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드타이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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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이맘 때 구판인 아들의 방으로 이 작품을 읽고 서평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할런 코벤과는 용서할 수 없는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꽤 근사했던 첫 만남 덕분에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 제법 실망을 느꼈고, 고백하자면, 당시에는 별 3개와 함께 거의 혹평에 가까운 서평을 남겼습니다.

 

한편에선 연이어 여성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선 흔적도 없이 사라진 10대 아들의 행방을 찾는 부부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두 이야기는 중후반부에 가서 어렵게 접점을 찾고,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합니다.

 


당시의 혹평은 상관없어 보이던 두 사건이 접점을 이루는 과정에 대해서도, 또 메인 사건인 소년의 실종 계기와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한 탓이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글은 제 블로그에 남아있었습니다.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그 서평을 삭제했기 때문이고, 삭제한 이유는 홀드 타이트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두 번째 읽은 뒤 그 서평을 찾아보니 제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홀드 타이트를 읽기 전에는 어차피 처음과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2년 전과는 반대로 큰 기대 없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때는 발견 못한 이 작품만의 미덕, 할런 코벤의 필력이 새삼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이 숙명처럼 주고받아야 했던 애정과 증오심,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강요하거나 강요받아야 했던 불편한 관계, 다른 가족의 불행과 내 가족의 불행의 무게를 재보는 어쩔 수 없는 이기심 등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홀드 타이트는 과장 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리는 듯 보였던 연쇄살인사건 역시 뿌리를 찾아가보면 가족이라는 이름의 불편한 과거와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이 연쇄살인사건의 뿌리를 억지로 주제의식에 맞춰 해석할 필요는 없고, 작품 전체의 재미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병행 서사로만 봐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할런 코벤은 두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수렴시키면서 10대 소년의 실종 외에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내기 위한 맛깔난 서사를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2년 전의 혹평의 이유를 새삼 추정하자면, 아마도 결과에만 너무 집착했던 속전속결 식 책읽기 탓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즉 연쇄살인범의 정체는 무엇이고, 10대 소년은 왜 사라졌으며, 두 사건은 어디서, 어떤 모양새로 만날 것인가, 라는 지엽적인 부분에만 신경 쓴 나머지 이야기 전반을 흐르는 큰 서사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홀드 타이트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다면,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제겐 별 3개 수준의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그 다음에 읽은 이나 영원히 사라지다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비판에 가까운 서평을 남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기를 기대하며(?) 조만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연이어 세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서평을 남겼던 걸 보면, 분명 할런 코벤은 제 코드와는 잘 안 맞는 작가로 보이긴 합니다.)

 

아무튼...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읽었을 때 상반된 느낌을 얻는 일이 장르물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낯설지만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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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 1 밀리언셀러 클럽 60
스콧 터로 지음, 한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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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들 군()의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던 검사 러스티는 동료 여검사 캐롤린이 살해당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오히려 용의자로 몰리고 맙니다.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 때문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러스티는 한때 자신과 대결을 벌였던 변호사 스턴의 도움을 받아 무고함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러스티와 라이벌 관계였던 검사 니코와 몰토는 물증, 정황 증거, 목격자 등을 총동원하여 러스티를 강하게 압박합니다. ‘유부남인 에이스 검사의 불륜녀 살해라는 타이틀 덕분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지만 공판은 검사나 변호사는 물론 배심원들도 전혀 예상 못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캐롤린의 죽음에 관한 진짜 비밀이 차츰 그 진상을 드러냅니다.

 

한때 푹 빠질 정도로 법정 스릴러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무죄추정(1~2권을 합쳐) 660여 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이 페이지가 넘어간 작품입니다. 존 그리샴의 걸출한 작품들을 연상시킬 만큼 정교한 짜임새, 적절한 선정성과 폭력성,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긴장감 등 완성도 높은 법정물의 미덕을 골고루 갖춘 덕분입니다.

 

스콧 터로의 문장은 거침없이 흐르는 거대한 강물처럼 느껴집니다. 사건의 배경과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소()에서는 묵직하고 도도하게 흐르다가,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법정, 즉 여울에 이르면 그야말로 잔혹한 전쟁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급하고 격하게 흐릅니다. 속도의 완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독자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물론 주제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표현과 묘사를 통해 설득력을 확보합니다. 특히 적당히 비틀고, 적당히 웃기고, 적절하게 비유를 끌어내면서 불필요한 사족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대단한 필력을 곳곳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는 번역 덕분이었습니다.

 

무죄추정의 재미를 배가시켜준 것은 거미줄처럼 얽힌 등장인물 간의 관계입니다. 우선, 배신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킨들의 정치판에 대한 묘사는 지독할 정도로 리얼합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정치적 갈등이 용서할 수 없는 혐오감으로 진화하는가 하면 추악한 욕망에다 이긴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로 똘똘 뭉친 악당들의 악의는 진실 같은 건 개나 주라는 식의 비정하고 살벌한 면모를 거듭 발산합니다. 그런 믿을 놈 하나 없는 개판의 한가운데 던져진 러스티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의심과 충돌, 타협과 화해 등 끔찍한 정치적 결정을 강요받습니다.

 

정치판보다 더 적나라한 묘사가 넘쳐나는 곳은 살해된 캐롤린과 주인공 러스티의 짧지만 불꽃같았던 불륜일지(?)와 그로 인해 해체 직전에 이른 러스티 부부의 갈등 장면입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여자캐롤린을 향한 러스티의 금지된 욕망은 10대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과격하고 통제 불능한 상태로 묘사되고, 불륜이 폭로된 후 러스티가 아내 바바라와 갈등을 겪은 환란의 시기는 마치 독자가 그 상황을 직접 겪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표현됩니다. 살인범으로 몰린 에이스 검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법정물이지만, 중년 부부의 권태와 일탈에 대한 욕망, 그로 인한 치명적인 위기에 관해서도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 덕분에 불륜 소설의 한 챕터를 읽는 재미도 함께 만끽할 수 있습니다.

 

법정물의 교과서 같은 미덕과 불륜 소설의 끈적끈적한 매력이 합쳐진 듯한 무죄추정은 진범을 찾고 누명을 벗는 본연의 서사 외에 사랑, 증오, 배신, 탐욕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노골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묘사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자가발전한 게 아닐까 의심됐던 과도한 감정묘사나 재판과정과 불륜관계 설명에 있어 거듭된 동어반복이 옥의 티처럼 느껴졌지만, 큰 그림으로 볼 때 작품 전체의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 작품의 후속작인 이노센트20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주인공 러스티가 거의 60세가 다 된 시점이란 뜻인데, 과연 그가 어떤 모습으로 첫 페이지에 등장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더불어 품절된 사형판결은 러스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역시 킨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하니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잘 짜인 법정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 읽어도 매력적인 장르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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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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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만큼 몽환적인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인상주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30여 년간 수련연작을 그리며 칩거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를 무대로 세 여인의 사랑, 운명, 절망,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싼 광기와 집착을 그려낸 검은 수련은 모호하면서도 궁금증을 일으키는,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불온함을 담은 프롤로그로 시작됩니다.

 

한 마을에 세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첫 번째는 심술쟁이, 두 번째는 거짓말쟁이, 세 번째는 이기주의자. 세 명은 완전히 달랐지만 남몰래 같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건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규칙은 잔혹했다.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다른 둘은 죽어야 했다.”

 

천재적인 그림 재능을 가진 11살의 파네트 모렐은 미술 콩쿠르에 입선함으로써 지베르니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36살의 나이에도 상대를 압도하는 매력을 지닌 여교사 스테파니 뒤팽은 단 한 번 찾아온 불같은 사랑을 통해 감옥이나 다름없는 지베르니를 떠나려 합니다. 80대에 접어든 는 마을 일대를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는 방앗간의 5층 망루에서 지베르니를 떠나려는 두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들의 불행한 운명을 예감합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어딘가 생명감을 잃은 듯한 지베르니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베르농 경찰서의 로랑스 서장과 보좌관 실비오가 수사에 뛰어듭니다. 바람둥이이자 모네의 그림을 손에 넣으려 혈안이 됐던 피살자 주변을 조사하는 한편, 현장에서 발견된 11살 아이의 생일 축하엽서를 단서 삼아 수사를 진행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유력한 용의자마저 풀어줘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미셸 뷔시의 그림자 소녀가 치밀한 구성과 리얼한 서사를 내세웠다면 검은 수련은 미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바탕에 깐 채 사랑과 욕망, 광기와 집착 등 인간 본연의 감정을 상징적이고 몽환적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독자는 경찰 콤비 로랑스와 실비오의 수사에 몰두하며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사건보다는 지베르니를 벗어나려는 세 여인의 욕망에 집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아름다운 그림 같은 지베르니에 대한 묘사에 빠져있다가도 어느 순간 감옥처럼 답답하고, 껍데기만 남은 듯한 지베르니의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연상시키는 두 경찰 콤비의 대화에 빙긋 웃다가도 세 여인의 내면 묘사를 위해 동원된 상징으로 가득 찬 시구(詩句)를 보고 있으면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몇 번씩 되읽으며 그 의미를 여러 번 곱씹게 됩니다.

 

독자에 따라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서술들을 어렵거나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검은 수련을 통해 미셸 뷔시를 처음 만나는 독자들은 자칫 전형적인 난해함으로 중무장한 프랑스 작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소녀의 대중적 성공 이후 재조명되면서 평단의 호평과 다양한 수상 이력을 쌓은 것을 보면 검은 수련이 결코 편하고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검은 수련의 진가는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여드는 중반부터 긴장감과 속도감을 높이면서 빛나기 시작하는데, 살인사건의 진상과 지베르니를 벗어나려는 세 여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엔딩에 이르면 놀라운 반전과 충격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독자는 미셸 뷔시가 왜 이토록 복잡 미묘한 서술예술적 서사를 고집했는지, 앞서 동원된 수많은 상징과 표현들이 왜 필요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검은 수련은 미스터리와 트릭, 비밀과 거짓말이 너무나도 촘촘하고 세밀하게 설정돼있어서 자칫 한 줄 소개만으로도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상세한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보다는 애매모호한 인상 비평에 가까운 서평 밖에 쓸 수 없었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소개글이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백지 상태에서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혹시 검은 수련이 어렵게 느껴졌더라도 미셸 뷔시를 포기하지 말고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그의 그림자 소녀만큼은 꼭 한번 만나볼 것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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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 새벽의 주검
디온 메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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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의 액션스릴러라는 타이틀은 미지의 대상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먹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하게 만드는 난생 처음 보는 음식 같은 낯설음을 더 강하게 심어줬습니다. 하지만 디온 메이어가 풀어낸 이야기는 의외로 흥미와 만족을 선사했고, 후속작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제도)가 악명을 떨치고, 독립운동이 불붙었던 70년대 아프리카 상황과 여전히 흑백 갈등이 상존한 채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90년대 후반의 남아공을 배경으로 디온 메이어는 수많은 목숨을 거둬갔던 참혹한 사건들의 진상 추적과 한 개인의 상처투성이 성장사 및 연애담 등 다양한 서사를 적잖은 분량 속에 녹여냈습니다.

 

장래가 보장된 프로파일러와 교수의 자리를 포기하고 현장 경찰의 길을 택한 판 헤이르던은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경찰을 그만뒀고, 지금은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초보 사립탐정으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성 변호사 호프 베네커를 통해 앤티크 가구상 얀 스미트 살해사건을 맡은 판 헤이르던은 대형 금고 속의 물건과 함께 사라진 피살자의 유언장 찾기에 나섭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주일. 하지만 실타래를 풀수록 사건의 규모는 커져가고, 군 정보국에 미국 정보기관까지 가세하면서 판 헤이르던은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판 헤이르던이 맡은 유언장 찾기이고, 또 하나는 유년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판 헤이르던의 성장사와 로맨스입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의 성장사 중 경찰이 되고자 마음먹은 지점부터 서서히 교집합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뒤틀리게 한 경찰 시절의 끔찍한 비극의 전말이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작가가 두 갈래의 전개를 선택한 이유와 노림수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건은 사건대로 눈덩이처럼 확장되다가 예상외의 결말을 맞이하고, 개인사는 개인사대로 한 인간의 굴곡진 인생경로를 보여주다가 뜻밖의 반전에 도착하는데, 두 가지 서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어놓은 작가의 필력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고, 두 서사의 마무리 역시 재미와 여운을 겸비한 매력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유언장 찾기에서 시작되어 오래 전 남아공과 아프리카의 정치적, 역사적 비극이 낳은 참혹한 사건의 실체에 이르는 장대한 스토리도 재미있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됐던 엘리트 경찰이 만신창이의 삶에 이르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유독 눈길이 갔던 부분은 판 헤이르던의 삶에 개입했던 8명의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에 눈 뜨던 청소년기의 판 헤이르던을 헤집어놓았던 세 명의 여인들, 그의 풍요롭고 안정된 미래에 올라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벤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판 헤이르던이 모든 것을 걸었던 비련의 여인 노니, 유언장 사건에 개입한 판 헤이르던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올곧은 여성 변호사 호프 베네커, 판 헤이르던에게 끝없는 추파를 던지는 부유하고 파괴적인 마조히스트 카라 안, 그리고 판 헤이르던의 지붕이자 족쇄이며 동시에 멘토이자 존경의 대상인 어머니 조안 등 그를 둘러싼 8명의 여인들은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 못잖게 매력적인 서사를 제공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 도덕적 기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미래에 대한 기대 등 현재의 판 헤이르던의 인격은 이 8명에 의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고, 연애조차 냉정함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로봇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보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또 주변의 여자들로 인해 숱하게 삶이 흔들렸던 판 헤이르던이 더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무래도 스릴러의 변방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보니 적잖은 작품이 영상화됐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도 처음엔 그다지 호기심이 일지 않았는데, ‘오리온을 읽은 뒤엔 후속작에 대한 관심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 작가임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여 판 헤이르던을 도와줬던 코사족 출신의 흑인 토벨라 음파이펠리가 후속작 프로테우스의 주인공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감이 들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다는 네 편의 베니 그리설 시리즈역시 머잖아 한국에서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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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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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통성 없는 옹고집에 질서정연함을 좋아하고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던 안조 세이지는 패전 직후의 혼란기에 경관의 길에 들어섭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 덕분에 호감을 샀지만, 그가 주재소 경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깊숙이 개입했던 두 건의 살인사건은 그 자신은 물론 손자에 이르기까지 깊고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아버지 세이지의 영향으로 경관의 길을 택한 안조 다미오는 우수한 재능 덕분에 스파이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애초 아버지처럼 주재소 경관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자신과 남을 완벽하게 속여야 하는 스파이 역할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과 그가 조사하던 두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으면서 헤어나기 힘든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애증을 품었던 안조 가즈야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관의 길을 택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쫓던 가즈야는 오래된 단서들과 증인, 목격자들을 통해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할아버지가 쫓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과 할아버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은 물론 스파이였던 아버지의 삶과 비밀까지 전부 알게 된 것입니다.

 


4~5년 전쯤 분권 상태로 읽을 때는 몰랐지만, 700페이지에 이르는 합본을 손에 쥐고 보니 만만찮은 부담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흐릿하긴 해도 대하(大河)급의 묵직한 서사를 만끽했던 일이 기억나면서 역시 이만한 분량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60년에 이르는 경관 3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경관의 피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1957년 안조 세이지의 의문사와 그가 수사하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을 아들 안조 다미오와 손자 안조 가즈야가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추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이지-다미오-가즈야 등 3대가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입니다. 더불어 아버지나 남편, 혹은 형이나 오빠를 경관으로 둔 가족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이 700페이지를 관통하는 미스터리의 핵심이라면, 두 번째 축은 세 명의 안조가 짊어져야 했던 경관으로서의 삶과 가장으로서의 삶을 시대의 변화상과 함께 느리지만 묵직하게, 소박하지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다보니 경찰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시대소설이자 사회소설, 또 한편으로는 3대에 걸친 가족소설이라는 복합적인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대와 사회에게 구속받는 개인의 삶과 저항은 장르를 불문하고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시대와 사회가 너무 강조되면 픽션의 매력이 떨어지고, 개인에게만 집착하면 서사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질 뿐입니다. ‘경관의 피는 패전 직후, 고도성장기, 거품경제 등 일본의 굴곡진 현대사와 그 안에서 경관으로서 구속과 저항을 반복했던 세 명의 안조를 잘 버무린 덕분에 시대와 사회와 개인이 모두 살아있는 제대로 된 대하급 서사를 완성한 작품입니다. “주인공들의 꿈이나 희망만이 아니라, 기쁨도 고뇌도 편견도 시대의 규정 속에 있다.”라는 작가 사사키 조의 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복잡하고 대단한 반전을 기대한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대하 또는 고전의 향기가 더 짙게 느껴지는 경관의 피가 조금은 지루할 수 있습니다. 60년에 걸쳐 세 명의 안조가 쫓은 살인사건과 그 진상은 잔혹하지도 극적이지도 않고, 그들이 각각 겪은 개별 사건 역시 흥미보다는 진정성에 더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경관의 피의 매력과 존재감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수사를 하고, 범인을 잡는 단선적인 경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택한 경관의 길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세 명의 인생행로는 험난한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비슷한 농도의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언뜻 손에 잡히는 두툼한 분량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일본 경찰소설에 입문하거나 그 기초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또 금세 잊힐 가벼운 이야기에 질려 감동과 여운이 담긴 묵직한 서사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조금은 넉넉한 여유를 갖고 경관의 피를 완독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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