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강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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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촬영감독이었지만 지금은 장례식에서 상영될 고인의 영상물 제작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에릭 쇼는 어느 날 임종을 앞둔 한 거부(巨富) 노인의 과거사를 취재해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거기에 깃든 사연이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에릭은 남부 인디애나에서 노인의 과거를 쫓던 중 예상치 못한 환각을 연이어 목격합니다. 야비하고 탐욕스런 노인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환각 속에서 에릭은 때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깊이 개입하는가 하면, 때론 철저하게 관객이 되어 그들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지켜보곤 합니다.

한편, 비루한 삶을 살아가던 조시아는 시카고에서 온 에릭이란 사람이 자신의 증조부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곤 발끈합니다.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노인이 등장하는 기이한 꿈을 연이어 꾼 후로 근원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조시아는 에릭의 존재를 극도로 경계하면서 점차 위험한 지경으로 스스로를 몰아갑니다.

 


앞서 읽은 마이클 코리타의 밤을 탐하다오늘 밤 안녕을의 서평에 할리우드 영화에 잘 어울리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래선지 사전정보 없이 읽은 숨은 강은 여러 가지로 쇼킹함(?) 그 자체였습니다. 읽는 내내 스티븐 킹의 샤이닝이 연상됐는데, 인터넷서점을 살펴보니 역시나 추천사나 소개글에 샤이닝이 거듭 언급돼있었습니다.

 

마이클 코리타의 웨스트바덴 호텔이 스티븐 킹의 오버룩 호텔을 만났다.” (댄 시먼스)

 

마이클 코리타는 스릴러적 요소와 스티븐 킹을 떠오르게 하는 호러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혼합시켜 복합장르의 재미를 가져다준다.” (북리스트=미국도서관협회)

 

실제로 샤이닝의 잭 토런스와 숨은 강의 에릭 쇼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고, 실재하지 않는 악마적 존재와 마주친 끝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가 하면, 신경증과 두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찾는 약마저 아스피린 계열의 엑세드린으로 동일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두 주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무척 많은 편이고,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나 악의 캐릭터 역시 유사점을 많아서 그런지 샤이닝에 대한 오마주, 또는 스티븐 킹에 대한 헌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중요한 무대인 숨은 강은 지하로 흐르던 본류가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간혹 웅덩이의 형태로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80년 전, 남부 인디애나의 작은 마을은 그 물을 이용한 생수산업으로 번영기를 구가했지만 대공황의 혼란 속에 탐욕과 이기심으로 중무장한 인물들로 인해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환각과 유령을 통해 80년 전의 비극에 휘말린 에릭과 조시아는 각자의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는데, 이들의 대결은 마치 샤이닝에서 오버룩 호텔에 잠식당한 잭 토런스와 그곳을 탈출하려는 모자(웬디와 대니)의 대결처럼 긴박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환각을 빚어내는 생수, 그 생수의 근원인 숨은 강, 그 강을 놓고 벌어졌던 80년 전의 탐욕으로 점철된 비극,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에릭과 조시아의 대결로 다시 한 번 되풀이되는 비극.... 스티븐 킹의 호러물, 특히 샤이닝과 그 후속작인 닥터 슬립의 팬이라면 숨은 강을 통해 그때의 흥분과 긴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을 탐하다오늘 밤 안녕을을 기억하는 마이클 코리타의 팬이라면 호러 판타지로 이뤄진 숨은 강이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독자를 자유자재로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는 그의 천재적인 필력 덕분에 장르의 충격과 당혹감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을 탐하다이후 2년이 되도록 그의 후속작이 출간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는데 RHK에서 올 가을에 그의 신작을 출간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오늘 밤 안녕을에 이은 링컨 페리 시리즈가 됐든 스탠드얼론이 됐든 마이클 코리타의 신작이라면 무조건 대환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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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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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러시아 이민자 슬럼가에서 섬처럼 고립된 채 성장하던 바츨라프와 레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천진난만함과 자유분방함을 잃지 않으며 먼 훗날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능가하는 마술사와 조수가 되기를 꿈꾸는 소년, 소녀입니다. 그들은 5살에 만나 서로를 자신의 우주라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10살이 된 어느 날 레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영문 모를 이별을 겪었다가 몸과 마음이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17살이 되어 운명적으로 재회합니다. 하지만 내내 서로를 잊지 못하던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은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고 맙니다. 해제돼선 안 될 봉인처럼 7년 동안 묻혀있던 레나가 사라졌던 그날의 진실이 폭로되면서 바츨라프와 레나는 대혼란에 빠지고,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맞이할 위기에 처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대단히 무겁고 심각한 미스터리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제목의 느낌 그대로 소년과 소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주변 어른들의 캐릭터, 10살이라는 나이에 겪은 끔찍한 상처와 이별 이야기로 인해 한편으론 잔혹동화의 정서를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아무런 위장도, 이기심도 없는, 그래서 맑고 순수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무엇이 숨어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원시림 같은 위험한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높이를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은 때론 선의로, 때론 악의 그 자체로 소년과 소녀의 삶에 개입합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기준과 도덕을 옳다고 믿으며 소년과 소녀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하기도, 억지로 갈라놓기도 하지만 끝내 거스를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력까지 멋대로 통제하진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을 지키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운명 같은 사랑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거나 그에 관한 기억을 상실한 독자에게는 이 작품은 일종의 판타지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랬듯 바츨라프와 레나의 10여 년에 걸친 사랑, 이별, 재회는 어린 아이들의 풋풋하고 철없는 불장난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전해줍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어른들이 쳐놓은 장막을 넘어서는 바츨라프와 레나의 사랑은 어쩌면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애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밋빛 미래를 기약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되지만 누구나 다 두 사람이 앞으로 한참은 더 폭풍 속을 헤매야 할 운명임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소년과 소녀의 성장+러브스토리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사랑이 난무하고 운명=허구라는 등식이 당연시 되는 시대에 바츨라프와 레나의 마법 같은 이야기는 그 또래인 10대부터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자층을 아우르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로 분류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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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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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에쿠니 가오리에 푹 빠져 그녀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대로 찾아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금지된 사랑 또는 어긋난 사랑을 일체의 과잉 없이 담담하게 그린 그 작품들은 마치 제가 직접 겪고 있는 듯 절실하고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빠져 한동안 잊고 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새로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를 검색하다가 이 작품을 알게 됐는데, 제가 기억하는 에쿠니 가오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여름 열대야를 서늘하게 식혀줄 미스터리 단편집이라는 소개글에 눈길이 갔습니다. 당연히 큰 기대감을 갖게 됐고, 그녀만의 미스터리의 색깔이 궁금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출판사의 소개글은 조금은 과장 또는 왜곡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독자에 따라 서늘함을 느낄 여지는 있지만, ‘열대야를 식혀줄 미스터리라고 보긴 어렵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의하면 유년기의 여름에 겪었던 조금은 특별하고 기이한 경험담이랄까요? 에쿠니 가오리와 미스터리의 교집합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쉽고 편한 문장으로 일상의 디테일을 포착해내는 그녀만의 섬세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수박 향기에 수록된 11편의 단편들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록작 모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무섭지는 않아도 뇌리에 깊이 각인될 것 같은 기담 종류가 많은 편이고, 담백한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평범하지 않은 사랑법을 풀어놓은 작품도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공통분모를 위해 수박, 매미, 꽈리, 장미 등 여름의 향기와 색상을 상징하는 소품들이 등장하고, 귀신, 복수, 왕따, 집착, 장례, 가출, 유괴 등 다양한 장르물 코드들이 동원됐는데 재미있는 건 이런 소품과 코드들이 여름 또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유년기 소녀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면서 특별한 빛을 발한다는 점입니다. 소녀들이 그해 여름에 만났던 특별한 사람들과 나눈 특별한 경험들은 옳다, 그르다또는 좋다, 나쁘다라는 가치판단과는 무관하게 어른이 된 후에도 비밀스러운 나만의 것으로 기억 속 어딘가에 또렷하게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 여름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는 식의 문장이 종종 눈에 띄곤 합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이성이나 해석의 옷도 입지 않아 무구하기만 한 순백의 감정들, 아니 감정이란 말로 규정되기에는 이른 마음속 어떤 덩어리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그려낸 어떤 덩어리들은 때론 끔찍하거나 부도덕한 악몽처럼, 때론 한없이 애틋한 추억처럼 포장되어 있습니다. 소녀들의 기억 속에 남은 어떤 덩어리들과 함께 한 그해 여름에 대한 11편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진 못했지만, 그 대신 11번의 특별한 여름과 11명의 특별한 소녀들을 통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에쿠니 가오리만의 특별한 기담을 맛보게 해줬습니다. ‘수박 향기를 제 방의 미스터리 책장에서 일반문학 책장으로 옮겨 꽂으면서 에쿠니 가오리가 제대로 된 정통 미스터리를 쓴다면 거기에선 어떤 맛이 날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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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키의 해체 원인 스토리콜렉터 31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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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한국에 출간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5편의 작품을 모두 본 덕분에,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그의 데뷔작이라는 치아키의 해체 원인에 대한 기대감은 출간 전부터 각별했습니다. 간단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니시자와 야스히코만의 특별한 상상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의 힘은 데뷔작부터 강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갖가지 토막 사체가 등장하는 9편의 중단편은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끌어내는 마약 같은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프리퀄로 보기엔 좀 애매했는데, 두 사람이 대학에 다니는 중, 그러니까 현재 또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도 실려 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의 닷쿠와 다카치의 이야기도 포함돼있어서 100% 프리퀄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크게 보면 7편의 단편과 1편의 희곡, 그리고 이 8편의 수록작을 망라한 궁극의 반전이 담긴 단편 1편이 실려 있습니다. 각 작품마다 기이한 형태의 토막 사체들이 등장하는데, 수갑을 찬 채 기둥에 묶인 상태에서 토막 난 여자 (해체 신속), 청산으로 독살된 뒤 34조각으로 토막 난 여자 (해체 신조), 불과 16초 만에 엘리베이터에서 옷이 벗겨지고 몸이 토막 난 여자 (해체 승강), 토막 난 채 6개의 상자에 분리되어 버려진 남자 (해체 출처), 앞선 희생자의 목이 다음 희생자의 몸과 함께 발견되는 연쇄살인 (해체 조응) 등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세계적인 뉴스가 될 만한 희대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한 광고 포스터에서 얼굴만 커터칼로 도려내진 모델 (해체 초상), 왼쪽 팔이 재단 가위로 잘린 곰 인형 (해체 수호)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토막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토막 사체만큼이나 추리와 해결의 주인공도 제각각인데, 닷쿠와 다카치가 대학 재학 중에 해결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졸업 후 취직도 하지 않고 미스터리한 삶을 사는 백수 닷쿠가 주인공인 작품도 있고, 예상을 깨고 고교 교사로 변신한 (두 사람의 선배) 헨미 유스케가 해결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작품 제목대로 모든 수록작의 공통 화두는 해체의 원인은 무엇인가?”, 즉 범인이 굳이 희생자를 토막 낸 이유를 추리하는 것입니다. 닷쿠를 비롯한 해결사들은 단서와 정황, 원한 관계 등 객관적인 팩트보다 범인이 사체를 토막 내야만 했던 이유에 집착하면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토막을 냄으로써 범인이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어느 특정 부위만 집착하듯 토막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토막 낸 사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폐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끊임없이 추리한 끝에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혐의를 벗기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용의선상 밖의 사람을 범인으로 콕 집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록작 모두 명쾌하고 확실한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해결사의 추리대로 사건이 마무리되어 경찰이 진범을 체포하는 엔딩도 있지만, 일부 작품은 주인공이 이건 순전히 내 상상인데...”라는 식으로 말머리를 뗀 후 사건의 배경, 사체를 토막 낸 이유, 진범의 정체 등을 가설처럼 설명하면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의 상상은 때론 너무 급진적이어서 아니면 말고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발함만큼은 한 번도 놀라지 않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매력적입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 중에 그녀가 죽은 밤일곱 번 죽은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 외 다른 작품들에서도 매번 느끼는 점이지만, 그의 엄청난 상상력과 정교하게 이야기를 직조하는 힘은 보통 사람들의 뇌 구조에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는 차원인 것 같습니다. 수록작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앞선 작품들의 주조연들이 총출동하여 궁극의 반전을 일으키는 마지막 수록작 해체 순로는 그런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천재성이 120% 발휘된 작품입니다. 또 희곡 형식으로 쓰인 해체 조응 - 추리극 <슬라이드 살인 사건>’은 상상력과 구성의 힘에 덧붙여 블랙코미디와 잔혹 미스터리를 제대로 믹스한 작품인데, 실제 연극으로 공연된다면 웃음과 공포를 번갈아 만끽할 수 있는 수작이 됐을 것입니다.

 

뒤에 실린 문고판 후기를 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자신의 데뷔작인 이 작품을 개그에 비유하며 자학했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사실 그의 닷쿠&다카치 시리즈는 상상력과 구성의 힘 못잖게 어딘가 B급 코미디의 냄새를 풍기는 어이없는 개그가 큰 미덕이자 매력이기 때문에, 그의 자학에서는 왠지 조금은 자랑의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습니다.

 

원 제목 자체가 해체제인(解體諸因), 즉 직역하면 해체의 모든 원인인데, 일본에서 실제로 토막살인을 해체살인이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상한 뉘앙스의 해체대신 직설적인 어감의 토막을 번역본 제목으로 삼았다면 좀더 눈길을 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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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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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풍광 좋은 애리조나의 작은 마을 주니퍼에 대형마트 더 스토어가 들어서면서 아무도 예상 못한 대혼란과 급격한 변화가 몰아닥칩니다. 더 스토어는 마을의 상권은 물론 의회, 경찰, 소방, 언론, 학교까지 먹어치우면서 마침내 주니퍼의 모든 것을 장악합니다.

처음부터 더 스토어의 등장을 불안하게 여겼던 빌은 주니퍼 내의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거나 사라지거나 가게를 잃는 지경에 이르자 신문편집장 벤, 스트리트 등과 함께 더 스토어의 만행에 저항해보지만 오히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특히 더 스토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두 딸에게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목격하면서 빌은 도청과 감시의 눈길을 뚫고 더 스토어와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심합니다.

 


더 스토어는 소도시의 상권을 잠식하며 이익을 독점하는 단순한 대형마트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기업 흡혈귀라고 묘사되듯 실제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존재합니다. 대형마트가 없는 소도시만 골라 각종 혜택을 받으며 지점을 오픈한 뒤 의식주는 물론 행정과 언론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모든 것을 천천히 잠식합니다. 자영업자는 모조리 몰락하거나 주니퍼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취약한 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더 스토어의 등장을 환영하며 온갖 특혜를 줬던 의회는 결국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되고, 큰 혜택을 누리게 됐다고 좋아하던 소비자들은 점차 더 스토어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거대 권력이 된 더 스토어에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이미 누군가 사라지거나, 의문의 죽음이나 방화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자본주의의 단면과 함께 작가는 더 스토어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타인을 통제하며 쾌감을 느끼는 권력의 중독성을 설파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끔찍한 방법으로 직원들의 정신과 육체를 장악하는 과정이나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응징을 가하는 장면, 또 폐점 후 목격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밤의 매니저)을 등장시켜 문명화된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의 공포감을 상승시킵니다.

 

주니퍼를 지키기 위해 더 스토어에 저항하는 빌과 그의 친구들의 노력은 도청과 감시, 협박과 폭력 속에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고, 절반 이상의 주민은 더 스토어가 나눠준 독이 묻은 사과에 열광하며 그들에게 주니퍼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권력까지 기쁘게 넘겨줍니다. 슈퍼맨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더 스토어의 진격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이고, 결국 주니퍼의 멸망 외에는 딱히 예상되는 엔딩이 없다고 판단될 즈음, 작가는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급선회시킵니다.

 

비교적 단선적인 서사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긴장감 넘치게 채워 넣은 작가의 필력은 대단합니다. (물론 동어반복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종종 있어서 100페이지 정도만 줄였다면 그야말로 빈틈없는 작품이 됐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자가발전하는 대형마트를 그린 대목이나 소도시 주민 개개인이 느끼는 공포심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대목을 읽다 보면 스티븐 킹과 함께 대표적인 호러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작가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저런 아쉬움이나 잘 이해가 안 되는 지점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된, 또 그 해결방법 역시 다소 모호했던 엔딩 부분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더 스토어에게 직격탄을 맞는 자영업자들을 선의의 피해자로만 설정한 점이나 주니퍼의 소비자들을 획일적이고 우매한 추종자들로 암시한 점, 또 이미 다른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 더 스토어가 별 어려움 없이 경찰과 언론, 학교와 의회까지 장악하고 통행금지까지 단행하는 장면은 아무리 이 작품의 배경이 1990년대라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더 스토어는 갑자기 치솟은 5월의 더위를 충분히 식혀줄 만큼 서늘한 공포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고, 탐욕, 도덕, 권력, 이기심, 자본주의 등 다채로운 코드들이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믹스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 특이한 작품이었습니다. 브람스토커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더 스토어가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이라는 점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앞으로 가끔씩이라도 벤틀리 리틀의 작품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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