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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먼저 읽었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프릭스’가 직설적이고 정직한 호러물이라면, ‘안구기담’에 실린 7편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공포, 탐미적인 기담, 꿈속의 호러 등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정서들이 한데 뒤섞여있어서 오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안구기담’의 한자 표기를 ‘奇’(기이할 기)가 아니라 ‘綺’(비단 기)로 삼은 것도, 또 출판사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표지를 선정한 것도 아마 수록작들이 지닌 이런 특이한 뉘앙스를 반영한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훼손된 부분이 고스란히 재생되는 저주받은 육체를 소재로 한 ‘재생’, 희귀한 물고기가 전혀 다른 종의 생물로 변태하는 이야기를 그린 ‘요부코 연못의 괴어’, 온갖 혐오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진 끔찍한 음식 이야기 ‘특별 요리’,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살해와 피살의 기억을 다룬 몽환적 이야기 ‘생일 선물’,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면서도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철교’, 우연히 주운 인형 때문에 존재 자체를 위협당하는 소설가의 이야기 ‘인형’, 그리고 피살자의 안구를 파간 기이한 연쇄살인범의 사연과 오묘한 빛깔의 안구를 지닌 여자들의 이야기가 혼재된 ‘안구기담’ 등 평범한 상상력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로테스크, 오컬트, 환상, 탐미, 광기’라고 간결하게 정리한 번역자의 후기에도 공감이 갔지만, 개인적으로는 미(美)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나 방화 등 극단적인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악마파의 정서가 이 작품집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에 드러난 극단적인 공포심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아름다운 모델을 절벽 끝에 매달아놓곤 추락하는 순간까지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하며 미친 듯이 손을 놀리던 화가의 광기랄까요? 특히 ‘재생’, ‘특별 요리’, ‘생일 선물’, ‘안구기담’은 악마파 화가의 광기를 능가하는, 아름답지만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아야츠지 유키토만의 ‘스케치’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든 작품마다 ‘사키타니 유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훼손된 신체가 재생되는 저주받은 몸의 여대생(재생), 모든 메뉴가 혐오음식으로 가득 찬 특별 요리 전문점 ‘YUI’의 여주인(특별 요리), 페티나이프, 살인, 토막 난 시체의 판타지로 둘러싸인 여대생(생일 선물), 태어나면서 두 눈이 없었던 불행한 운명의 소녀(안구기담) 등 ‘사키타니 유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 또는 조연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처음엔 그저 형식적인 재미를 위해서 이런 설정을 했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뭐라 표현하기 힘든 서늘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단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호러의 한복판에 놓인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할까요?
그에 반해 사키타니 유이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대학 조교수, 대학 비상근 강사, 대학 문학부 연구원, 요양이 필요한 소설가 등 대체로 얌전하거나 어딘가 무력해 보이지만 은밀한 일탈을 꿈꾸는 캐릭터로 포장돼있어서 사키타니 유이와 극적으로 대비되곤 합니다. 그들은 사키타니 유이가 제공하는 공포와 환상의 ‘수혜자’ 또는 ‘피정복자’이면서 동시에 1인칭 화자로 역할하고 있어서 마치 독자의 대리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안구기담’은 단지 무서움이나 괴이함뿐 아니라 동정심, 공감, 따라해 보고 싶은 모방의 욕구 등 다양한 여운을 함께 전해줘서 ‘프릭스’와는 또 다른 종류의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상물로 만들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들 정도로 시각적 재미도 갖추고 있어서 보는 내내 눈앞에서 장면들이 펼쳐지는 짜릿함을 기대해도 괜찮은 작품입니다. 가령, 성장과정이 고속 촬영된 식물처럼 훼손된 신체가 삐죽삐죽 자라나고, 튀기고 조린 바퀴벌레나 소의 고환과 음경이 탐식가의 입으로 흘러들어가고, 연쇄살인범이 파낸 안구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라면 호러 마니아들에게는 군침이 돌 정도로 매력적인 영상이 아닐까요?
사족이지만, 수록작 가운데 ‘특별 요리’는 식사 전후에 읽으면 난감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비위가 약한 분은 반드시 만반의 준비를 하시거나 공복 상태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