사건을 물어다 주는 중요한 사건 브로커(?)이자

대책 없이 게으름을 부리고 싶을 때 정신이 번쩍 나게 해주는 냉수 같은 존재입니다.

진구의 천재성이나 사건의 해결 과정만큼이나 두 사람의 투닥대는 멜로 라인은

진구 시리즈를 읽는 또 다른 재미입니다.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하드보일드 명탐정도 좋아하고,

마음껏 천재의 끼를 발휘하는 안하무인 명탐정도 좋아하지만,

그 두 개의 얼굴을 모두 가진듯한, 그래서 더 애정이 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구는

앞으로의 성장과 활약상이 더욱 더 기대되는 매력덩어리 캐릭터입니다.

진구 시리즈의 최신작 가족의 탄생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 후속작이 기다려지는 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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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에게 고한다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0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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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범인과의 대결 구도 못잖게 흥미롭게 설정된 악역 경찰(특히 관료)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은 범인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도 모자라 공을 빼앗고 과실을 떠넘기는 부패하고 사악한 관료들과 싸우느라 녹초가 되곤 합니다. ‘범인에게 고한다는 거기에 더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까지 얹어줌으로써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6년 전 벌어진 아동 유괴살해 사건 당시 마키시마는 특유의 감으로 범인을 포착했지만 무능한 관료들의 오판으로 인해 범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실책은 그가 뒤집어썼고 좌천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연이어 발생한 아동 유괴살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가나가와 현경으로 그가 복귀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를 복귀시킨 본부장은 6년 전 그에게 모든 실책을 떠넘겼던 자입니다. 전대미문의 방식, TV뉴스를 통한 공개수사가 시작되고 마키시마는 배드맨이라 자칭하는 범인과의 소통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시민은 물론 경찰 내부에서조차 무리한 시도라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누군가는 6년 전 사건을 문제 삼아 마키시마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방송출연이 거듭될수록 마키시마는 점점 더 위기에 몰리고 사건해결은 요원해집니다. 결국 악화된 여론과 상부의 압력 때문에 또다시 희생양이 필요해진 본부장은 마키시마에게 1주일의 시한을 못 박습니다.

 


사건 자체는 복잡하거나 어려운 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범인에게 고한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갇힌 형사, 경찰 내부의 추잡한 알력, TV를 통한 범인과의 접촉 시도, 시청률 경쟁에 나선 방송사의 보도행태 등 다양한 설정을 통해 서사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덕들 덕분에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갑니다.

 

형식적인 특별함 외에도 범인에게 고한다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감정을 쉴 새 없이 요동치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웃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도드라진 작품입니다. 최근 읽은 검찰 측 죄인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시즈쿠이 슈스케가 건드리는 감정선은 묵직하면서도 시니컬하고 동시에 어딘가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가족애라든가 화해와 용서를 다룰 때는 울컥함을 참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마키시마가 부여받은 극단적인 상황과 감정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잡지 못한 범인, 지키지 못한 피해자, 황폐해진 자신으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진 가족 등 마키시마의 삶은 너덜너덜한 누더기에 다름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마녀사냥 식 비난과 굴욕적인 좌천은 합리적이고 온화했던 그를 변질시켜 증오와 분노를 삶의 동력으로 삼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6년 간 쌓여온 증오와 분노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터뜨려가며 소시오패스 배드맨과의 일전을 불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수사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가 하면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진범을 잡기 위한 에 기꺼이 출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어 아내와 딸, 손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모습이나 절망에 빠진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경찰의 길을 제대로 걷는 동료에게 애정과 믿음을 주는 모습은 그가 아무리 냉소와 비관에 길들여진다 해도 결국엔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키시마 외에도 선과 악의 진영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또 어딜 가든 하나쯤은 꼭 있을 법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어서 읽는 내내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고위 관료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포진한 경찰은 경찰캐릭터 백과사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이나 사실감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만, 배드맨의 단서를 잡고 체포하는 과정이라든가, 내부유출자를 찍어내는 이야기 등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조금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이 독자를 너무 과대평가한 작가의 불친절함과 설명 부족 탓인지, 너무 빠른 속도로 읽느라 중요한 대목을 놓치고 지나간 독자 탓인지는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쩌면 명쾌하고 선명한 이야기와 빠른 전개를 맛봤던 검찰 측 죄인을 읽은 지 얼마 안 돼서 저도 모르게 두 작품의 서사나 속도감, 밀도 등을 비교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즈쿠이 슈스케의 대표작인 두 작품을 연달아 만나게 돼서 반가웠고, 특히 애호 장르인 법정물과 경찰소설이어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범인에게 고한다TV뉴스가 작품 속 중요한 설정이라 영상물로 제작될 여지가 많다고 여러 번 느꼈는데 검색해보니 2007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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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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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존 그리샴의 작품에 열광했던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여느 작가의 작품보다 귀가 솔깃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에 읽은 그의 작품들이 초기작들에 비해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겨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명성과 필력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잿빛 음모의 원제는 ‘Gray Mountain’인데 남자주인공인 도노번 그레이의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온 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애팔레치아 산맥의 한줄기인 그레이 마운틴은 인근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석탄 재벌의 탐욕과 끔찍한 노천 채굴에 의해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그로 인해 도노번과 제프 형제의 부모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이들 형제 뿐 아니라 놀런드 카운티 일대에는 석탄 재벌들의 횡포로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이 망가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정재계나 법조계와 공생 관계를 맺은 석탄 재벌들은 그저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온갖 불법을 태연히 자행할 따름입니다.

 

이런 놀런드 카운티에 29살의 무늬만 변호사인 서맨사 코퍼가 흘러들어옵니다. 뉴욕의 초대형 로펌에 몸담았던 서맨사는 금융위기 속에서 해고된 후 의료보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지못해 자원봉사 자리를 찾던 중 벽지나 다름없는 놀런드 카운티에서 일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소송에 참여한 적도 없거니와 법정 구경조차 한 적 없는 서맨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호를 맡아온 매티와 애넷, 그리고 석탄 재벌의 비리에 저항하는 도너번-제프 형제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차 진짜 변호사로 성장합니다. 때론 석탄 재벌의 하수인들에게 미행과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힘없는 의뢰인들의 비극을 직접 목격하거나 함께 싸우던 동료를 잃기도 하지만, 서맨사는 더 이상 자신이 있을 곳이 뉴욕이 아님을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잿빛 음모는 독자들의 기대와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서맨사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된 상대가 석탄 재벌이라기보다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필로폰중독자, 유언장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유족들, 부당한 해고와 착취를 일삼는 소규모 공장 등 무력한 개인들을 못살게 구는 소소한 악당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맨사와 도노번 형제가 온힘을 다해 맞서 싸우는 이 너무 많거나 혹은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도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석탄 재벌이 주적으로 설정돼있긴 하지만, 선명하고 구체적인 한 명의 악당이 아니라 약간은 집단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이다 보니 서맨사와 그들의 대결 구도나 갈등의 양상은 대체로 두루뭉술하게 묘사될 뿐입니다.

 

이런 특징은 속 시원한 권선징악이라는 일반적인 법정 스릴러의 공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품었던 독자라면 양념이 덜 들어간 심심한 음식을 먹는 기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잿빛 음모의 가장 큰 미덕은 명문대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대형 로펌의 부속품이 되어 그저 고액 연봉의 장밋빛 미래만 바라보며 껍데기만 변호사인 목적 없는 삶을 살던 서맨사 코퍼가 진짜 변호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낸 데 있습니다.

 

다소 진부하지 않나, 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스토리지만 존 그리샴의 노회한 필력이 빚어낸 맛깔난 문장들은 그런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킵니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은 물론 공간적 배경인 놀런드 카운티와 애팔레치아 산맥 일대의 불온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풍광,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사건들과 그에 저항하는 선한 인물들의 노력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노장의 오랜 명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마지막 통쾌한 한 방의 부재(不在)는 끝까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1년에 한 편 꼴로 작품을 낸다는 그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는 아직까지는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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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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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3년 전, 강간살인을 저질렀지만 공소시효를 통해 벌을 피했던 자가 강도살인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됩니다. 누군가는 23년 전의 죄를 묻기 위해 그에게 누명을 씌워서라도 강도살인의 진범으로 몰아가기로 작심합니다. 반면 누군가는 그의 과거를 사면해준 공소시효와 그가 저지른 흉악한 범죄에 분노하면서도 그가 이번 강도살인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곤 그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합니다.

 

흥미로운 건 두 명의 누군가가 모두 유능한 검사들이란 점입니다. 다만, 한 사람은 23년 전의 피해자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검사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검사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정의에 대한 관점도, 수사의 목적도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응원하고 싶을까요?

 


개인적으론 과거의 죄를 묻기 위해 누명을 씌워서라도 악당을 징벌하려는 검사의 편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엄청난 딜레마와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명을 씌운다는 행위 자체도 그렇지만, 그로 인해 강도살인의 진범이 법의 심판을 벗어나게 된다는 딜레마도 발생하고, 과연 그런 행위가 과거의 죄를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느냐는 갈등도 일어납니다. ‘검찰 측 죄인은 바로 그런 딜레마와 갈등을 정면으로 파고든 걸작입니다.

 

사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도 이 딜레마와 갈등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즈쿠이 슈스케는 오히져 정반대의 길, 그러니까 독자에게 한없이 무거운 감정과 숙제를 내준 채 작품을 마무리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법이 정한 정의와 내가 정한 정의 사이의 간극은 메워질 수 있는가? 법이 포기한 악인에 대한 사적 심판은 과연 정의인가? 체포되지 않았더라도 그만한 시간이면 징벌에 준하는 고통을 충분히 받았다고 규정한 공소시효란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작가는 굳이 반전의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돌직구처럼 처음부터 독자에게 모든 패를 내보인 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엄청난 에너지와 가속의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한나절도 안 돼 끝까지 내달릴 수 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면 셀프 스포일러가 적잖이 담겨있습니다. 법정 미스터리나 공소시효, 원죄, 검사들의 세계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운 좋게 시즈쿠이 슈스케의 대표작인 범인에게 고한다를 최근에 손에 넣었는데, ‘검찰 측 죄인을 보고 나니 당장이라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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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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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의 ‘64’나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처럼

깊고 묵직한 서사를 지닌, 시대를 넘나드는 대하급 경찰소설을 무척 좋아합니다.

단순한 범인 찾기 이상의 강렬한 메시지와 여운을 남기는데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끔 현실감이 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64’경관의 피모두 미스터리로서의 본래 미덕,

즉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반전을 거듭한 끝에 진실에 도달하는 지난한 여정이

메시지나 여운 못잖게 매력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걸작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3.67’‘64’경관의 피에 필적하는 대작임에 틀림없는 작품입니다.

1967년부터 2013년까지 온갖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치러낸 홍콩에서

천재 탐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경찰 관전둬(關振鐸)의 일생을

6편의 중편에 실어 시간의 역순으로 구성한 ‘13.67’은 경찰소설로서의 매력뿐 아니라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을 모두 갖춘 걸작입니다.

 

살인사건에 얽힌 비극적인 가족사 (‘흑과 백 사이의 진실’)

삼합회의 두목을 제대로 옭아매기 위한 겹겹의 트릭 (‘죄수의 도의’),

하루아침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내는 추리 (‘가장 긴 하루’),

마약 밀매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경찰 내부의 갈등 (‘테미스의 천칭’),

자신이 속한 경찰조직의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결단 (‘빌려온 공간’),

경찰 초년병 시절, 행운과 좌절을 한꺼번에 전해준 폭탄 테러사건 (‘빌려온 시간’)

관전둬가 홍콩의 격변기마다 겪었던 큼지막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뤄샤오밍은 갓 스무살에 관전둬의 눈에 든 후로 20년 넘게 그의 파트너이자 제자로 활약하며

관전둬의 인격과 가치관, 경찰로서의 품격과 책임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정의는 입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며 진실을 위해서라면 경찰 내의 경직된 규칙은 물론

불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관전둬의 철학을 신봉합니다.

 

관전둬는 계속 흑과 백의 경계를 떠돌았다.

제도가 악당을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진실을 덮으려 한다면

관전둬는 자기 자신을 시커먼 늪에 던져 넣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상대할 것이다.

어쩌면 그의 방식은 검은색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흰색이다.

흑과 백 사이에서 정의를 찾아라.

이것이 바로 뤄샤오밍이 관전둬에게서 이어받은 사명이다. (p112, ‘흑과 백 사이의 진실)

 

찬호께이는 2011기억하지 않음, 형사로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았습니다.

‘13.67’을 읽다보면 시마다 소지가 직접 선정하는 그 상을 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데,

미약하지만 관전둬에게서 시마다 소지의 천재 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 모두가 하찮게 여기며 간과한 사소한 단서나 정황에서 사건의 핵심을 찾아내는가 하면,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추리를 이끌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깜짝 놀랄만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관전둬의 이런 면모는 작가가 설정해놓은 복잡다단한 사건 속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끝났구나 싶어서 뒤를 보면 항상 20~30페이지가 남아있는데

말하자면, 그때부터 진짜 반전 쇼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양파껍질 같은 중첩된 트릭과 천재적인 범인의 덫은 여지없이 관전둬에게 박살나는데,

공학도다운 작가의 완벽하고 세밀한 설계도 덕분에

관전둬와 범인의 대결은 마지막까지 빈틈없는 정교함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다만, 미타라이 기요시와 마찬가지로 관전둬의 비현실적인 천재성이 위화감을 주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는 독자들이 따라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며 추리를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관전둬의 천재성은 너무나 멀리, 홀로 폭주하듯 앞서나가곤 합니다.

또한 관전둬의 천재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설정된 범인의 위장과 트릭 역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난 나머지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마지막 수록작인 빌려온 시간의 마지막 여섯 줄입니다.

홍보카피에 실린 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아이러니라는 문구는

아마도 이 마지막 여섯 줄에서 착안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나름 반전이면서 동시에 관전둬의 지난한 삶에 대한 울컥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대목입니다.

시간의 역순이라는 구성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마지막 여섯 줄 때문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요동쳤던 홍콩을 배경으로

천재 탐정이자 반골 경찰로 살아갔던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지만

진정성 어린 휴머니즘 덕분에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묵직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읽기 전에는 홍콩 출신 작가의 작품이라 반신반의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올해의 베스트10’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작품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에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안긴 기억하지 않음, 형사

조만간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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