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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수호자 ㅣ 바스탄 3부작 1
돌로레스 레돈도 지음, 남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10월
평점 :
신화와 전설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스페인 북부 소도시 엘리손도의 바스탄 숲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10대 소녀들이 발견됩니다. 아마이아 살라사르는 수사 책임자로 임명받곤 두 언니 부부가 살고 있는 고향 엘리손도를 찾습니다. 아마이아는 과학수사팀의 도움과 탐문을 통해 범인의 동기를 어느 정도 추정하지만 더 이상 큰 진척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건 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아마이아의 심신은 갈수록 피폐해집니다. 늘 빈정대는 큰언니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작은언니와의 갈등, 그녀들로 인해 떠오르는 유년기의 끔찍한 트라우마, 연쇄살인사건을 전설 속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고 믿는 엘리손도 주민들의 불온한 분위기, 그리고 여자 수사반장을 못마땅해 하는 남자 형사들의 노골적인 반기 등이 그 요인들입니다.
지지부진하던 수사가 돌파구를 마련하고 사건의 진상이 그 윤곽을 드러내지만, 그 순간 아마이아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범인의 일그러진 욕망과 비뚤어진 신념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트라우마의 조각들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애초 자신이 이 사건을 맡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장난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과학과 이성, 신화와 전설, 역사와 인류사, 그리고 비극적인 가족사와 참혹한 연쇄살인 등 한 그릇에 버무리기 힘든 코드들이 혼재해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신화와 전설이 여전히 일상 속에 잠재해있고 원시성이 살아있는 자연을 품고 있는 소도시 엘리손도는 이런 혼재된 코드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작가는 아마이아의 입을 빌어 엘리손도 구석구석을 ‘문화유산 답사기’만큼 상세히 묘사합니다. 더불어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엘리손도의 역사와 여성들의 수난사를 언급하는가 하면, 신화와 전설에 관해서도 장문에 걸쳐 전문서적 수준의 설명을 곁들입니다.
이런 몽환적인 배경 속에서 ‘너무나도 현실적인’ 연쇄살인이 벌어졌을 때 전설 속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아마이아는 과학과 이성에 입각한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녀 역시 엘리손도의 딸인지라 때로는 꿈과 환영을 통해 암시를 받기도 하고 타로 카드의 주술적 힘에 기대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극심한 갈등 상대인 언니들로 인해 유년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면서 수사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아마이아의 정신은 극도의 혼란에 빠집니다. 동료라기보다 마초라 불러 마땅한 남자들의 비열한 행태도 그 혼란에 한몫을 거듭니다. FBI와 함께 콴티코에서 교육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여형사지만 아마이아의 능력치는 여러 방해꾼들의 훼방으로 인해 바닥까지 추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자신을 방해했던 모든 요인들 - 사람, 자연, 신화, 전설 - 이 실은 연쇄살인사건의 진상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음을 깨닫자 그녀의 억눌렸던 잠재의식과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고 맙니다.
방대한 서사와 인물들, 그리고 독특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조합에 대해 유럽의 출판사들은 물론 많은 독자들이 서평을 통해 호감을 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적잖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들을 통해 거꾸로 설명해 보면...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소설 (출판사 리뷰)
-경찰 수사와 인류학적 상상력을 통합시킨... (스페인 Erein 출판사)
-서스펜스와 신화, 가족사가 절묘하게 결합된 (스페인 Columna 출판사)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범죄는 부차적인 것... (저자 인터뷰)
장르문학, 순문학, 인류학적 상상력, 서스펜스, 신화, 가족사 등 섞이기 힘든 다양한 코드들의 조합이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적인 기품을 끌어올린 것이 사실이더라도 엘리손도의 역사와 인류학적 유산에 대한 과도한 설명은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견디기 힘든 고문(?) 같았습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대목이란 점은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림잡아 1/3(혹은 그 이상) 정도의 분량을 할애한 탓에 “지금 내가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수시로 들었습니다. 살라사르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와 자매들 간의 전쟁에 버금가는 갈등 역시 과유불급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지나쳤습니다.
물론 이 모든 코드들이 연쇄살인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긴 하지만, 제 경우엔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서 연쇄살인사건의 무게감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범인에 대한 궁금증은 희석됐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의 존재감도 희미하게만 느꼈을 뿐입니다. 그래선지 아마이아를 놓고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 클라리스 스털링에 비견된다.”는 표현은 적어도 이 한 작품만으로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화제가 됐고 영화화까지 결정된 ‘바스탄 3부작’의 첫 편이라는 외형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되진 못했지만, 남은 두 편의 작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의 ‘욕심’이 조금만 덜어진다면, 그리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가 활약하는 스릴러로서의 존재감을 되찾는다면 외형만큼이나 알차고 재미있는 책읽기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