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예측불허의 상상력으로 독자를 몰아치는 오쓰이치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호러에서 미스터리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단편 10편이 수록돼있는데, 감금된 채 토막 살해되는 여자들, 기계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사이보그, 말 한마디로 모든 생물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소년, 자신이 죽인 시체들로 집을 짓는 소년 등 극단적인 호러 또는 판타지 설정이 빛나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정통 미스터리와 블랙코미디는 물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비극에 이르기까지 오쓰이치를 한 자리에서 골고루 맛볼 수 있는 뷔페 같은 단편집입니다.

 


10편의 수록작을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면 양립 불가능한 정서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난다식의 이중적인 감정을 전해주는 작품도 있고, 참혹한 죽음을 보며 공포보다는 호기심이나 웃음, 심지어 감동(?)을 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옆구리에 부엌칼이 꽂힌 채 자신의 유산을 걱정하는 구두쇠 노인을 보면 웃음이 나고, 폭력에 시달리던 소녀의 절묘한 복수 장면은 통쾌함보다는 애틋함과 안쓰러움만 남겨줍니다.

번역 후기에서도 “‘ZOO’는 오쓰이치의 퓨어(pure)함과 다크(dark)함이 어우러진 단편집이며, 피부에서는 소름이 돋는데 동시에 애절함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리는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쓰이치의 전작들 가운데 암흑동화가 이 작품과 유사한 정서를 지녔다고 생각되는데, 소녀와 까마귀로 대변되는 양립 불가능한 정서가 독특하고 절묘하게 혼합됐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동 톱 살인마의 위협에 빠진 남매의 이야기를 다룬 ‘SEVEN ROOMS’,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게 하는 슬픈 사이보그 스토리 양지의 시’, 끔찍한 가정폭력에 신음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소녀의 극적인 탈출기 카리자와 요코’, 시체 더미로 집을 짓는 소년의 이야기 차가운 숲의 하얀 집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쓰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연작단편집 엠브리오 기담을 읽는 중인데, 이 작품의 수록작들 역시 낙태된 채 버려진 태아, 40년 전 죽은 유령, 머리카락 괴담 등 꽤나 끔찍하고 불편한 설정들을 품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엔딩에 이르면 거의 예외 없이 훈훈함 또는 애틋함을 느끼게 됩니다. ‘불협화음 같지만 잘 들어보면 실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화음이랄까요? 그의 상상력과 독특한 서사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그저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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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아파트
엘렌 그레미용 지음, 장소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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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0대 정신과 의사 비토리오가 젊은 아내 리산드라 살인범으로 체포됩니다. 오랜 불화에다 사건 현장의 단서들이 모두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군부독재 시절 딸 스텔라를 잃은 뒤로 엉망이 된 삶을 살아왔고 결국 5년 전부터 비토리오에게 진료를 받아오던 에바 마리아는 그의 무죄를 믿으며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진범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살해된 리산드라에 관한 뜻밖의 정보들, 즉 그녀의 불같은 사랑, 기이한 일탈과 불륜, 비정상적 질투에 관해 알게 되면서 에바 마리아는 혼선을 겪습니다. 한편, 수감된 비토리오는 오직 에바 마리아의 조사에 희망을 걸지만, 어느 날 경찰이 그녀의 집을 급습하면서 리산드라 살인사건은 전혀 예상 못 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광기와 요염함, 우아함과 순수함을 겸비한 한 젊은 여인의 미스터리한 죽음, 유력한 용의자이자 남편인 정신과 의사의 무죄를 입증하려 백방으로 노력하는 단골 환자, 그녀의 마음병의 근원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 딸의 실종에 기인한다는 점 등 작가는 불행했던 역사와 상처받은 개인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직조한 것은 물론 치정극과 심리극에다 미스터리라는 포장까지 덧씌움으로써 여느 장르물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자신이 저질렀던, 또는 자신에게 닥쳤던 참혹했던 사건 때문에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환자들입니다. 군부독재의 고문과 학살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서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도 있고, 범죄, 배신, 불화, 자학 등 개인적인 불행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병이 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환자들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리산드라의 죽음에 관련돼있습니다.

 

용의자인 환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그들의 과거사와 트라우마를 디테일하게 서술하다 보니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무척 몽환적이거나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독자 역시 누가 리산드라를 죽였는가?”보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은 과거사와 그로 인해 비틀어지고 일그러진 현재의 심리 묘사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정신과 의사 비토리오의 치료기록에 등장하는 여러 환자의 불행하거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관한 리얼하고 적나라한 묘사들이었습니다. 특히 젊은 여자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힌 채 노화라는 자연의 섭리에 저주를 퍼붓는 한 노파에 관한 기록은 몇 번이나 되읽고 싶게 만들 정도로 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사는 심리극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책읽기를 제공하겠지만, 깔끔하고 선명한 미스터리를 원하는 독자들에겐 조금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심리 미스터리와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의 상흔을 결합하려던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 탓인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바구니에 담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내내 어떤 식으로든 개인-역사-심리-사건이 서로 결합돼있긴 한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 결합력이 점점 느슨해지거나 산만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70~80년대 남미 독재에 관한 영화를 여러 편 본 적이 있어서 나름 이 작품의 엔딩을 예상해봤지만, 작가는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예상 못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급선회했습니다. 이에 관해 뒤통수를 치는 훌륭한 반전으로 평가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어쩌면 반대로 아쉽게 여긴 독자도 꽤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앞서 언급한 느슨하거나 산만한 결합의 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심리 미스터리에 거는 독자의 기대와 눈높이는 일반 미스터리에 비해 훨씬 높습니다. ‘비밀 아파트는 심리 미스터리로서 그만의 독특함을 자랑하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애초의 높은 기대감에 비해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 넘치는 필력을 발산한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았는데, ‘비밀 아파트이전에 엘렌 그레미용을 세상에 널리 알린 비밀 친구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너무 큰 기대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엘렌 그레미용의 데뷔작을 읽다 보면 비밀 아파트에서 놓친 그녀만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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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명탐정 사건기록부
오카모토 기도.노무라 고도.히사오 주란 지음, 김혜인.고경옥.부윤아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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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당대 명탐정들의 체포록 모음집입니다. 노무라 고도(1882~1963)제니가타 헤이지 체포록’, 오카모토 기도(1872~1939)한시치 체포록’, 그리고 히사오 주란(1902~1957)아고주로 체포록등인데, 이중 작가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고 자극을 받아 썼다는 한시치 체포록은 귀에 익을 정도로 그 명성을 자주 들어봤지만 실제 작품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100% 아날로그 수사법에 의존해야 했던 시대지만, 범죄의 양상과 흉포함은 현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보니 당시 탐정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탐문과 증거수집 외에는 우연과 기적밖에 바랄 수 없는 열악한 현실에서 세 명의 탐정은 빛나는 추리와 타고난 직감으로 난해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엽전 날리기의 명수이자 쇼군의 신임을 얻은 제니가타 헤이지는 주술의 제물이 되는 여인들, 사이코패스에게 살해당하는 여인들, 인신매매의 희생자 등 모두 여자를 대상으로 한 참혹한 범죄를 수사합니다.

노년에 이른 한시치가 누군가에게 과거의 무용담을 들려주는 형식을 가진 한시치 체포록은 그 시작은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의 오프닝 같지만, 거기에 담긴 사건의 내용은 치정에 얽힌 비극, 괴담에 가까운 불가해한 사건 등 복잡하고 끔찍할 뿐입니다.

거대한 턱을 지닌 외모로 유명한 아고주로는 게으른 4차원 캐릭터처럼 보이다가도 정작 사건에 뛰어들면 날카로운 추리와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현대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당시 명탐정들의 아날로그식 수사가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도 있고, 특히 직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대목에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습니다. (간혹 묻지마 직감 수사가 등장하는데, 한두 군데 외엔 크게 거북하진 않습니다) 또 워낙 짧은 단편 9편으로 구성돼있어서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재미있어질 만하면 끝나버리는 분량의 아쉬움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 탐정의 활약은 결코 촌스럽지도 않고, 요행수를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집요함과 추리에 있어서는 현대의 명탐정에 못잖은 기량을 선보입니다. 짧은 분량의 문제는 어쩔 수 없지만, 대신 작가 한 명당 세 편의 작품을 맛볼 수 있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으면 될 것 같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2의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나 셜록 홈즈와 동시대를 살아간 에도 시대 명탐정의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들에겐 짧지만 흥미 있는 책읽기의 시간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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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춤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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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하룻밤 사이 수많은 꿈을 동시에 꾼, 그것도 서로 뒤엉켜 원형을 잃어버린 꿈들을 한꺼번에 꾼 느낌입니다. 아직 국내에 출간된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절반도 채 못 읽었지만, 지금까지 읽을 작품 중 가장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뒤끝이 남는작품입니다.

() 시리즈 단편집이라는 별칭처럼 장르와 소재는 제각각이고, 어떤 일관성 있는 테마로 엮이지도 않았습니다. 3페이지 남짓한 엽편부터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연작 단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수록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녀의 주특기인 현실과 판타지의 기묘한 버무림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현실감 있게 흐르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판타지로 넘어가는가 하면, 판타지려니 하고 읽다 보면 어느새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는 몇몇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겨줍니다.

 

수록된 작품들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볼 수 있는데, 추억의 도시가 배경인 친구와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타이베이 소야곡’, ‘화성의 운하’), 기존 작품에 실렸던 에피소드의 뒷이야기를 다룬 작품(‘변심’, ‘변명’), 미니멈급 미스터리의 알싸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변심’, ‘오해’), 개와 고양이가 주조연을 맡은 판타지(‘충고’, ‘협력’, ‘이유’), 오래 전의 인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그린 이야기(‘나와 춤을’, ‘둘이서 차를’) 등입니다.

 


일부 예외도 있지만, 온다 리쿠 본인이 일상에서 겪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특별한 향수를 남겨준 여행이나 단골 카페에서 본 소소한 일상들, 또는 존경하거나 좋아했던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도 있고, 심지어 꿈속에서 들은 대화를 기록해놓았다가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든 첫 느낌은, 어쩌면 판타지는 늘 우리 곁에 조용히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우리를 지켜보거나 우리가 찾아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 변화하는 날씨와 계절, 내 책상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 따위는 교육과 상식을 통해 획일화된 눈을 가진 보통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하찮은 풍경에 불과하지만, 온다 리쿠는 어딘가 비뚤어지거나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눈을 통해 그 안에서 판타지를 엮어낸 것이 아닐까요?

 

모든 단편집이 그렇듯, 독자마다 제대로 꽂히는 작품은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따라서 수록된 19편 모두에게 만족감과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변심’, ‘소녀계 만다라’, ‘화성의 운하’, ‘둘이서 차를’, ‘나와 춤을이 온다 리쿠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게 해준 작품들이었습니다.

 

온다 리쿠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입니다. 나름 온다 리쿠 팬이라고 자처하는 저도 일부 작품에선 뭐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그녀가 창조해낸 몇몇 이야기에는 전혀 녹아들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가장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뒤끝이 남는작품이라고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인데, 아마 이 작품으로 온다 리쿠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약간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편 모두 조금씩은 온다 리쿠만의 개성이 투영됐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녀의 세계로 들어서는 관문으론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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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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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해 놓았지만, ‘허즈번드 시크릿은 마크 해던의 빨간 집이나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처럼 가족에게 닥친 불행, 가족으로부터 가해진 상처, 가족을 향한 분노를 다룬 비() 장르물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제목대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축은 남편의 비밀이고 미스터리 코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장르물의 훌륭한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소중한 딸이 살해당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절망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력한 용의자 코너를 눈앞에서 매일 마주해야 하는 레이첼 크롤리, 우연히 발견한 남편 존 폴의 편지 한 통 때문에 하루아침에 일상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이 잿더미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세실리아 피츠패트릭, 쌍둥이나 다름없는 펠리시티와 남편 윌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불륜 고백을 듣곤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떠나게 된 테스 올리리 등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편이 7일 동안 겪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딸을 앞서 보내고 이제 아들과 손자까지 멀리 떠나보내야 될 노인의 구원(舊怨)과 상심,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덕분에 남편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아내의 갈등, 남편의 불륜에 증오심으로 맞대응하면서도 어린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아내의 혼란, 그리고 고부간, 형제간, 부모자식간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관심, 애정, 의심, 증오, 시기, 질투 등 그야말로 가족을 둘러싸고 품을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이 작품이 추리/미스터리로 분류된 것은 세실리아가 연 판도라의 상자 속 남편의 비밀 때문인데, 이 비밀이 초반부에 일찌감치 폭로되면서 이야기는 알게 된 비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어떻게 해도 가족의 붕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세실리아의 고뇌와 이미 붕괴된 가족을 30년 가까이 겨우겨우 지탱해 온 레이첼의 상처는 뛰어난 장르물 못잖은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엔딩에 대한 궁금함과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또한 남편의 불륜에 항거하는 테스의 이야기는 보조축이면서도 불륜뿐 아니라 중년부부가 맞이할 수 있는 정서적 위기를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어서 말초적인 재미와 함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세 가족을 몰아넣은 작가가 어떤 엔딩을 택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작위적인 비극으로 끝나도 실망스러울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작가는 한편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엔딩을, 한편으론 전혀 예상 못 한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위기의 날들을 보낸 세 가족에게 어김없이 새날이 밝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독자는 이라고 인쇄된 페이지 너머에서 새롭게 시작될, 하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행복과 불행, 믿음과 불신이 불안하게 공존할 그들의 남은 삶을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수는 사람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첫 페이지의 제사(題詞)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비로소 확 와 닿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상황을 다룬 작품이든 중심 테마에 가족의~’ 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선입관이 떠오르게 되는데, 하나는 좀 뻔하고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이고, 묵직하고, 그래서 후유증이 길게 남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허즈번드 시크릿은 첫 선입관 때문에 잠시 선택을 미뤘다가 결국 읽고 나서 두 번째 선입관이 맞아든 것을 경험한 특별한 작품입니다. 가족에게 가해진 온갖 끔찍한 상처들을 들여다본 탓에 마음은 무겁지만, 농밀한 묘사와 짜임새 있는 구성 덕분에 빠른 속도로 재미있게 읽은 것도 사실입니다.

 

리안 모리아티가 자주 만나기 힘든 호주 작가이기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력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가 그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 역시 판타지적 재미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 결혼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작품이라는 걸 보면 아마도 허즈번드 시크릿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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