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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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편치 않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잔학기는 매서운 직설과 적절한 비유를 겸비한 기리노 나쓰오 특유의 문장을 통해 10살 소녀 게이코가 25살 청년 겐지에게 유괴, 감금당한 참혹한 1년의 시간과 구출된 이후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살아온 25년의 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유괴범 겐지와 피해자 게이코 간의 비틀어진 악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명백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판타지를 읽은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실보다는 상상이, 현실보다는 꿈이 이 작품의 서사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게이코가 1년여 동안의 끔찍한 일들 가운데 분명한 사실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겐지가 자신을 유괴한 이유도 확실하지 않고, 그가 소아성애자인지 연쇄살인범인지 다중인격자인지 그 정체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옆방의 야타베가 정말 야쿠자 출신의 청각장애인이 맞는지, 밤마다 구멍을 통해 자신을 엿보던 관음증 환자인지, 겐지와는 무슨 관계인지 전혀 모릅니다. 그저 확실한 것은 폭력을 휘두르며 성적인 수치심을 안겨주던 낮의 겐지가 밤이 되면 자기 또래의 여학생처럼 굴면서 마냥 소심한 존재로 급변했다는 점뿐입니다. 결국 상상은 공포를 증식시켰고, 공포는 새로운 상상을 야기한 악순환의 1년이었던 것입니다.

 

1년이 지난 후 구출된 게이코도, 체포된 겐지도 모든 심문자에게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경찰, 검사, 정신과 의사 등 심문자들은 그저 제각기 게이코가 당했을 끔찍한 일에 대해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돌아온 게이코를 맞이한 가족, 맨션 주민, 선생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상은 자유를 되찾은 게이코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 제멋대로 자신의 지난 1년을 상상하는 음란한 눈빛들, 그리고 기어이 언어로 날아오는 비수들 - “범인한테 무슨 짓을 당한거야?” - 로 인해 게이코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와 소통을 끊어버린 삶을 택합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게이코는 감금됐던 1년여의 시간 속에서 이곳저곳 불분명한 채로 남아있던 여백들을 자신만의 상상으로 채워 넣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밤의 꿈또는 ()의 꿈이라 이름 붙인 그 상상 속에서 게이코는 겐지가 자신을 유괴한 이유, 겐지의 성장기, 옆방 남자 야타베의 정체, 심지어 밀폐된 방 곳곳에 남아있던 괴이한 흔적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공상을 펼치며 사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갑니다.

그것은 악몽을 떨쳐내기는커녕 오히려 악몽의 한복판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게이코에게 지옥 같은 외부 세계에 대항할 힘을 준 것은 상상뿐이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런 행동에 대해 불합리한 경험을 겪었던 아이는 반드시 뭔가로 정신의 결함이나 마음의 상처를 메우려는 일을 시도하지.”라고 설명합니다. 게이코의 경우, 겐지와 야타베에 관해 자신만의 독살스러운 상상을 층층이 쌓음으로써 자신이 겪은 악몽 같은 시간들과 깊게 패인 상처의 골을 메우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고생 무렵, ‘밤의 꿈또는 독의 꿈에서 웃자란 상상을 풀어서 쓴 글이 젊은 남자의 폭력적인 성()을 파격적으로 묘사했다는 찬사와 함께 세상에 공개되면서 게이코는 10대의 나이에 주목받는 소설가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처럼 잔학기는 사실 또는 진실이 모호하게 가려진 상태에서 10살 소녀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과 꿈을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입니다. 독자마저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 겐지에 대한 게이코의 감정마저 어떤 종류, 어떤 색깔인지 불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겐지와 게이코의 기이하고 비틀어진 관계는 이 작품의 중요한 또 하나의 축입니다. 범인과 피해자가 일종의 유대관계를 맺는다는 스톡홀름 신드롬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두 사람의 나이나 감금된 환경 때문에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또한, 다중인격자처럼 낮과 밤의 두 얼굴을 지닌 겐지와 게이코 사이의 위태로운 기류가 끝까지 애증의 경계 위에서 미묘하게 묘사되고 있어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고조시킵니다.

 

단순히 비극적인 감금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관한 픽션에 그쳤다면 잔학기는 평범한 작품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섬뜩할 정도로 디테일한 심리 묘사는 독자에게 작품 속 한 인물이 되어 사건의 한복판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게이코를 훔쳐보고, 그녀의 불행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상하는 인물들을 비난하면서도 독자는 어느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게이코를 엿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잔학기는 겐지와 게이코에 대한 보편적이고 공통된 감정이입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상상에 의해 자신만의 결론과 감정이입에 이르게 하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특이하고 오래 기억될만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기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작품에 따라 업다운이 심한 편이라 한동안 손이 잘 안 가던 기리노 나쓰오였지만, ‘잔학기는 그녀의 장점과 미덕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수작이었습니다. 깔끔한 엔딩과 개운한 뒷맛을 원하는 독자에겐 쉽지 않은 작품일 수도 있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팬은 물론 처음 그녀를 만나려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사족으로, 책읽기를 마친 후 (앞부분에 실린) 겐지가 게이코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냥 덮지 말고, 꼭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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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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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여름, 사고로 부모를 잃은 10대 소녀 맥 로린은 여동생 수전과 함께 소도시 로럴 애버뉴의 루스 챈들러 아줌마 집에 머물게 됩니다. 루스의 옆집에 사는 12살 데이비드는 맥에게 특별한 호감을 갖습니다. 계곡에서 함께 가재를 잡는가 하면, 카니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데이비드는 루스가 맥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친절한 아줌마였던 루스의 폭력은 데이비드에게 큰 충격을 안깁니다. 루스의 폭력은 점차 강도가 심해졌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들과 로럴 애버뉴의 10대들까지 끌어들이며 위험수위를 넘나듭니다. 데이비드는 지하 방공호에 감금된 채 끔찍한 고문과 폭력에 노출된 맥을 보며 그녀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과 그녀를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루스의 폭력은 아무런 제약 없이 폭주를 거듭하지만 폐쇄적인 소도시의 사람들은 마치 공범인 양 무관심과 불간섭으로 일관합니다. 경찰마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무시하거나 외면할 따름입니다. 한편 무력감과 성적 호기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데이비드는 맥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감행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밀하지만, 동시에 무관심과 불간섭이 공존했던 1950년대 미국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한 소녀에 대한 끔찍한 폭력일지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고통스럽고 참담한 경험이며 심지어 역겨움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억압과 히스테리라는 정치적 분위기와 함께 보수적인 가족주의가 만연했고, 계층과 종교와 지식의 수준에 관계없이 아이들에 체벌은 당연히 여겨졌습니다. 그런 경향이 한층 두터웠던 소도시 로럴 애버뉴는 루스와 그녀를 따르는 어린 악마들’, 그리고 맥 같은 희생자를 낳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전성기를 코앞에 둔 맥에 대한 루스의 폭력은 여성으로서 늙고 초라해진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조카들을 떠맡게 된 짜증과 한탄도 한몫 거들긴 했지만 분노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관심을 빼앗아간 것은 물론 거역과 저항을 일삼는 아름답고 못된 맥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증오심입니다. 그 증오심은 (루스 본인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본성을 공격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발현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맥 로린은 창녀!”라는 일관된 신념이 루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너도 우리 엄마나 내가 했던 짓거리를 그대로 하게 될 거야. 이브의 저주, 그게 바로 여자의 약점이고, 여자는 다 매춘부나 짐승에 지나지 않아. 아랫도리에 구멍을 가진 멍청하고 패배의식에 젖은 창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너의 그 더러운 천성을 태워 없애버리는 거지.”

 

맥에 대한 최악의 폭력을 앞두고 루스가 질러댄 악마의 일성은 그녀가 맥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잘 설명해줍니다. 한마디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 중에서도 극단적인 사례인 셈입니다.

 

루스만큼이나 (아니면 훨씬 더) 독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과 폭행에 가담한 잡티 하나 없는 순수 악으로서의 10대 아이들의 집단 광기입니다. 애초 아름다운 이방인 맥에 대해 품었던 선하고 순수했던 호기심은 루스의 지원 하에 순식간에 아무런 죄의식 없는 폭력성으로 전화됐고, 맥의 육체를 마음껏 유린하고 짓밟은 두 달간의 지하실의 카니발로 이어집니다. 특히 만 10살 밖에 안 된 루스의 막내아들 우퍼의 잔혹한 행위는 폭력에 대한 원시적이고 끝없는 갈망그 자체라서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화자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의 무력한 태도는 시종 독자의 분노를 자아내지만, 극도의 폭력 앞에 노출된 12살 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밀고자나 배신자가 되지 못한 것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호기심이 뒤엉킨 그 또래의 혼란이 안타깝게 여겨질 뿐입니다. 엔딩에서 그가 선택한 마지막 저항이 앞서 무력했던 태도를 상쇄해주긴 하지만, 그는 결코 맥을 만나기 전의 데이비드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독자는 읽는 내내 잘못을 저지른 자와 이를 묵인한 자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쁜가?’라는 행간에 숨은 질문을 받곤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번역 전에 이 작품을 읽은 뒤 처음엔 작가를 미친놈이거나 성도착증 환자거나 반사회적 이상 성격자로 예단했다.”라는 번역자의 고백처럼 저 역시 작가에 대한 분노와 함께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들은 언제나 나를 두렵고 분노하게 한다. 오래전부터 이런 몹쓸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 달리 다른 인터뷰에서는 이 작품을 스너프 소설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의도결과가 조금은 엇나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웃집 소녀196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 30대 여자가 올바른 여성이 되는 법을 가르친다16살 소녀를 고문하다가 살해한 실화에 근거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이 소설의 가치는 폄하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번역자 역시 실화라는 점을 들어 미친놈이라고 예단했던 작가에게 면죄부를 내줬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착잡함을 피할 수 없었던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명처럼 들렸습니다.

 

어지간히 잔혹한 이야기들을 많이 봐왔지만, 10대 소녀에게 가해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악마적 폭력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의 홍보 카피 - “당신은 악의 심연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가 이 작품처럼 피부에 와 닿은 적도 없던 것 같습니다. 공포 그 자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평범한 장르물 독자에게 추천했다간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작품입니다. 물론 그런 쪽의 취향을 가진 독자에게는 거꾸로 강추하고 싶은 작품인 것도 사실입니다. 호기심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나름 단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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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1 - 팥알이와 콩알이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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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을 심플한 연필 드로잉으로 그려낸 만화 에세이입니다. 순둥이인데다 소심하기까지 한 콩알()과 말괄량이 팥알()이 입양되는 프롤로그부터 독특한 일가족과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며 벌어지는 24개의 에피소드가 들어있습니다.

 

1시간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후루룩 넘어갈 정도로 이야기는 소소하고, 그림은 많은 여백을 갖고 있습니다. 딱히 어떤 스토리를 기대할 작품도 아니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을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쁘고 여유 없는 일상 속에서 만난 잠시의 휴식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 역시 곧 만 5살이 되는 강아지 시추를 키우고 있다 보니 콩알과 팥알의 횡포(?)나 식탐, 사람과 함께 살면서 생기는 해프닝들이 남달리 느껴졌지만, 특히 고양이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콩알과 팥알의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양이 주인의 할아버지인 내복씨와 두 고양이가 인연을 맺어가는 모습은 왜 애완동물이란 호칭 대신 반려동물이란 표현이 등장했는지 쉽게 이해하게 해줄 뿐 아니라 누구나 나도 고양이를 입양해볼까?’라는 욕심을 갖게 만들 정도로 따뜻하고 정겨워 보입니다.

가끔 소파에 늘어져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또는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로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한 번씩 꺼내 읽다보면 피로와 분노, 상처와 상심이 저절로 달래질 것 같기도 합니다.

 

마네키 네코(복고양이)를 비롯하여 문화와 일상 곳곳에 고양이가 스며들어있는 일본에서 이 작품이 꽤 화제를 모은 것은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2, 3권이 연이어 출간됐다고 하니 국내에도 곧 소개가 될 것 같습니다. 연말연시, 애묘가들에게 선물하기에 딱 좋은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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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시력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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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래스 키 상(Glass Key Award, 스칸디나비아 추리작가협회에서 북유럽 작가의 최우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과 인격 장애를 겪는 사이코패스가 벌이는 살인사건이라는 내용만 놓고 보면 분명 스릴러로 분류되는 것이 맞는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은 독특한 심리물 한 편을 읽은 듯한 복잡다단한 심경이었습니다. 화려한 표현이나 속도감을 앞세우지도 않은데다 누가 범인인가?’라는 미스터리보다는 내게 여자가 있다면...”을 끊임없이 되뇌며 사랑을 갈구하는 고독한 사이코패스 릭토르의 불안정한 심리와 기이한 행동들을 느린 속도로 파고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릭토르는 뢰카 요양원에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돌보는 간호사입니다. 동료인 안나를 흠모하며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순정남이기도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약을 변기에 버리고 무력한 그들을 고문하는 사이코패스이기도 합니다. 또 쉬는 시간엔 공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한없는 고독에 빠지는 고독남이기도 합니다.

그런 릭토르가 세 건의 죽음에 휘말립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지만 직접 돕지도, 경찰에 연락하지도 않습니다. 우발적이긴 해도 직접 사람을 살해하고 매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요양원에 입원해있던 한 노인의 죽음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살인범으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미스터리는 릭토르의 살인-매장이 어떻게 밝혀질 것인가요양원의 노인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등 두 갈래로 진행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이 두 개의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은 그리 크게 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건의 죽음을 대하는 릭토르의 불안정하고 변화무쌍한 심리 상태가 독자의 눈길을 훨씬 더 강하게 잡아당깁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을 고문하고 시신 앞에서 광기어린 춤을 추는 등 죽음에 이끌리는 일그러진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극한의 고독을 택했으며, 특별한 트라우마도 없이 악의와 선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가슴 설레는 모순된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백히 악마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기를, 그래서 그가 꿈꾸는 사랑이 이뤄지기를 응원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좀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릭토르의 모순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기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악의와 선의를 조금씩은 공유하고 있기 마련이고, 폭력을 통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는가 하면, 거기에서 자라난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필하고 싶어 합니다.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한순간 이성이 무너지기도 하고, 한없이 강한 척 허세를 부려보지만 돌아서선 이내 겁에 질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누구나 다 조금씩은 릭토르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릭토르는 공동체가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로 분류된 것이고,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제재당한 것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 후기의 마지막 문장에 특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

 

릭토르가 몰랐던 것은 누구나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어둠이 얇은 얼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그 속에 발을 내딛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고독을 알지만 그 안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다 읽고도 이 작품의 원제 나는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 (I can see in the dark)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그 의미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순 없지만, 번역 후기의 이 마지막 문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작가의 의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을 지닌 북유럽의 스산한 심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의외로 매력적인 캐릭터나 줄거리와 만나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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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섬 -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
나혁진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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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강력범죄자를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 필리핀으로부터 임대한 일명 교도섬입니다. 전기 철조망 외엔 제대로 된 수감시설도, 교도관도 없는 탓에 10년 만에 악당들의 섬으로 변질됐습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섬을 장악했고, 권력과 부의 서열이 만들어졌으며 매춘과 마약이 횡행합니다. 이곳에 엘리트 경찰 출신의 연쇄살인범 장은준이 수감됩니다.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라는 부제대로 장은준은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사이코패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수감돼있는 교도섬에 스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긴 장은준은 교도섬 선배인 추웅과 이강생의 도움으로 섬에서 벌어진 여러 미스터리를 풀어내며 불가능해 보이던 복수극 미션에 매진합니다.

 

교도섬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이 잘 조합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입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교도섬에 수감되기를 자청한 장은준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장은준을 돕는 전설의 암살자 추웅이나 꾀돌이 이강생도 주연 못잖은 역할을 해냅니다.

이야기는 장은준의 복수극 외에도 교도섬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건드리는데, 필리핀 창녀살인사건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시퀀스나 추웅의 과거 속에 숨어있는 음모를 파헤치는 대목에선 전직 엘리트 경찰로서의 장은준의 뛰어난 능력이 십분 발휘됩니다.

 

홍보카피만 봤을 땐 배틀 로열이나 헝거 게임과 유사한 고립된 곳에서의 추격 액션물이라고 예상했는데 악당들이 세운 그들만의 천국이라는 설정은 이야기를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들어냈습니다. 악당들의 영구 격리를 위해 만들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감시의 손길은커녕 활기찬(?) 자본주의의 천국으로 변질된 교도섬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마다 작가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의 산물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교도섬에는 추리, 무협, 액션, 모험 등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있고, 필리핀 해안의 절경이나 거칠고 위험한 밀림은 물론 식민지 시대의 건물 등 시각적인 재미를 주는 공간들도 다수 등장해서 영상물로 제작될 여지도 충분해보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을 꼽아보자면, 가족을 붕괴시킨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장은준이 한때 본연의 임무를 잊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는 시퀀스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강생과 처음 만난 이후 약 100여 페이지에 걸쳐 장은준은 스스로 즐거운 날들이라고 표현할 만큼 교도섬에 들어온 목적을 망각한 채 추웅, 이강생과 함께 야생의 삶을 만끽합니다. 복수를 펼칠 방법을 찾지 못해 낙심한 채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땐 여긴 도대체 왜 온 거야?”라는 반문이 저절로 나올 법한 이상한 장면들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조연들에 관한 것인데, 우선 추웅은 뒤로 갈수록 주인공이 뒤바뀐 건가, 할 정도로 그 역할이 장은준을 넘어섭니다. 장은준이 지능과 액션을 겸비한 슈퍼맨이 아닌 것은 사실적인 설정이었지만, 처음부터 추웅의 도움을 기대라도 한 듯한 모습이나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의존하는 모습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또한 가족을 잃은 장은준 입장에서 볼 때 연쇄강간을 저질러 교도섬에 수감된 이강생은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쓰레기 중의 쓰레기가 분명한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와 인연을 맺는 모습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은준의 복수의 대상인 악마의 존재감이 너무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포악한 본능이 하늘을 찌르든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든 엄청난 폭력재능을 지니고 있든 뭐 하나라도 장은준을 위협할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든 기대에 한참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또한 악마에 대한 묘사 역시 분량도, 표현의 수위도 너무 미미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옥의 섬에 들어온 장은준의 의지까지 맥없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384페이지라는 적당한 분량에 재미와 몰입감을 갖춘 흥미로운 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아쉬움은 있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이 탄생시킨 교도섬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복수를 위해 그곳에 잠입한 매력적인 주인공이라고 생각된 바,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권총 한 번 쏘기 어려운 척박한 대한민국 스릴러의 토양 위에서 신선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필력 역시 후속작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나혁진의 데뷔작 브라더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보니 그가 만들어낸 암흑가에 몰아치는 피비린내가 어떤 모양일지 급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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