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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연인이었던 메린이 살해당한지 꼭 1년이 되는 날,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이하 이그)는 머리에 작은 뿔이 자란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내 뿔이 가진 초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과거사를 꿰뚫어보게 되는 사이코메트리로서의 능력은 물론, 타인으로 하여금 감추고 싶은 속내를 모두 털어놓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까지 갖춥니다. 그 능력을 통해 이그는 메린의 죽음의 진상을 조금씩 알아내게 됩니다. 한때 메린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받기도 했던 이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살해당하기 직전 메린이 겪었던 모든 일은 물론 진범의 정체까지 파악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악마의 삶을 택한 이그는 복수를 위해 그만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영화(제목 ‘혼스’)로 만든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폭로이자 마음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라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오랜 사랑과 갈등, 증오와 분노, 그리고 파국에 이르는 여정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소감입니다. 여기에 ‘어느 날 갑자기 뿔이 튀어나오면서 악마가 된 남자’라는 판타지를 설정함으로써 조 힐은 다양한 코드들 - 사랑, 증오, 살인, 복수, 그리고 실존하는 악마 - 이 뒤섞인 독특하고도 거대한 서사를 완성시킵니다.
‘뿔 달린 초인적 악마’라는 설정을 걷어낸다면 이 작품은 ‘연인을 살해한 진범을 찾는 한 남자의 목숨을 건 복수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할리우드의 복수극을 연상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아버지(스티븐 킹)에게 물려받은 우수한 유전자를 나름의 방식대로 확장하고 변형시킨 조 힐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독특한 설정을 가미함으로써 사랑, 악마, 신화, 스릴러가 혼재된 훨씬 더 중층적인 이야기를 창조해냈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은 탓에 첫 페이지부터 관자놀이에 뿔이 난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조 힐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그의 캐릭터를 다져나갔고, 다분히 풍자적인 재미를 동반한 ‘뿔의 위력’에 관한 설명과 함께 1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 15년 전에 시작된 사랑과 우정에 관한 묘사를 꼭 필요한 만큼씩 독자에게 전달하면서 첫 페이지의 당혹스러움을 지워나갔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커져가는 악마적 능력보다도 이그 본인의 선택, 즉 신에 대한 저주와 악마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진화 과정입니다. 메린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이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인 ‘악마성’에 관한 그의 설명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을 법한 공감 가는 내용들입니다.
“신은 아주 멀쩡히 살아있지만 구원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아. 범죄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저주받을 처지지. 보호를 제공하기 전에 충성의 맹세와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깡패들이나 할 거래지. 반면 악마는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아. 악마는 항상 죄악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도우러 이 자리에 있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부터 언뜻 봐서는 금세 눈치 채기 힘든 꽤 의미 깊은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품이나 의상, 물과 불, 색과 빛이 등장하는데 이런 점들을 눈여겨보면서 읽다보면 작가가 공들여 세운 서사의 무게와 깊이를 좀더 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메린을 살해한 범인은 초반에 공개되고, 적잖은 분량을 통해 이그와 메린, 주변 인물들의 인연과 악연을 설명하다 보니 독자에 따라서는 5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고 사건과 상황을 알맞게 배분한 조 힐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 덕분에 휴일 하루면 충분히 마지막까지 달리며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로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소설에서 표현된 다양한 상징들이 얼마나 관객에게 어필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특정 매체를 통해 재미있게 본 작품은 다른 매체로는 잘 안 보게 되는데, ‘뿔’의 비주얼이 구현된 결과가 궁금한 나머지 영화로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왠지 올드한 느낌이 나는 제목이라 언뜻 손이 안 갔던 ‘20세기 고스트’가 조 힐의 작품이란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매력적인 중단편이 실렸다는 서평들을 보니 기회가 되는 대로 얼른 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