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수호자 바스탄 3부작 1
돌로레스 레돈도 지음, 남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화와 전설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스페인 북부 소도시 엘리손도의 바스탄 숲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10대 소녀들이 발견됩니다. 아마이아 살라사르는 수사 책임자로 임명받곤 두 언니 부부가 살고 있는 고향 엘리손도를 찾습니다. 아마이아는 과학수사팀의 도움과 탐문을 통해 범인의 동기를 어느 정도 추정하지만 더 이상 큰 진척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건 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아마이아의 심신은 갈수록 피폐해집니다. 늘 빈정대는 큰언니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작은언니와의 갈등, 그녀들로 인해 떠오르는 유년기의 끔찍한 트라우마, 연쇄살인사건을 전설 속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고 믿는 엘리손도 주민들의 불온한 분위기, 그리고 여자 수사반장을 못마땅해 하는 남자 형사들의 노골적인 반기 등이 그 요인들입니다.

지지부진하던 수사가 돌파구를 마련하고 사건의 진상이 그 윤곽을 드러내지만, 그 순간 아마이아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범인의 일그러진 욕망과 비뚤어진 신념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트라우마의 조각들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애초 자신이 이 사건을 맡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장난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과학과 이성, 신화와 전설, 역사와 인류사, 그리고 비극적인 가족사와 참혹한 연쇄살인 등 한 그릇에 버무리기 힘든 코드들이 혼재해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신화와 전설이 여전히 일상 속에 잠재해있고 원시성이 살아있는 자연을 품고 있는 소도시 엘리손도는 이런 혼재된 코드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작가는 아마이아의 입을 빌어 엘리손도 구석구석을 문화유산 답사기만큼 상세히 묘사합니다. 더불어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엘리손도의 역사와 여성들의 수난사를 언급하는가 하면, 신화와 전설에 관해서도 장문에 걸쳐 전문서적 수준의 설명을 곁들입니다.

 

이런 몽환적인 배경 속에서 너무나도 현실적인연쇄살인이 벌어졌을 때 전설 속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아마이아는 과학과 이성에 입각한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녀 역시 엘리손도의 딸인지라 때로는 꿈과 환영을 통해 암시를 받기도 하고 타로 카드의 주술적 힘에 기대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극심한 갈등 상대인 언니들로 인해 유년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면서 수사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아마이아의 정신은 극도의 혼란에 빠집니다. 동료라기보다 마초라 불러 마땅한 남자들의 비열한 행태도 그 혼란에 한몫을 거듭니다. FBI와 함께 콴티코에서 교육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여형사지만 아마이아의 능력치는 여러 방해꾼들의 훼방으로 인해 바닥까지 추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자신을 방해했던 모든 요인들 - 사람, 자연, 신화, 전설 - 이 실은 연쇄살인사건의 진상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음을 깨닫자 그녀의 억눌렸던 잠재의식과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고 맙니다.

 

방대한 서사와 인물들, 그리고 독특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조합에 대해 유럽의 출판사들은 물론 많은 독자들이 서평을 통해 호감을 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적잖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들을 통해 거꾸로 설명해 보면...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소설 (출판사 리뷰)

-경찰 수사와 인류학적 상상력을 통합시킨... (스페인 Erein 출판사)

-서스펜스와 신화, 가족사가 절묘하게 결합된 (스페인 Columna 출판사)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범죄는 부차적인 것... (저자 인터뷰)

 

장르문학, 순문학, 인류학적 상상력, 서스펜스, 신화, 가족사 등 섞이기 힘든 다양한 코드들의 조합이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적인 기품을 끌어올린 것이 사실이더라도 엘리손도의 역사와 인류학적 유산에 대한 과도한 설명은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견디기 힘든 고문(?) 같았습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대목이란 점은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림잡아 1/3(혹은 그 이상) 정도의 분량을 할애한 탓에 지금 내가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수시로 들었습니다. 살라사르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와 자매들 간의 전쟁에 버금가는 갈등 역시 과유불급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지나쳤습니다.

물론 이 모든 코드들이 연쇄살인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긴 하지만, 제 경우엔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서 연쇄살인사건의 무게감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범인에 대한 궁금증은 희석됐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의 존재감도 희미하게만 느꼈을 뿐입니다. 그래선지 아마이아를 놓고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 클라리스 스털링에 비견된다.”는 표현은 적어도 이 한 작품만으로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화제가 됐고 영화화까지 결정된 바스탄 3부작의 첫 편이라는 외형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되진 못했지만, 남은 두 편의 작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의 욕심이 조금만 덜어진다면, 그리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가 활약하는 스릴러로서의 존재감을 되찾는다면 외형만큼이나 알차고 재미있는 책읽기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십이국기는 소문은 숱하게 들었지만 워낙 방대한 양(첫 출간 때 11권까지 나왔습니다)인데다 신화적인 요소를 강하게 풍기는 것 같아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 사전 서평단에 뽑혀 10여년 만에 나온 개정판 가운데 첫 편의 가제본을 읽게 됐습니다.

첫 출간 때 두 권으로 분권됐던 1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를 한 권으로 묶었는데, 거의 한 호흡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하면서 왜 십이국기가 화제의 작품이 되었는지,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수많은 오타쿠를 양산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16세 여고생 나카지마 요코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기이한 모습의 게이키에 의해 허해(虛海)를 건너는 식()을 통해 교국(巧國)이라는 낯선 세상으로 옮겨집니다. 흉사를 몰고 온 해객(海客)으로 낙인 찍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요코는 겨우 감금을 풀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자신을 데리고 온 게이키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가진 것이라곤 그가 건네준 검 한 자루 뿐인 신세가 됩니다. 이후 밤마다 끔찍한 요마들의 습격을 받으며 게이키 찾기에 나선 요코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이곳이 십이국 중 한 나라인 교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쥐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 라쿠슌을 만나면서 요코의 여정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해객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안국(雁國)으로 함께 길을 가던 중 라쿠슌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왜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은 요코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안국의 왕 연을 만나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을 확인한 요코는 오랜 고민 끝에 내전과 혼란으로 가득 찬 십이국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다른 차원의 세상이 등장하는 장면은 물론 요코가 요마(妖魔), 선인(仙人), 환영(幻影), 반인반수(半人半獸) 등과 마주치는 장면들을 보곤 조금은 당혹스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판타지 설정에 대한 이런저런 편견과 어색함은 요코가 점차 십이국이라는 새 세상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감에 따라 금세 잊을 수 있었고, 이내 과연 요코는 집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든가, ‘요코가 십이국의 세계로 끌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요코를 십이국으로 데려온 게이키와 요마들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에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대서사의 첫 편이다 보니 십이국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가 쏟아집니다. 십이국의 탄생 신화에서부터 하늘과 각국의 왕, 그리고 왕을 보필하는 기린(麒麟), 또 이형의 짐승에서부터 빙의가 가능한 요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소개되고, 현재 십이국의 각각의 상황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작품의 이해를 위해 세세한 정보까지 머릿속에 입력하다 보면 한없이 골치 아프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노 후유미가 이 복잡하고 방대한 설정들을 구상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공 들였을지 상상해보면 저절로 경외감이 들기도 합니다.

 

사건의 전개만 따지면 의외로 줄거리는 심플합니다. 십이국이라는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된 요코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그 출발점까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공황에 가까운 심리적 갈등을 통해 요코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작품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어서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감을 높여줍니다. ‘저쪽 세상의 가족과 친구들 속에서 무력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와 회한, 연이은 배신과 속임수를 통해 얻은 사람은 결국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서글픈 깨달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십이국의 미래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 등 낯선 세상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요코의 모습은 이 작품이 단순한 오락물 판타지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메시지가 담긴 의미 있는 서사임을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이것으로 요코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라는 본편의 마지막 문장을 본 순간 두 번째 이야기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렜습니다. 인터넷서점과 블로그에서 여러 서평과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후속작들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진 십이국기에 대한 그 어떤 사소하고 작은 정보도 외면하기로 했습니다. 오노 후유미의 거대한 서사를 만끽하는 재미를 스포일러로 망치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십이국기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검색해본 자료가 하나 있는데, 작품 속 묘사만으로는 잘 연상되지 않아 너무 궁금한 나머지 이리저리 검색하다 찾아낸 십이국의 지도입니다. (정식 출간본에는 이 지도가 들어있는 것 같은데, 가제본에는 없었습니다) 꽃잎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지만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십이국의 지도를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읽은 뒤 작가 안치우의 이력이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2010년에 출간된 ‘ZA 문학공모전 수상작품집에 실린 도도 사피엔스한 편이 전부였습니다. 단편 한 편이 경력의 전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치우는 재림에서 뛰어난 필력과 캐릭터 플레이를 선보였는데, 앞으로 주목해야 할 또 한 명의 우리 장르물 작가를 만났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변호사지만 오래 전부터 키워온 탐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민간조사원으로 나선 독고잉걸,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탐정의 길을 걷게 된 미학 전공 시간강사 강승주, 180cm의 키에 가공할 무력과 뛰어난 추리력과 해커의 능력까지 겸비한 홍일점 권민, 그리고 전직 경찰로 거미줄 같은 정보원을 확보한 사무장 등 네 명의 괴짜가 재림의 주인공들입니다.

독고잉걸(독 소장)과 강승주가 사건 현장에서조차 한시도 수다를 그칠 줄 모르는, 그것도 수시로 샛길로 빠져 사건과는 무관한 엉뚱한 논쟁을 펼치는 만담 캐릭터인 반면, 권민은 여자이면서도 무채색처럼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를 지닌 데다 그마저도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묵직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을 섞어놓은 것처럼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독 소장의 멤버들은 사립탐정이 허용되지 않는 한국에서 민간조사원이라는 애매한 타이틀밖에 지닐 수 없었지만 그 열정만큼은 ‘CSI’크리미널 마인드의 멤버들 못잖게 뜨겁습니다.


 

표제작인 재림과 프리퀄인 만남 그리고 시작등 두 편의 중편으로 구성됐는데, ‘재림이 종교의 광기가 불러온 끔찍한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는 반면, ‘만남 그리고 시작은 영국에서 벌어진 여대생 실종사건 수사를 통해 독 소장과 강승주, 그리고 권민이 한 팀이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두 사건 모두 결정적인 키 플레이어는 하드보일드 여탐정 권민의 몫이었지만, 엉뚱한 발상과 예리한 관찰력을 자랑하는 독 소장과 강승주의 콤비 플레이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두 콤비를 지켜보고 있으면 미드 ‘NCIS’의 바람둥이 수다꾼 토니 디노조가 생각나는데,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는 잔혹한 이야기에 만담 스타일 유머를 가미함으로써 책읽기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다만,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동원한 점(가령, ‘재림에서 기독교 내부의 논쟁과 교리를 여러 장에 걸쳐 강의하듯 서술한 것)은 눈에 거슬렸고,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각인시키기 위해 동원된 약간은 썰렁하거나 작위적인 에피소드들은 동어반복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가끔씩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현학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곤 했는데, 작가의 필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오히려 이야기의 균형감을 잃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이 작품이 지닌 장점과 미덕에 비하면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할 뿐입니다. 매력적인 시리즈의 첫 편을 본 듯한 흐뭇함 때문에 이 이질적인 멤버들의 좌충우돌 해프닝과 환상적인 팀워크가 단발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시리즈로 이어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까지 갖게 됐습니다. 재차 언급하지만, 다음 행보를 눈여겨봐야 할 새로운 우리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심증후군
제스 로덴버그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순간 나는 죽었어.”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당연히 애틋하고 마음 아픈 청춘 로맨스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열여섯의 나이로 죽었어.”라는 문장이 눈에 훅 들어왔고, 얼마 후 남자친구 제이컵으로부터 난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주인공 브리가 정말로심장이 부서져 죽는 장면까지 나오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브리가 저승의 피자집 천국의 한 조각에서 만난 패트릭의 도움을 받아 유령의 몸으로 이승으로 내려온 이후 벌어지는 뜻밖의 이야기 전개는 도대체 이건 무슨 장르?’라는 호기심과 의아함을 자아냈습니다.


 

상심증후군은 두 가지 테마를 축으로 펼쳐집니다. 16살 청춘들이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첫사랑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동시에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비밀과 거짓말, 복수와 화해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됩니다.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판타지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사랑과 영혼10대 버전일 것이라는 예단은 금물입니다. 유령의 몸으로 이승에 내려온 브리의 눈에 비친 사랑하던 사람들의 배신, 저승의 로맨스를 이룰 것만 같던 브리와 패트릭 사이의 첨예한 갈등, 어둡고 악마적인 샌프란시스코의 야경 속에 숨은 끔찍한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 ‘죽은 자가 영원히 죽게 되는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브리와 패트릭의 사투, 그리고 그동안 무작정 브리를 돕던 패트릭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 등에서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에 거듭 놀라며 예측불허의 전개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Catastrophic History of You and Me’, ‘대재앙의, 파멸의, 비극적인, 파국적인이라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지닌 중의적인 의미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달달한 표지에서 예감할 수 있듯 이야기는 나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종착점에 도착하기 위해 브리와 패트릭이 겪은 수많은 굴곡들은 브리의 심장이 두 동강 난 일부터 시작하여 말 그대로 재앙, 파멸, 비극, 파국으로 가득 차 있는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판타지 장르 혹은 사후 세계 이야기에 지독한 거부감을 품은 독자만 아니라면 누구나 브리와 패트릭의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지금 이별을 겪고 있는 독자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치료제 같은 소설이라는 번역자의 후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구한 날 피와 살이 튀는 장르물에 파묻혀 있다가 운 좋게 읽게 된 상심증후군은 초콜릿 한 조각을 혀에 올려놓은 것처럼 달달한 간식으로는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형사 슈투더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7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 박원영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사건이 일어난 게르첸슈타인은 스위스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입니다. 한 외판원이 숲에서 총에 맞은 채 발견됐고 용의자는 금세 체포됩니다. 용의자는 숱한 전과를 지닌 청년으로 돈 때문에 애인의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습니다. 하지만 슈투더는 사건 자체에 의문을 품고 피살자와 용의자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수사를 거듭할수록 슈튜더는 외판원의 죽음이 보험금을 노린 자살이 아닐까 의심하지만, 좁은 공동체 사회의 폐쇄성은 도시에서 온 형사를 무시하거나 비아냥댔고, 외판원의 가족조차 수사에 비협조적인 탓에 슈투더는 곤란한 상황에 빠집니다. 하지만 나이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집요하게 단서들을 찾아가던 슈투더는 결정적인 물증과 진술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옵니다.

 

보기 드문 스위스 작가의, 그것도 1930년대에 출간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지만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밑바닥 계급으로 좌천된 뒤 일개 형사로서 사소한 사건들을 맡고 있는 슈투더가 주인공입니다. 콧수염을 기른 거구에 싸구려 시가를 즐기고, 적잖은 나이지만 여전히 의욕은 넘치는데다 전화와 급행우편 외엔 딱히 소통의 도구도 없던 1930년대의 형사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입니다.

 

형사 슈투더의 가장 큰 특징은 사건이 벌어진 공간이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폐쇄적인 공동체에 침입한 외부인은 환영받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살인사건처럼 폐쇄성을 더욱 옥죄는 요소가 등장하고, 그것을 수사하기 위해 외부인이 개입한 경우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본문 속의 표현처럼 도시의 살인사건 10건보다 시골의 살인사건 1건이 더 어려운데, 엉겅퀴처럼 엉긴 채 무엇이든 숨기고,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슨 짓을 저지르던 자신과 상관없으면 모른 체하기 일쑤인 주민들, 진상 따윈 고민하고 싶지 않은 예심판사, 시골마을의 하잘 것 없는 헤게모니를 놓고 다투는 유지들, 그리고 노래와 연설과 뉴스를 통해 주민들을 지배하는 스피커등 사건이 발생한 게르첸슈타인은 형사 슈투더에게는 최악의 공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슈투더는 집요하리만치 탐문에 탐문을 이어가고, 얼렁뚱땅 수사를 접으려는 수많은 방해꾼들을 극복해나갑니다.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전도유망한 젊은 형사보다는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반골 기질의 노형사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립니다. 귀차니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예심판사를 엿 먹여 수사를 재개하고, 보이지 않는 손처럼 마을을 지배하는 유지들을 어렵지 않게 코너까지 몰아붙입니다.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적절히 거리를 둔 밀고 당기기 식의 노회한 수사를 벌입니다. 이런 수사 덕분에 슈투더는 속도감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올바른 방향만은 놓치지 않습니다. 스위스에서 모두 다섯 권이 출간됐다는 슈투더 시리즈는 아마 이런 미덕을 기반으로 당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한 가지만 꼽자면 돌직구 스타일의 지나친 정직함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라고 할 수 있는데, 연이은 탐문과 단서의 발견, 누군가의 제보에 힘입은 비밀의 폭로 등 전형적인 공식에 입각한 전개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고 반전에 대한 기대감 역시 반감된 게 사실입니다. 사건이든 캐릭터든 구성이든 하나쯤은 특이하거나 뚜렷한 개성이 있어야 주목받을 수 있는 요즘의 장르물 경향으로 볼 때 슈투더의 정직함이나 모범생 같은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입니다.

 

독일어권 미스터리 문학의 선구자이며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고, 최고의 독일어권 미스터리 작가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을 보면 프리드리히 글라우저의 슈투더 시리즈가 분명 권위 있고 매력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후 그의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관심 있게 지켜보겠지만, 다음에는 첫 편의 정직함을 극복한, 조금은 더 쫄깃쫄깃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