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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개정판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오이 가든’으로부터 시작한 ‘편혜영 읽기’에 이어 비슷한 이유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한강의 작품을 출간순서대로 읽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한강 읽기’입니다. 한강의 첫 작품집 ‘여수의 사랑’은 1995년에 초판이 나왔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라면 작가가 조금씩 문장을 수정했다는 점(개정판 작가 후기 참조)과 초판에는 있던 단편 ‘저녁 빛’이 빠져서 6편의 작품만 수록됐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한강과 편혜영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끌림’입니다. 학창시절 이래로 이문열의 진지함과 묵직함, 신경숙-은희경의 애틋하거나 비틀어진 사랑, 김영하의 발칙함과 도발, 윤대녕의 아스라한 서정성에 차례로 이끌렸던 기호가 왜 느닷없이 ‘불편함’ 쪽으로 기울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변덕 외에는 딱히 댈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제목만으로도 눈길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일 때문에 짧은 출장으로 한번, 한때 빠졌던 바다낚시 때문에 두어 번 정도 가본 게 전부지만 여수는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초판이 출간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직접 만난 ‘여수의 사랑’은 기대했던 대로 무척이나 불편하고 아프고 뒤끝이 아린 작품이었습니다. 수록된 나머지 다섯 작품 역시 비슷한 정서와 모양새를 지닌 탓에 연이어 읽기가 부담스러웠고 결국 1주일에 한 편 꼴로 겨우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와 살은 젊지만 정신은 늙고 병들고 찌들어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년의 끔찍한 일들이 그들을 망가뜨리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은 후에 겪은 치 떨리는 일들이 원인일 때도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아프거나 타인을 아프게 하거나, 어딘가에서(누군가로부터) 도망치거나 어딘가로 무작정 향하거나, 그러다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아니면 포기해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여섯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설정 중 하나는 가족의 상실입니다. 부모에 의해 기차에 버려진 자흔, 아버지와 여동생의 자살을 겪은 정선(여수의 사랑), 아버지는 농약으로, 동생은 또래에게 맞아 죽은 인규(질주), 과속 차량에게 임신 5개월의 아내를 잃고 자신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명환(어둠의 사육제), 자신의 몫까지 우유 배달을 하다가 사고로 식물인간인 된 쌍둥이 동생을 둔 동걸(야간열차), 부모의 폭력과 냉담함 탓에 가출하면서 백치 여동생과 헤어져야 했던 정환, 아내와 아들이 가출하고 딸마저 심장병으로 떠난 뒤 저택에 홀로 남은 황씨(진달래 능선), 사람 좋은 딴따라로 살다가 술에 취해 죽은 아버지를 둔 동식과 동영 형제(붉은 닻) 등 하나같이 주인공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출발점을 가족의 상실로 설정했습니다.
이들 중엔 정신의 피폐함이 넘쳐흘러 기어이 몸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정선은 고질병인 위경련과 안두통 외에 치명적인 결벽증을 앓고 있고(여수의 사랑), 동걸은 수시로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는 이명에 시달리고(야간열차), 정환은 가짜 약임에 분명한 위장약을 몇 봉씩 한꺼번에 복용하기도 하며(진달래 능선), 동식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폭음과 폭연을 일삼다가 간 경변에 걸립니다.(붉은 닻)
그런가 하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또는 그동안 피해왔던 ‘어떤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구체적이고도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인물들도 있는데,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고향 여수를 향해 밤기차를 탄 정선(여수의 사랑), 식물인간이던 동생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야간열차를 타고 동해로 떠나는 동걸(야간열차), 이를 악 문 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끝없이 달리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규(질주), 지금까지의 삶과는 반대로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게 살기로 결심한 영진(어둠의 사육제), 그리고 자살을 통해 모든 것에게 종지부를 찍으려는 명환(어둠의 사육제)이 그들입니다.
여섯 작품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입니다. 가장 극적인 상황들은 모두 밤에 벌어지는데, 밤기차(여수의 사랑, 야간열차), 밤의 달리기(질주), 밤의 투신자살(어둠의 사육제), 밤의 나무 태우기(진달래 능선), 그리고 밤의 외출(붉은 닻)이 그것입니다. 밤과 새벽의 어둠은 인물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더욱 고립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포장합니다. 그래선지 여섯 작품의 비주얼은 대체로 흑백 영화나 변색된 컬러에 가깝습니다. 밤기차의 전등, 밤거리의 가로등, 밤의 아파트 불빛, 밤에 불타는 나뭇가지, 그리고 오롯이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어둠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요소들로, 등장인물에 동화되고 이입된 독자에게는 무척이나 서글픈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점심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서 인파 속에 휩쓸렸을 때 문득 ‘이들 중에도 정선이나 자흔, 동걸, 인규 같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한두 가지 정도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기억들을 봉인한 채 무의식 속에 처박아 뒀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독자 가운데 주인공들의 삶을 지켜보며 치유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새삼 봉인해놓았던 오래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 다시 한 번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수의 사랑’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한번쯤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또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을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