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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연인 ㅣ 스토리콜렉터 25
알렉산데르 쇠데르베리 지음, 이원열 옮김 / 북로드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잘 만들어진 액션 스릴러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입니다. 같은 스웨덴 작가인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 비견한다는 홍보카피는 살짝 과장된 게 사실이지만, 이야기의 스케일이나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사건과 반전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자들이 탐낼 만한 높은 완성도와 대중성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아들을 둔 평범한 간호사 소피는 담당환자인 스페인 갱단의 중간보스 엑토르 구스만에게 호감을 가진 탓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경찰과 갱, 갱과 갱 사이의 전쟁에 휘말립니다. 구스만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소피는 갱단의 일에 깊숙이 말려들게 되고, 구닐라가 이끄는 경찰은 구스만의 범죄 증거를 잡기 위해 그의 연인인 소피를 이용하려 합니다. 그 무렵 구스만 일당은 마약 운송루트 확보를 놓고 독일의 한케 일당과 대치중이었는데, 소피의 첫사랑이자 무기밀매상인 옌스가 그들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소피의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치닫습니다.
갱들의 전쟁은 한 치의 관용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벌어지고, 구닐라를 비롯한 경찰의 수사는 미행, 도청, 살인 등 초법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소피는 ‘범죄자 구스만’과 ‘연인 구스만’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지만 경찰과 갱들이 얽힌 전쟁의 여파가 아들에게까지 미치자 모든 것을 초월하는 거대한 분노에 휩싸입니다.

수많은 등장인물 중 평범하거나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소피와 그녀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뿐입니다. 구스만과 한케의 갱단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닐라가 이끄는 경찰까지도 탐욕스러운데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점에서는 갱단과 정확히 닮은꼴입니다. 심지어 소피의 첫사랑이자 그녀 곁을 지키는 옌스마저도 불법적인 무기밀매상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사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권을 놓고 암살, 협박 등 다양한 폭력을 주고받는 갱들의 대결도 스릴 넘치지만, 개인적으로는 구닐라가 이끄는 경찰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그녀의 팀은 스웨덴 국립범죄센터에서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특이한 조직인데, 재미있는 건 팀원 대부분의 면면이 어딘가 한군데 이상 나사가 풀린 듯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경력이라곤 12년의 순경 활동이 전부인 불안증 환자 라르스 빙에, 현장 증거물인 돈 봉투를 슬쩍 했다가 비밀경찰에서 쫓겨난 안데르스, 반복된 과잉대응으로 신속대응팀에서 공항 경비로 좌천된 인종차별주의자 하세, 구닐라의 동생이자 모든 성인병을 끌어안고 있는 패스트푸드 중독자 에리크 등 전혀 국립범죄센터와 어울리지도,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팀원으로도 보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한 순간 사이코패스로 변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시한폭탄 같은 인격을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내부적인 균열과 갈등이 상존하고, 기어이 우려했던 시한폭탄이 후반부에 이르러 연이어 터지면서 갱들의 이야기보다 더 긴장감 넘치고 흥분지수를 고조시키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예전에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을 읽다가 1권에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에서 그 해 Top3로 꼽힐 정도로 인기를 얻었고, ‘악명 높은 연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모자라지 않을 만큼 폭력적인 서사를 품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빗발치는 총알과 난무하는 죽음만 있을 뿐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서평 중 일부를 인용하면,
“멕시코를 무대로 한 장대한 마약전쟁은 보이는데,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겪는 개인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살아있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인형 같다는 느낌?”
말하자면 ‘악명 높은 연인’의 가장 큰 미덕은 ‘사람’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평범한 주부이자 간호사인 소피는 주인공으로서의 캐릭터의 힘은 약하지만 독자로부터 “그녀는 반드시 살아야 돼!”라는 강력한 동정과 공감을 얻어냅니다. 분량이나 역할에 있어 뜻밖에 큰 자리를 차지한 경찰 라르스 빙에는 감정과 행동의 진폭이 굉장히 큰 인물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소피의 첫사랑인 옌스는 적당한 폭력성을 지닌 무기밀매상이자 다정다감한 훈남 캐릭터로 설정돼서 매력적으로 읽힌 인물입니다. 그 외에 다수의 조연들 역시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생생히 전해줍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대표하는 ‘밀레니엄 시리즈’가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액션이 사실감 넘치는 인물들과 잘 조화됐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해결되는가, 도 중요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독자로부터 공감과 이입을 얻어낼 수 없다면 독자의 기억에서 금세 잊히는 평범한 오락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악명 높은 연인’은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겸비한 수작이었고, 또한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 편으로서도 괜찮은 출발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앞서 주인공으로서 소피의 캐릭터의 힘이 약하다고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여자 소피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폭력과 악의 연결고리 속으로 발을 담그는 과정’이라는 시리즈 첫 편으로서의 임무는 무난하게 완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반부에 던져진 ‘예고’대로라면 후속작에서는 소피가 수동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인물로, 또 어떤 형태로든 실제 폭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리스베트처럼 그 자체가 살상무기인 캐릭터까지 진화하진 않겠지만, 현재와는 사뭇 다른 ‘과격한 소피’가 될 것은 확실합니다. 소피의 두 번째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변신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