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토버리스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7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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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꿈의 직장과 안정된 생활, 어쩐지 운명의 상대일 것 같은 남자와의 첫 데이트까지, 달콤했던 가브리엘라의 주말은 그녀의 딸을 유괴한 범인으로부터 거액의 몸값은 물론 비밀 문건 옥토버리스트를 찾아내라는 협박을 받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잘 생기고 친절한 데다 부자이기까지 한 대니얼은 이제 막 만났을 뿐인 가브리엘라를 도와 유괴범과 협상을 벌이려 한다. 가브리엘라의 딸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 보내는 조셉, 뉴욕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의문의 남자, 그리고 결코 협조적이지 않은 경찰들. 소설은 그들의 사흘 동안의 동선을 역순으로 추적한다.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이야기라 줄거리 정리가 조심스러워서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책 소개글을 요약했습니다)


 

이야기를 거꾸로 전개한다는 것, 그것도 반전이 거듭되는 스릴러를 마지막 챕터부터 첫 챕터의 순서로 집필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반전의 맛을 마지막에 배치된 첫 챕터에서 느끼라고? 그 역시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제프리 디버라 하더라도...

일단 이런 의구심과 미심쩍은 시선으로 첫 페이지를 열자 챕터 36’부터 챕터 1’을 향해 그려진 목차가 눈에 띄었습니다. 진짜구나, 하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첫 챕터를 마치자마자 또다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게, 마지막 장면이라고? 긴장감도 반전의 향기도 느낄 수 없는 내용인데, 이걸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렇게 시작을 했을까? 새삼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들어있던 번역자의 한마디가 떠올랐습니다.

 

충분한 마음의 준비 없이 옥토버리스트를 펼쳐든 독자라면 한동안 고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사실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한 챕터를 마칠 때마다 그 앞 챕터의 첫 문장을 다시 확인하곤 했습니다. , 이렇게 연결되는군,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중반쯤부터 앞에 깔아놓은 설정들이 하나씩 하나씩 정체를 드러내면서 책읽기에 탄력이 붙기 시작합니다. 2/3쯤 되면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되고, 마지막 몇 챕터에서는 빙긋 웃음까지 나올 정도로 제프리 디버의 트릭에 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시원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

사건과 인물의 실체를 시간의 역순에 따라 배열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서술에 비해 몇 배의 노력과 치밀한 구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 모든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지레 걱정했던 독자들은 그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짜릿함과 함께 제프리 디버의 진면목을 맛보게 됩니다.

 

작업실에 있는 모든 포스트잇을 이용하여 스토리를 완성했다.”는 제프리 디버의 고백을 보고 사방의 벽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으로 가득 채워졌을 작업실이 연상됐습니다. 얼마나 많은 포스트잇을 떼었다, 붙였다 반복했을까? 휴지통을 꽉꽉 채울 만큼 버려진 포스트잇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몇 번씩이나 이리저리 옮겨 붙여지던 포스트잇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완벽하게 시간의 역순에 따라 배열됐음을 발견했을 때의 제프리 디버의 쾌감은 어땠을까? 등등 설계자제프리 디버의 고뇌로 가득 찬 모습까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번역자는 두 번째 읽을 때는 뒤부터, 즉 챕터 1부터 읽어볼 것을 권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옥토버 리스트는 몇 번을 읽더라도 챕터 36부터 거꾸로 읽어야 깊은 맛과 지적 쾌감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웬만해선 출판사의 소개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까칠한 독자지만, 이번만큼은 눈에 띄는 두 줄의 홍보 카피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을 믿지 마라, 정보를 속단하지 마라, 인물에 공감하지 마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당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이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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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0일생 소설NEW 1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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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모임 때문에 고향인 J시를 찾은 현재는 한때 불륜관계였던 혜린과 우연히 만납니다. 그런데 1주일 후 혜린이 살해당하고, 현재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가까스로 혐의를 벗지만 현재는 연고도 없는 J시에서의 혜린의 행적이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살해당하기 직전 혜린이 만났던 한 여인을 시작으로 현재는 혜린의 동선을 하나씩 되밟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혜린이 J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윤조는 J시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내를 방치한 채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희대의 바람둥이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혜린이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지난 60여 년간 봉인되어 온 비밀들을 하나둘씩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혜린의 죽음이 그 비밀들을 푸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230일이라는, 존재할 수 없는 날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에서 출발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펼쳐놓은 서사의 폭은 60여 년이라는 시간만큼 깊고 방대합니다. 전쟁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추악하지만 절실했던 욕망을 뿌리삼아 작가는 권력, 이기심, 탐욕, 성욕, 살인, 시기, 질투, 치정(癡情) 등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본능들을 민낯 그대로 내보입니다.

 

그 중심에는 정윤조-정태훈-정현재로 이어지는 3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정윤조는 칠순에 이르러서도 남의 여자를 넘보던 희대의 바람둥이였고, 아버지 정태훈은 처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이력이 있습니다. 아들 정현재는 임신한 아내를 둔 채 함께 일하던 혜린과 몸을 섞었고, 아내는 뱃속의 아기를 지키면서 정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3대가 공유한 불륜과 치정의 유전자는 60여 년에 걸친 비극의 이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저 한 쌍의 남녀가 금지된 영역에서 쾌락을 맛보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거나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60여 년에 걸친 현대사의 비극불륜과 치정이라니, 물과 기름 같기도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이러니한 조합이 아닐 수 없지만, 작가는 생생한 캐릭터, 적절히 배치된 사건, 베일에 싸인 과거사를 정교하게 구성함으로써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이끌어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은 기억과거에 관한 것인데, 혜린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현재는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덕분에 혜린이 살해된 시점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고, 어쩌면 정말 자신이 혜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동시에 현재는 혜린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만난 사람들에게 길게는 60년부터 짧게는 20년 전의 일들을 기억해내라고 다그칩니다. 사라진 자신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기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폭주하는 현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캐릭터들의 이름을 통해 묘사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현재에 충실히 살라는 의미로 현재’, 여동생에게는 항상 앞을 생각하라는 의미로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어디선가 과거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억과거를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사건이나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는데, 독자에 따라 작위적이라 여길 수도 있고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 매력적인 설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는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일어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아주 잘 뽑힌 한 줄의 카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벗길수록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현재의 진실들과 고구마 줄기처럼 아무리 뽑아내도 끝없이 뽑혀 나오는 과거의 진실들, 그리고 그에 발맞춰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역겹거나 안타까운 죽음들이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차 없이 직조된 덕에 하루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김서진의 첫 작품인 선량한 시민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두 번째 작품인 ‘230일생을 읽고 나니 첫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한 서사를 꼼꼼하고 빈틈없이 요리한 필력으로 미뤄볼 때 그녀의 첫 작품 역시 큰 기대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후기 중 이 작품의 작의를 압축한 부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뻔뻔함과 노골적인 욕망을 지닌 지독한 악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면서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인물을... 동시에 우리 시대의 분위기, 핵심을 드러낼 수 있는, 또 그를 통해 현대사 60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욕망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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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 -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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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짧게는 2, 길게는 20년 간 실종됐던 사람들이 돌연 나타나 살인을 저지릅니다. 처형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살해한 뒤 다음에 벌어질 살인사건의 단서를 현장에 남겨놓고 사라집니다.

7년 전 속삭이는 자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에 실종전담반에 머물며 사건현장과 담을 쌓고 살아온 밀라 바스케스는 처음엔 상부의 수사참여 지시를 거부하지만 범인=실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어쩔 수 없이 7년 만에 피로 범벅이 된 사건현장을 찾습니다.

인류학에 빠져 현장형사 대신 취조전문가가 된 사이먼 베리쉬와 콤비플레이를 펼치며 밀라는 실종자들이 나타나 벌이는 기이한 살인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그들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고 특정한 약을 복용했으며 납치나 유괴가 아닌 명백히 자발적인 형태로 종적을 감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밀라는 잊고 싶은 7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속삭이는 자가 남긴 공포가 또다시 그녀의 삶 속에 침투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결국 밀라와 베리쉬가 밝혀낸 사건의 진상은 그녀의 불길한 예감을 한참 뛰어넘어 치명적이고 잔인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실종됐던 사람들이 나타나 돌연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실종된 소녀들의 신체 일부가 발견된다는 속삭이는 자의 설정만큼이나 독특했고, 스스로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살인을 벌이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호기심을 자아내면서 초반부터 몰입도를 끌어올립니다.

 

사이먼 베리쉬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파트너가 다방면에서 적잖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존재감은 원톱 주인공 밀라 바스케스의 캐릭터 - 그녀의 상처와 트라우마, 그녀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녀의 연약한 가족과 암울한 미래 - 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7년 전 속삭이는 자사건의 파생물들입니다. 그것은 후유증이나 트라우마라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감당 못할 만큼 크고 거대했고, 밀라의 몸과 마음에 너무 깊이 새겨진 탓에 이젠 화석처럼 굳어져 그녀의 일부가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 이후 밀라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공감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있어.”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밤낮으로 듣게 됐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기억을 통증으로라도 잊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칼을 대기 시작했으며, 그런 자신의 삶이 전염이라도 될까 두려워 6살 된 딸 앨리스를 곁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속삭이는 자사건의 파생물들 가운데 밀라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둠입니다. 어둠과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어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것은 자만이나 만용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사를 헤매던 전쟁의 생존자가 또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당초 수사에 참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세 차례나 거부한 것은 피로 범벅된 현장은 결국 자신에게 치명적인 인력(引力)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밀라의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호불호는 다양하게 갈릴 것입니다. 작위적인 냄새가 너무 강하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면 충분히 존재할 법한 캐릭터라는 의견도 있을 것입니다. 밀라를 파괴한 주범이자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 속삭이는 자이름 없는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픽션이라도 그게 가능하냐?”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밀라에 대해서도, ‘속삭이는 자이름 없는 자에 대해서도 반반 정도인데, 그래도 큰 거부감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도나토 카리시가 짜놓은 개연성 있는 사건들과 사실감 있는 조연들 덕분이었습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의 부제를 왜 밀라 바스케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니라 속삭이는 자 : 두 번째 이야기라고 붙였는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준 마지막 페이지의 단 몇 줄의 문장은 궁금함이 해소됐다는 시원함보다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서늘함만 잔뜩 남겨줬습니다. 그래선지 다 읽은 후에 오히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실제 그런 문구는 없었지만 제 눈에는 ‘To be continued’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전작에 이어 또다시 전대미문의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공을 세우긴 했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트라우마 덩어리인 밀라의 불행은 이번에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작가는 밀라와 그녀의 딸 앨리스에게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빠르고 변화무쌍한데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게 설정돼서 자칫 잘못 언급했다간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더 이상 구체적인 소개는 어렵지만, 그런 만큼 가능하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서평은 작품을 먼저 읽은 후에 찾아볼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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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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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었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프릭스가 직설적이고 정직한 호러물이라면, ‘안구기담에 실린 7편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공포, 탐미적인 기담, 꿈속의 호러 등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정서들이 한데 뒤섞여있어서 오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안구기담의 한자 표기를 ’(기이할 기)가 아니라 ’(비단 기)로 삼은 것도, 또 출판사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표지를 선정한 것도 아마 수록작들이 지닌 이런 특이한 뉘앙스를 반영한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훼손된 부분이 고스란히 재생되는 저주받은 육체를 소재로 한 재생’, 희귀한 물고기가 전혀 다른 종의 생물로 변태하는 이야기를 그린 요부코 연못의 괴어’, 온갖 혐오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진 끔찍한 음식 이야기 특별 요리’,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살해와 피살의 기억을 다룬 몽환적 이야기 생일 선물’,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면서도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철교’, 우연히 주운 인형 때문에 존재 자체를 위협당하는 소설가의 이야기 인형’, 그리고 피살자의 안구를 파간 기이한 연쇄살인범의 사연과 오묘한 빛깔의 안구를 지닌 여자들의 이야기가 혼재된 안구기담등 평범한 상상력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로테스크, 오컬트, 환상, 탐미, 광기라고 간결하게 정리한 번역자의 후기에도 공감이 갔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나 방화 등 극단적인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악마파의 정서가 이 작품집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에 드러난 극단적인 공포심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아름다운 모델을 절벽 끝에 매달아놓곤 추락하는 순간까지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하며 미친 듯이 손을 놀리던 화가의 광기랄까요? 특히 재생’, ‘특별 요리’, ‘생일 선물’, ‘안구기담은 악마파 화가의 광기를 능가하는, 아름답지만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아야츠지 유키토만의 스케치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든 작품마다 사키타니 유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훼손된 신체가 재생되는 저주받은 몸의 여대생(재생), 모든 메뉴가 혐오음식으로 가득 찬 특별 요리 전문점 ‘YUI’의 여주인(특별 요리), 페티나이프, 살인, 토막 난 시체의 판타지로 둘러싸인 여대생(생일 선물), 태어나면서 두 눈이 없었던 불행한 운명의 소녀(안구기담) 사키타니 유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 또는 조연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처음엔 그저 형식적인 재미를 위해서 이런 설정을 했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뭐라 표현하기 힘든 서늘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단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호러의 한복판에 놓인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할까요?

 

그에 반해 사키타니 유이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대학 조교수, 대학 비상근 강사, 대학 문학부 연구원, 요양이 필요한 소설가 등 대체로 얌전하거나 어딘가 무력해 보이지만 은밀한 일탈을 꿈꾸는 캐릭터로 포장돼있어서 사키타니 유이와 극적으로 대비되곤 합니다. 그들은 사키타니 유이가 제공하는 공포와 환상의 수혜자또는 피정복자이면서 동시에 1인칭 화자로 역할하고 있어서 마치 독자의 대리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안구기담은 단지 무서움이나 괴이함뿐 아니라 동정심, 공감, 따라해 보고 싶은 모방의 욕구 등 다양한 여운을 함께 전해줘서 프릭스와는 또 다른 종류의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상물로 만들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들 정도로 시각적 재미도 갖추고 있어서 보는 내내 눈앞에서 장면들이 펼쳐지는 짜릿함을 기대해도 괜찮은 작품입니다. 가령, 성장과정이 고속 촬영된 식물처럼 훼손된 신체가 삐죽삐죽 자라나고, 튀기고 조린 바퀴벌레나 소의 고환과 음경이 탐식가의 입으로 흘러들어가고, 연쇄살인범이 파낸 안구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라면 호러 마니아들에게는 군침이 돌 정도로 매력적인 영상이 아닐까요?

 

사족이지만, 수록작 가운데 특별 요리는 식사 전후에 읽으면 난감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비위가 약한 분은 반드시 만반의 준비를 하시거나 공복 상태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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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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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카이도 동부 구시로 외곽의 습지 일대에서 30년을 버텨온 호텔 로열의 일대기와 함께 호텔 로열을 세우고, 드나들고, 지키고, 끝내 문을 닫아야 했던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일곱 편의 연작 단편에 실려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진 않았지만, 첫 에피소드 셔터 찬스가 이미 오래 전 폐허가 된 호텔 로열을 무대로 삼고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 선물이 호텔 로열을 세우기로 결심한 창업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호텔 로열의 과거를 향해 조금씩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나이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여인과 함께 호텔 로열을 세운 다이키치, 제대로 된 부부 침실 하나 없는 가난한 삶 속에서 가족마저 해체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가 우연히 들른 호텔 로열에서 쾌락과 희망을 얻은 메구미-신이치 부부, 호텔 로열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난한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미코, 호텔 로열 창업자 다이키치의 딸이면서 자신의 손으로 호텔의 문을 닫게 된 마사요, 폐허가 된 호텔 로열에서 누드 사진을 찍는 연인 다카시와 미유키 등 일곱 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하나같이 눈물겹거나 애틋하거나 아니면 따뜻하거나 서늘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인적 드문 습지에 자리 잡은 러브호텔이라는 무대는 그곳을 세우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물론 짧게는 2시간, 기껏해야 며칠 동안 그곳을 스쳐갔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드라마틱한 공간입니다. 그곳은 공허한 원나잇 스탠드나 아슬아슬한 불륜 등 다양한 형태의 애증이 공존하는 곳이며, 밤낮으로 타인들의 정사의 잔재를 쓸고 닦아야 하는 고된 노동을 감수하는 사람부터 삶의 막장에 이르러 도피를 위해 숨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몰락 끝에 폐허에 이른 호텔 로열을 닮은, 즉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지금 겪고 있는 곤란에서 쉽게 헤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소외감, 그리고 결국 습지 같은 현실에 항복한 채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열패감 등입니다. 때로 꿈이나 희망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밝은 미래를 담보하진 못합니다. 책 소개글에선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결핍이라고 칭했는데, 간결하지만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런 극적인 무대와 캐릭터들을 일곱 개의 이야기 속에 과장하지도, 억지로 꾸미지도 않은 채 잘 조합해냈고 그 결과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한숨을 자아내게 만들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흔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담담함과 처연함이 149회 나오키상 수상의 동력이 됐으리라 여겨집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자신이 홋카이도 구시로에서 태어났으며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가 '호텔 로열'이란 러브호텔을 경영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성장한 것은 물론 객실청소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소녀 시절의 작가의 눈에 비쳤던 인물들을 모델로 삼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록된 작품마다 제각각 다채로운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딱히 어느 작품이 더 재미있거나 인상적이라고 꼽긴 어렵지만, 창업주의 딸 마사요가 호텔 로열의 문을 닫는 날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린 쎅꾼과 호텔 로열에서의 거품 목욕을 잊지 못하는, 삶에 찌든 중년 여인의 사연을 담은 거품 목욕’, 그리고 호텔 로열 창업자의 유골 공양을 맡은 주지승 아내의 기구한 삶을 그린 금일 개업이 개인적으로 호감이 많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

기억에 오래 남을 또 한 권의 연작 단편집을 만나 볼 수 있어서 반가웠고, 사쿠라기 시노라는 빼어난 작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더욱 더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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