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장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3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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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쿠미(百巳) 집안의 장손이지만 밖에서 태어난 첩의 자식다쓰미 미노부는 5살이 된 해 여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햐쿠미 가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햐쿠미 가의 독특한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葬送百儀礼)를 거듭 겪으면서 생생한 공포의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이 대해주는 다미 할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신당 백사당(百蛇堂)과 도도야마() 산을 찾은 는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한 그것과 마주치곤 혼절에 혼절을 거듭합니다.

쫓겨나듯 햐쿠미 가를 떠나 30대가 된 는 또다시 죽음의 의례를 치르기 위해 백사당을 찾습니다. 구경꾼에 불과했던 유년기와 달리 의례를 주관하는 장손의 자격으로 백사당에 들어간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녹아있던 생생한 그것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잊은 줄 알았지만 실은 억눌려 있을 뿐이던 유년의 끔직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출간 소식만 들었을 때는 제목의 을 당연히 특정 건물을 가리키는 으로 생각했습니다. 사관장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추측했지만, 정작 표지에 인쇄된 장례를 의미하는 을 보곤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2014년에 출간된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에서 비교적 상세히 묘사됐던 저주받은 사야오토시 가문의 특이하고 기분 나쁜 장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곳곳에서 노조키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데, 장례 장면은 물론 공포의 기운을 내뿜는 인근의 산,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가문의 묘지, 범접해선 안 되는 건물과 그 안에 모셔진 기이한 그것등 유사한 설정과 코드들이 사관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조키메가 호러와 미스터리를 융합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면, ‘사관장은 애초에 미스터리라는 포장을 배제한 채 죽음과 관련된 설명 불가능한 수많은 현상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햐쿠미 가의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에 깃든 공포담이랄까요? 작품 제목에 이 들어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후속편인 백사당작가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괴담 속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인물 미쓰다 신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백사당엔 미스터리 코드가 어느 정도 녹아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보지만, 어쨌든 사관장호러 그 자체라는 말 외엔 달리 어울리는 수식어가 없는, 미쓰다 신조 식 괴담 서사의 진수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비밀의 폭로, 연이은 반전, 트릭의 해체 등 깔끔한 미스터리 엔딩을 기대한 독자들에겐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묘사들로 가득 찬 사관장읽기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죽음의 의례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간 본연의 공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편의상 사관장작가 시리즈’ 3편의 상권이고, ‘백사당은 하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관장이 프리퀄을, ‘백사당이 본편을 담당한 셈입니다. 그래선지 백사당에선 약간이나마 미쓰다 신조 식 미스터리 설정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햐쿠미 가문의 과거사, 장송백의례와 백사당의 유래 또는 비밀, 다미 할멈의 정체, 또 애너그램 같은 두 작품의 화자의 이름(‘사관장’=다쓰미 미노부, ‘백사당’=미쓰다 신조) 등 작가가 사관장곳곳에 흘려놓은 떡밥들을 보면 궁금증을 자아냈던 수많은 정황들이 백사당에서는 그 정체를 드러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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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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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킹을 찾아라한 편밖에 읽어보지 못한 노리즈키 린타로지만, ‘녹스머신은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간극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딱히 SF물을 멀리 하는 편은 아니지만 과학이 서사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가까이 하기가 좀 힘들었는데, ‘녹스머신에 수록된 단편들은 말 그대로 Scientific Fiction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들이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체감 독서시간은 꽤 길었습니다.

 

평행이론과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표제작 녹스머신과 후속편 격인 논리 증발은 양자역학 같은 먼 나라(?)의 개념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해서 정말 많이 난감했지만, 그래도 바탕에 깔린 메인 스토리나 정서 자체는 충분히 공감 가능해서 재미와 호기심을 갖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탈출을 테마로 한 바벨의 감옥은 기본적으로 일본어의 특징을 기반으로 한 서술 미스터리라 그런지 다 읽고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분의 친절한 서평을 보니 , 그런 거였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피해, 왜 탈출하려는지 결국엔 이해불가의 영역에 남아버렸습니다.

그나마 편하게 읽힌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너무나 유명한 고전 탐정들의 조수들이 등장하여 공공의 적인 애거서 크리스티와의 한판을 놓고 논리와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인데 기획의 신선함에 비해 마무리가 아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한 인터넷 카페에서 이 작품의 서평단을 모집한 적이 있는데, 대략의 소개글을 보곤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응모 자체를 포기했었고, 시간이 지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보곤 역시 응모 안 하기를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신인도 아니고 작품 역시 SF물로서의 미덕을 갖췄는데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한 독자가 어설픈 서평을 올리는 건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이 일본의 주간문춘 미스터리’, ‘본격미스터리’,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등에서 나름 의미 있는 순위를 기록한 걸 봐도 그렇고, 한국 인터넷서점에서 평균 4개 이상의 평점을 받은 걸 봐도 그렇고, 환호하며 즐길 독자층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지만, 학창 시절 내내 과학 수업이 든 날이면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받던 저 같은 독자에겐 그 진가를 발견하기도 전에 답답함과 자기연민이 먼저 찾아올 것 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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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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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었던 메린이 살해당한지 꼭 1년이 되는 날,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이하 이그)는 머리에 작은 뿔이 자란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내 뿔이 가진 초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과거사를 꿰뚫어보게 되는 사이코메트리로서의 능력은 물론, 타인으로 하여금 감추고 싶은 속내를 모두 털어놓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까지 갖춥니다. 그 능력을 통해 이그는 메린의 죽음의 진상을 조금씩 알아내게 됩니다. 한때 메린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받기도 했던 이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살해당하기 직전 메린이 겪었던 모든 일은 물론 진범의 정체까지 파악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악마의 삶을 택한 이그는 복수를 위해 그만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영화(제목 혼스’)로 만든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폭로이자 마음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라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오랜 사랑과 갈등, 증오와 분노, 그리고 파국에 이르는 여정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소감입니다. 여기에 어느 날 갑자기 뿔이 튀어나오면서 악마가 된 남자라는 판타지를 설정함으로써 조 힐은 다양한 코드들 - 사랑, 증오, 살인, 복수, 그리고 실존하는 악마 - 이 뒤섞인 독특하고도 거대한 서사를 완성시킵니다.

 

뿔 달린 초인적 악마라는 설정을 걷어낸다면 이 작품은 연인을 살해한 진범을 찾는 한 남자의 목숨을 건 복수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할리우드의 복수극을 연상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아버지(스티븐 킹)에게 물려받은 우수한 유전자를 나름의 방식대로 확장하고 변형시킨 조 힐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독특한 설정을 가미함으로써 사랑, 악마, 신화, 스릴러가 혼재된 훨씬 더 중층적인 이야기를 창조해냈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은 탓에 첫 페이지부터 관자놀이에 뿔이 난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조 힐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그의 캐릭터를 다져나갔고, 다분히 풍자적인 재미를 동반한 뿔의 위력에 관한 설명과 함께 1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 15년 전에 시작된 사랑과 우정에 관한 묘사를 꼭 필요한 만큼씩 독자에게 전달하면서 첫 페이지의 당혹스러움을 지워나갔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커져가는 악마적 능력보다도 이그 본인의 선택, 즉 신에 대한 저주와 악마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진화 과정입니다. 메린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이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인 악마성에 관한 그의 설명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을 법한 공감 가는 내용들입니다.

 

신은 아주 멀쩡히 살아있지만 구원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아. 범죄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저주받을 처지지. 보호를 제공하기 전에 충성의 맹세와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깡패들이나 할 거래지. 반면 악마는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아. 악마는 항상 죄악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도우러 이 자리에 있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부터 언뜻 봐서는 금세 눈치 채기 힘든 꽤 의미 깊은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품이나 의상, 물과 불, 색과 빛이 등장하는데 이런 점들을 눈여겨보면서 읽다보면 작가가 공들여 세운 서사의 무게와 깊이를 좀더 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메린을 살해한 범인은 초반에 공개되고, 적잖은 분량을 통해 이그와 메린, 주변 인물들의 인연과 악연을 설명하다 보니 독자에 따라서는 5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고 사건과 상황을 알맞게 배분한 조 힐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 덕분에 휴일 하루면 충분히 마지막까지 달리며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로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소설에서 표현된 다양한 상징들이 얼마나 관객에게 어필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특정 매체를 통해 재미있게 본 작품은 다른 매체로는 잘 안 보게 되는데, ‘의 비주얼이 구현된 결과가 궁금한 나머지 영화로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왠지 올드한 느낌이 나는 제목이라 언뜻 손이 안 갔던 ‘20세기 고스트가 조 힐의 작품이란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매력적인 중단편이 실렸다는 서평들을 보니 기회가 되는 대로 얼른 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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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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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스위스 국민작가이자 세계적인 극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추리소설은 단 네 편뿐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에 따르면 극작가로 대성하는 시기를 얼마 앞두지 않은 때 밥벌이를 위해 추리소설을 썼고, 그 이후로는 다시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약속은 그 중 두 편 - 표제작인 중편 약속과 단편 사고’ - 을 수록한 작품집으로, 1950년대에 집필된 두 편 모두 일반적인 추리소설 서사와는 거리가 먼 무척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표제작인 약속에는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말 그대로 추리소설의 주류 경향에 대한 명백한 도전 또는 비꼼을 품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추리소설 안에서 엉뚱한 사기극이 연출된다는 점입니다. 무릇 사건이란 수학 공식처럼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순전히 직업상 운이나 우연이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흔하지요.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이 우연이라는 것이 아무 역할도 못하지요. 당신네들은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정하지요. 그렇게 세워진 세계는 아마도 완전한 세계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 세계입니다.”

 

약속에 등장하는 전직 경찰국장이 명망 있는 추리소설가를 향해 내뱉은 일갈입니다. 추리소설의 비현실성과 동화적인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전직 경찰국장은 현실에서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의 사례를 9년 전에 벌어진 소녀 연쇄살인사건을 들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사례의 내용이 약속의 주된 스토리입니다. 완벽한 스펙을 지닌 한 경찰이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고 범인을 쫓지만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다가 참담하게 실패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의 진상은 우연의 도움을 받아 엉뚱한 곳에서 밝혀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르긴 해도 추리소설 속 비현실적인 명탐정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겪어본 현업 경찰과 형사라면 대환호를 보낼 듯 싶습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야!”라며 말입니다. 아마 명망 있는 추리소설가가 이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완벽한 스펙을 지닌 경찰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치밀하게 설계된 연쇄살인을 멋들어지게 해결했을 겁니다.

 

하지만 약속은 단순히 픽션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도식적인 주장을 넘어 기존 추리소설의 인습을 깨고 미묘한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추리소설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깔끔한 주인공 대신 잔인한 우연에 조롱당하며 파멸해가는 주인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건 이면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만드는가 하면, 진부하고 뻔한 권선징악의 공식 대신 인생의 아이러니라든가 씁쓸한 운명의 장난을 지켜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번째 수록작 사고재판 놀이를 소재삼아 인생의 급반전을 겪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서스펜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퇴직한 판사, 검사, 변호사가 별장 숙박객을 피고인으로 세워놓고 하룻밤의 유쾌한 재판 놀이를 벌이는데, 재판이 진행될수록 주객이 전도되는가 하면, 재미삼아 즐기던 놀이가 한순간 서늘한 현실처럼 급변하면서 결국엔 아무도 예상 못한 비극적인 엔딩에 이르고 맙니다.

캐릭터와 스토리 모두 다분히 연극적인 설정이라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작가는 신이나 운명 같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인 존재보다 사소한 사고하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인간의 나약함이나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곁들여 놓았습니다.

 

고전의 올드함이 역력하지만 약속은 장르물 애호가들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를 뒤집는 미스터리라는 보기 드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 연민과 동정심 등 마음 한쪽이 먹먹해지는 색다른 여운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통쾌하고 속 시원한 엔딩을 장르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독자들에겐 다소 거북하게 읽힐 이야기겠지만 분량도 300페이지 내외로 한나절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고, 스위스 출신 독일어권 작가로는 적잖은 명성을 날린 작가의 작품인 만큼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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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요코제키 다이 지음, 이수미 옮김 / 살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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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리더 게스케, 철부지 나오토, 개구쟁이 준이치, 말괄량이 마키코는 초등학생 시절이던 23년 전, 똘똘 뭉쳐 다니던 4총사였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와 불행 탓에 그들은 각자 모양새가 다른 공포와 트라우마를 끌어안게 됐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약 없는 타임캡슐 안에 그날의 흔적들을 담고 봉인했지만, 결국 4총사는 차례로 마을을 떠나면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잔인한 운명은 뜻밖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4총사를 23년 만에 다시 재회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 사건의 열쇠가 23년 전 4총사가 겪은 사건과 연관됐다는 점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날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경찰의 수사는 결국 봉인됐던 4총사의 23년 전 기억을 무자비하게 열어젖힙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이나 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처럼 오랫동안 봉인해온 비밀이 어느 날 갑자기 해제되면서 과거의 아픈 상처현재의 사건이 교차되듯 전개되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8수 끝에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은 요코제키 다이의 재회는 그런 맥락에서 무척 기대가 됐던 작품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상의 만족과 여운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굉장한 트릭이 숨어 있지도 않고 유혈이 낭자한 사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4총사의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물음 때문입니다.

 

“23년 전,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과 동시에 네 명의 인물이 번갈아 화자 역할을 맡아 전개됩니다. 두 개의 시제, 네 개의 시선 등 복잡한 서술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방으로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 한 곳을 향해 모여들다가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4총사는 완성된 큰 그림을 보는 순간 충격에 빠집니다. 같은 그림이었지만 4총사는 제각각 다른 형태와 색깔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겪은 불행이었지만 각자의 마음속엔 전혀 다른 트라우마가 뿌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4총사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내내 착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들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운명이란 것이 그들에게 조금만 덜 가혹했더라면, 이라는 부질없는 회한이 4총사 못잖게 독자의 마음에 피어오릅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드러난 후에도 결코 착잡함과 부질없는 회한은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상해줄 수 없는 그들의 지난 시간들, 기억들, 상처들이 안쓰럽고 애틋할 뿐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적절한 수의 인물과 에피소드를 배치한 덕분에 속도 빠른 독자들은 한나절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웬만하면 수상작을 결정한 심사위원, 즉 기성 작가들의 과찬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재회에 관한 한은 히가시노 게이고, 덴도 아라타, 온다 리쿠의 칭찬 릴레이가 결코 과장되거나 작위적인 홍보용 멘트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에도가와 란포 상 결선에 올랐던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조만간 새로운 작품의 출간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퍼즐을 모으고 끼워 맞추는 역할은 가나가와 현경에서 파견된 특별한 형사 나라가 맡았는데, 팀플레이 대신 독립군노릇을 허락받을 정도로 뛰어난 추리를 자랑하는 캐릭터입니다. 그 역시 마지막 반전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는데, 요코제키 다이가 수상작가의 입지를 넘어 두드러진 활약을 하게 될 날이 온다면 시리즈물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도 있을 만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요코제키 다이의 나라 시리즈를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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