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 - 두 남매 이야기 케이스릴러
전혜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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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살해죄로 5년 형을 복역한 서준현이 출소합니다. 이복동생 나현을 성폭행하던 아버지는 물론 의붓어머니까지 살해한 중범죄였지만, 정황 상 동정의 여지가 많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어서 정상이 참작됐던 것입니다. 나현은 자신을 지키려다 살인까지 저지른 준현을 감싸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를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경기도 장제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서윤병원 원장인 서필환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손주인 준현과 나현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엄청난 반발과 후폭풍을 몰고 왔고 결과적으로 준현과 나현을 큰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런 와중에 5년 전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려는 기자까지 나타나자 준현과 나현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그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섭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에 접속한 후에야 이 작품이 이미 10년 전 만화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당시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로 이야기의 파괴력과 무게감이 대단해서 그 여운을 한참이나 만끽했는데, 아마 10년 전 만화로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 역시 비슷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씨 일가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비극을 다루고 있어서 이야기의 얼개는 무척이나 복잡하게 짜여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지만 그 관계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얽혀있는데다 그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악의와 탐욕이 워낙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탓에 이야기의 복잡함은 더욱 그로테스크한 모양새를 띄게 됩니다.

 

아버지는 천하의 망종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인자였다. 살인도, 강간도, 기만도, 배신도, 혈연 간의 욕망도,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독을 마시는 것까지도, 이 집안에서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서로서로 돌아가며 저질러온 일이었다.” (p329)

 

비극의 연원은 수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들을 오늘날 수면위로 떠올려 무수한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만든 것은 첩의 자식으로 서씨 일가에 들어온 준현이 일으킨 5년 전 살인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성폭행하고, 또 다른 자식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그 사건은 경기도 장제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서씨 일가를 휘청거리게 만든 것은 물론 상속 구도에도 큰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준현이 출소하자 서씨 일가의 갈등은 격화되고 상속 재산을 놓고 끔찍한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현과 나현을 향한 폭력과 협박이 난무하면서 조금씩 오랜 과거의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혼란 속에서 살인미수, 자살, 살인 등 일가족의 절멸을 예고하는 듯한 잔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서씨 일가는 물론 그 주위에서 증오와 악의를 키워온 인물들은 길게는 반세기, 짧게는 5년 안팎에 걸쳐 그야말로 막장극 속의 악귀들처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이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으려 추잡한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빈번히 목격되는 건 근친상간이라는 터부(taboo)입니다. 작가는 이 금지된 사랑이 가진 음습한 폭발력을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여러 번 터뜨리는데, 그 대목들은 대부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흥미로운 반전을 품고 있어서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어두운 늪의 바닥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공포심과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인물도 많고 그만큼 이야기의 갈래도 사방으로 뻗쳐있는데다 크고 작은 반전들이 마지막 장까지 연이어 배치돼있다 보니 스포일러가 될 정보가 워낙 많아서 더 상세한 줄거리를 소개하긴 곤란합니다. 하지만 족쇄는 올해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불편하고 불쾌할 정도로 피부에 와 닿는 등장인물들의 악의와 그것이 빚어낸 피비린내 진동하는 잔혹한 사건들,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다짐을 나누는 남매의 금단의 사랑,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악연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빈틈없이 그려냄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든 작가의 필력 등 족쇄는 추천할 이유가 수두룩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족쇄이전에 유일하게 읽은 전혜진의 작품은 전래동화와 고전소설을 모티브로 삼은 장르물 앤솔로지 모던 테일의 수록작 수경-나선 미궁 속의 여자들입니다. 당시 서평엔 괜찮았다.” 정도의 짧은 평만 남겼는데, ‘족쇄를 통해 관심목록에 올려놓을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고,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전혜진의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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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의 집 - 제3회 바라노마치 후쿠야마 미스터리 문학 신인상 수상작!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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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항구에서 엄마 이쿠에와 아들 슈이치로가 탑승한 자동차가 바다에 빠진다. 끝내 두 사람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고 은둔형 외톨이인 막내딸 유키나만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된다. 보험사가 엄마와 오빠의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자 유키나는 사립탐정 사카키바라에게 보험사와의 협상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우리 집 귀축은 엄마였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사카키바라는 유키나의 의뢰를 수락하고 사고와 관련된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도 인터뷰하게 된다. 그러다 점점 가족과 집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숨 막히는 참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끔찍한 참상의 이면에는 더욱 놀랄 만한 진상이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21기만의 살의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미키 아키코의 작품이자 그녀가 63(2010)에 신인상을 받았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기만의 살의단 한 편만으로 그녀의 팬이 됐는데, 3년 만에 새 작품을, 그것도 시마다 소지가 희귀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추리의 정밀기계가 쓴 것 같다라며 극찬했던 작품을 읽게 돼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유키나의 의뢰를 받은 사립탐정 사카키바라가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모자의 죽음이 자살이나 보험사기가 아니라 사고임을 입증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탐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직 형사인 사카키바라는 탐문을 거듭할수록 지난 13년 동안 유키나 일가족에게 닥쳤던 기이한 사건들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고, 유키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일가족 주변사람들에게서 그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마 이쿠에를 인간의 탈을 쓴 악귀”, “영락없는 야차라고 비난합니다. 의뢰인인 유키나가 우리 집 귀축은 엄마였다라고 말한 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관련자들과 유키나가 들려준 귀축이쿠에의 만행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13년 전, 남편 기타가와가 죽은 이후 아들 슈이치로, 딸 아야나, 유키나와 함께 살아온 이쿠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 방화, 사기, 협박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동차 사고로 실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저질러온 악행들은 지금도 관련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가차 없었습니다.

사립탐정 사카키바라는 관련자들의 진술 속에 깃든 사소한 단서와 위화감을 토대로 일가족에게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때론 의뢰인인 유키나가 감추거나 속인 부분까지 포착해낼 정도로 그는 전력을 다해 조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지난 13년 동안 여러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던 사건들의 진실을 의뢰인인 유키나에게 보고합니다. ‘귀축으로 불렸던 엄마 이쿠에의 진면목, 언니 아야나에게 닥친 비극의 진상, 엄마와 오빠가 인적 없는 항구에서 바다에 빠져 실종된 사건의 비밀 등 사카키바라는 누구도 예상 못한 반전을 폭로하며 유키나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인물이나 사건 모두 아날로그적이지만, 빼어난 트릭과 반전의 힘은 올드한 설정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속도감 역시 대단해서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만드는데, 문제는 이 속도감에 도취되면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와 단서를 죄다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기만의 살의를 읽고 썼던 서평의 일부인데, ‘귀축의 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대목이라 인용해봤습니다. 현란한 기교나 특수한 설정 같은 건 조금도 없지만 깊고 그윽한 추리의 향연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옮긴이의 말에서도 이 작품의 고전적 매력과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 그리고 막판 반전과 복선 회수의 쾌감을 극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번쩍이는 깨달음이나 비약적 추리 없이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진상에 다다르는 사카키바라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고, 의뢰인 유키나가 마지막에 밝힌 사건들 이면의 진실은 반전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줬습니다.

 

201063세에 데뷔한 이래 2023년까지 미키 아키코가 내놓은 작품은 모두 13편입니다. 한국에는 이제 겨우 두 편이 소개됐을 뿐인데, 두 작품 모두 만점 이상의 재미와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다음엔 어떤 작품이 언제쯤 한국에 출간될지 벌써부터 기다려질 뿐입니다. 그녀의 신작 소식이 좀더 빨리, 좀더 자주 들리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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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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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쯤 북스피어 인스타그램에 삼송 김사장 님의 장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름 아닌 활자 잔혹극의 두 번째 복간 소식이었는데(초간은 1996년 고려원의 유니스의 비밀이고, 첫 복간은 2011년 북스피어의 활자 잔혹극입니다), 어찌나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로서 미안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더 미안했던 건 실은 2011년에 출간된 구판을 몇 년 전쯤 중고로 구입한 뒤 책장에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얼른 읽고 서평 올리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곧바로 약속 안 지키면 압수수색 드갑니다.”라는 답글이 올라왔고, 그런 연유로 원래 읽으려던 책을 덮고 부랴부랴 활자 잔혹극을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습니다. (서평 가운데 인용문과 페이지는 모두 2011년 판 기준입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활자 잔혹극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평을 들은 작품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카드뉴스에 그 유명한 첫 문장이 공개돼있기에 저도 서평 첫머리에 그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곧장 독자에게 알린 셈인데,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는 다소 황당한 범행동기가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맹이란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는 있어도 일가족을 몰살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범행동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문맹이란 단지 읽고 쓰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시한폭탄임을 깨달았습니다.

 

커버데일 일가는 대저택을 관리하고 집안일을 돌볼 가정부로 40대 중반의 유니스 파치먼을 고용합니다. 잘 웃지도 않는데다 차갑고 섬뜩하기만 한 외양과 달리 유니스는 가정부로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가족 중 일부는 유니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대저택 생활은 큰 탈 없이 이어집니다. 유니스가 유일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건 활자의 문제. 대저택 곳곳에 꽂혀있는 엄청난 양의 책은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메모나 편지를 통해 일을 지시받는 것도 극도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가까스로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며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유니스는 더 이상 문맹을 감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략)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p61)

 

유니스는 명백한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무 죄책감 없이 협박과 공갈을 일삼아왔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으며, 공감 능력은 물론 감정이나 상상력 자체가 결여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이코패스 기질은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즉 문맹으로 인해 촉발되고 강화된 것입니다. 문맹임을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은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버렸고, 단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차원을 넘어 도덕적 문맹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활자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이나 보편적 도덕마저 읽어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유니스가 유일하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가구나 장식품 등의 사물뿐입니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가 유니스에겐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유니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살짝 맛이 간 여성 조앤 스미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연 이유는 그녀가 활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니스에게 누군가 책이나 메모를 들이대며 너 문맹이지?”라고 지적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폭주라도 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량도 짧고 이야기 구조도 단선적이지만 거의 50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영국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의 참맛을 만끽하느라 한 줄 한 줄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첫 문장이 수시로 떠오르며 소름을 돋게 만들곤 해서 좀처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스 파치먼의 이야기는 요즘처럼 연일 뜨거운 날이 계속 될 때 의외의 서늘함을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활자 잔혹극이라는 잘 만들어진 번역 제목에 눈길이 끌린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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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는 천국에 있다
고조 노리오 지음, 박재영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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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목이 베어져 살해된 여섯 명의 남녀가 바닷가 대저택에 모입니다. 그곳은 현세에서 일명 천국 저택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섯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살해될 당시의 상황만 기억할 뿐 자신의 이름이나 직업조차 잊어버린 여섯 남녀는 왜 자신들이 이곳에 모인 건지, 자신들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추리를 벌입니다. 또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야만 이 천국을 떠나 제대로 성불할 수 있다고 믿으며 협력합니다. 다만 자신들 가운데 한 명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기에 저택은 늘 미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동일범에게 살해된 여섯 명의 영혼이 기이하게도 범행이 벌어진 바로 그 저택에 모여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미스터리인데, 말하자면 영혼 판타지와 본격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셈입니다. 현세에서 천국 저택으로 불리던 그곳은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란 점에서 진짜 천국이기도 한데, 그런 탓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살해당한 이유도, 자신을 살해한 자도 모르는 영혼들이 범인을 밝히고 진상을 추적한다고 하면 당연히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이 작품은 대체로 화기애애(?)하고 때론 코믹하기까지 한 뜻밖의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름과 직업은 물론 살해당한 이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운데 한 사람이 범인이지만, 다들 기억이 휘발된 탓에 무턱대고 의심을 품기보다는 어정쩡한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시간들이 몇 날에 걸쳐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친분과 우정이 싹트다 보니 어느 시점엔 딱히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특별히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다는, 아주 묘한 공동체 의식까지 생겨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진상 규명을 포기하고 이대로 사건을 잊는다면 여섯 명이서 영원히 함께 놀 수 있어요.”라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판타지 설정 속에서 본격 미스터리를 이끌어가는 건 명탐정 역할을 맡은 입니다.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아침마다 저택에 배달되는 신문을 통해 현세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의 정보를 손에 넣은 는 끊임없는 추리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자신만만한 태도로 매번 다른 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가 번번이 반론에 고개를 숙이곤 하지만 그는 명탐정 역할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추리를 통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해법을 찾아내는데, 그 대목부터 연이은 반전이 터지면서 클라이맥스에 진입하게 됩니다.

 

일부 작품 때문에 특수설정 미스터리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살인자는 천국에 있다는 판타지와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음울한 설정과 달리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한 점도 좋았고, 복잡하지 않게 잘 짜인 판타지의 규칙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고조 노리오가 일본에서 다른 작품도 내놓았다고 하는데, 한국에 출간된다면 꼭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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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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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평범한 직장인 나가미네 시게키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보물처럼 키워온 딸 에마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범인들의 이름과 거처를 들은 나가미네는 그곳에서 에마가 끔찍하게 성폭행당한 뒤 살해당하는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발견합니다. 오열하던 나가미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마주친 범인 한 명을 죽인 뒤 남은 한 명을 찾아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즉각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지지만 나가미네의 집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막연한 단서만 갖고 있을 뿐인 나가미네의 복수의 여정은 시간이 갈수록 그를 더욱 큰 절망에 빠뜨립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 미스터리 입문 직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와 처음 만났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촉법소년, 소년법, 사적 복수의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지금도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매번 방황하는 칼날을 떠올리곤 합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주인공 나가미네가 마지막에 어떤 엔딩을 맞이했는지는 잊었지만, 살해당하는 딸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며 오열하던 그의 참담한 모습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갱생을 더 중요시 여기는 부당한 소년법 체계는 나가미네로 하여금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입니다. 계획살인이 아닌 이상 범인들은 3년이면 사회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상황은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되고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며, 그래선지 아직도 일본에서는 촉법소년과 소년법에 대한 미스터리가 적잖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 점에서 방황하는 칼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게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과연 그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로 을 차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p508~509)

 

히가시노 게이고는 촉법소년과 소년법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사적 복수에 관해선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인생 전부를 내던진 나가미네의 분노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복수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여러 조연들을 통해 거듭 밝히곤 합니다. 독자 역시 한편으론 나가미네의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 복수가 끝났을 때 과연 그에게 무엇이 남을까, 라는 안타까운 자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가미네 역시 당연히 그 자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사적 복수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 결국 자신의 인생마저 망쳐버린다는 점, 성공해도 허무함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처절함이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붙입니다.

 

나가미네의 복수의 여정과 경찰의 추적극이라는 구도에 비해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 살짝 과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가미네의 복수극에 휘말린 여러 조연들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즉 무겁고 어두운 주제지만 재미라는 또 하나의 미덕도 놓치지 않습니다.

성공해도 기쁠 것 같지 않고, 실패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 같은 나가미네의 복수는 예상 밖의 엔딩을 맞이합니다. 엄청난 반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음미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엔딩이라고 할까요?

 

고백하자면 전 갱생론따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엄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솜방망이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를 응원하지만 그것이 횡행하는 사회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일관성 없는 이상한 신념인 셈인데, 이 모든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건네는 방황하는 칼날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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