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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나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처럼
깊고 묵직한 서사를 지닌, 시대를 넘나드는 대하급 경찰소설을 무척 좋아합니다.
단순한 범인 찾기 이상의 강렬한 메시지와 여운을 남기는데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끔 현실감이 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64’와 ‘경관의 피’ 모두 미스터리로서의 본래 미덕,
즉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반전을 거듭한 끝에 진실에 도달하는 지난한 여정이
메시지나 여운 못잖게 매력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걸작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3.67’은 ‘64’나 ‘경관의 피’에 필적하는 대작임에 틀림없는 작품입니다.
1967년부터 2013년까지 온갖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치러낸 홍콩에서
천재 탐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경찰 관전둬(關振鐸)의 일생을
6편의 중편에 실어 시간의 역순으로 구성한 ‘13.67’은 경찰소설로서의 매력뿐 아니라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을 모두 갖춘 걸작입니다.
살인사건에 얽힌 비극적인 가족사 (‘흑과 백 사이의 진실’)
삼합회의 두목을 제대로 옭아매기 위한 겹겹의 트릭 (‘죄수의 도의’),
하루아침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내는 추리 (‘가장 긴 하루’),
마약 밀매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경찰 내부의 갈등 (‘테미스의 천칭’),
자신이 속한 경찰조직의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결단 (‘빌려온 공간’),
경찰 초년병 시절, 행운과 좌절을 한꺼번에 전해준 폭탄 테러사건 (‘빌려온 시간’) 등
관전둬가 홍콩의 격변기마다 겪었던 큼지막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뤄샤오밍은 갓 스무살에 관전둬의 눈에 든 후로 20년 넘게 그의 파트너이자 제자로 활약하며
관전둬의 인격과 가치관, 경찰로서의 품격과 책임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정의는 입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며 진실을 위해서라면 경찰 내의 경직된 규칙은 물론
불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관전둬의 철학을 신봉합니다.
관전둬는 계속 흑과 백의 경계를 떠돌았다.
제도가 악당을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진실을 덮으려 한다면
관전둬는 자기 자신을 시커먼 늪에 던져 넣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상대할 것이다.
어쩌면 그의 방식은 검은색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흰색이다.
흑과 백 사이에서 정의를 찾아라.
이것이 바로 뤄샤오밍이 관전둬에게서 이어받은 사명이다. (p112, ‘흑과 백 사이의 진실’ 中)
찬호께이는 2011년 ‘기억하지 않음, 형사’로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았습니다.
‘13.67’을 읽다보면 시마다 소지가 직접 선정하는 그 상을 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데,
미약하지만 관전둬에게서 시마다 소지의 천재 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즉, 모두가 하찮게 여기며 간과한 사소한 단서나 정황에서 사건의 핵심을 찾아내는가 하면,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추리를 이끌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깜짝 놀랄만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관전둬의 이런 면모는 작가가 설정해놓은 복잡다단한 사건 속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끝났구나 싶어서 뒤를 보면 항상 20~30페이지가 남아있는데
말하자면, 그때부터 진짜 반전 쇼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양파껍질 같은 중첩된 트릭과 천재적인 범인의 덫은 여지없이 관전둬에게 박살나는데,
공학도다운 작가의 완벽하고 세밀한 설계도 덕분에
관전둬와 범인의 대결은 마지막까지 빈틈없는 정교함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다만, 미타라이 기요시와 마찬가지로 관전둬의 비현실적인 천재성이 위화감을 주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는 독자들이 따라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며 추리를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관전둬의 천재성은 너무나 멀리, 홀로 폭주하듯 앞서나가곤 합니다.
또한 관전둬의 천재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설정된 범인의 위장과 트릭 역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난 나머지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마지막 수록작인 ‘빌려온 시간’의 마지막 여섯 줄입니다.
홍보카피에 실린 “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아이러니”라는 문구는
아마도 이 마지막 여섯 줄에서 착안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나름 반전이면서 동시에 관전둬의 지난한 삶에 대한 울컥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대목입니다.
시간의 역순이라는 구성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마지막 여섯 줄 때문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요동쳤던 홍콩을 배경으로
천재 탐정이자 반골 경찰로 살아갔던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지만
진정성 어린 휴머니즘 덕분에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묵직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읽기 전에는 홍콩 출신 작가의 작품이라 반신반의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올해의 베스트10’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작품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에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안긴 ‘기억하지 않음, 형사’를
조만간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