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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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3주를 앞두고 연인 안나가 종적을 감추자 라파엘은 패닉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안나가 사라지기 직전 세 구의 참혹한 시신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고백한 탓에 라파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사는 퇴직형사 마르크와 함께 안나를 찾아나선 라파엘은 얼마 안 가 안나가 오랫동안 신분을 바꿔 살아온 사실, 11년 전 벌어졌던 일명 하이츠 키퍼 사건’, 10대 소녀들을 감금하고 폭행했던 사건에 안나가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나를 찾으려면 그녀의 과거를 파헤쳐야 한다고 확신한 라파엘은 파리에서의 조사를 마르크에게 맡긴 뒤 안나가 태어나고 자란 뉴욕으로 향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브루클린의 소녀는 거침없는 속도감과 빠른 국면 전환에 관한 한 가장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안나를 찾기 위한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녀에 관한 뜻밖의 정보들 때문에 엄청난 속도와 굴곡을 지닌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됩니다. 마치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속방지턱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과속과 역주행을 거듭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라파엘과 마르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안나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된 게 분명하다는 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조사는 단순한 실종된 연인 찾기가 아니라 악취와 악의가 진동하는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안나의 과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라파엘과 마르크는 11년 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왔다가 하이츠 키퍼 사건에 연루된 클레어 칼라일이란 소녀가 안나의 실체임을 확신합니다. 마르크가 파리에 남아 하이츠 키퍼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라파엘은 뉴욕으로 날아가 클레어 칼라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뜻밖에도 같은 시기 그곳에서도 의문의 죽음이 있었던 걸 알게 되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에 엮여있음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 때마다 거기에 연루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조사해야 할 사건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복잡하게 얽혀있고, 무대마저 파리와 뉴욕으로 양분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빛의 속도로 책장을 넘기는 와중에도 넘쳐나는 새 정보와 인물들을 머릿속에 담느라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정보와 인물들 속에 안나의 행방은 물론 과거의 진실을 가리키는 작은 조각들이 숨어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얼른 책장을 넘기고 싶으면서도, 뭔가 놓친 게 없을까 싶어 다급한 마음으로 활자들을 노려봐야 하는 고도의 몰입감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과거와 현재, 파리와 뉴욕이라는 시공간 속에 배치된 여러 사건들은 대반전과 함께 해소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이 운명처럼 얽힌 끝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이 벌어진 셈인데, 그 모든 우연과 필연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탐문과 추리를 벌인 라파엘과 마르크의 여정은 우여곡절과 반전과 충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막판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기욤 뮈소는 마지막까지 뜻밖의 반전을 남겨놓아서 독자로 하여금 책을 덮을 때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가끔씩 마주치곤 했던 장황한 사족들입니다. 딱히 어느 대목이라고 지목하긴 어렵지만, 인물이나 배경을 소개할 때라든지, 사건과 상황을 묘사할 때라든지 한두 줄이면 충분할 것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묘사한 경우가 종종 목격되곤 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땐 건너뛰고 싶기도 했는데, 물론 마음만 그랬고 결국 한 줄도 건너뛰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조급함이 과도해진 나머지 멀쩡한(?) 대목을 사족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만점에서 별 1개를 빼게 할 정도로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기욤 뮈소는 읽은 작품보다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은 작가인데, ‘브루클린의 소녀를 읽고 나니 우선 스릴러 서사에 충실한 작품부터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가씨와 밤처럼 재미있게 읽은 작품도 있지만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처럼 실망이 더 컸던 작품도 있어서 다른 독자들의 평을 살펴가며 목록을 만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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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사라지던 밤 1 나비사냥 3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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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하태석 형사는 12살 소녀들을 납치 살해한 것이 확실한 김동수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독직폭행을 저질러 중징계를 받고 지방으로 좌천됐습니다. 물증도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자 김동수는 유유히 법망을 벗어났고 사건은 여전히 미제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동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납치된 소녀들의 가족이 범인이란 걸 알게 되자 하태석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서울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에 지원한 하태석은 김동수 사건의 전말은 물론 7년째 미제상태인 소녀들 납치사건을 다시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7년 전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이 하태석의 수사를 방해합니다. 소녀들 사건의 재수사를 위해선 죽은 김동수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지만 하태석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발목을 잡히곤 합니다.

 

나비사냥’(2013), ‘시그니처’(2017)에 이은 나비사냥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소녀가 사라지던 밤은 시리즈 첫 편에서 하태석 형사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김동수 사건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소녀들의 가족이 김동수를 살해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7년 전 두 소녀를 납치 살해한 것이 분명한 김동수의 범행을 입증하는 것, 그리고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결국 한줄기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이는 경기-인천 일대 연쇄실종사건이 막간극처럼 끼어듭니다.

하태석과 미제사건전담팀의 1차 미션은 소녀들 사건이지만, 죽은 김동수에 대한 조사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경찰 상층부는 김동수 사건을 서둘러 종결하려고만 할뿐 하태석의 조사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7년 전처럼 갖은 핑계를 대가며 하태석의 행보를 방해할 뿐입니다. 결국 조직 내부로 시선을 돌린 하태석은 경찰을 그만둘 각오까지 다지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현직 형사만이 풀어낼 수 있는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경찰조직 내부의 문제, 현장을 뛰는 형사들의 애환, 서무와 관제 등 빛나진 않지만 꼭 필요한 경찰 업무 등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디테일이 곳곳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대형로펌의 변호사, 법최면 전문가, 범죄피해자 가족모임 등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서사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아마 한국에서 출간된 경찰 미스터리 가운데 나비사냥 시리즈만한 리얼리티와 볼륨감을 갖춘 작품을 찾아보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스릴러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면 하나쯤 갖고 있는 죄책감 가득한 트라우마이자 반드시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지막 무대이자 총결산편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작품에서 김동수의 범행을 입증하고 소녀들의 유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태석에게 과연 얼마나 잔혹한 시련들이 닥칠지 읽기 전부터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 걱정의 몇 배나 되는 고난들이 하태석과 미제사건전담팀을 위기에 빠뜨리곤 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전작들에 비해 군더더기와 사족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주고받는 대화는 불필요할 정도로 길게 늘어지고, 스토리와 무관한 대목에도 적잖은 분량이 할애됩니다. 동일한 정보가 거듭 설명되기도 하고, 꼭 필요한 정보도 지나칠 정도로 여러 겹으로 포장돼 설명됩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하태석에게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 대목, 그러니까 클라이맥스로 진입하는 곳에서부터 이 군더더기와 사족이 더욱 많아진 점인데, 정작 몰입도가 가장 높아야 할 지점에서부터 거의 스킵하듯 책장을 넘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작가가 온 힘을 다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 도가 지나친 나머지 거꾸로 독자의 진을 뺀 느낌입니다.

한 가지만 더 부연하자면, 잔혹한 스릴러를 어지간히 많이 읽기도 했고 또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소녀가 사라지던 밤의 마지막 부분은 도저히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해서 결정적인 몇 페이지는 건너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 때문에 책을 다 읽고도 여운은커녕 지독한 씁쓸함만 남았는데, 그래선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과잉으로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엔딩만 보면 나비사냥 시리즈는 이 작품으로 마무리될 것 같은데, 언젠가 하태석의 이야기가 또다시 독자를 찾아올지는 작가 외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하태석의 복귀는 언제라도 환영하겠지만 군더더기와 사족과 견딜 수 없는 참혹함만큼은 충분히 덜어내진 상태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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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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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리노 준고는 내 양아버지다. 그가 나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 나는 지진 때문에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초등학교 4학년짜리 꼬마였다. 아주 먼 친척인 준고는 복잡한 몇 가지 절차를 거쳐 내 양아버지가 되었다. 8년 전, 준고가 서른네 살 때 우리는 도쿄로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이제 내일이면 결혼을 한다. 그때 준고는 왜 어린 여자 아이를 굳이 맡으려 했을까. 준고라는 남자가 과거에 한 선택과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비 냄새 같은 체취를 풍기는 이 양아버지가 바로 내 남자라는 것뿐이다.” (p12~13에서 발췌)

 

읽은 지 10년도 훌쩍 넘은 작품이지만 당시 느꼈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15년에 걸친 사랑의 행적을 그려낸 소설이라는 평범한 소개글에도 불구하고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읽었던 작품인데, 초반 몇 페이지만에 남녀 주인공이 실은 불과 16살 차이인 양아버지와 양녀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단순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어둡고 음습하고 시한폭탄처럼 위험한 것임을 눈치 채곤 큰 충격에 빠졌던 겁니다. 잠시나마 플라토닉 러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근거 없는 기대와 짐작을 해봤지만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달콤하면서 관능적이고 불길하며 퇴폐적인 느낌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양아버지 준고가 42, 양녀 하나가 26살인 첫 챕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27살과 11살 시절, 그러니까 15년 전에 시작된, 난폭하면서도 애틋하고 납득하기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사랑을 그려냅니다.

 

반도덕적, 반사회적이며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소설이다. 이것을 세상에 내놓고 한 번 묻고 싶었다.”라는 나오키 상 심사위원의 평뿐 아니라 상식을 가볍게 짓이기며 전개되는 가장 위험한 러브 스토리”, “더러운 늪에서만 피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소설이라는 세간의 평대로 내 남자는 상식의 잣대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그들만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애초 이런 사랑이 어떻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작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천천히, 하지만 누구도 깨부술 수 없는 공고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농밀하게 묘사하며 독자를 설득합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가족을 잃은 뒤 양부녀가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가족 혹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충족하려 했고, 그 감정이 점차 고양되어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됐을 때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남녀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가지를 뻗쳐 얽히려고 하는 연리지(連理枝)와 다름없었습니다.

그 사랑을 부정하고 손가락질하는 자를 가차 없이 살해한 뒤로 두 사람의 인생은 살얼음판 위를 걷게 됐고, 한편으론 서로에게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뼈가 되어서도 함께 하고 싶은 복잡한 감정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찾아온 파국 - 양녀 하나의 결혼 - 의 날, 두 사람은 속내를 감춘 채 비오는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봅니다.

 

독자에 따라 불쾌함과 욕지기를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저처럼 두 사람의 감정을 100% 이해하진 못해도 씁쓸하고 애틋한 여운에 사로잡힌 채 이야기의 주 무대 중 한 곳인 오호츠크 해의 검푸른 바다 앞에 홀로 서있는 듯한 황량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선과 악, 도덕과 패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모호한 이야기라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바로 그 점이 내 남자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여운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탓에 10년도 훌쩍 넘은 이제 와서 서평을 써보겠다며 다시 읽었지만, ‘내 남자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 모르긴 해도 과거와 현재와는 또 다른 인상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10년쯤 후엔 과연 어떤 눈빛으로 준고와 하나를 지켜보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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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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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직후 기타규슈의 탄광에서 일명 검은 얼굴의 여우라는 기괴한 전설을 모방한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대학 동창 구마가이 신이치의 초대로 도쿄에 온 뒤 또다시 난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붉은 미로라고 불리는 암시장에서 온몸이 붉은 남자가 여자의 뒤를 미행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를 붉은 옷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치의 과장된 소개 때문에 명탐정으로 불리게 된 하야타는 도리 없이 붉은 미로의 조사에 나서는데, 실제로 그곳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자 하야타는 바짝 긴장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암시장 상인조합장의 가게에서 끔찍한 밀실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이 붉은 옷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하야타는 다시 한 번 명탐정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붉은 옷의 어둠은 출간순서로 치면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지만, 작품 속 시간적 배경으로 따지면 시리즈 1편과 2편의 중간에 위치한 일종의 스핀오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리즈 2편인 하얀 마물의 탑에서 하야타가 암시장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 있는데, 바로 그 사건을 다룬 작품이 붉은 옷의 어둠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일본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적극적이고 비판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패전의 충격, 혼란과 무질서, 가난과 기아, 기득권의 비리, 미군정의 폐해 등 당시의 처참한 상황들이 단순한 배경그림이 아니라 미스터리의 중요한 축으로 설정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출간된 검은 얼굴의 여우하얀 마물의 탑은 그런 토대 위에서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 서사가 제대로 빛을 발한 반면, ‘붉은 옷의 어둠은 마치 근현대사를 다룬 논픽션처럼 패전 직후의 상황을 더욱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눈길을 끕니다. 특히 이 작품의 주요무대인 암시장은 실제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데, 그래선지 사건은 괴담의 기운이 섞인 밀실살인으로 설정돼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 혹은 역사 미스터리로서의 향기도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동창의 부탁으로 암시장 붉은 미로에 횡행하는 괴담의 진실을 밝히려던 하야타는 암시장 상인조합장의 가게에서 벌어진 밀실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붉은 미로의 좁고 복잡한 골목에서 여자들이 연이어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골목들 역시 범인이 도망갈 길이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밝혀지자 하야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말 그대로 괴담 속 붉은 옷의 소행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데다, 주위의 그 누구를 의심해 봐도 동기나 범행수법을 추론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불가해한 호러 코드와 전형적인 밀실사건이 조합되면서 이번에도 하야타에게는 난이도 높은 과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붉은 옷의 어둠은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우선, 초반에 암시장을 비롯한 패전 직후 일본의 상황이 다소 장황하게 설명돼서 그런지 전작들에 비해 시동이 많이 늦게 걸린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론 논픽션에 버금가는 그 내용들이 흥미로웠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야타가 붉은 옷괴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는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지만, 페이지를 꽤 넘긴 뒤에야 첫 살인사건이 등장한 점도 살짝 아쉬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를 특정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다소 무리한 추론과 작위적인 해법이 동원된 점입니다. 복선의 회수과정 중 일부는 수긍하기 어려웠고, 느닷없는 인물이 결정적 조언을 하는 장면이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리하는 장면은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호러미스터리의 특성 상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엔딩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붉은 옷의 어둠의 엔딩은 왠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이었습니다.

 

세 편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가운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미스터리의 맛을 가장 강렬하게 맛본 건 하얀 마물의 탑입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고가사키 등대에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대혼란에 빠진 채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하야타가 다음엔 어느 곳으로 향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작품에선 하얀 마물의 탑이상의 호러미스터리의 찐맛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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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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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뉴잉글랜드의 작은 섬 리틀톨에서 대저택에 홀로 살던 자산가 베라 도노반이 계단에서 추락해 사망합니다. 수십 년간 그녀를 모셔왔던 60대 여성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살해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경찰에 출두한 돌로레스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주인마님이자 말년엔 중풍 때문에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던 베라와의 오랜 애증의 역사는 물론 29년 전 개기일식이 벌어지던 날 남편 조를 살해한 일까지 포함하여 길고도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캐시 베이츠 주연의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은 뒤로 미뤘는데,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의 힘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호러 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킹이지만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얼마나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악연과 애증이 기어이 두 여자 돌로레스와 베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휴먼드라마이자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라는 교훈에 따라 가부장적이고 거만하고 폭력적인 남편을 통쾌하게 단죄하는 서스펜스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는 돌로레스의 처절한 모성애라든가 극악스런 겉모습과 달리 새카맣게 탄 속으로 수십 년을 버텨온 베라의 고통스런 인생 역정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물론 킹의 주 무기인 호러라는 양념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뿌려져있습니다.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기일식이라는 기묘한 우주현상, 사람의 얼굴을 닮은 먼지덩어리 유령, 소름끼치는 비명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하는 악몽 등 킹 특유의 생생한 호러 코드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서 이야기의 볼륨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한 사람은 남편에게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지닌 자산가이고, 또 한 사람은 주정뱅이에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며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정부 겸 하녀 신세지만 베라와 돌로레스의 삶은 실은 데칼코마니에 가깝습니다. 특히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절망과 고통에 잠식된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점까지 닮은 탓에 두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이나 무겁고 편치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흥분, 분노, 욕지거리, 폭소, 비애가 모두 뒤섞인 변화무쌍한 태도로 두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속기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돌로레스 덕분에 독자 역시 롤러코스터를 탄 듯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며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지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마는, 그런 특별한 책읽기라고 할까요?

 

가끔 별난 간식을 챙기듯 스티븐 킹의 초중기 작품들을 읽곤 하는데,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중에서도 좀더 특별한 맛을 만끽한 작품입니다. 조만간 캐시 베이츠가 열연한 영화를 볼 생각인데, 원작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면 그 맛이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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