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의 살인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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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잔혹한 묘사와 막판 반전으로 유명한 살육에 이르는 병부터 코믹 청춘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인형 탐정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작품들을 선보였던 아비코 다케마루의 신작입니다. 일본 출간 시기로 따지면 살육에 이르는 병이전의 작품이며 거의 데뷔작이나 마찬가지라서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성향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밝고 즐거운 소설을 쓰려고 유의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살인사건이 주류이고, 살인 동기는 쓰면 쓸수록 어두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만 이 작품을 읽으실 때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작품은 모 탄산 음료수처럼 개운하고 상쾌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야미 3남매 시리즈중 한 편인 ‘0의 살인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B급 코믹 코드가 버무려진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3남매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경시청 수사1과 경위 하야미 교조는 거구의 무술 유단자지만 35살 미혼에 애인 하나 없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어디 멋진 여자 없을까? 운명적인 만남이 굴러들어오지는 않을까?” 자문하기도 하고, 한번 꽂힌 여자 앞에선 수시로 얼굴이 빨개지는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제법 터울이 지는 남동생이자 카페 점주인 신지는 예리한 추리력을 지닌 반면, 여동생 이치오는 천방지축에 막무가내 식 추리로 교조의 수사에 혼선을 가중시키곤 합니다.

 


유머러스한 3남매 캐릭터에 비해 이들이 마주한 살인사건은 무척 기이하고 풀기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부호 노파인 후지타 가쓰의 일가족에게 닥친 독살, 추락사, 사고사 등 다양한 죽음은 어느 것 하나 앞뒤 맥락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괴짜 후배 기노시타와 함께 정열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었던 하야미 교조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수사본부가 축소되고 미제로 종결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겨울 밤, 3남매는 경찰이 포기한 사건을 놓고 안락탐정들의 난상토론을 연상시키는 추리 대결을 펼칩니다.

 

재미있는 점은 첫 장에 등장하는 작가의 도전장입니다. 우선 아비코 다케마루는 독자가 지켜봐야 할 용의자 4명을 공개합니다. 심지어 나머지 인물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밝힙니다. 압권은 다분히 도발적인 냄새를 풍기는 마지막 멘트입니다.

 

간단한 문제이니만큼 대부분의 독자는 종막 전에 진상을 간파하겠지만, 백 명 중 한 명쯤은 모르는 분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도 그 한 명이기를 바랍니다.”

 

고백하자면 작가의 예상대로(?) ‘진상을 파악 못한 백 명 중 한 명이 돼버렸지만, 그만큼 아비코 다케마루가 짜놓은 촘촘한 본격 미스터리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는 뜻이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들은 엄청난 반전은 아니더라도 나름 오호~”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머 코드가 섞인 미스터리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0의 살인은 적절한 선에서 유머와 미스터리를 믹스한 덕분에 읽으면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분량도 가벼워서 몇 시간이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미륵의 손바닥처럼 잔혹한 서사에 더 꽂힌 탓에 그런 방면의 신작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자뻑 만발한 하야미 3남매 시리즈역시 후속작의 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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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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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사전 서평단 가제본'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전설의 밤털이(빈집털이와 달리 밤에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자) 마카베 슈이치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1년 여간 겪은 다양한 일상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꾸민 연작 단편집입니다.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비밀을 캐는 것은 당연히 주인공 마카베의 몫인데, 형사나 탐정 등 제도권속 인물이 아니라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밤털이로 먹고사는 도둑이 탐문과 수사를 벌이다 보니 의외의 재미나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마카베는 자신이 검거되기 직전 목격했던 살인음모를 은밀히 파헤치는가 하면, 자신을 눈엣가시이자 먹잇감으로 여겼던 한 형사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도 하고, 동종업자들을 향한 야쿠자의 무차별 다구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증거 수집 차 남의 건물에 잠입하는가 하면,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하기 위해 밤털이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들 속에서 마카베는 웬만한 형사나 탐정 이상의 추리력을 발휘하는데, 완력에 기대어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과는 재미있는 대비를 보여줍니다. 처음엔 사소한 단서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냈어!”라는 식의 마카베 식 추리가 좀 어색했지만. 이어지는 부연설명을 보면 논리와 직관을 겸비한 뛰어난 추리였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카베의 밤털이 캐릭터나 미스터리 스타일도 눈길을 끌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카베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쌍둥이 동생 게이지입니다. 게이지는 15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지만, 지금은 형 마카베의 귓속뼈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채 끊임없이 형과 소통하는 일종의 고스트(ghost)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유했고, 한 여인을 사랑한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마카베는 한때 게이지의 존재를 저주하기도 했지만,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불행 이후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에 휩싸인 그만의 고유한 동생 사랑법이었습니다.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쌍둥이였다가)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게이지가 마카베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카베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생을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가 없는 어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게이지의 영혼을 불러들여 자기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빈틈없이 완벽한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판타지 또는 환상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점은 의외였습니다. 극단적인 설정 속에서도 묵직한 사실감과 따뜻한 감동을 맛깔나게 버무리는 필력 덕분에 그의 팬이 된 입장에서 게이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는 급하지 않게, 억지스럽지 않게 독자를 설득합니다. 왜 마카베가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걱정하고 존중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게이지에게 갖고 있는 마치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을 일곱 편의 에피소드를 진행시키면서 조금씩 조금씩 독자들에게 털어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게이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더 이상 큰 거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소식이 들리기에 ‘64’클라이머즈 하이처럼 분량과 내용 모두 묵직한 대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림자밟기역시 얼굴이나 종신검시관에서 맛봤던 요코먀아 히데오 단편집 특유의 감동과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밤털이 마카베의 어딘가 시니컬한 캐릭터 덕분에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다음엔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진짜 대작을 만나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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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구 나와 23인의 노예 1 - 소설
오카다 신이치 지음, 이승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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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르물에서 맛볼 수 있는 판타지의 영역은 정말 넓고 다양합니다. 애니메이션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상상력과 기발한 설정을 이끌어내는 창작력이 만들어낸 독특한 서사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면서도 한편 부러운 느낌까지 들곤 합니다.

 

치아교정기를 닮은 SCM(Slave Control Method)은 그것을 착용한 사람끼리 게임을 벌여 이긴 사람, 즉 주인이 패자를 노예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장치입니다. 주인끼리 게임을 할 경우 승자는 상대방의 노예까지 모두 확보할 수 있으며, 감정까지 통제하진 못하지만 대부분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시리즈 1편에서는 모두 11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치열하게 노예 만들기 게임에 뛰어듭니다. 단순히 금전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예를 확보하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유린한 남자들에게 복수하려는 여자, 오로지 성적 착취를 위해 여자 노예를 구하려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곁에 두려는 여자, 스릴감과 정복감을 누리기 위해 게임 자체를 즐기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SCM 게임을 벌입니다.

 


자칫 엇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연작 단편들이지만, 작가는 다양한 게임 룰과 얽히고설킨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를 활용하여 매 에피소드마다 놀라운 이야기를 이끌어냅니다.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가 하면, 주종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고, GPS를 통해 SCM 착용자의 위치를 추적하는 스릴러의 묘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앞서 등장한 인물이 새로운 인물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가 파벌로 발전하면서 점점 거대한 대결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게임을 통한 노예 확보라는 말초적 재미를 넘어 통제 가능한 인간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은 이 작품을 평범한 엔터테인먼트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딱히 어떤 철학적 주제나 도덕적 함의를 지닌 작품은 아니지만, ‘겉으론 욕하면서도 실은 한번쯤 쥐어보고 싶은 무한한 권력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노예로 전락한 삶에 대한 공포와 전율을 제대로 맛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 고유한 미덕과 주제 의식을 갖췄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좀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2편에서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당초 SCM이라는 기발한 도구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실체와 목적이 무엇인지, 또 이미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 아니면 모의 삶을 강요받은 등장인물들이 자신 앞에 놓인 예정된 비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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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기억들 Medusa Collection 4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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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범죄자의 손에 죽어가는 누나 그웬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폴 그레이브스는 무력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평생을 그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의 화신인 케슬러와 그를 쫓는 형사 슬로백을 등장시킨 스릴러 시리즈를 통해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아이러니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5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16살의 나이에 사망한 소녀 페이예의 친구이자 리버우드 대저택의 여주인 앨리슨 데이비스는 폴에게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50년 전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쳐줄 것을 의뢰합니다. 경찰마저 포기했던 소녀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폴은 같은 또래에 죽은 누나 그웬의 마지막 모습은 물론 살인자의 목소리를 수시로 떠올립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토머스 H. 쿡의 작품입니다. 단 한 편이긴 해도 나름 쿡 맛보기를 한 상태라 결코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였습니다.

밤의 기억들은 세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전개시킵니다. 메인 스토리는 폴이 앨리슨의 의뢰를 받아 50년 전 리버우드에서 발생한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어린 시절 누나의 참혹한 죽음에 관한 폴의 악몽, 그리고 소설가로서 그가 창조한 악마 케슬러에 관한 묘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며 메인 스토리와 함께 나란히 진행됩니다.

 

밤의 기억들은 다른 장르물에 비해 비교적 집중력이 필요한 작품인데,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별개의 서사가 아니라 한 몸통처럼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리버우드 저택은 누나 그웬이 살해당한 농장처럼 고립된 곳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첫인상은 소설 속 악마 케슬러의 저택 말버나처럼 음습하고 어두컴컴할 뿐입니다. 16살에 죽은 페이예는 누나 그웬을 계속 연상시키는데, 그로 인해 폴의 조사는 중반부까지도 제대로 된 진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페이예의 죽음을 조사할수록 누나 그웬의 마지막 모습과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페이예 살해 용의자들과 누나 그웬을 죽인 살인자와 자신의 소설 속 악마인 케슬러가 마치 한 몸에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처럼 번갈아 폴의 뇌리에 떠올라 그를 희롱하거나 정신을 갉아먹는데, 그러다보니 끊임없는 악몽 속에서 폴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은 번번이 범인을 놓치는 소설 속 형사 슬로백의 분신인 것 같고, 악의 화신 케슬러와 그의 앞잡이 사이크스는 현실 속으로 뛰쳐나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실체를 지닌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행을 저질렀던 폴의 소설 속 악마 케슬러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거나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조종하는 힘을 갖췄던 존재입니다. 실제로 그런 존재에게 누나를 잃은 남자가 소설가가 되어 지상 최고의 악마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것은 누나의 죽음에 관한 악몽을 지워내고 누나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려는 그만의 의식이며 통과의례입니다. 또한 그런 그에게 5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션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세 갈래의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진행되는 밤의 기억들은 설정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짓누르고도 남을 만큼 그 무게감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에도 기억과 마음에 남는 여운의 대부분은 리버우드 저택의 비극의 진상보다도 폴의 삶의 궤적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호할 필요도 없고,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도 없어서 45살이 되도록 결혼도, 연애도, 아이도 없이 홀로 된 삶을 영위해왔고, 조용하거나 외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에 둥지를 틀곤 끝없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 자신을 숨겼으며, 어디선가 덫이 튀어 오르거나 그물이 떨어지거나 익명의 손아귀에 붙잡히는 공포 때문에 잠시라도 멈춰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마음이 놓이는 남자.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축복일 수 있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숨 막히듯 고통스러운 일상을 견뎌야 하는 폴의 캐릭터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리버우드 대저택에 머물며 50년 전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은 단서와 탐문을 통해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대과거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반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폴의 캐릭터가 워낙 인상적인 탓에 정작 사건과 스토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는 행위가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는 뭔가 진짜배기를 읽은 것 같은, 날것 같지만 진정성으로 가득 찬 서사를 접한 듯한 묘한 만족감 때문입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 떠올려보면 아직 읽지 못한 토머스 H. 쿡의 심문이나 붉은 낙엽역시 큰 기대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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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당 - 괴담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3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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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작품입니다. 동시에 출간된 사관장이 햐쿠미(百巳) 가의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葬送百儀礼)와 신당 백사당(百蛇堂)에서 겪은 다쓰미 미노부라는 남자의 기이한 공포 경험담이라면, ‘백사당은 주인공 미쓰다 신조와 그의 동료들이 다쓰미 미노부의 기록, 사관장을 읽은 후에 겪게 되는 끔찍하고 기괴한 현상들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쓰미 미노부의 사관장을 읽은 미쓰다 신조는 괴담 편집자로서 호기심을 갖곤 신이치로, 고스케 등 괴담 전문가인 친구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햐쿠미 가가 위치한 나라 현 다우 군에서 수년 전부터 연이어 아이들이 실종된 사건에 주목한 미쓰다 신조는 다쓰미의 기록과 햐쿠미 가의 신당 백사당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사관장을 읽은 동료에게 사고가 벌어지는가 하면, 다쓰미는 책의 출간을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다 신조는 햐쿠미 가의 신당 백사당에 가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백사당에 다가갈수록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가 하면, 햐쿠미 가를 둘러싼 사악하고 음산한 분위기에 휩쓸리고 맙니다.

 

사관장이 괴이한 현상들을 열거한 호러 기록물이라면, ‘백사당은 그 현상들의 이면과 사연을 찾아가는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미쓰다 신조가 백사당에 호기심을 가진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괴담 편집자라면 누구나 매력을 느낄 만한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백사당에서 벌어졌던 두 번의 밀실 미스터리와 아이들의 실종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괴담과 미스터리라는 두 가지 테마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교묘히 섞어놓으면서 동시에 독자의 공포심이 극대화되도록 풀어놓습니다.

 

“(괴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를 따져봤자 부질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진짜로 그런 무서운 현상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단순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괴담을 즐기는 올바른 자세 아닐까. 허나 이 원고(‘사관장’)처럼 진한 맛을 내는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그 이야기의 진상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다는 호기심이 고개를 쑥 쳐든다.”

 

작가 시리즈두 번째 작품인 작자 미상에선 미궁초자라는 단편 괴담집을 읽은 미쓰다 신조와 동료들이 괴담 속의 기이한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가도 괴담 속 수수께끼를 풀어내면 가까스로 그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탈출구가 있었던 셈인데, ‘백사당은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절대 풀리지 않고, 풀려고 하는 자에게는 끔찍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느껴지는가 하면, 다쓰미가 기록한 사관장속의 장면들이 밤마다 악몽으로 떠오릅니다. 오히려 도망치려 할수록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불행을 맛보게 됩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마물의 존재,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산과 숲, 뱀을 뜻하는 한자를 품은 수많은 지명들, 피부에 와 닿는 듯한 끈적이는 어둠 등 명백히 비현실적이고 환상에 다름 아닌 괴담 코드들로 가득 차 있지만, ‘백사당은 밀실 미스터리, 실종 사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 등을 빈틈없이 버무림으로써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읽는 듯한 사실적인 느낌까지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담과 전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성적인 엔딩을 끌어냈고, ‘노조키메사관장이 괴담 그 자체를 서술해놓은 작품이라면, ‘백사당은 모든 것이 믹스된, 그러면서도 결코 친절하거나 깔끔한 엔딩이 아닌, 말 그대로 괴담의 여운을 진하게 남겨놓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중반의 전개 부분이나 후반부에 밝혀지는 여러 가지 진상 가운데 일부는 , 이게 뭐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술 자체가 모호하게 돼있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일반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빠른 속도로 읽은 탓에 앞서 등장한 상황이나 대화에서 제시된 결정적인 단서들을 놓쳤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사관장백사당을 안 읽은 분이라면 천천히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고, (저 역시 그럴 계획이지만) 이미 읽은 분이라면 기회가 될 때 재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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