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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평점 :
융통성 없는 옹고집에 질서정연함을 좋아하고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던 안조 세이지는 패전 직후의 혼란기에 경관의 길에 들어섭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 덕분에 호감을 샀지만, 그가 주재소 경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깊숙이 개입했던 두 건의 살인사건은 그 자신은 물론 손자에 이르기까지 깊고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아버지 세이지의 영향으로 경관의 길을 택한 안조 다미오는 우수한 재능 덕분에 ‘스파이’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애초 아버지처럼 주재소 경관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자신과 남을 완벽하게 속여야 하는 스파이 역할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과 그가 조사하던 두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으면서 헤어나기 힘든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애증을 품었던 안조 가즈야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관의 길을 택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쫓던 가즈야는 오래된 단서들과 증인, 목격자들을 통해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할아버지가 쫓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과 할아버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은 물론 스파이였던 아버지의 삶과 비밀까지 전부 알게 된 것입니다.

4~5년 전쯤 분권 상태로 읽을 때는 몰랐지만, 700페이지에 이르는 합본을 손에 쥐고 보니 만만찮은 부담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흐릿하긴 해도 대하(大河)급의 묵직한 서사를 만끽했던 일이 기억나면서 역시 이만한 분량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60년에 이르는 경관 3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경관의 피’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1957년 안조 세이지의 의문사와 그가 수사하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을 아들 안조 다미오와 손자 안조 가즈야가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추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이지-다미오-가즈야 등 3대가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입니다. 더불어 아버지나 남편, 혹은 형이나 오빠를 경관으로 둔 가족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이 700페이지를 관통하는 미스터리의 핵심이라면, 두 번째 축은 세 명의 ‘안조’가 짊어져야 했던 경관으로서의 삶과 가장으로서의 삶을 시대의 변화상과 함께 느리지만 묵직하게, 소박하지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다보니 경찰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시대소설이자 사회소설, 또 한편으로는 3대에 걸친 가족소설이라는 복합적인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대와 사회에게 구속받는 개인의 삶과 저항’은 장르를 불문하고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시대와 사회가 너무 강조되면 픽션의 매력이 떨어지고, 개인에게만 집착하면 서사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질 뿐입니다. ‘경관의 피’는 패전 직후, 고도성장기, 거품경제 등 일본의 굴곡진 현대사와 그 안에서 경관으로서 구속과 저항을 반복했던 세 명의 ‘안조’를 잘 버무린 덕분에 시대와 사회와 개인이 모두 살아있는 제대로 된 대하급 서사를 완성한 작품입니다. “주인공들의 꿈이나 희망만이 아니라, 기쁨도 고뇌도 편견도 시대의 규정 속에 있다.”라는 작가 사사키 조의 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복잡하고 대단한 반전을 기대한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대하 또는 고전의 향기가 더 짙게 느껴지는 ‘경관의 피’가 조금은 지루할 수 있습니다. 60년에 걸쳐 세 명의 안조가 쫓은 살인사건과 그 진상은 잔혹하지도 극적이지도 않고, 그들이 각각 겪은 개별 사건 역시 흥미보다는 진정성에 더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경관의 피’의 매력과 존재감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수사를 하고, 범인을 잡는 단선적인 경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택한 경관의 길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세 명의 인생행로는 험난한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비슷한 농도의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언뜻 손에 잡히는 두툼한 분량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일본 경찰소설에 입문하거나 그 기초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또 금세 잊힐 가벼운 이야기에 질려 감동과 여운이 담긴 묵직한 서사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조금은 넉넉한 여유를 갖고 ‘경관의 피’를 완독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