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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부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해 놓았지만, ‘허즈번드 시크릿’은 마크 해던의 ‘빨간 집’이나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처럼 가족에게 닥친 불행, 가족으로부터 가해진 상처, 가족을 향한 분노를 다룬 비(非) 장르물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제목대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축은 ‘남편의 비밀’이고 미스터리 코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장르물의 훌륭한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소중한 딸이 살해당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절망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력한 용의자 코너를 눈앞에서 매일 마주해야 하는 레이첼 크롤리, 우연히 발견한 남편 존 폴의 편지 한 통 때문에 하루아침에 일상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이 잿더미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세실리아 피츠패트릭, 쌍둥이나 다름없는 펠리시티와 남편 윌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불륜 고백을 듣곤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떠나게 된 테스 올리리 등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편이 7일 동안 겪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딸을 앞서 보내고 이제 아들과 손자까지 멀리 떠나보내야 될 노인의 구원(舊怨)과 상심,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덕분에 남편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아내의 갈등, 남편의 불륜에 증오심으로 맞대응하면서도 어린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아내의 혼란, 그리고 고부간, 형제간, 부모자식간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관심, 애정, 의심, 증오, 시기, 질투 등 그야말로 ‘가족’을 둘러싸고 품을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이 작품이 추리/미스터리로 분류된 것은 세실리아가 연 판도라의 상자 속 남편의 비밀 때문인데, 이 비밀이 초반부에 일찌감치 폭로되면서 이야기는 ‘알게 된 비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어떻게 해도 가족의 붕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세실리아의 고뇌와 이미 붕괴된 가족을 30년 가까이 겨우겨우 지탱해 온 레이첼의 상처는 뛰어난 장르물 못잖은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엔딩에 대한 궁금함과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또한 남편의 불륜에 항거하는 테스의 이야기는 보조축이면서도 불륜뿐 아니라 중년부부가 맞이할 수 있는 정서적 위기를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어서 말초적인 재미와 함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세 가족을 몰아넣은 작가가 어떤 엔딩을 택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작위적인 비극으로 끝나도 실망스러울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작가는 한편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엔딩을, 한편으론 전혀 예상 못 한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위기의 날들을 보낸 세 가족에게 어김없이 새날이 밝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독자는 ‘끝’이라고 인쇄된 페이지 너머에서 새롭게 시작될, 하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행복과 불행, 믿음과 불신이 불안하게 공존할 그들의 남은 삶을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수는 사람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첫 페이지의 제사(題詞)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비로소 확 와 닿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상황을 다룬 작품이든 중심 테마에 ‘가족의~’ 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선입관이 떠오르게 되는데, 하나는 ‘좀 뻔하고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이고, 묵직하고, 그래서 후유증이 길게 남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허즈번드 시크릿’은 첫 선입관 때문에 잠시 선택을 미뤘다가 결국 읽고 나서 두 번째 선입관이 맞아든 것을 경험한 특별한 작품입니다. 가족에게 가해진 온갖 끔찍한 상처들을 들여다본 탓에 마음은 무겁지만, 농밀한 묘사와 짜임새 있는 구성 덕분에 빠른 속도로 재미있게 읽은 것도 사실입니다.
리안 모리아티가 자주 만나기 힘든 호주 작가이기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력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가 그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 역시 ‘판타지적 재미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 결혼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작품이라는 걸 보면 아마도 ‘허즈번드 시크릿’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