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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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 짓하다라는 작품을 보면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라는 좀 생소한 용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어 돈을 횡령하고 사기를 치고 그러죠. 심지어 사회복지사, 은행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담한 성격에 양심의 가책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없고 집중력이 높다는 것도 그들의 특징이죠.”

 

종이달의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김재희가 설명한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99% 가까운 인물입니다. 41살의 계약직 은행원으로 예금증서를 위조하여 고객 예금 1억 엔을 횡령했고, 그 돈으로 12살 연하의 연인과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횡령이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태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액면만 보면 리카는 가공할 금융 사기꾼이자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가 맞습니다. 하지만 동창, 친구, 옛 연인 등이 기억하는 리카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기억 속의 리카는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청초함과 정의감을 지닌 소녀, 욕심 없고 고상한 품위를 지닌 여자,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애초부터 금융 사기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그녀를 사기꾼으로 전락시킨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거나 한 순간의 실수로 삶을 망쳐버린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쿠타 미츠요는 순도 99%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우메자와 리카보다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시간제 은행원이 된 평범한 여성우메자와 리카의 남은 1%를 묘사하는데 주력합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에 감사하고,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검소한 외식에 기뻐하던 그녀가 왜, 어떻게 파국의 길에 접어들게 됐는지를 담담하지만 지독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돈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그려나갑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리카가 횡령한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과 불륜에 빠지는 중반 이후보다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미세한 균열로 가득한 평범한 여성 리카의 일상이 묘사된 초반부입니다. 단편집 죽이러 갑니다에서도 경험했던 가쿠타 미츠요의 담담하지만 얼음장 같은 문장들은 불임과 우울로 인한 자괴감, 단절된 소통과 공공연한 무시 속에 위화감만 남은 부부관계, 어제와 똑같은 날을 답습하듯 사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 등 시한폭탄 같은 리카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포착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산층 주부에 불과한 리카가 어느 날 갑자기 파국의 첫 걸음을 떼는 장면이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게 보이는 것은 이런 탄탄한 기초공사덕분입니다.

 

자신의 수입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치스러운 삶에 빠져들면서 리카는 고객의 예금증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횡령을 시작합니다. 사실 이후의 이야기는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개를 보이지만, 파국의 끝을 향해 폭주하듯 달리는 리카의 심리를 세세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 덕분에 독자는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즉 눈앞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현실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리카로 변신하려는 욕망,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만능감(萬能感)을 죄책감 없이 만끽하게 되는 심리,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돌아갈 수 없다면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좀 알아차려줘라는 소리를 이명처럼 듣게 되는 불안감 등 두 개의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리카의 심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리카와 인연을 맺었던 주요 조연들은 그녀의 과거를 설명하는 역할뿐 아니라 돈에 지배당하는 불행이 어떤 건지 몸소 보여주는 역할도 함께 맡습니다. 절약과 저축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강박관념처럼 돈의 노예가 된 사람, 과거의 부귀영화를 잊지 못해 현실의 곤궁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쇼핑중독에 빠져 이혼당했지만 끝내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등 돈에 끌려 다니며 불행의 늪에 빠진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돈을 소재로 삼은 사쿠라바 카즈키의 토막 난 시체의 밤이 극단적인 캐릭터와 사건을 동원하여 폭주하듯 이야기를 전개시킨 반면, ‘종이달은 현실적인 캐릭터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상황들을 차분하고도 냉정한 톤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작가의 의도가 더 강렬하고 생동감 있게 전달된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글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는데, 인상적인 한 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이 소설은 마치 꿈틀거리는 장어를 맨손으로 만지는 기분이었다. 무섭도록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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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8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남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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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에 소개된 대낮의 사각을 비롯 파계재판’, ‘유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1950~60년대의 주요 출간작들보다 앞선 다카기 아키미쓰의 1948년 데뷔작입니다.

패전 이후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던 도쿄의 사회상과 함께 다분히 주술적이고 기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문신의 향연이 상세히 묘사돼있고, 당대 최고의 문신을 새긴 여자, 광적으로 최고의 문신을 수집하는 의대 교수, 문신이 있어야 성욕을 느끼는 재력가, 문신 자체를 정신병으로 여기는 남자 등 괴담에 어울릴 법한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은 토막 나거나 가죽이 벗겨진 채 발견되고, 밀실을 포함한 고전적이지만 중의적인 트릭들이 복잡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외연만 놓고 보면 언뜻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떠오릅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에도 시대가 끝나고 통제와 금지령 속에 몰락해간 문신사들의 비극, 세 자식들의 몸에 금기시 된 동물 문신을 새긴 전설적인 문신사, 도쿄대 의학부 표본실에 소장된 문신이 새겨진 100여 장의 인피(人皮), 뛰어난 문신을 찾아 매일 목욕탕을 찾아다니며 사후 문신 양도계약에 혈안이 된 수집가들, 그리고 전설과 신화, 탐욕과 증오가 혼재된 비극적인 가족사 등 독자를 요괴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도조 겐야 시리즈스타일의 설정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막판에 이르러 그동안 드러난 단서들을 제시하며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구성이나, 한계에 부딪힌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초슈퍼 울트라급 천재 해결사를 등장시킨 점 등은 다분히 아날로그적이고 올드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의 트릭으로 이중 삼중의 효과를 노렸던 범인의 치밀한 계획이나 연이어 독자의 뒤통수를 치며 반전을 이끌어내는 해결사의 활약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일찌감치 범인을 눈치 챌 수도 있지만, 다카기 아키미쓰가 곳곳에 숨겨놓은 트릭만큼은 그리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천재 해결사의 입을 빌려 표현한대로, “모든 단서와 정보를 뒤집어 생각하고, 평행선도 어디선가 마주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면의외로 빨리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20152분기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으로 개정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동서문화사에서 2005년에 처음 출간됐으니 꼭 10년만입니다. 편집이나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세련된 문신 살인사건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어느 작품의 표지보다 파격적이고 독창적이긴 하지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구판의 표지 - 작품을 읽고 나면 나름 이해할 수 있지만 만큼은 작품의 내용과 2015년이라는 시대에 걸맞게 페이스오프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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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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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관한 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고, 그 작품에 등장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은 주인공 쓰쿠루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거의 소설의 일부나 마찬가지여서 책을 읽던 도중 기어이 음원을 찾아내선 반복해서 들으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음악이 친숙한 관계라는 것은 그의 작품을 두세 편만 읽어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음악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클래식이라곤 상식 수준에도 못 미치는 문외한이다 보니 오자와 세이지라는 이름은 물론 그의 위상조차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그에 대한 전기나 인물론이 아닌 그와의 대화록 모음집이란 형식으로 꾸며진 점은 더욱 파격적이었습니다.


 

여러 작품에서 클래식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녹여낸 것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에 대한 편력은 가공할 연륜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지만, 거장 오자와 세이지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스스로 문외한임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도가 지나친 겸손이라는 약간의 삐딱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오자와 세이지와 나누는 대화를 한 줄 한 줄 읽다 보면 겸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우고자 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기술적인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고 있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교향곡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언어가 외계어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행간에 녹아있는 두 거장의 열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에 관한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자 역시 작품에 등장하는 음악들을 미리 듣거나 혹은 들으면서 읽어야겠지만, ‘DVD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독자에게 그런 수고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가자는 식의 편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로 했고, 그러다 보니 왜 이런 독특한 형식의 책을 낼 생각을 했는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작품이 오자와 세이지의 인물론이 아님을 거듭 밝혔지만, 실은 지휘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 유럽과 미국에서 겪은 굴곡과 환희로 채워진 다채로운 경험들, 그리고 음악을 대하는 그만의 개성 있는 태도 등에 좀더 공을 들여 묘사하고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거장의 삶의 향기와 발자취를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간을 들여야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경우 벼락치기하듯 하루아침에 내공과 연륜을 쌓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클래식을 공부하겠다고 하루 종일 교향곡을 듣고, 작곡가와 곡명과 음악의 사조를 외워봤자 오랜 시간 사심 없이 편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음악을 즐겨온 사람 앞에서는 한낱 치졸한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60년 넘게 야유와 찬사 속에 지휘자의 삶을 살아온 오자와 세이지나 오랜 시간 음악을 통해 행복감을 만끽해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에 관한 애정과 정열은 왜 그들이 거장으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스타프 말러에 관한 대화가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도전할 수 없었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던 말러에 관한 이야기며, 동 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와의 관계,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과 풍경 등은 두 거장의 묘사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고 말러의 음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오자와 세이지가 밀라노에서 오페라 지휘를 하며 야유를 받은 일, 시카고 언론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았지만 단원들에게 샤워를 통해 응원 받은 일, 오직 뛰어난 음악가를 키우기 위해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힘쓰는 그의 노력 등도 흥미로운 에피소드였습니다.

 

제겐 미지의 영역인 클래식에 관한, 그것도 낯설고 특이한 대화록 형식의 작품이었지만, 다 읽고 난 후 , 이런 책읽기도 나름 재미있네.”라는 느낌이 절로 든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아마도 대화체에서도 묻어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매력 있는 문장들과 자신들의 열정을 꾸미지 않고 드러낸 두 거장의 진정성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오자와 세이지를 좋아하는 수준 높은 클래식 애호가나 클래식에 관심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에겐 더욱 반가운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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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달리아 1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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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 L.A 할리우드에서 두 동강 난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거칠기 짝이 없는 형사 리 블랜처드와 버키 블라이처트가 언론에서 블랙 달리아라고 별명 붙인 이 사건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수사는 미궁에 빠지고, 검찰과 경찰의 고위직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뿐이며, 언론과 일부 경찰들마저 훼방꾼 노릇을 하면서 리와 버키의 수사는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런데 납치-실종된 여동생을 쇼트와 동일시하기 시작한 리는 광적으로 수사에 몰입하고, 버키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쇼트에게 도를 넘어선 집착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수사 도중 갑자기 사라져버린 리 때문에 홀로 분투하던 버키는 간과했던 단서들을 통해 쇼트의 행적을 찾아내고 범인을 특정하지만, 그의 직감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속삭입니다.


 

1940년대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한 영화의 흐름을 필름 누아르라고 불렀고, 거기에서 파생된 추리소설을 로망 누아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번역자에 따르면, ‘블랙 달리아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어둡고 운명주의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로망 누아르로 분류됩니다.

실제로 제임스 엘로이는 인종문제, 알코올 중독, 정신병, 범죄가 만연하던 1940년대를 한껏 일그러진 인물들을 통해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은행을 털거나 섹스의 대가로 증거를 은닉하는 경찰, 부잣집 딸이지만 창녀처럼 살기를 원하는 여자, 승진과 명예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사법부의 고위직, 시체 해부와 장기(臟器)에 집착하는 남자, 허영심에 빠져 한탕을 노리는 배우 지망생과 그녀를 성적 노예로 삼는 영화제작자 등 등장인물 대부분 부정과 부패, 비리와 뒷거래로 얼룩진 당시의 사회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어둡고, 성적으로 집착하고, 정서적으로 복잡하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또 다른 작품인 ‘L.A 컨피덴셜못잖게 블랙 달리아는 이런 고백에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특히 살해된 쇼트의 캐릭터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검은 드레스를 즐겨 입어 어둠 그 자체를 상징하듯 불온해 보였던 쇼트는 살아서는 거짓말쟁이 창녀의 기질을 독처럼 사방에 뿜어댔고, 죽어서는 자신의 죽음을 수사하는 두 남자를 집착에 빠뜨리게 했고, 그로 인해 그들을 사랑하는 한 여자의 삶을 망가뜨렸으며, 충격적인 토막 시신으로 발견된 탓에 탐욕스러운 언론과 정치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나쁜 여자를 꿈꾸는 평범한 여자들에겐 두려움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쁜 여자를 장난감처럼 농락하고 싶은 남자들에겐 시커먼 정복욕의 대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블랙 달리아엘리자베스 쇼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희롱하면서 이 작품의 타이틀 롤에 걸맞는 판타지 같은 매력을 발산합니다.

 

블랙 달리아는 별개의 두 이야기로 나눠도 될 만큼 복잡한 서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형사인 리와 버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평범하지 않은 우정과 사랑, 갈등과 파국의 이야기입니다. 버키는 여러 여자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물론 성관계 도중 살해된 쇼트를 떠올려야 흥분이 되는 기이한 상황에 빠집니다. 여동생이 납치-실종된 트라우마를 쇼트에게 투사한 리 역시 정서적 불안을 견디지 못한 끝에 결국 파국을 불러오고 맙니다. 또 하나는 리와 버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인데, 작가는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붕괴된 두 인물의 심리묘사를 접착제 삼아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 속에 질감이 다른 두 이야기를 절묘하게 믹스했습니다.

 

‘L.A 컨피덴셜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은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엔딩은 충격적이긴 해도 깔끔하고 시원한 맛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범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은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희미해지고, 번역자가 언급한 선악과 도덕의 불명료성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즉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고 누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불분명해지다 보니 사건이 해결되고 수렁에 빠졌던 주인공이 희망의 끈을 잡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결코 해피하고 명료한 엔딩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적잖은 독자들이 이런 철학적인(?) 엔딩에 비호감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자로 잰 듯한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픈된 엔딩보다는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메인 스토리 외에 조금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곁가지 에피소드들이 끼어들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인물들 역시 복잡하고 방대하게 설정됐는데, 에피소드와 인물을 축소하고 500페이지 안쪽에서 마무리됐더라면 임팩트가 훨씬 더 강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오탈자가 거의 없는 번역은 그 자체로는 만족스러웠지만, 너무 점잖게번역된 일부 비속어는 눈에 거슬렸습니다. 번역자도 스스로 그런 부분을 후기 말미에 언급했는데,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좀더 리얼한 번역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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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밥 - 제133회 나오키상 수상작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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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쯤 구판으로 읽은 꽃밥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고 오랜 여운을 남긴 따뜻한 단편집이라는 막연한 잔상이 전부였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수록작의 내용을 온전히 기억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는데 8년 만에 나온 개정판을 운 좋게 손에 넣은 덕분에 슈카와 미나토가 그려낸 6편의 주옥같은 단편들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단편집 오늘은 서비스 데이처럼 꽃밥역시 죽음, 환생, 영혼을 다루고 있는데, ‘오늘은 서비스 데이가 소동극 또는 라이트한 호러물의 느낌이 강했다면, ‘꽃밥은 지금은 중년이 된 주인공들이 오래 전에 겪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회상하며 그 안에서 마주쳤던 죽음이나 영혼의 문제를 고백하는 따뜻한 서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환생과 가족애를 다룬 표제작 꽃밥’, 재일한국인과의 우정과 귀신 해프닝을 그린 도까비의 밤’, 소녀의 성장기와 가족의 붕괴를 성()과 결부시킨 요정 생물’, 요절한 삼촌의 장례식에 등장한 세 여자의 소동극 참 묘한 세상’, 산 자의 목숨을 거두는 언령(言靈)에 관한 이야기 오쿠린바’, 따돌림 당한 소년이 만난 신기루 같은 여자 이야기 얼음 나비등 대부분의 작품이 죽음이라는 무겁고 원초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한두 편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읽는 동안 한번쯤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순간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죽음 자체는 본인은 물론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힘든 여정이지만, ‘꽃밥속의 죽음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숙명처럼 공평하게, 그리고 때론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마치 축복처럼 그려집니다. 오사카 변두리의 연립주택단지에서 많은 인물들이 맺은 인연은 대부분 죽음을 계기로 끊어지거나 깨지곤 하지만, 왠지 그 죽음들은 내세에 다시 만날 것을 보장받은 휴식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죽음으로 인해 헤어졌던 전생의 가족과 고향을 찾아가는 아이(꽃밥), 차별과 병치레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유쾌한 귀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도까비의 밤), 죽어서도 바람둥이 기질을 버리지 못해 영구차를 멈추게 만든 백수 삼촌(참 묘한 세상), 고통 대신 안락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제공하는 괴짜 할머니(오쿠린바) 등 죽음과 결부된 인물들 모두 실은 죽었지만 죽은 것 같지 않은,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만날 것 같은, 그래서 슬프고 아쉬워도 충분히 그()의 부재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들입니다. 온통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끝이라는 비극성보다 웃으면서 그()를 보내주는 듯한 훈훈함이 남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판타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서사들로 가득 차있고, 빈곤의 그늘이 훨씬 더 컸던 1960~70년대 오사카의 변두리라는 낯선 공간이 주 무대인데다 곳곳에 일본식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화감을 못 느꼈던 것은 꽃밥에 담긴 이야기들이 문화와 세대를 건너뛰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 실린 작품 해설과 번역자의 후기에서도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정 시대나 세대,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그리움”(작품 해설)이라든가, “세월이 흘러 다시금 펼쳐 본 꽃밥이 이리도 애잔하게 가슴을 적시는 것은 각 단편이 보편성이라는 힘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번역자 후기)라는 설명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독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치유와 위로를 받고 싶은 독자라면, 혹은 온 세상이 아날로그였던 그 시대의 끄트머리라도 잠시 살아봤던 독자라면, 또 아사다 지로의 단편에 마음이 움직였던 독자라면 주말의 하루쯤 슈카와 미나토의 꽃밥과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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