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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ㅣ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4월
평점 :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올 법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 스리 파인스. 상주하는 경찰 하나 없지만 세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다툼 한 번 없이 살 것 같은 사람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고, 어딘가 잠복해있던 ‘이웃 간의 갈등과 욕망’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피살된 사람은 마을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험담의 대상이 된 적 없는 76세의 싱글녀 제인 닐이기에 소도시 스리 파인스가 받은 충격은 엄청납니다. 어쨌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수사가 이뤄지고, 흉악한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지만, ‘스틸 라이프’는 묘하게도 다 읽은 후에 따뜻한 느낌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첫 편인 ‘스틸 라이프’는 흔히들 전원 코지 미스터리, 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정서가 느껴지는 고전 후더닛 미스터리라고 칭해집니다. 번역 후기에 따르면 “독립된 시골 마을,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건 관계자, 등장인물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 외부에서 유입되어 파장을 일으키는 주요인물, 연극 무대를 옮겨놓은 듯한 사건 무대 같은 고전 미스터리의 클리셰는 이 작품에서도 굉장히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비슷한 설정이더라도 이야기를 얼마든지 무겁고 냉랭하게 끌어갈 수 있겠지만, 작가는 살인사건만 아니라면 유쾌하고 따뜻한 시트콤에 제격인 캐릭터와 배경을 활용하여 독특한 장르물을 완성시켰습니다. 특히 긴장감과 유쾌함을 동시에 내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애증이 교차하는 화가 부부,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노시인, 불쾌한 시선과 대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는 게이 커플, 전직 심리치료사이자 스리 파인스의 유일한 흑인인 서점주인 등 사람 사는 동네라면 어디나 있을 것 같은 각양각색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건 발생 이후 스리 파인스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태도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돼주기도 합니다.
더불어 퀘벡 경찰청에서 파견된 가마슈 경감 이하 경찰 캐릭터 역시 때론 웃음을, 때론 신중함과 묵직함을 선보이며 보기 드문 매력을 선사합니다. 가마슈 경감은 한마디로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습니다. 그는 경쟁보다 팀웍을 더 중시하고, 모자란 부하에게는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 누구보다 진정성을 담은 마음으로 사건 수사에 나섭니다. 조직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승진과도 거리가 먼 경찰이 분명하지만, 누구나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런 모범 경찰입니다.
가마슈의 부하이자 파트너이며 가마슈의 ‘감성’을 보완하는 ‘이성’의 소유자 보부아르, 신참으로 가마슈 휘하에 들어와 평지풍파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 이베트 니콜, 그 외에 가마슈 주위의 동료들 역시 매력 만점의 캐릭터들입니다.
잔혹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 대세인 시대에 사건도, 캐릭터도 독하지도 않고, 딱히 세일즈 포인트라고 꼬집어 말할 특이한 점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 페니의 문장은 독자의 관심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끌어들입니다. 부드러운 것 같지만 어딘가 톡 쏘는 맛을 풍기기도 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묘하게 비틀어 희극적으로 풀어놓은 문장들은 감칠맛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피살된 제인 닐을 묘사한 이 작품의 첫 문장을 보면, “미스 제인 닐은 추수감사절 하루 전인 일요일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자신의 창조주를 만났다.”라고 돼있습니다. 평화롭고 축복받은 호상(好喪)을 연상시키는 이 역설적인 첫 문장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급상승했습니다. 읽는 내내 이런 따뜻한 재치가 느껴지는 문장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번역자의 알뜰한 노력도 일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장르물로서의 품격 역시 결코 모자라지 않았는데, 모두가 용의자로 보이지만 동시에 뚜렷한 동기를 확정할 수 없는 딜레마라든지 피살된 제인 닐의 기이한 행적, 숨겨진 이웃의 과거사, 끝내 밝혀진 기상천외한 트릭 등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구축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줍니다. 또한 평화로운 스리 파인스의 사람들조차 짊어져야 했던 상실, 탐욕, 기만, 정체된 삶 등 현실적인 주제들에 대해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깊이의 서사를 풀어놓음으로써 작가는 장르물 외적인 만족감도 함께 전달해줍니다.
아쉬움이라면 딱 두 가지인데, 우선은 스리 파인스의 주요 인물들과 분위기를 설명하는 초반부의 지루함입니다.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장르물을 읽고 있는 거 맞아?” 할 정도로 조금은 장황하게 전개되는데, 이 지점만 넘어가면 속도감은 10배는 빨라집니다. 두 번째는 캐릭터는 물론 활약이 기대됐던 신참형사 니콜에 관한 것인데, 나름 ‘세컨드 주인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등장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저기 민폐만 끼치다 보니 무척 아쉬웠습니다.
올해(2014년)에만 네 편이나 출간된 ‘가마슈 경감 시리즈’를 더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 이 평화로운 스리 파인스가 뉴욕을 능가하는 범죄도시라도 된 건가, 하는 생각에 궁금증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물론 정답은, 읽어봐야 알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