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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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를 위해 교과서에 실린 시()를 무작정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해부했던시절 이후로 시는 저의 모든 일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한때 암울했던 시대를 통렬히 비판한 시를 사랑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시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무기로서의 시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저의 일상에서 시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난해함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에 수록된 시인문답이라는 산문에서 다니카와 슌타로가 묘사했듯 평상시에 말하고 읽고 쓰는 것과는 많이 다른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 밑에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시는 일반인에게 어필하기엔 태생적으로 핸디캡을 지닌 장르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정서는 메마르고, 직설적인 인스턴트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한때나마 열광했던 몇 편의 시와 일부 시인에 대한 애정마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국민시인이라 불리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기념 선집인 사과에 대한 고집은 근 10여년 만에 읽어보는 시집입니다. ‘내가 이 시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공포심(?)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고, 여러 가지 감정과 기분 - 인내심, 난해함, 가벼운 놀람 또는 재미 등을 느끼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호흡에 쭉 달렸습니다. 사실 한 권의 시집을 한 호흡에 달린다는 것은 시집과 시인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지만, 대강의 큰 맛을 먼저 느껴보기 위해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대목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60여 년간 발표한 방대한 작품 가운데 수록작을 선별한 탓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톤의 시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모르겠는 철학적인 언어와 상징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장난 같은 유희, 유아용 동시 같은 단순함이 있는가 하면, 출생과 죽음에 관한 파격적이고 독특한 묘사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출생과 죽음에 관한 작품들에 눈길이 자주 머물렀는데, 특히 빌리 더 키드’, ‘탄생’, ‘장딴지’, ‘안녕등은 때론 풍자나 해학의 느낌이, 때론 현학과 철학의 느낌이 교차되는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보통 예술가라고 하면 선입관처럼 파란만장한 삶이 연상되는데, 다니카와 슌타로 역시 그 부분에서만큼은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단(詩壇)이나 동인지, 아카데미즘의 세계와도 떨어져 살아온 독립군같은 삶도, 세 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도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단 한 권의 선집으로 한 시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일본의 국민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특히 장르물에 삽입된 단카나 하이쿠 외에 일본의 현대시를 접한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으며, 그 가운데 공감할 수 있는 몇 편의 시를 만난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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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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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이지만, 청소년 버전으로 출간된 추리소설에 흠뻑 빠졌던 때가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도 매력적이었지만, 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와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그땐 루팡이라는 표기가 표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은 어린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학과 담을 쌓은 채 젊은 날을 보내면서 홈즈도 뤼팽은 기억에서 사라졌고, 뒤늦게 찾아온 장르물에 대한 관심은 온통 일본 미스터리와 현대 영미권 스릴러에 집중됐습니다. 그동안 뤼팽이 여러 곳에서 전집 혹은 단행본으로 출간됐어도 딱히 관심을 갖진 않았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코너스톤에서 출간된 전집 소식을 접하곤 오랜만에 제대로 한번 완독해야겠다는 욕심이 들어 10권의 시리즈를 덥석 구매해버렸습니다.

 

그 첫 편인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뤼팽의 초기 활동부터 영원한 숙적 가니마르 형사와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대결, 그리고 세기의 라이벌인 헐록 숌즈(아마도 셜록 홈즈의 창조자 코난 도일의 허락을 받지 못한 탓에 이렇듯 괴이한 이름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와의 짜릿한 첫 대결에 이르기까지 9편의 단편을 수록해놓았습니다.

화려한 부유층과 부도덕한 지배층을 터는 도둑의 이야기는 픽션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반인에게는 환영받는 소재입니다. 특히 그 과정이 귀신 뺨치듯 기막힌 트릭으로 포장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더구나 몇월 몇일 몇시에 귀하를 방문하겠다.”며 대담한 도둑 예고장을 날리는 대목에선 호기심과 함께 영웅의 출격을 지켜보는 듯한 흥분까지 맛보게 됩니다.

 

뤼팽은 천재적 지능에 덧붙여 마술사, 화학자, 변장의 천재, 무술유단자 등 다양한 능력을 갖춘 완벽한 캐릭터로 묘사되어 불세출의 도둑에 오르게 됩니다.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이런 뤼팽의 캐릭터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끔 다채로운 에피소드로 꾸며져 있습니다.

유람선에서 체포된 뒤 수감생활을 하며 경찰을 멋지게 희롱하다가 기어이 아무도 예상 못한 방법으로 탈옥에 성공하는 3부작이 있고, 도둑 견습생으로서 처음 뤼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프리퀄 같은 단편도 있습니다. 열차 안에서 강도에게 습격당해 우스운 꼴이 되거나 뤼팽의 인생에서 딱 한 번 겪었다는 최악의 실수를 담은 에피소드도 있고, 타고난 직감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약간은 판타지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물론 압권은 셜록 홈즈와의 기념비적인 첫 대결을 다룬 '헐록 숌즈, 한발 늦다'입니다. 비록 얼굴을 맞댄 것은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천재의 불꽃 튀는 대결은 재회를 고대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작 한두 편에서 느꼈던 번역의 아쉬움(제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번역이 너무 앞서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엔 오랜만에 뤼팽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소개글에 실린 뤼팽에 대한 찬사는 뤼팽을 모르는 독자에겐 과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소설 속 뤼팽에 관해 이보다 간결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건을 훔치고 사기 행각을 일삼지만 그 방법이 우아하고 예술적이라 감탄을 자아낸다. 공권력은 뤼팽에게 어떠한 힘도 미치지 못하며 도리어 신랄한 조롱을 받기 일쑤다. 하지만 뤼팽은 조국 프랑스에 무한한 애국심을 보이고, 약한 존재가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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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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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우노의 초대를 받아 최고급 요트 인디아나 호에 승선한 5명의 승객은 승무원 2명과 함께 오키나와를 향한 7일간의 호화판 크루즈 여행을 떠납니다. 작가, 변호사, 의사, 프로골퍼, 재벌 2세 등 그 면면도 화려한 승객들은 앞으로 이어질 특별한 여행에 대한 기대에 들뜨지만, 첫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느닷없이 스피커를 통해 선실에 울려 퍼진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승객과 승무원 7명의 숨겨진 죄를 까발리곤 그들을 단죄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이어지는 바다 위 밀실에서의 연쇄살인에 경악합니다.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유력한 용의자라 여긴 인물마저 참혹하게 살해당하자 결국 패닉에 빠지게 됩니다.

 

나쓰키 시즈코는 몇 년 전인가 ‘W의 비극으로 처음 만났던 작가입니다. 신년 모임을 위해 눈 쌓인 산장에 모인 와쓰지 일가에게 일어난 비극을 다룬 ‘W의 비극이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였다면,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는 제목에서 바로 짐작할 수 있듯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대한 오마주로 집필된 작품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니 일본에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을 패러디한 다양한 작품들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게 되다’,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어진 건가?’, ‘그리고 아무도 없어질 예정이었다등 기발한 제목들을 가진 작품들인데, 그만큼 애거서 크리스티의 막대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대가 섬에서 요트로 바뀌었을 뿐, 등장인물의 숨겨진 죄를 고발하는 목소리나 인물 수만큼 준비된 인형, 각기 다른 수법이 동원된 연쇄살인,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갈등을 빚는 상황 등 작가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기본 세팅을 충실히 빌려왔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쓰키 시즈코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엔딩을 만들어냈습니다. 말하자면 원작과 거의 같은 경로로 이야기를 이끄는 듯 하면서도 곳곳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사를 통해 원작에 익숙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가 하면, 에필로그에서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도덕관 또는 가치관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승객들 일부가 선실에 비치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발견하곤 요트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이 그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벌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나 그 작품에서 범인이 누구였는지, 어떤 살해 방법이 동원됐는지, 생존자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을 떠올리며 나름의 방어책을 준비하는 장면에선 원작까지 소품으로 삼은 오마주의 재미를 더욱 쏠쏠하게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을 다시 한번 본 뒤에 이 작품을 읽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원작의 기억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나쓰키 시즈코가 설계한 이야기를 읽은 게 훨씬 더 나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만의 묘미를 훨씬 더 진하게 맛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작을 전혀 모르고 읽어도 무방하고, 원작을 보고 이 작품을 읽어도 무방합니다. 나쓰키 시즈코가 보여준 오마주란 이런 것!”의 재미는 어떻게 읽어도 독자에게 확실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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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의 살인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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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코하마의 한 수족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관람객들 앞에서 수조에 빠진 사육사가 참혹하게 상어 밥이 되고 마는데, 하필 가제가오카 고교 신문부 가오리 일행이 사건의 전말을 목격한 탓에 가나가와 현경의 센도 경부와 유사쿠 형사는 체육관의 살인이 해결된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우라조메 덴마를 비롯한 가제가오카 고교생들과 악연을 맺게 됩니다.

싱겁게 해결될 것 같던 사건은 용의자들의 완벽한 알리바이로 인해 벽에 부딪히고, 센도 경부는 천재 고교생 우라조메 덴마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여전히 경찰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수족관을 휘저으며 자신만의 수사를 펼쳐나가던 덴마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사소한 단서들에서 출발하여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부터 깨뜨립니다.

 


애니메이션 CD와 미소녀 피규어로 가득 찬 학교 동아리 방에 은거하는 천재적인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의 두 번째 활약을 다룬 작품입니다. 전작인 체육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 덴마는 엘러리 퀸의 향기가 느껴지는 수사법, 즉 현장의 단서를 통해 진실을 찾아내는 특별한 재능을 선보입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사소한 물건과 흔적들을 통해 범인의 동선을 도출해낸 뒤 그를 기반으로 용의자 11명의 완벽한 알리바이 트릭을 무너뜨리는가 하면, 자신이 세운 범인상과 거리가 먼 용의자를 한 명씩 제외시키면서 궁극의 1인에 도달합니다. 또한 기상천외한 추리로 경찰과 사건 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동료들을 기이한 실험에 끌어들이기도 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용의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직격탄을 날리기도 합니다.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는 덴마의 좌충우돌 캐릭터는 난잡한 단서들로 가득 찬 사건 현장의 기괴함이나 수족관의 차갑고 으스스한 분위기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웃음과 소름을 번갈아 전해줍니다.

 

일본 학원물의 정서와 엘러리 퀸 스타일의 미스터리가 잘 믹스된 수족관의 살인이 재미와 속도감 등 강력한 페이지터너로서 미덕을 갖춘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작인 체육관의 살인에 비해 아쉬움을 많이 느낀 게 사실입니다.

우선, 완벽한 알리바이를 무너뜨리고 사소한 단서를 통해 진실을 밝혀낸 덴마의 활약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면서 동시에 약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체육관의 살인이 밀실의 매력, 동기가 충분해 보이는 다수의 용의자, 수사진 간의 갈등 등 미스터리의 다채로운 재미가 혼재되어 있었다면, ‘수족관의 살인은 좀 과장하자면 덴마에 의한, 덴마를 위한 원 맨 밴드같았다고 할까요?

전작에서 나름 자신만의 역할을 가졌던 센도 경부와 유사쿠 형사는 물론 가제가오카 고교생들 모두 수동적이거나 관객 수준의 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히 남녀노소 골고루 설정된 용의자 11명은 특별한 개성이나 비중을 부여받지 못한 탓에 작품을 읽는 내내 누가 범인일까?”라는 관심을 자아내지 못했습니다. 용의자들 간의 갈등이라든가 치정 혹은 복수의 가능성, 경찰과의 대립 등 좀더 다양한 장치를 구사했더라면 덴마 원 맨 밴드보다 더 알찬 미스터리가 완성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는 덴마의 천재성입니다. 일반인의 두뇌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추리를 펼치는 과정들은 단연 압권이지만, 때로는 무리하게 끼워 맞춰진 듯한 느낌을 준 장면도 있었습니다. ,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하고 연구했던 단서들보다 우연과 행운 덕분에 얻은 평범한 단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도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반부에 요코하마 수족관의 상황을 묘사하고 용의자가 될 11명의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됐는데, 정작 그 시간 동안 주인공 덴마는 사건과는 무관한 곳에 머문 탓에 가장 긴박해야 할 초반부를 느슨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탐정 덴마의 중독성은 단 두 편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됐다는 생각입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곧 세 번째 작품인 도서관의 살인이 출간될 예정인데, ‘수족관의 살인에서 투척된 두 개의 대형 떡밥이 후속작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하나는 오타쿠 캐릭터 덴마의 멜로 라인이고, 또 하나는 덴마의 여동생이 남긴 폭탄발언, 즉 덴마가 집을 나와 학교 동아리 방에 은거하게 된 놀라운 사연입니다. 덩치 큰 이 두 개의 떡밥이 과연 사건과 어떻게 연결될지 무척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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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김경희 지음, 김세희 각본 / 21세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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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이방원-정도전의 3각 관계는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극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부자간의 권력투쟁에다 제로섬 게임의 양극에 선 정치 라이벌의 대결이라는 설정은 일부러 지어낸 허구처럼 긴박감을 품고 있고, 처참한 살육으로 막을 내리는 과정 역시 픽션 속의 한 장면 같기만 합니다.

 

순수의 시대는 이 3각 관계에 가공의 인물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한층 강화시킨 팩션 소설입니다. 정도전의 사위이자 삼군부사로 북방을 호령하던 김민재, 일개 해어화에서 김민재의 첩이 되지만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 가희, 그리고 김민재의 아들이자 경순공주의 남편이며 가희와는 악연으로 맺어진 한량 김진 등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을 투입함으로써 자칫 너무나도 익숙한 조선 초기 권력투쟁의 재판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에 전혀 새롭고 흥미로운 포장을 입혀놓았습니다.

 


개봉된 영화로는 보지 못했지만, 대중적인 코드들이 곳곳에 설정되어 있고, 화려한 액션과 적절한 선정성, 매력적인 캐스팅 덕분에 상업영화로서의 미덕을 고루 갖췄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책으로 출간된 순수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분량과 깊이입니다. 아무래도 영화를 소설로 재포장하다 보니 디테일한 묘사와 깊이 있는 심리묘사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적어도 500페이지 이상이 필요한 이야기를 240여 페이지에 욱여넣은 인상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문장은 고급스럽고 군더더기 없이 유려하게 흐르지만, 좀더 묵직하고 두툼한 서사를 꾸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상징되는 조선 건국 초기의 권력투쟁의 단면과 척박한 운명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개인에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순수의 시대가 품고 있는 팩션의 재미를 위해 한나절 정도 투자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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