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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스
마커스 세이키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천재적인 지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신인류 브릴리언트는 인구의 1%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99%를 상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한때 모든 부모가 자신의 자식이 브릴리언트로 태어나기를 기원한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돌연변이나 변종으로 불리며 ‘노멀’이라 칭해지는 보통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전능한 권력과 무한대의 예산을 보유한 국가기관인 분석⋅대응팀의 닉 쿠퍼는 불순한 브릴리언트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유능한 요원입니다. 그는 세상을 전복시키려는 브릴리언트 테러 집단의 수장 존 스미스를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상관 피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적진으로 뛰어듭니다. 하지만 쿠퍼가 브릴리언트의 세상에서 마주친 진실은 그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 믿어왔던 모든 것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나 반전에 강점이 있는 스토리는 아니지만 엔터테인먼트 액션 스릴러로는 별 5개 이상의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마커스 세이키의 데뷔작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를 인상 깊게 본 덕분에 그의 신작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설정 자체가 독특해서 더 기대감이 컸습니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인문과 과학, 역사와 예술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인류는 극소수의 브릴리언트, 즉 능력자들 덕분에 첨단의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뤄낸 업적 못잖게 희소성, 즉 희귀한 존재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희소성이란 것이 무려 1%에 육박한다면, 그리고 그 1%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세상을 전복시킬 힘과 세력을 갖추게 된다면, 또 실제로 테러와 살인을 자행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키려 한다면 99%의 보통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노멀’, 즉 보통 사람들은 ‘좋은 능력자’와 ‘나쁜 능력자’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뛰어난 두뇌와 감각으로 일상에서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이끄는 능력자가 있는 반면, 그 능력을 이용해 악의 행보를 걷는 능력자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능력자 모두를 싸잡아 국가와 보통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관리와 통제와 효율적인 공존을 모색할 것을 주장합니다. 사실 어느 쪽으로도 쉽게 결론내기 힘든 문제입니다. 주인공 닉 쿠퍼는 분석⋅대응팀 내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냉정한 요원으로 손꼽혔지만, 그 역시 능력자의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한 뒤에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악당을 상대로 눈 하나 깜짝 않고 주먹과 총알을 날리는 쿠퍼의 무자비한 폭력은 잔인함보다는 속 시원한 쾌감을 먼저 자극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 헌신적인 남자로서의 모습이나 여러 차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일발 속의 모습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쿠퍼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줍니다. ‘브릴리언스’는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소제목이 추격자/도망자/반역자로 돼있습니다.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쿠퍼는 극적인 신분 변화를 겪으며 위태로운 여정을 걷게 됩니다.
‘브릴리언스’는 단순히 부와 권력에 미친 악당들을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가 아닙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탐욕’이라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기저에 깔려있고, 미국식 가족주의가 주인공의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할리우드 서사의 전형적인 면을 품고 있지만 그보다는 생존, 도덕, 균형, 미래 등 다양하고 묵직한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딱딱하거나 어렵게 읽힌다는 뜻은 아닙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표현과 묘사는 쉽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적절한 비유와 생략, 촌철살인 같은 적확하고 간결한 문장, 독자의 감정선을 자유자재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마커스 세이키 특유의 필력은 읽는 내내 짜릿함을 전해줍니다.
단순히 킬링 타임을 위한 블록버스터를 찾는 독자는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잘 빠진 액션 스릴러를 기대하는 독자 역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마커스 세이키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 속 불안과 공포가 워낙 생생해서 다소 암울하면서도 긴 여운을 느낄 수도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