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의 기억들 ㅣ Medusa Collection 4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어릴 적, 범죄자의 손에 죽어가는 누나 그웬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폴 그레이브스는 무력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평생을 그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의 화신인 케슬러와 그를 쫓는 형사 슬로백을 등장시킨 스릴러 시리즈를 통해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아이러니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5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16살의 나이에 사망한 소녀 페이예의 친구이자 리버우드 대저택의 여주인 앨리슨 데이비스는 폴에게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50년 전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쳐줄 것을 의뢰합니다. 경찰마저 포기했던 소녀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폴은 같은 또래에 죽은 누나 그웬의 마지막 모습은 물론 살인자의 목소리를 수시로 떠올립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토머스 H. 쿡의 작품입니다. 단 한 편이긴 해도 나름 ‘쿡 맛보기’를 한 상태라 결코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였습니다.
‘밤의 기억들’은 세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전개시킵니다. 메인 스토리는 폴이 앨리슨의 의뢰를 받아 50년 전 리버우드에서 발생한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어린 시절 누나의 참혹한 죽음에 관한 폴의 악몽, 그리고 소설가로서 그가 창조한 악마 케슬러에 관한 묘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며 메인 스토리와 함께 나란히 진행됩니다.
‘밤의 기억들’은 다른 장르물에 비해 비교적 집중력이 필요한 작품인데,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별개의 서사가 아니라 한 몸통처럼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리버우드 저택은 누나 그웬이 살해당한 농장처럼 고립된 곳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첫인상은 소설 속 악마 케슬러의 저택 말버나처럼 음습하고 어두컴컴할 뿐입니다. 또 16살에 죽은 페이예는 누나 그웬을 계속 연상시키는데, 그로 인해 폴의 조사는 중반부까지도 제대로 된 진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페이예의 죽음을 조사할수록 누나 그웬의 마지막 모습과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페이예 살해 용의자들과 누나 그웬을 죽인 살인자와 자신의 소설 속 악마인 케슬러가 마치 한 몸에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처럼 번갈아 폴의 뇌리에 떠올라 그를 희롱하거나 정신을 갉아먹는데, 그러다보니 끊임없는 악몽 속에서 폴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은 번번이 범인을 놓치는 소설 속 형사 슬로백의 분신인 것 같고, 악의 화신 케슬러와 그의 앞잡이 사이크스는 현실 속으로 뛰쳐나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실체를 지닌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행을 저질렀던 폴의 소설 속 악마 케슬러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거나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조종하는 힘을 갖췄던 존재입니다. 실제로 그런 존재에게 누나를 잃은 남자가 소설가가 되어 지상 최고의 악마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것은 누나의 죽음에 관한 악몽을 지워내고 누나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려는 그만의 의식이며 통과의례입니다. 또한 그런 그에게 5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션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세 갈래의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진행되는 ‘밤의 기억들’은 설정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짓누르고도 남을 만큼 그 무게감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에도 기억과 마음에 남는 여운의 대부분은 리버우드 저택의 비극의 진상보다도 폴의 삶의 궤적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호할 필요도 없고,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도 없어서 45살이 되도록 결혼도, 연애도, 아이도 없이 홀로 된 삶을 영위해왔고, 조용하거나 외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에 둥지를 틀곤 끝없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 자신을 숨겼으며, 어디선가 덫이 튀어 오르거나 그물이 떨어지거나 익명의 손아귀에 붙잡히는 공포 때문에 잠시라도 멈춰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마음이 놓이는 남자.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축복일 수 있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숨 막히듯 고통스러운 일상을 견뎌야 하는 폴의 캐릭터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리버우드 대저택에 머물며 50년 전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은 단서와 탐문을 통해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대과거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반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폴의 캐릭터가 워낙 인상적인 탓에 정작 사건과 스토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는 행위가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는 뭔가 ‘진짜배기’를 읽은 것 같은, 날것 같지만 진정성으로 가득 찬 서사를 접한 듯한 묘한 만족감 때문입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 떠올려보면 아직 읽지 못한 토머스 H. 쿡의 ‘심문’이나 ‘붉은 낙엽’ 역시 큰 기대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