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190cm가 넘는 키에 110kg의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소심한데다 타인과의 소통에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것이 타고난 인성이라기보다는 일부러 뭔가를 감추기 위한 방편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때 위험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그저 고독한 삶을 만끽하고 있을 뿐인 괴짜 바텐더 밥 사이노스키를 둘러싼 보스턴 뒷골목의 하드보일드 느와르입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에 익숙한 데니스 루헤인의 팬에게는 조금은 낯설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밥의 캐릭터는 슈퍼맨도 아니고 유쾌한 한량이나 꽃미남도 아닙니다. 오히려 무슨 이유에선지 스스로 진창에 처박혀 침묵의 삶을 살아가는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그는 가난한 할머니에게 공짜 술을 몰래 따라주는가 하면, 경찰의 심문에는 어설프게 대응하고 바(bar)를 장악한 체첸 폭력단에게는 조용히 순종합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많아 보이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요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이물질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급변합니다. 특히 유기견 로코와 미지의 여인 나디아는 단색뿐이던 밥의 삶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합니다. 무뚝뚝한 거구의 밥이 왜소한 강아지 로코와 낯선 여인 나디아에게 쩔쩔 매는 모습은 겉으론 무척 언밸런스해 보이지만 왠지 묘하게도 따뜻하고 밝은 미래를 예지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로코와 나디아를 지켜주고 싶은 밥의 의지가 엿보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의지가 그동안 감춰온 그의 비밀스런 과거와 충돌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 삐딱하기 짝이 없는 탐욕스런 캐릭터들까지 연이어 등장하여 밥의 삶에 큰 파문을 일으킵니다. 밥의 사촌으로 한때 주먹깨나 휘둘렀지만 이젠 바의 바지사장일 뿐인 커즌 마브, 보스턴 뒷골목을 지배하는 체첸 폭력단, 밥과 그의 바에서 벌어진 사건을 발판삼아 경찰조직에서의 거듭된 추락을 만회하려는 토레스, 소년원과 교도소를 전전하며 악인으로 진화해왔고 사악한 의도로 밥에게 접근하는 에릭, 밥이 일하는 바에 겁 없이 들이닥친 ‘2인조 강도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오만과 탐욕은 엄청난 판돈이 걸린 슈퍼볼의 밤에 밥의 바에서 대참사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감춰져온 밥의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납니다.


 

막판에 이르러 밥이 풍겼던 위화감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를 괴롭히던 악당들이 응징되는 순간 짜릿한 쾌감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쾌감의 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묘하게 변해갔습니다. 뭐랄까, 첫맛은 괜찮았는데 씹을수록 뒷맛이 개운치 않아지는 느낌이랄까요? 그 이유는 밥이 맞이한 엔딩이 상식과 도덕의 기준으로 볼 때 용납 가능한 일인지, 또 그의 미래가 밝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느와르가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장르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밥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기억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본문 가운데 저의 이 찜찜함에 대한 데니스 루헤인의 답변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어서 인용해보면,

 

결국 살아남기 위해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 게다가 그런 일들은 어느 정도 야망을 이루지 못하면 끔찍한 비극이 된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를 감출 수 있지만, 낙오자는 바로 그 과거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여생을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다.”

 

이 찜찜함을 해소하고 싶어서 번역 후기를 꼼꼼하게 읽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본편만 있고 작가나 역자의 후기가 없어서 결국 저만의 숙제로 남게 됐습니다. 당초 단편이었지만 영화 시나리오 작업 이후 살을 붙여 중편 분량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100% 추정이지만) 데니스 루헤인이 대중성 강한 장편에서는 펼치지 못했던 작가주의적 본색을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 캐릭터, 사건 모두 전형적인 오락용 블록버스터보다는 개성 강한 독립영화의 뉘앙스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팬 입장에서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지만, 이 작품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한 번 찬찬히 숙독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스피디한 전개의 오락물을 대하듯 빠르게 읽은 탓에 압축된 듯 또는 정제된 듯한 문장과 그 행간 속에 숨은 진정한 매력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건너뛴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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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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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맛이 물씬 풍기는 루이즈 페니의 문장도 좋았고,
훈훈한 옆집 아저씨 같지만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가마슈 경감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가마슈 경감의 나머지 작품도 기대하게 만드는 만족스러운 시리즈 첫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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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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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올 법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 스리 파인스. 상주하는 경찰 하나 없지만 세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다툼 한 번 없이 살 것 같은 사람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고, 어딘가 잠복해있던 이웃 간의 갈등과 욕망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피살된 사람은 마을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험담의 대상이 된 적 없는 76세의 싱글녀 제인 닐이기에 소도시 스리 파인스가 받은 충격은 엄청납니다. 어쨌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수사가 이뤄지고, 흉악한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지만, ‘스틸 라이프는 묘하게도 다 읽은 후에 따뜻한 느낌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첫 편인 스틸 라이프는 흔히들 전원 코지 미스터리, 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정서가 느껴지는 고전 후더닛 미스터리라고 칭해집니다. 번역 후기에 따르면 독립된 시골 마을,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건 관계자, 등장인물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 외부에서 유입되어 파장을 일으키는 주요인물, 연극 무대를 옮겨놓은 듯한 사건 무대 같은 고전 미스터리의 클리셰는 이 작품에서도 굉장히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비슷한 설정이더라도 이야기를 얼마든지 무겁고 냉랭하게 끌어갈 수 있겠지만, 작가는 살인사건만 아니라면 유쾌하고 따뜻한 시트콤에 제격인 캐릭터와 배경을 활용하여 독특한 장르물을 완성시켰습니다. 특히 긴장감과 유쾌함을 동시에 내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애증이 교차하는 화가 부부,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노시인, 불쾌한 시선과 대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는 게이 커플, 전직 심리치료사이자 스리 파인스의 유일한 흑인인 서점주인 등 사람 사는 동네라면 어디나 있을 것 같은 각양각색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건 발생 이후 스리 파인스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태도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돼주기도 합니다.

 

더불어 퀘벡 경찰청에서 파견된 가마슈 경감 이하 경찰 캐릭터 역시 때론 웃음을, 때론 신중함과 묵직함을 선보이며 보기 드문 매력을 선사합니다. 가마슈 경감은 한마디로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같습니다. 그는 경쟁보다 팀웍을 더 중시하고, 모자란 부하에게는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 누구보다 진정성을 담은 마음으로 사건 수사에 나섭니다. 조직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승진과도 거리가 먼 경찰이 분명하지만, 누구나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런 모범 경찰입니다.

가마슈의 부하이자 파트너이며 가마슈의 감성을 보완하는 이성의 소유자 보부아르, 신참으로 가마슈 휘하에 들어와 평지풍파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 이베트 니콜, 그 외에 가마슈 주위의 동료들 역시 매력 만점의 캐릭터들입니다.

 

잔혹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 대세인 시대에 사건도, 캐릭터도 독하지도 않고, 딱히 세일즈 포인트라고 꼬집어 말할 특이한 점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 페니의 문장은 독자의 관심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끌어들입니다. 부드러운 것 같지만 어딘가 톡 쏘는 맛을 풍기기도 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묘하게 비틀어 희극적으로 풀어놓은 문장들은 감칠맛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피살된 제인 닐을 묘사한 이 작품의 첫 문장을 보면, “미스 제인 닐은 추수감사절 하루 전인 일요일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자신의 창조주를 만났다.”라고 돼있습니다. 평화롭고 축복받은 호상(好喪)을 연상시키는 이 역설적인 첫 문장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급상승했습니다. 읽는 내내 이런 따뜻한 재치가 느껴지는 문장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번역자의 알뜰한 노력도 일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장르물로서의 품격 역시 결코 모자라지 않았는데, 모두가 용의자로 보이지만 동시에 뚜렷한 동기를 확정할 수 없는 딜레마라든지 피살된 제인 닐의 기이한 행적, 숨겨진 이웃의 과거사, 끝내 밝혀진 기상천외한 트릭 등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구축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줍니다. 또한 평화로운 스리 파인스의 사람들조차 짊어져야 했던 상실, 탐욕, 기만, 정체된 삶 등 현실적인 주제들에 대해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깊이의 서사를 풀어놓음으로써 작가는 장르물 외적인 만족감도 함께 전달해줍니다.

 

아쉬움이라면 딱 두 가지인데, 우선은 스리 파인스의 주요 인물들과 분위기를 설명하는 초반부의 지루함입니다.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장르물을 읽고 있는 거 맞아?” 할 정도로 조금은 장황하게 전개되는데, 이 지점만 넘어가면 속도감은 10배는 빨라집니다. 두 번째는 캐릭터는 물론 활약이 기대됐던 신참형사 니콜에 관한 것인데, 나름 세컨드 주인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등장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저기 민폐만 끼치다 보니 무척 아쉬웠습니다.

 

올해(2014)에만 네 편이나 출간된 가마슈 경감 시리즈를 더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 이 평화로운 스리 파인스가 뉴욕을 능가하는 범죄도시라도 된 건가, 하는 생각에 궁금증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물론 정답은, 읽어봐야 알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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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6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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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겐야 시리즈와는 또다른 미쓰다 신조의 기담을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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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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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고서점 2층에 머물며 지독히도 가난했던 학생 시절을 보낸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재력가의 사위가 되었고, 비상근 강사로 일하며 번역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다들 그의 처지를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는 혐오와 무시 속에 투명인간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그에겐 아내 모르는 큰 빚이 있고 여러 소비자금융을 통해 돌려막고 있는 중입니다.

어릴 적, 가족이 파탄나면서 가난의 수렁에 빠진 여자가 있습니다. 멋모르고 쓰기 시작한 대출이 사채에 이르면서 그녀는 고서점 2층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에서 남자를 만난 그녀는 무색무취한 섹스를 나누며 그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그녀의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가치는 돈입니다.

이 두 남녀가 한여름에 만나 한겨울에 영원히 결별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돈과 정욕으로 얽힌 만남이었고 토막 살인으로 종결되지만, 씁쓸하고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처럼 긴 여운을 남깁니다.


 

내 남자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이어 사쿠라바 카즈키와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제목만 보면 끔찍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잔혹 미스터리 같지만 실제 이야기는 돈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사랑’, ‘죽음에서 시작된 기이한 인연을 함께 다루고 있어서 사쿠라바 카즈키답게 여러 장르를 믹스한 듯한 묘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고 의미 없는 섹스로 시작된 요시노 사토루와 시로이 사바쿠의 관계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욕만을 위한 만남도 아닌 기이한 인연입니다. 두 계절에 걸쳐 드문드문 이어지던 관계는 이 끼어들면서 급격히 비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단순한 화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토루에게 은 영혼을 거둬간 악마이자 굴욕의 대가이며 가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밑바닥 삶을 사는 사바쿠에게 있어 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입니다.

 

그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사쿠라바 카즈키는 그들의 파국을 돈을 놓고 벌이는 치정살인극따위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품경제의 후유증을 다루는 고발극처럼 유치하게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내 남자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서도 그랬듯이 사쿠라바 카즈키는 참담한 현실과 예정된 비극을 너무도 담담하고 예쁘게 그립니다. 또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고단한 삶을 훤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파국이 뻔한 두 사람의 관계가 통속극처럼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고,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망할 놈의 돈이라는 욕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다가 결국 파국이 다가왔을 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화까지 나게 만듭니다.

 

사쿠라바 카즈키는 다양한 상징과 대비를 동원하여 독자의 공감을 배가시킵니다. 두 사람은 습하고 기분 나쁜 한여름에 만나 살을 파고드는 한겨울의 혹한 속에 헤어집니다. 사토루의 아내의 집은 흰 요새처럼 웅장하고, 침실은 우주선 조종석을 떠올릴게 할 만큼 넓고 견고하고 청결합니다. 하지만 사토루와 사바쿠가 공유하던 고서점 2층은 누가 계단이라도 밟으면 파도위의 배처럼 흔들리고, 열리지 않는 둥그런 세 개의 창만 있는 너무나 외로운 방입니다. 또 후광이 드리운 여신 같은 아내는 하얗고 고른 치열을 지녔지만, 사바쿠는 누렇고 더럽고 제멋대로인 치열 덕분에 더러운 구멍 같은 입을 갖고 있습니다. 아내와 집이 온통 하얀 색이라면, 사바쿠의 모든 것은 불길하고 희망 없는 암적색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징과 대비들 덕분에 현실감은 또렷해지고, 감정은 깊이 이입됩니다.

 

내용과 묘사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사쿠라바 카즈키만의 묘한 매력이 엿보이는데, 일반적인 사용법을 무시한 채 곳곳에 찍어놓은 쉼표들은 독자들의 호흡과 일반적인 눈 운동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템포에 맞춰 책을 읽다 보면 문장과 행간에 깔린 작가의 의도를 얼핏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무척 거슬리지만 그 엇박자의 리듬을 타면 쉼표 하나만으로도 문장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꽤 뒤죽박죽인 이상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토막 시체가 된 것을 보니 묘하게도 비로소 사람다워 보이고 차분해진 것 같았다. 뭐랄까, 안정적인 모습이 되었다. 그래. 이 사람은 예전부터 토막 나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이었다.”

 

프롤로그에 실린 이 글에서는 누가 토막 난 시체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누가 누구를 토막 냈는가?’가 무척 궁금했는데, 정작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실은 누구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등장인물 모두 살아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들이라는 먹먹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단순히 에 지배당하고, 놀아나다가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현실적으로 그려진 치명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리 긴 분량의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구절절 긴 서평을 쓰게 만들 정도로 사쿠라바 카즈키는 여러 가지 화두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은 독자의 호불호를 많이 타는 편이고, 특히 그리 말끔한 기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느낌과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에 취향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이라면 늘 기대감을 갖고 찾아보게 됩니다. 다만 너무 자주, 연이어 읽는 것은 팬인 저로서도 그리 권하고 싶진 않습니다. 몇 달 또는 한 1년 쯤 후에 아직 못 읽은 그녀의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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