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의 저주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8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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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 즉 죽음의 그림자나 증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쓰루야 슌이치로는 무녀인 외조모의 도움으로 탐정사무소를 열고 첫 의뢰인인 나이토 사야카를 맞이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약혼자 아키라의 죽음 이후 이리야 가()에서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사지가 마비되거나 미각을 잃는 인물이 속출하는가 하면 멀쩡하던 조각상이 넘어지고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는 등 온 가족에게 괴현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덧붙여, 13개의 막대가 그려진 괴편지까지 가족 개개인에게 날아든 바 있습니다.

이리야 가를 방문한 슌이치로는 사야카를 비롯한 이리야 가 사람들의 사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한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괴현상들 곳곳에 ‘13’이라는 숫자가 연관됐다는 점을 파악한 것 말곤 슌이치로는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채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냈고, 결국 이리야 가의 참혹한 비극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 그리고 최근 출간된 노조키메등을 통해 공포와 괴담의 진수를 선보인 미쓰다 신조의 사상학 탐정 시리즈첫 편입니다.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는 단편집 붉은 눈에 실린 죽음이 으뜸이다를 통해 데뷔했는데, 나름 캐릭터가 호응을 얻었기 때문인지 장편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승격됐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슌이치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타인의 죽음을 알아보는 특이한 능력을 얻게 된 유치원 시절에 겪은 사건이나 그 이후 귀신 들린 아이로 손가락질 받으며 은둔형 외톨이가 된 그의 성장기, 그리고 그를 보살피고 키워준 뛰어난 무녀인 외할머니의 사연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배치돼있습니다. 타인과의 소통에 익숙하지 않아 삐딱하고 까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던 슌이치로가 첫 사건인 이리야 가 연쇄변사에 뛰어든 후 여러 사람과 맞부딪히며 겪는 성장통은 그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 못잖게 깨알 같은 재미를 던져줍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가 문명과 동떨어진 자연이나 외진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이 작품은 도쿄 한복판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현대의 도시괴담이라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괴현상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이리야 가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분명 주술의 결과는 아닌 듯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일으킨 현상이라기엔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누가 범인인가?”보다 괴현상은 범인의 물리적인 힘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의 힘에 의한 것인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으며,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미쓰다 신조는 곳곳에 제법 많은 힌트를 깔아놓습니다. 아예 대놓고 ‘13의 저주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데서 알 수 있듯 작품 속에는 숫자 13과 관련된 많은 정황들이 등장하는데, 그 정황들은 독자를 위한 힌트이자 동시에 뒤통수를 때리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에 신경 쓰기보다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가 더욱 비현실적인 사건을 어떻게 다루고 풀어가는지를 음미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힌트나 함정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미쓰다 신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여유 있는 책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명백한 단서와 증거보다는 이해 불가능한 현상들이 등장하고,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과학적 추리보다는 직관이나 느낌에 좀더 의존하는 내용이다 보니 본격 미스터리나 리얼리티를 선호하는 독자에겐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을 수도 있고, 공포나 괴담을 좋아하는 독자는 물론 미쓰다 신조의 팬 중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신화와 전설을 동반한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좀더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일단 시리즈 첫 편으로서 주인공 슌이치로의 매력을 잘 이끌어낸 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무수한 떡밥을 사방에 깔아놓은 점, 특히 언젠가 조우할 것이 분명한 엄청난 힘을 지닌 적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점 등은 앞으로 이어질 사상학 탐정 시리즈를 여러 면에서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직은 탐정으로서도 어설프고, 인간관계도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미숙아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호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상학 탐정 쓰루야 슌이치로가 두 번째 편에서는 어떤 사건을 통해 인간과 탐정으로서 쑥쑥 성장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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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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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자매편이며 소매치기가 주인공인 쓰리는 비교적 쉽고 편하게 읽혔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왕국은 인물들을 훨씬 더 사악하거나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달의 광기, 매춘과 욕망의 신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장악한 절대 악 등 수많은 상징들이 때론 묵직하게, 때론 은유적으로 작품 곳곳에 배치돼있어서 자매편인 쓰리와 달리 결코 쉽고 편한 책읽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건만 놓고 보면 내용은 심플합니다. 유리카는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추정되는 야다의 지시를 받아 기업이나 정부 고위직 남자들의 추잡한 사진과 동영상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고급 콜걸 출신의 위장 창녀입니다. 하지만 야다의 적대 세력인 기자키에게 신분이 들통 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유리카는 본의 아니게 위험천만한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유리카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지만 그로 인해 야다와 기자키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파이물의 공식을 따르는 것 같지만, ‘왕국의 구성에서 이런 통속적인 줄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작 몸통이 되는 이야기는 운명을 거부한 한 여자와 남의 인생을 멋대로 설계하려는 한 남자의 대결입니다.


 

쓰리의 주인공 니시무라가 천재적인 소매치기지만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조금은 과할 정도로 철학적인 태도를 견지한 남자였다면, ‘왕국의 유리카는 자신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이 세계의 온갖 힘과 맞서겠다는 자기애, 참혹하게 죽긴 싫지만 그렇다고 딱히 삶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채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여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밤마다 뜨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달()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때론 환멸하고, 때론 자조하고, 때론 사무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쓰리의 니시무라보다 훨씬 더 심연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리에서 니시무라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기자키는 왕국에서 유리카를 상대로 또다시 신에 버금가는 절대 악을 행사합니다. 그는 타인의 인생 경로는 물론 감정, 희망, 절망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신의 권능을 꿈꾸는데, 그 인생을 멋대로 희롱하다가 배신하고 망가뜨리고 싶은 대상으로 유리카를 점찍은 기자키는 그녀를 야다와의 권력 투쟁에 이용함과 동시에 삶 자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계획을 품습니다.

 

유리카와 기자키는 극과 극의 위치에 서있으면서도 배신이라는 코드에 있어서만큼은 동류항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기자키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를 한순간에 배신하면서 살해하는데서 쾌감을 느낀다면, 유리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탐내는 잘난 남자들을 배신함으로써 그들이 성취해온 것과 인생 자체를 박살내는데서 열기와 자유를 느낍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정말 공감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데, ‘왕국에서는 유리카와 기자키 외에도 이런 비범한(?) 인물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랑에 속아 절망에 빠진 여자를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선량함으로 남을 도와주다가 정작 상대가 구원을 받게 되면 분노를 느끼곤 어째서 계속 불행하지 않은 것이냐?”며 너덜너덜하게 파멸시켜버리는 인물도 있습니다. ‘왕국의 등장인물 중 인간적으로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비밀조직에 복무하며 유리카를 이용해 추잡한 정보를 모으는 야다 정도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의 첫 느낌은 솔직히 말하자면 “So what?”이었습니다. 범인을 잡아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장한 새드 엔딩이나 유쾌한 해피엔딩도 아니며, 그렇다고 눈물이든 분노든 감정의 폭발을 끌어내는 마무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도 많고 여운이 강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의미한 삶, 고통스러운 기억, 타인에 대한 지배,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등등...

추정이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정서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또 공통된 여운을 느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절대 악과 운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인류 최초의 직업인 창녀와 소매치기를 통해 내보였고, 공감과 반감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유리카와 기자키의 삶의 방식이나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느낌은 글로 표현해봤자 지독히 주관적인 궤변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서평에 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팬이더라도 왕국에 관한 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자매편인 쓰리왕국을 모두 안 읽은 독자라면, ‘쓰리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싶고, 혹시 왕국을 읽고 실망한 독자라면 꼭 쓰리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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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의 살인 - 제22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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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가오카 고등학교 구 체육관에서 방송부장 아사지마 도모키가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됩니다. 사건에 투입된 센도 경부와 하카마다 유사쿠 형사는 탐문을 통해 체육관이 밀실 상태였다는 점을 알게 되곤 충격을 받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고 나름 확신에 찬 심문에 들어가지만, 경찰의 수사는 괴짜 천재 2학년생 우라조메 덴마에 의해 완벽하게 부정당합니다. 이후 수사팀이 용의자를 지목할 때마다 우라조메는 조롱하듯 그들의 수사결과를 뒤집었고, 결국 센도 경부는 우라조메와의 공조수사(?)를 결심합니다. 우라조메는 탐문은 물론 현장에 있던 사소한 단서들을 꼼꼼히 체크하기 시작하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평범한 단서 속의 의미들을 추리하면서 퍼즐을 완성해나갑니다.

 

22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수상한 아오사키 유고의 체육관의 살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산을 쓰고 있는 미소녀 일러스트 표지 때문에 그 진가를 오해하기 딱 좋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체육관의 살인은 본격 미스터리에 일본 특유의 학원물 정서가 잘 믹스된 제대로 된탐정물입니다. 라노벨 풍의 장면들이 간혹 등장하지긴 하지만, 그것은 라노벨 공모에도 몇 번 지원한 적이 있는 작가의 이력이 알게 모르게 배어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아오사키 유고는 최대한 적은 단서와 물증으로부터 모든 것이 밝혀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엘러리 퀸에 대한 오마주를 고백했는데, 실제로 탐정 역할을 맡은 우라조메는 살해당한 아사지마의 주머니에 있던 물건들을 비롯해서 지극히 평범하고 얼마 안 되는 단서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도출해내어 엘러리 퀸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냅니다. 21살의 나이에 화려하게 데뷔한 아오사키 유고에게 헤이세이(현재 일본의 연호) 엘러리 퀸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라조메를 보면서 두 탐정 캐릭터가 생각났는데, 한 명은 당연히 엘러리 퀸이고 또 한 명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입니다. 우라조메의 뛰어난 추리 능력 때문에 젊은 엘러리 퀸이 연상됐다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똘끼(?) 충만한 천재의 면모는 미타라이가 10대였을 때 딱 저랬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라조메를 수사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자 화자 역할을 맡은 1학년 생 하카마다 유노는 이런 우라조메를 놓고 탐정이라기보다는 은둔형 외톨이에 만화광이랄까?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구제불능 인간 같기도 해.” 라고 깔끔하게 정리해줍니다.

 

중간고사 만점을 기록하여 온 학교를 놀라게 한 천재지만, 가까이에 집을 두고도 학교 문예부실을 아지트 삼아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미소녀 포스터, 피규어, 만화와 DVD, 게임소프트에 빠져 사는 기인일 뿐 아니라 수사 의뢰를 거부하다가도 10만 엔이라는 돈을 제안하자 덥석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인생을 즐기는 캐릭터입니다. 얄미워 보일 때도 있고, 잘난 척이 하늘을 찔러 재수 없기가 이를 데 없을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커버하는 것은 우라조메의 순수한 천재성입니다. 올해 본격미스터리 대상 후보까지 오른 아오사키 유고의 수족관의 살인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성공한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다면 한번쯤 미타라이 기요시와 맞대결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부제를 갖다 붙인다면 왕재수 천재들의 진검 승부쯤 될까요?

 

당차고 똑똑한 탁구부 1학년 여학생 하카마다 유노를 비롯해서 가나가와 현경 수사 1과의 센도 경부, 유노의 오빠이자 형사인 하카마다 유사쿠, 50대의 관할서 순사부장 시라토 형사 등 조연들의 라인업도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캐릭터들입니다. 물론 매번 가제가오카 고등학교에서 사건이 벌어질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관할구역이 주 무대가 된다면 매력적인 탐정과 조연들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이세이 엘러리 퀸아오사키 유고의 차기작을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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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지옥 이타카
유메노 큐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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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메노 큐사쿠의 대표작 도구라 마구라3대 기서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솔직하게 고백하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한줄 평에서 얻은 편치 않은 정보들에 부담을 느껴서 그동안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가에 대한 관심까지 끊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조금은 부담 없이 유메노 큐사쿠와 만나고 싶어 선택한 작품이 소녀지옥입니다.

제목과 표지가 무척 강렬한 작품입니다. 특히 소녀지옥이라는 극단적인 두 단어의 조합이 주는 기대감이 컸고, 과연 소녀가 겪는 지옥 이야기일까, 소녀 자체가 지옥의 역할을 하는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소녀지옥이라는 표제 하에 중편 3편이 실렸고, 그 외에 독립된 단편 3편까지 모두 6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소녀지옥 3부작의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의 간호사 히메구사 유리코는 거짓과 망상에 빠진 채 사람들을 속이고 거기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는 천재적인 거짓말쟁이입니다. ‘살인 릴레이의 버스 여차장 도미코는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화성의 여자의 아마카와 우타에는 기형적인 자신의 몰골을 웃음거리와 노리개로 전락시킨 학교 관계자와 가족들에게 끔찍한 복수극을 벌입니다.

 

소녀지옥 3부작의 주인공들은 팜므 파탈이거나 겉으로 강한 척 자부하거나 외톨이지만 어떻게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제법 센 캐릭터들이지만, 실은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말 그대로 소녀다운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소녀들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스스로 지옥을 만들거나 자진해서 지옥으로 들어가거나 악의에 찬 타인의 지옥에 빠져 고통스러운 삶에 허우적대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그녀들이 선택한 길은 죽음을 통해 지옥을 영원히 잊거나 자신이 겪은 지옥을 타인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번역자 최고은은 후기를 통해 1930년대라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괴물이 된 소녀들지옥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언급했는데, 간략하게 편집해보면...

 

당시 사회진출을 모색하던 신여성들은 가부장제 및 현모양처 이념과 정면으로 대치했지만, 그녀들의 노력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고, 오히려 괴물로서 지옥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하지만 소녀지옥속의 소녀들은 말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억압하던 남성들에게 마지막 복수에 이르기까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옥 같은 현실에 절망한 소녀들이 스스로 지옥이 되어 현실에 복수한 것입니다.”

 

세 작품 모두 편지의 형식을 사용했는데, 편지라는 매체의 특성 상 정황이나 감정이 훨씬 더 사실적이고 진정성 있게 전달됩니다. 또한 결과를 먼저 보여준 후 ’, ‘어떻게를 찬찬히 설명하는 구도를 취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형식과 구도 때문인지 강렬한 표지에서 느껴지는 직설적인 공포는 좀 덜한 편이지만, 대신 느리면서 천천히 스며드는 은근한 공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후반에 실린 3편의 단편 역시 개성이 강한 작품들인데, 주인공들은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선 보기 드물게 부와 권력을 소유했고 남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을 몸소 실천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녀시절의 지옥을 빠져나와 기어이 괴물이 된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할까요? ‘소녀지옥 3부작과 맥이 닿아있기도, 또 떨어져있기도 한 이야기들이지만 유메노 큐사쿠의 기이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고, 특히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굴뚝은 미스터리의 느낌까지 배어있어서 제일 눈에 띄었던 작품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고전 미스터리에 비해 1930년대의 풍경과 분위기가 더 강조돼서 그런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이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비해 문화적 이질감은 더 강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그 덕분에 날것 같은 근대적 아날로그의 정서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도구라 마구라에 도전할 것인지 여부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유메노 큐사쿠의 세계를 일부라도 들여다본 것은 일본 장르물을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선 꽤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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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트 원티드 맨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6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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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홀연히 함부르크에 나타난 '지상 최대의 지명수배자' 이사 카르포프. 온몸에 고문을 당한 흔적이 있고,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아 보이는 이 무슬림 청년을 민권단체에서 일하는 변호사 아나벨 리히터가 돕게 됩니다. 오래 전, 자신의 판단착오로 한 불법체류자를 정부기관에 빼앗겼던 아나벨은 사선을 넘어 독일에 온 이사의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를 노리는 기관들과 맞서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사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부담스러운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한편 러시아 장성 카르포프와 아버지 에드워드가 연루된 거액의 검은 돈을 관리해온 개인은행가 토미 브뤼는 어느 날 카르포프의 아들을 자처하며 검은 돈에 관해 물어오는 이사와 아나벨을 만나곤 갈등에 빠집니다. 여기에 이사를 이용하여 이슬람 테러조직을 소탕하려는 독일 헌법수호부 요원 귄터 바흐만까지 합세하면서 사건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스파이물의 거장이라는 존 르 카레와 처음 만난 작품입니다. 장르물을 좋아하면서도 스파이물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에 어울린다는 생각에 자주 접하지 못했습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역시 독일, 영국, 미국의 첩보기관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놓고 각축전을 벌인다는 소설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설정 때문에 읽을까 말까를 꽤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의 선입관은 초반부터 깨졌습니다. 적절한 비유와 생략이 곁들여진 고급스러운 영국식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문장과 재기 넘치는 이야기꾼의 입담을 듣는 듯한 경쾌한 리듬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기관 측 대표선수로 설정된 귄터 바흐만과 에르나 프레이는 데니스 루헤인의 명품 시리즈 주인공인 켄지와 제나로를 연상시킬 만큼 유쾌한 반골의 면모를 물씬 내뿜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모든 기관이 주목하는 '지상 최대의 지명수배자'인 이사 카르포프, 그를 돕는 명문가 출신의 반골 민권 변호사 아나벨 리히터, 그의 유산을 보관한 탓에 사건에 휘말리면서 아나벨에게 연정을 품는 은행가 토미 브뤼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 덕분에 재미있는 전개와 엔딩이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롤러코스터처럼 거칠게 달려갈 거란 예상과 달리 초반부를 벗어나자마자 이야기는 의외로 차분하고 정적인 형태로 흘러갑니다. 이사를 차지하려는 각국의 기관들의 암투와 두뇌 싸움은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긴 하지만 실제 그들의 충돌은 의외로 단순한 전략과 대리전 양상을 띨 뿐입니다. 주인공인 이사-아나벨-토미의 미묘한 3각 관계 역시 같은 자리를 맴돌며 관념적인 대화와 내적 갈등의 토로 혹은 느릿한 줄다리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민권변호사 아나벨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행동에 관한 독자들의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선을 넘어 독일까지 왔지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사, 은행가로서의 직업적 의무와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관보다는 주변 상황에 의해 떠밀려 다니는듯한 토미, 소신과 경험을 두루 갖췄을 뿐 아니라 마초 기질까지 다분한 매력적인 캐릭터임에도 결국 그런 능력들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조연 수준에 머무른 귄터, 그리고 이사에게 테러리스트의 낙인을 찍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계획을 준비하지만 딱히 그래야만 하는 근거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각국의 정보기관 등 등장인물들의 선명하지 못한 동기와 수동적인 태도들은 마지막 장까지 답답한 책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서방 문명과 이슬람을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포장하지 않은 점, 무의미하고 공상적인 해피엔딩보다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 전개, 이미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냉전시대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 테러리즘을 악용하는 사악한 서방의 실체와 그 와중에 무력하게 희생당하는 개인들을 적나라하게 조명한 점 등은 이 작품을 얼마 안 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스파이물과 차별화시키는 장점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 장점들은 소재나 서사에서만 빛났을 뿐 실제 이야기 속에선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 장점들이 좀더 재미와 대중성으로 포장되어 이야기에 반영됐더라면, 즉 작가가 조금은 통속적이고 친절했더라면, 또 사건의 한복판에 선 개인들이 좀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능동적으로 움직였더라면, 그래서 테러리즘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엔딩을 맞이했더라면 아마 출판사의 홍보카피처럼 전통적 스릴러에 현실의 현안을 결합한 묵직한 주제와 이야기적 재미가 완벽하게 결합된 작품이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단 한 편으로 스파이물의 거장을 판단할 순 없겠지만, 다음 작품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면 더 이상은 존 르 카레의 작품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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