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즈 웨이워드파인즈 시리즈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변용란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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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부상과 함께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채 정신을 되찾은 에단 버크는 단편적인 단서들 덕분에 자신이 비밀수사국 특수요원이며, 실종된 동료들을 찾기 위해 소도시 웨이워드파인즈를 찾았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어렵게 찾아간 병원의 의사는 치료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고, 도움을 청한 보안관 역시 태만한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더구나 거리엔 차도 사람도 별로 없고, 집과 사무실은 도무지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 위화감으로 가득 찬 웨이워드파인즈를 벗어나려 하지만 그때부터 연이어 위기가 닥쳐옵니다. 탈출자를 향한 주민들의 광란에 찬 테러, 전기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마을 경계,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이한 생물체의 습격 등 몇 번의 큰 위기를 겪은 에단은 결국 웨이워드파인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낯선 공간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중반부까지만 해도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비밀로 가득 찬 공포 스릴러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비밀요원, 미지의 여인이 남긴 주소에서 발견되는 시체, 친절하거나 허술해 보이지만 어딘가 날선 무기를 숨겨놓은 듯한 의사와 보안관, 그리고 심장이 들여다보이는 괴물과의 사투 등 목숨을 건 에단의 탈출기는 말 그대로 한 순간도 안심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단의 고된 여정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후반부에 도착하면 이 작품의 실체, , 평범한 소도시를 무대로 한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제야 왜 이 작품의 소개글에 트윈 픽스’, ‘로스트’, ‘X 파일등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룬 작품들이 함께 언급됐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암울함과 혼란스러움은 꽤 오래 지속됩니다. 내가 저 곳에 있다면, 저 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고 외부의 침입을 막아줄 튼튼한 전기철조망이 있더라도 과연 그것이 행복한 삶이 되어줄까, 라는 의문도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웨이워드파인즈는 보기에 따라 유토피아일 수도,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문과 회의에 대해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가 후속작인 웨이워드’, ‘라스트 타운에서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는 미지수지만,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공동체의 이미지보다는 블레이드 러너가 남겨준 비와 어둠, 깜빡이는 네온사인으로 잠식된 음울한 도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떠오르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우는 아닐 것 같습니다. 과연 후속작들에서 에단 버크와 웨이워드파인즈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양새로 이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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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빨간 심장을 둘로 잘라버린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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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 에리카 뮐러의 시신이 공원에 유기된 채 발견됩니다. 율리아 뒤랑은 시신의 상태를 보자마자 1년 전에 벌어졌으나 미제 상태로 남아있는 두 건의 살인사건과 동일한 수법임을 알아봅니다. 무수한 폭행과 바늘 자국이 남아있고, 신체는 잔혹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로부터 1주일 여 동안 하루에 한 명꼴로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된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뒤랑은 희생자 중 한 명인 고급 매춘부의 고객 명단에 들어있던 프랑크푸르트의 유력인사들을 탐문하지만 혐의를 특정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일부 희생자들과 용의자들이 파티와 점성술을 통해 인연을 맺은 것을 알게 된 뒤랑은 그들 간의 내밀한 관계를 추궁하는 한편 점성술사를 통해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정신과 의사를 통해 범인의 프로파일을 작성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 사건은 쉴 새 없이 계속 발생합니다.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작품을 짧은 시간 안에 연이어 읽어서 그런지 특히 이번 작품은 앞서 읽은 작품들과 비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서평 대신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한국 출간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아쉬운 점, 궁금한 점들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서평을 써볼까 합니다. (‘신데렐라 카니발은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 내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1.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잔혹함과 선정성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요? ‘율리아 뒤랑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곤 했지만, 이번만큼 범행 수법이 잔혹하고 선정적이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잔혹함과 선정성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진 않지만, 밀도 있는 구성이나 사실적인 캐릭터 등 작품의 완성도가 받쳐주지 않은 상태에서 말초적인 호기심만 자극하는 잔혹함과 선정성은 결코 매력적일 수 없습니다. ‘예쁘고~’의 경우 완성도를 논할 정도로 부족한 작품은 절대 아니지만, 어쩐지 독자들에게 소구하는 포인트가 여성 신체의 엽기적인 훼손에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혹함과 선정성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2.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불륜의 사슬, 부모 또는 가족으로 인해 각인된 폭력과 성에 관련된 트라우마 등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자기복제는 앞으로도 계속 될까요? ‘예쁘고~’는 안드레아스 프란츠가 즐겨 설정하는 갖가지 트라우마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과거의 상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가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각인시킨 주범으로는 어머니가 으뜸으로 가장 많았고, 아버지의 경우 권위적이고 묵시적인 폭력으로 가족들을 굴복시키곤 합니다. 또한 이웃이나 친구 또는 가까운 지인의 배우자와 거침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도 예외 없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이런 설정들이 매 작품마다 반복되면서 자기복제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점입니다.

 

3. ‘외부의 제보나 우연한 계기 없이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 못하는 뒤랑의 형사로서의 능력은 어느 정도로 평가해야 할까요? ‘영 블론드 데드에서는 우연히 발견한 단서 하나가, ‘12송이 백합~’에서는 우연한 기회에 조사하게 된 참고인들이, ‘치사량에서는 난데없이 날아든 제보가 각각 사건 해결의 열쇠로 설정됐습니다. ‘예쁘고~’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남자의 제보가 없었다면 여러 희생자를 낸 연쇄살인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뒤랑의 탐문은 집요하고 빈틈없지만 결국 제보나 우연한 행운 없이는 성과를 못 내온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뒤랑은 뛰어난 형사가 맞을까요?

 

4. 이건 좀 사족인데, 원제와는 무관한 번역 제목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예쁘고~’의 경우는 왜 이렇게 원제와 거리가 먼 번역 제목을 붙였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예쁘고~’의 원제는 심플한 한 단어 ‘Der Jager’, 즉 쫓는 사람, 사냥꾼이란 뜻입니다. (네이버로 검색해보니 ‘Jäger’로만 나왔는데, 혹시 오류라면 정정 부탁드립니다) 내용과 직접 연관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에 대한 상징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이 길고 뜬금없는 번역 제목의 출처는 도대체 어딜까요? 원제가 조금 밋밋한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작품의 완성도보다 잔혹하고 선정적인 제목으로 관심을 끌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예쁘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못했는데, 인물과 사건만 바뀌었을 뿐 전작들에서 보인 전형적인 틀을 복제한 느낌이 강했던 탓에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한국 출간작에 대한 거시저인 리뷰가 되고 말았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일단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엽기적인 사건, 극단적인 트라우마, 흥미진진한 불륜 등 다소 막장에 가깝고 자극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점성술 이야기도 의외로 흥미롭고, 중반쯤에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을지 모르지만 진범의 정체도 꽤 충격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공격적인 서평을 쓰게 된 것은 최근 1년여 동안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네 작품을 연이어 읽은 피로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로는 손색없지만 그의 작품을 연이어 읽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띄엄띄엄, 조금은 기억에서 잊힐 만 할 때쯤 한 편씩 읽어보는 것이 안드레아스 프란츠와 율리아 뒤랑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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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혹은 시작
우타노 쇼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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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아들, 딸이 유괴를 당하든 말든, 누군가 옆집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육두문자 낙서질을 하든 말든, 심지어 핵폭탄이 일본 열도에 또다시 떨어지든 말든 내 가족, 내 집만 안 다치면 알 바 아니라는 마흔 살 남자 도가시 오사무. 스스로 이기주의자임을 자인하면서도 그것이 행복을 위한 올바른 삶의 태도라 믿던 그에게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남다른 우등생인 6학년 아들 유스케가 최근 벌어진 초등학생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가시는 아들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스케의 범행은 확고해질 뿐입니다. 결국 도가시는 앞으로 벌어질 지옥 같은 상황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떠올려봅니다.


 

누구나 극단적인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한없이 이기적인 도가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아들 유스케가 저지른 끔찍한 범행을 확인하곤 극과 극을 달리는 상상에 휩싸입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타개하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상상에서부터 모두 함께 죽거나 아니면 유스케를 희생해서라도 자신과 가족은 살아남거나...’라는 극단적인 상상에 이르기까지 도가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됩니다. 동시에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합니다.

우타노 쇼고는 도가시가 처한 끔찍한 현실도가시가 품는 일그러진 상상이라는 두 이야기 덩어리를 교묘하게 또는 모호하게 이어붙임으로써 독자에게 혼란과 호기심을 동시에 던집니다. 물론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친절히알려주긴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 새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다시 모호해집니다. 현명한 독자라면 금세 그 경계를 눈치 채겠지만, 우타노 쇼고 식 서술의 매력은 약간의 아둔함을 겸비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스스로를 한심한 독자라고 여기면서도 그 덕분에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어딘가 계몽적인 냄새까지 살짝 풍기는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른 독자의 서평들 가운데 결말에 대한 호불호를 언급한 경우가 꽤 많았는데, 대체로 무책임하다는 의견과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의견으로 갈렸습니다. 두 입장 모두 일정부분 동감할 수 있었지만, 현학적이거나 계몽적이거나 심지어 두루뭉술해 보이는 양비론을 내세운 점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독자 입장에선 풍자든 비난이든 찬사든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는 좀 아쉬웠지만, 전반적으로는 우타노 쇼고의 필력을 맛볼 수 있는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이게 뭐야?”라고 반문할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또 개인적인 잣대로 봤을 때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는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정형의 틀을 깬 독특함과 혼란스러움 속에 숨어있는 색다른 재미를 원한다면 가끔 간식처럼 우타노 쇼고를 꺼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면 얼마든지 주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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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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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오이 가든으로부터 시작한 편혜영 읽기에 이어 비슷한 이유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한강의 작품을 출간순서대로 읽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한강 읽기입니다. 한강의 첫 작품집 여수의 사랑1995년에 초판이 나왔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라면 작가가 조금씩 문장을 수정했다는 점(개정판 작가 후기 참조)과 초판에는 있던 단편 저녁 빛이 빠져서 6편의 작품만 수록됐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한강과 편혜영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끌림입니다. 학창시절 이래로 이문열의 진지함과 묵직함, 신경숙-은희경의 애틋하거나 비틀어진 사랑, 김영하의 발칙함과 도발, 윤대녕의 아스라한 서정성에 차례로 이끌렸던 기호가 왜 느닷없이 불편함쪽으로 기울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변덕 외에는 딱히 댈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제목만으로도 눈길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일 때문에 짧은 출장으로 한번, 한때 빠졌던 바다낚시 때문에 두어 번 정도 가본 게 전부지만 여수는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초판이 출간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직접 만난 여수의 사랑은 기대했던 대로 무척이나 불편하고 아프고 뒤끝이 아린 작품이었습니다. 수록된 나머지 다섯 작품 역시 비슷한 정서와 모양새를 지닌 탓에 연이어 읽기가 부담스러웠고 결국 1주일에 한 편 꼴로 겨우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와 살은 젊지만 정신은 늙고 병들고 찌들어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년의 끔찍한 일들이 그들을 망가뜨리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은 후에 겪은 치 떨리는 일들이 원인일 때도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아프거나 타인을 아프게 하거나, 어딘가에서(누군가로부터) 도망치거나 어딘가로 무작정 향하거나, 그러다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아니면 포기해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여섯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설정 중 하나는 가족의 상실입니다. 부모에 의해 기차에 버려진 자흔, 아버지와 여동생의 자살을 겪은 정선(여수의 사랑), 아버지는 농약으로, 동생은 또래에게 맞아 죽은 인규(질주), 과속 차량에게 임신 5개월의 아내를 잃고 자신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명환(어둠의 사육제), 자신의 몫까지 우유 배달을 하다가 사고로 식물인간인 된 쌍둥이 동생을 둔 동걸(야간열차), 부모의 폭력과 냉담함 탓에 가출하면서 백치 여동생과 헤어져야 했던 정환, 아내와 아들이 가출하고 딸마저 심장병으로 떠난 뒤 저택에 홀로 남은 황씨(진달래 능선), 사람 좋은 딴따라로 살다가 술에 취해 죽은 아버지를 둔 동식과 동영 형제(붉은 닻) 등 하나같이 주인공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출발점을 가족의 상실로 설정했습니다.

 

이들 중엔 정신의 피폐함이 넘쳐흘러 기어이 몸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정선은 고질병인 위경련과 안두통 외에 치명적인 결벽증을 앓고 있고(여수의 사랑), 동걸은 수시로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는 이명에 시달리고(야간열차), 정환은 가짜 약임에 분명한 위장약을 몇 봉씩 한꺼번에 복용하기도 하며(진달래 능선), 동식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폭음과 폭연을 일삼다가 간 경변에 걸립니다.(붉은 닻)

그런가 하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또는 그동안 피해왔던 어떤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구체적이고도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인물들도 있는데,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고향 여수를 향해 밤기차를 탄 정선(여수의 사랑), 식물인간이던 동생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야간열차를 타고 동해로 떠나는 동걸(야간열차), 이를 악 문 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끝없이 달리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규(질주), 지금까지의 삶과는 반대로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게 살기로 결심한 영진(어둠의 사육제), 그리고 자살을 통해 모든 것에게 종지부를 찍으려는 명환(어둠의 사육제)이 그들입니다.

 

여섯 작품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이라는 시간적 배경입니다. 가장 극적인 상황들은 모두 밤에 벌어지는데, 밤기차(여수의 사랑, 야간열차), 밤의 달리기(질주), 밤의 투신자살(어둠의 사육제), 밤의 나무 태우기(진달래 능선), 그리고 밤의 외출(붉은 닻)이 그것입니다. 밤과 새벽의 어둠은 인물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더욱 고립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포장합니다. 그래선지 여섯 작품의 비주얼은 대체로 흑백 영화나 변색된 컬러에 가깝습니다. 밤기차의 전등, 밤거리의 가로등, 밤의 아파트 불빛, 밤에 불타는 나뭇가지, 그리고 오롯이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어둠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요소들로, 등장인물에 동화되고 이입된 독자에게는 무척이나 서글픈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점심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서 인파 속에 휩쓸렸을 때 문득 이들 중에도 정선이나 자흔, 동걸, 인규 같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한두 가지 정도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기억들을 봉인한 채 무의식 속에 처박아 뒀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독자 가운데 주인공들의 삶을 지켜보며 치유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새삼 봉인해놓았던 오래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 다시 한 번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수의 사랑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한번쯤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또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을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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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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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10% 이상을 수로가 차지하는 물의 도시 야나쿠라에 기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들이 얼마 후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왔는데, 그들은 사라진 기간 중의 기억이 전혀 없으며 깊은 잠을 잔 듯한 느낌뿐이라고 진술합니다. 전직 교수 교이치로는 수로가 집단실종에 관련 있을 거라 믿으며 사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기자인 다카야스는 당사자와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등 취재에 열을 올리지만 주로 노년층인 당사자들은 별일 없이 돌아왔으니 소동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고 답할 뿐입니다. 교이치로의 딸이자 교토에서 요정을 운영하는 아이코, 교이치로의 제자이자 약간 괴짜 티가 나는 음악 프로듀서 쓰카자키 다몬 등이 합세하면서 야나쿠라의 실종사건의 진실을 캐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지만, 매번 얼마 못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 시점에선가 저도 모르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만다는 점, 또 꿈이란 걸 알면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는 듯한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 공간에 친숙해진 나머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 푹 빠져 읽다 보면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온다 리쿠의 경우에는 그 도가 좀 심한 편입니다. ‘몽위에서는 대규모 패닉현상과 실종사건이 벌어진 나라(奈良) 한복판에 던져진 느낌이었고, ‘Q&A’에서는 대참사가 벌어진 대형마트 주변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달의 뒷면은 독자로 하여금 거미줄 같이 늘어선 수로 속 도시 야나쿠라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살아온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그녀의 몽환적인 묘사들에 홀려 어느 새 딴 세상, 딴 공간으로 점프해버린다고 할까요?

 

달의 뒷면은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에 비해 상징이나 비유가 더 복잡하고 다채롭게 설정돼서 쉽고 빠른 책읽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물론 문장은 쉽고 표현은 적확해서 금세 페이지가 넘어가긴 하지만, 후루룩 읽어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찬찬히 되읽은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수로에 인접한 주택들이나 주변 풍광은 물론 소품처럼 등장하는 책, 영화, 게임, 음식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어서 무심코 페이지를 넘겼다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인물들의 언행도 마찬가지인데,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실종사건을 대하는 네 명의 주인공이 주고받는 대화 속엔 모종의 단서처럼 읽히는 대목들이 꽤 많아서 몇 번이고 되읽게 되곤 합니다.

 

존재론을 비롯하여 다소 철학적인 뉘앙스까지 풍기는 주제 의식 역시 난이도가 꽤 높습니다. 단순히 야나쿠라의 수로에 얽힌 괴담이라든가 갓파를 소재로 한 기이한 이야기 정도라면 깊게 고민할 일이 없겠지만, 온다 리쿠는 수로 + 수로 안에 사는 뭔가’ + 실종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괴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한 담론을 독자에게 던지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대략 채 절반 정도도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은데, 사실 이런 주제와 담론은 온다 리쿠의 고유한 개성을 빛나게 만들기도 있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낯섦과 혼란스러움의 원인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온다 리쿠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그녀의 팬이면서도 작품에 따라 호불호를 따지게 되는 특이한 현상 역시 바로 이런 몽환적이고 난해하고 철학적인 주제와 담론 때문입니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잣대를 갖고 읽는 것은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매력을 만끽하기엔 적절치 않은 방법입니다. 특히 호러와 판타지를 넘어 SF적인 요소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달의 뒷면은 억지로 이해하려기보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의 뒷면을 느긋하게 유람하겠다, 라는 가벼운 마음가짐의 책읽기가 더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온다 리쿠도 은근슬쩍 독자들이 이런 태도를 갖길 원한 것 같은데, (착각일 수도 있는 억측에 불과하지만) 실종됐다가 돌아온 한 여인의 말에서 온다 리쿠의 바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이 작품의 제목인 달의 뒷면은 온다 리쿠의 대표적인 키워드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달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실제로는 앞면일 뿐이며, 그렇기에 그 뒷면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는 채 살아간다. 뒷면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테마는 몽위‘Q&A’외에도 온다 리쿠의 적잖은 작품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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