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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키의 해체 원인 ㅣ 스토리콜렉터 31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앞서 한국에 출간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5편의 작품을 모두 본 덕분에, 또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그의 데뷔작이라는 ‘치아키의 해체 원인’에 대한 기대감은 출간 전부터 각별했습니다. 간단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니시자와 야스히코만의 특별한 상상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의 힘은 데뷔작부터 강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갖가지 토막 사체가 등장하는 9편의 중단편은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끌어내는 마약 같은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프리퀄로 보기엔 좀 애매했는데, 두 사람이 대학에 다니는 중, 그러니까 현재 또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도 실려 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의 닷쿠와 다카치의 이야기도 포함돼있어서 100% 프리퀄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크게 보면 7편의 단편과 1편의 희곡, 그리고 이 8편의 수록작을 망라한 궁극의 반전이 담긴 단편 1편이 실려 있습니다. 각 작품마다 기이한 형태의 토막 사체들이 등장하는데, 수갑을 찬 채 기둥에 묶인 상태에서 토막 난 여자 (해체 신속), 청산으로 독살된 뒤 34조각으로 토막 난 여자 (해체 신조), 불과 16초 만에 엘리베이터에서 옷이 벗겨지고 몸이 토막 난 여자 (해체 승강), 토막 난 채 6개의 상자에 분리되어 버려진 남자 (해체 출처), 앞선 희생자의 목이 다음 희생자의 몸과 함께 발견되는 연쇄살인 (해체 조응) 등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세계적인 뉴스가 될 만한 희대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한 광고 포스터에서 얼굴만 커터칼로 도려내진 모델 (해체 초상), 왼쪽 팔이 재단 가위로 잘린 곰 인형 (해체 수호)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토막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토막 사체만큼이나 추리와 해결의 주인공도 제각각인데, 닷쿠와 다카치가 대학 재학 중에 해결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졸업 후 취직도 하지 않고 미스터리한 삶을 사는 백수 닷쿠가 주인공인 작품도 있고, 예상을 깨고 고교 교사로 변신한 (두 사람의 선배) 헨미 유스케가 해결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작품 제목대로 모든 수록작의 공통 화두는 “해체의 원인은 무엇인가?”, 즉 범인이 굳이 희생자를 토막 낸 이유를 추리하는 것입니다. 닷쿠를 비롯한 해결사들은 단서와 정황, 원한 관계 등 객관적인 팩트보다 범인이 사체를 토막 내야만 했던 이유에 집착하면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토막을 냄으로써 범인이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어느 특정 부위만 집착하듯 토막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토막 낸 사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폐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끊임없이 추리한 끝에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혐의를 벗기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용의선상 밖의 사람을 범인으로 콕 집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록작 모두 명쾌하고 확실한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해결사의 추리대로 사건이 마무리되어 경찰이 진범을 체포하는 엔딩도 있지만, 일부 작품은 주인공이 “이건 순전히 내 상상인데...”라는 식으로 말머리를 뗀 후 사건의 배경, 사체를 토막 낸 이유, 진범의 정체 등을 가설처럼 설명하면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의 상상은 때론 너무 급진적이어서 ‘아니면 말고’ 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발함만큼은 한 번도 놀라지 않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매력적입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 중에 ‘그녀가 죽은 밤’과 ‘일곱 번 죽은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 외 다른 작품들에서도 매번 느끼는 점이지만, 그의 엄청난 상상력과 정교하게 이야기를 직조하는 힘은 보통 사람들의 뇌 구조에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는 차원인 것 같습니다. 수록작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앞선 작품들의 주조연들이 총출동하여 궁극의 반전을 일으키는 마지막 수록작 ‘해체 순로’는 그런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천재성이 120% 발휘된 작품입니다. 또 희곡 형식으로 쓰인 ‘해체 조응 - 추리극 <슬라이드 살인 사건>’은 상상력과 구성의 힘에 덧붙여 블랙코미디와 잔혹 미스터리를 제대로 믹스한 작품인데, 실제 연극으로 공연된다면 웃음과 공포를 번갈아 만끽할 수 있는 수작이 됐을 것입니다.
뒤에 실린 문고판 후기를 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자신의 데뷔작인 이 작품을 ‘개그’에 비유하며 자학했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사실 그의 ‘닷쿠&다카치 시리즈’는 상상력과 구성의 힘 못잖게 어딘가 B급 코미디의 냄새를 풍기는 어이없는 개그가 큰 미덕이자 매력이기 때문에, 그의 자학에서는 왠지 조금은 ‘자랑’의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습니다.
원 제목 자체가 해체제인(解體諸因), 즉 직역하면 ‘해체의 모든 원인’인데, 일본에서 실제로 토막살인을 해체살인이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상한 뉘앙스의 ‘해체’ 대신 직설적인 어감의 ‘토막’을 번역본 제목으로 삼았다면 좀더 눈길을 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