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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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풍광 좋은 애리조나의 작은 마을 주니퍼에 대형마트 더 스토어가 들어서면서 아무도 예상 못한 대혼란과 급격한 변화가 몰아닥칩니다. 더 스토어는 마을의 상권은 물론 의회, 경찰, 소방, 언론, 학교까지 먹어치우면서 마침내 주니퍼의 모든 것을 장악합니다.

처음부터 더 스토어의 등장을 불안하게 여겼던 빌은 주니퍼 내의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거나 사라지거나 가게를 잃는 지경에 이르자 신문편집장 벤, 스트리트 등과 함께 더 스토어의 만행에 저항해보지만 오히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특히 더 스토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두 딸에게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목격하면서 빌은 도청과 감시의 눈길을 뚫고 더 스토어와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심합니다.

 


더 스토어는 소도시의 상권을 잠식하며 이익을 독점하는 단순한 대형마트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기업 흡혈귀라고 묘사되듯 실제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존재합니다. 대형마트가 없는 소도시만 골라 각종 혜택을 받으며 지점을 오픈한 뒤 의식주는 물론 행정과 언론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모든 것을 천천히 잠식합니다. 자영업자는 모조리 몰락하거나 주니퍼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취약한 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더 스토어의 등장을 환영하며 온갖 특혜를 줬던 의회는 결국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되고, 큰 혜택을 누리게 됐다고 좋아하던 소비자들은 점차 더 스토어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거대 권력이 된 더 스토어에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이미 누군가 사라지거나, 의문의 죽음이나 방화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자본주의의 단면과 함께 작가는 더 스토어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타인을 통제하며 쾌감을 느끼는 권력의 중독성을 설파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끔찍한 방법으로 직원들의 정신과 육체를 장악하는 과정이나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응징을 가하는 장면, 또 폐점 후 목격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밤의 매니저)을 등장시켜 문명화된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의 공포감을 상승시킵니다.

 

주니퍼를 지키기 위해 더 스토어에 저항하는 빌과 그의 친구들의 노력은 도청과 감시, 협박과 폭력 속에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고, 절반 이상의 주민은 더 스토어가 나눠준 독이 묻은 사과에 열광하며 그들에게 주니퍼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권력까지 기쁘게 넘겨줍니다. 슈퍼맨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더 스토어의 진격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이고, 결국 주니퍼의 멸망 외에는 딱히 예상되는 엔딩이 없다고 판단될 즈음, 작가는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급선회시킵니다.

 

비교적 단선적인 서사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긴장감 넘치게 채워 넣은 작가의 필력은 대단합니다. (물론 동어반복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종종 있어서 100페이지 정도만 줄였다면 그야말로 빈틈없는 작품이 됐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자가발전하는 대형마트를 그린 대목이나 소도시 주민 개개인이 느끼는 공포심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대목을 읽다 보면 스티븐 킹과 함께 대표적인 호러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작가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저런 아쉬움이나 잘 이해가 안 되는 지점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된, 또 그 해결방법 역시 다소 모호했던 엔딩 부분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더 스토어에게 직격탄을 맞는 자영업자들을 선의의 피해자로만 설정한 점이나 주니퍼의 소비자들을 획일적이고 우매한 추종자들로 암시한 점, 또 이미 다른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 더 스토어가 별 어려움 없이 경찰과 언론, 학교와 의회까지 장악하고 통행금지까지 단행하는 장면은 아무리 이 작품의 배경이 1990년대라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더 스토어는 갑자기 치솟은 5월의 더위를 충분히 식혀줄 만큼 서늘한 공포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고, 탐욕, 도덕, 권력, 이기심, 자본주의 등 다채로운 코드들이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믹스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 특이한 작품이었습니다. 브람스토커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더 스토어가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이라는 점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앞으로 가끔씩이라도 벤틀리 리틀의 작품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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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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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할복한 아버지 소자에몬의 무고함을 밝혀내고 무너진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에도로 올라온 도가네 번 출신의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에도 대행 사카자키, 무라타야 대본소의 지헤에, 벚꽃 정령을 닮은 여인 와카,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쪽방촌 도미칸 나가야의 개성 강한 이웃들과 함께 겪은, 제목 그대로 뒤죽박죽또는 벚꽃박죽의 서사가 그려진 미스터리 사극입니다.

 

아버지의 누명 벗기기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가운데, 쇼노스케 주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병행됩니다. 아버지의 누명이 아버지의 필체로 쓰인 조작된 뇌물 수취증서에서 비롯된 탓에 쇼노스케는 에도 대행 사카자키와 대본소의 지헤에의 도움을 받아 필사 일을 하면서 본인조차 혼동할 만큼 완벽하게 필체를 모방하는 대서인(代書人)’을 찾습니다. 그런 와중에 쇼노스케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편지 속 암호를 해독하는가 하면, 협박장의 글씨를 통해 납치사건을 밝혀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은 뇌물 수취증서, 편지, 협박장 등 글로 쓰인 어떤 것이 중요한 단서나 증거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글씨를 들여다보고 필사하며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려는 쇼노스케의 노력은 일반적인 탐문이나 추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줍니다. 또한 그것이 쇼노스케의 목표 - 아버지의 글씨를 모방하여 누명을 씌운 자를 찾는 미션과 절묘하게 닿아있어 별개의 사건이지만 내내 긴장감을 갖게 만듭니다.

 


벚꽃, 다시 벚꽃19세기 에도를 무대로 한 미스터리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가족의 의미, 권력과 파벌, 빈곤의 문제 등 그 시대 사회상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증오하는 가족부터 늘 다투면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족 군상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재미와 감동, 안타까움과 회한을 전해주는가 하면, 한줌의 권력을 위해 서로를 속이고 파멸시키려 드는 파벌들의 다툼이나 당장 오늘 하루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빈곤의 문제는 물론, 끈 떨어진 무사들의 초라한 모습,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함을 잃지 않는 쪽방촌 서민의 삶, 화려한 요릿집 여주인의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 등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 덕분에 마치 그 무렵의 에도를 한 바퀴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줍니다.

 

이 작품의 원제 사쿠라호사라’(ほうさら)뒤죽박죽이란 뜻의 고슈 방언 사사라호사라’(ささらほうさら)를 살짝 비튼 것인데, ‘여럿이 마구 뒤섞여 엉망이 된 모양을 뜻하는 우리나라의 뒤죽박죽과 달리 고슈 방언 사사라호사라온갖 일이 있어 힘들었다, 큰일났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쇼노스케가 고향 도가네 번에서는 물론 에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의 목표를 위해 온갖 일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뜻인데, 여기에 작품 곳곳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벚꽃의 의미를 더함으로써 벚꽃박죽이라는 운치 있는 제목이 태어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벚꽃, 다시 벚꽃이라는 세련된 제목도 괜찮았지만, ‘벚꽃박죽이라는 투박하지만 어딘가 중의적인 느낌을 주는 제목에 좀더 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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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싱 - 돌아온 킬러 의사와 백색 호수 미스터리 밀리언셀러 클럽 119
조시 베이젤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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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마피아 킬러이자 의사인 피에트로 브라우나는 라이어넬 아지무스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채 유람선에서 선상 의사로 근무 하던 중 대부호 렉 빌의 제안을 받고 미네소타 주 오지에 있는 백색호수를 방문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백색호수에 괴물이 있다고 주장하며 스폰서를 끌어 모은 현지 캠핑장 운영자 레지 트레이거 일행과 함께 괴물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100% 사기 같지만 마피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자금이 필요했던 아지무스는 렉 빌이 동행시킨 미모의 고생물학자 바이올렛과 함께 백색호수에 도착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사건에 연이어 휘말리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작은 도시 포드와 그곳에 인접한 신비한 분위기의 백색호수는 괴물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와 함께 으스스한 공포물의 배경을 이룹니다. 수년 전 일어난 백색호수에서의 의문의 사망사고가 정말 괴물에 의한 것인지, 그 후에 발생했지만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 역시 괴물과 관련 있는 것인지, 이 쇼를 기획한 레지 트레이거를 비롯하여 괴물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자들의 의도는 무엇인지, 집단 히스테리에 걸린 듯한 백색호수 인근 주민들 사이의 긴장감의 실체는 무엇인지, 특히 거액을 주며 바이올렛과의 동행을 조건으로 아지무스를 백색호수까지 보낸 대부호 렉 빌의 의중은 무엇인지 등 수많은 미스터리와 함께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위태로운 활극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애초 모든 것이 사기라고 확신했던 아지무스는 백색호수에서 정체불명의 생물체를 직접 맞닥뜨린 후론 괴물 실재론이 마냥 허구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명백히 거짓 쇼라는 선입견과 실제 자신이 겪은 일사이에서 아지무스는 혼란에 빠집니다. 작은 도시 포드를 황폐하게 만든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은 더욱 난감했는데, 관련자들의 진술이 명백한 살인이라는 주장과 단순사고라는 의견으로 갈리면서 아지무스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언뜻 보기엔 괴물 판타지와 살인 미스터리를 융합시켜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탐욕에 관한 것입니다. 막판에 드러나는 진실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그로 인해 파생된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탐욕을 선의로 왜곡하고, 희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인간들을 고발하면서 작가는 괴물이라는 신비한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중층의 서사를 잘 정렬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를 운반하는 도구는 의외로 블랙 코미디 풍의 화법입니다. 냉소와 풍자를 가득 담아 최대한 비틀고, 비꼬고, 비아냥대는 문장들은 의사지만 마피아 킬러의 전력을 지녔고 도피자금을 위해 사기극이 분명한 쇼에 동참한 아지무스의 모순된 캐릭터와 잘 어울리면서 독자의 눈길을 즐겁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다만, 가끔씩 과하게 사용된 나머지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큰 그림에서 보면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분량 대비 부족했던 서사의 두께입니다. 540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알맹이가 되는 서사는 비교적 단선적이었고, 막판에 드러나는 비밀과 거짓말의 실체는 기대한 만큼의 폭발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쇼에 동참한 적잖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개인사가 상당한 분량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메인 사건과의 관련성은 그리 밀접하지도, 촘촘하지도 않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메인 요리는 소박한 반면 전채와 디저트는 너무 많은데다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할까요?

 

워낙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블랙 코미디 풍의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또 음습한 분위기의 미지의 괴물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대책 없는 킬러 출신 의사 라이어넬 아지무스의 모험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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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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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원죄(冤罪) 피해자 지원 단체의 스태프인 나미키 나오토시는 자신과 동료들이 보살펴오던 세 명의 여성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녀들은 사회를 파멸시킬 만큼 위험한 인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료 스태프인 아카네가 그의 계획을 눈치 채고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해오자 나미키는 계획을 바꿔 당장 오늘 밤중으로 세 여성을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무자비한 살인을 통해 극한의 절정감을 맛보면서 나미키는 폭주하듯 밤을 달립니다. 하지만 폭주의 끝에 이르러 나미키는 예상 못한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연쇄살인의 동기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처음 만나는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입니다. 본격 미스터리가 전공이라는데, 어쩌다 보니 그가 잠시 외도한 작품부터 읽게 됐습니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하룻밤에 걸친 연쇄살인마의 리얼한 살인기록이지만 동시에 판타지 또는 지독한 심리극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선정적이고 잔혹한 살인 과정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고 사실감 넘치지만, 정작 연쇄살인마의 살인 동기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두 가지 서사가 절묘하게 뒤섞인 작품입니다. 하나는 완전범죄를 통한 연쇄살인을 꿈꾸는 범인의 시점에서 서술된 미스터리이고, 또 하나는 두 개의 판타지, 즉 심리조작과 세뇌를 통해 반사회적 괴물을 창조하려는 악마적 판타지와 그렇게 창조된 괴물을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려 하는 강박적 판타지입니다.

 

나미키의 완전범죄 미스터리는 사실 초보 살인범의 어설픈 행각에 관한 기록이 전부입니다. 어떤 흉기를 준비하고, 누구부터 죽일 것이며, 어떻게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인가, 또 조금 전에 실행한 살인에서 실수한 것은 무엇이며, 반성할 것은 무엇인가 등 살인범 나미키가 끊임없이 주절대는 독백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서술은 때론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하다가도 때론 독자 스스로 범행을 저지르는 듯한 극단적인 사실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백미는 나미키가 목표로 삼은 세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악마적 판타지와 절박하게 연쇄살인을 감행하려는 나미키의 강박적 판타지에 있습니다. 나미키를 비롯한 원죄 피해자 지원 단체의 스태프들은 아버지를 잃은 세 명의 미소녀에게 특별히 관심을 더 가졌고, 수년에 걸쳐 그녀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이쪽 편저쪽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왔습니다. ‘이쪽 편인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고, 아버지에게 원죄를 씌운 저쪽 편은 절대 악이라는 인식이 고착된 탓에 그녀들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격으로 성장했고, 타인의 죽음과 불행에 대해 일체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의 속성을 갖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그녀들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괴물성이 비로소 발현될 것을 감지한 나미키는 그녀들이 사회를 파멸시킬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전화되기 전에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괴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미키는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맙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보며 욕정을 느끼는가 하면, 죄책감 따윈 찾아볼 수가 없는 괴물에 다름 아닌 캐릭터로 진화해나갑니다. 그래서인지 역자 후기에 인용된 니체의 표현이 새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공감이 됐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미소녀들이 반사회적 괴물로 성장하고 전화하는 과정, 그녀들의 괴물성을 증폭시키려는 쪽과 저지하려는 쪽의 목숨을 건 갈등, 또 괴물성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키워지고 주입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잠재된 가능성인지에 대한 논란 등 섬뜩하고 독특한 판타지가 작품 전체에 걸쳐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작가는 세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알라우네(Alraune)라는 전설 속 식물을 설정했는데, 독일의 전설에 따르면 알라우네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교수형에 처해진 남자가 흘린 정액이 땅속에 머무르며 피워낸 기괴한 식물입니다. 알라우네는 그것을 뽑아 정성스럽게 키운 주인에게는 행복과 행운을 전해주지만, 그것을 뽑을 때 나는 비명을 들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귀를 막은 채 뽑아야 무사히 알라우네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나미키에게 있어 세 여성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아버지를 둔 알라우네였고, 자신과 지원 단체의 극단적인 보호와 세뇌 속에 사회를 파멸시킬 괴물로 성장한 나머지 반드시 뽑아내야 하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으며, 그래서 나미키는 그녀들을 뽑는동안 듣게 될 비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귀를 막고 밤을 달렸던 것입니다.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반복되는 상황과 어설픈 초보 살인범의 행각이 조금은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감을 발산하는 판타지에 집중한다면 그 어느 장르물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재미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 중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를 소장하고 있는데 그의 전공인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니 당장이라도 읽어보고 싶지만, 우선은 이 작품의 여운이 가실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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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의 희귀본과 중고책 서점 - 어느 사이코패스의 사랑
캐럴라인 케프니스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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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의 희귀본과 중고책 서점에서 일하는 조 골드버그는 어느 날 서점에 찾아온 기네비어 벡을 자신의 운명으로 점찍습니다. 그날 이후 조의 일상은 벡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녀의 스마트폰을 손에 넣은 뒤론 사생활까지 낱낱이 엿봅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벡은 조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벡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연인과 단짝 친구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의 집착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벡을 소유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를 다집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벡을 갖게됐지만, 조 앞에 결코 희열과 기쁨만 찾아오진 않습니다. 또다시 나타난 방해자, 어딘가 의심스러운 벡의 행동, 꽁꽁 감춰놓았던 비밀의 탄로 등 조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벡과의 술래잡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합니다.

 

일기 또는 독백 형식으로 서술된 한 남자의 평범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조의 일기는 온통 벡에 대한 집착과 욕망, 섹스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시에 (이 작품을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장르물로 분류시켜주는) 몇몇 살인에 대한 담담하면서도 세밀한 고백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어느 사이코패스의 사랑이라는 언밸런스한 부제는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녀의 메일을 해킹하고, 뒤를 미행하며, 소지품을 하나씩 소장해가는 조는 명백히 제정신이 아닌 광적인 스토커이고, 그가 저지른 살인 역시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하에 실행된 것들이지만, 작가는 일기 형식의 문장과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한 심리 묘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 순간 이 광적인 스토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듭니다. 스토킹이나 살인 모두 명백한 범죄이고, 조는 사이코패스로 분류되는 것이 마땅한 인물이지만 그의 일련의 행위를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처럼 잘 포장했기 때문입니다.

 

벡 역시 어느 한 곳, 누구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을 비범한 여자입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을 끌어들여 파멸시키거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치명적인 항성 같은 존재입니다. 조가 벡을 묘사할 때 종종 영화 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만을 언급하곤 하는데, 그 영화를 본 독자라면 벡의 치명적인 매력이 어떤 모양새인지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읽다 보면 결국 조와 벡 모두 비슷한 DNA를 지닌 사람들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조와 벡의 해피엔딩을, 누군가는 비극적 엔딩을 기대하게 될 텐데, 두 사람의 관계가 조울증처럼 극단을 치달으며 전개되는 덕분에 거의 마지막까지 그들의 엔딩을 쉽게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2년 전쯤 읽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라는 작품이 종종 생각났습니다. 1920년대에 출간됐고, 일본 특유의 사육이라는 테마를 기반으로 15살 소녀 나오미를 향한 28살 남자 가와이 조지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다룬 작품인데, 가와이 조지가 집착보다는 헌신에 가까운 무한애정을 바쳤다면 무니의~’의 주인공 조는 좀더 공격적이고 기복이 심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엔 사랑에 관한 한 비슷한 경로를 걸은 인물들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가와이 조지가 탐미주의에 빠진 마조히스트라면, 조는 공격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사이코패스 새디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사이코패스의 사랑이라는 부제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한 독자라면 당혹스러움을 느끼거나 매끄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경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심리묘사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딱히 페이지터너라고 부를 수도 없고, 살인과 스토킹을 긴장감 있게 묘사했다고 할 수도 없어서 애초 장르물의 매력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뛰어난 캐릭터 플레이와 집착-냉소-욕망에 관한 디테일한 심리묘사 등 이 작품만의 미덕은 분명히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음악, 영화, 책이 자주 인용되거나 언급되는데 저의 경우 다행히 대부분 아는 작품들이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음악의 경우 엘튼 존과 데이빗 보위, 영화의 경우 한나와 그의 자매들’, ‘클로저’, 책의 경우 스티븐 킹의 샤이닝’, ‘닥터슬립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영화와 책의 경우 검색을 통해서라도 약간의 사전 지식을 예습한다면 이 작품을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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