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긋는 소녀 - 샤프 오브젝트
길리언 플린 지음, 문은실 옮김 / 푸른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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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단 두 작품을 통해 길리언 플린은 자신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뇌와 마음 모두 누군가에게 후벼 파이는 느낌을 자초한다는 뜻이고, 다 읽은 뒤에는 먹먹함과 후유증과 소화불량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목마저 몸을 긋는 소녀입니다. 주인공 카밀 프리커는 커터(cutter)입니다. 자신의 몸을 칼이나 가시 같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긋고 베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카밀은 단순히 긋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수많은 단어들을 칼끝으로 새겨 넣습니다. 그녀가 13살에 처음 자신의 음부 근처에 새긴 단어는 사악한이었고, 그 후로 해로운’, ‘메스꺼운’, ‘분노등 온통 어두운 뉘앙스의 단어들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29살에 이르러 사라지다를 끝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녀의 커터로서의 활동은 종료됩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고작 2,000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미주리 주 최남단의 후미진 도시 윈드 갭입니다. 13살의 카밀이 동생 메리언을 잃었던 곳이고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난도질을 한 곳이며, 같은 해 한꺼번에 4명의 남자와 첫 경험을 치른 곳입니다. 카밀에 따르면 너무도 숨 막히고 작은 마을, 싫어하는 사람과 매일 맞닥뜨리는 마을입니다.

카밀은 나를 찾아줘에서 일기장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에이미, ‘다크 플레이스에서 온 가족이 몰살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리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고향 윈드 갭은 다크 플레이스에 등장했던 캔자스의 후미진 마을을 연상시킵니다.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며 외로움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탐구하고 싶었다.”는 말대로 길리언 플린은 고집스러울 만큼 일관성 있게 불행과 고통의 서사를 그려온 것입니다.

 

시카고의 만년 꼴찌 일간지 데일리 포스트의 여기자 카밀 프리커가 윈드 갭에 파견됩니다. 9살 소녀가 이빨이 모두 뽑힌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1년 만에 또다시 10살 소녀가 실종되자 선정적인 대박 기사를 기대한 데스크가 마침 그곳이 고향인 카밀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카밀에게 있어 윈드 갭은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은 곳이었고, 그 고통의 진앙지는 바로 어머니 아도라를 비롯한 가족들이었습니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카밀은 사랑한 적도, 사랑받은 적도 없는 어머니 아도라의 냉기와 16년이 지나도록 고스란히 보존된 죽은 여동생 메리언의 방이 내뿜는 서글픔, 그리고 또 다른 여동생 13살 앰마의 극단적인 행동들을 감내하는 가운데 캔자스시티에서 파견된 리처드 윌리스 형사의 도움을 받아 취재에 나섭니다.


 

어린 소녀들을 참혹하게 죽인 뒤 이빨을 모두 뽑아간 괴물을 쫓는 이야기지만, 길리언 플린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여자들, 그리고 3대에 걸친 모녀간의 애증이 초래한 비극입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등 뒤 한복판을 제외하고 온몸을 칼끝으로 난도질한 카밀, 섹스와 마약을 즐기며 나도 살해당하고 싶어. 그럼 모두가 날 사랑할 테니까.”라는 앰마, 그리고 자신이 낳은 딸 카밀에게 난 너를 사랑해본 적 없어.”라고 단호히 말하는 아도라 등 3대의 애증은 극단적이다 못해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뮌하우젠 증후군이란 병명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MBP(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 Munchausen by Proxy)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거꾸로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3대에 걸친 모녀의 애증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거나 상대방을 아프게 하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내는 깊고 질긴 뿌리 역할을 합니다.

 

모녀 3대의 비극과 윈드 갭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의 조합이 매끄러운 황금비율로 이뤄지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는데, 이 부분은 사소한 언급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생략하도록 하고, 대신 전체적인 인상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몸을 긋는 소녀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보다 앞선 길리언 플린의 데뷔작인데 그래선지 전작들에 비해 조금은 거칠고 관념적인 느낌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물들의 행동과 동기가 쉽게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밀이 자해를 저지르게 된 동기도, 앰마가 폭력적인 괴물과 고분고분한 딸(또는 동생)이라는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또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유전처럼 물려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도라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비뚤어진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조연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소녀들이 실은 동물을 죽이고 동급생을 잔인하게 공격한 적이 있다거나 앰마를 추종하는 패거리가 장례식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추모비를 훼손한다는 설정은 단순히 불편함 이상의 작위적인 느낌을 줄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거칠다고 느낀 이유는 이런 부분에 대한 묘사들이 집요하고 과격하고 노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고, 관념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내 이웃에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사실감을 갖기 어려운, 즉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나갔거나 때론 추상적으로 보일 만큼 그 형체가 모호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앞서 읽은 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와 마찬가지로 몸을 긋는 소녀역시 적잖은 중압감과 후유증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카밀과 그녀의 가족들이 겪은 비극이 그저 픽션에서만 존재하기를 바랄 정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의 당혹감은 꽤 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길리언 플린의 매력은 매번 이런 지점에서 폭발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며 독자들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뛰어들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 읽은 뒤 새삼 책의 첫 머리에 실린 한 줄짜리 프롤로그가 생각났습니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지만, 나중에 다시 한 번 그 한 줄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서늘하거나 한없이 애틋할 따름이었습니다.

 

예쁜 여자아이는 잘만 행동하면 어떤 곤경도 피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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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손톱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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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최근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자주 접하게 됐습니다. ‘이와 손톱역시 빌 밸린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5년에 출간된 대표작입니다. 왜 하필 제목을 이와 손톱이라고 지었을까 궁금했는데, 본문 뒤에 실린 번역 후기를 보곤 ~!”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서평을 마무리한 후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건너뛰겠습니다.

이와 손톱은 두 가지 이야기가 한 챕터씩 교차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검사 프랭클린 캐넌과 변호사 찰스 덴먼이 벌이는 법정 공방전이고, 또 하나는 주인공 루 마운틴이 벌이는 치밀한 복수극입니다.

 

마술사 루 마운틴은 곤경에 빠진 탤리 쇼를 구해준 뒤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결혼을 거쳐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한 통의 협박전화로 인해 그들의 행복은 균열을 맞이했고, 끝내 루는 소중한 탤리를 잃고 맙니다. 경찰의 사고사 단정에도 불구하고 루는 탤리가 지니고 있던 물건때문에 정확한 진상을 밝힐 수 없었고 결국 사적인 복수를 다짐합니다. 마술뿐 아니라 뛰어난 추리력까지 동원하여 성공을 코앞에 뒀던 루의 복수극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뒤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한편, 법정에서는 기이한 살인사건에 관한 재판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는 아이샴 레딕이라는 남자로 보이는데, 문제는 사건현장에 이와 손톱, 뼈와 혈흔 같은 애매한 흔적만 남아있었을 뿐 정작 시체도 없고, 목격자 역시 하나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검사는 현장 증거에 따르면 피고는 유죄라고 주장하는 반면, 변호사는 발견된 것이라곤 단지 정황 증거 뿐이므로 피고는 무죄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검사는 도무지 범행동기를 알 수 없어 기소를 확신하지 못했고, 변호사는 증언이 거듭될수록 의뢰인인 피고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줄거리만 보면 두 이야기의 접점이 어디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지만, 평행선을 달리듯 나란히 전개되던 두 이야기는 후반부에 이르러 정교하게 합쳐집니다.

루 마운틴의 복수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합니다. 복수 상대의 얼굴도 본 적 없고, 목소리조차 직접 들은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오직 연상과 추리만으로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아내듯복수 상대를 찾아낸 것은 다소 무리수가 느껴졌지만, 마술 같은 트릭과 치밀한 사전 포석을 통해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완벽한 신의 한수로 복수극을 마무리하는 과정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법정 공방전의 경우 새로울 것 없는 전형적인 증인 심문과 반대 심문이 이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증인을 향해 전혀 다른 시각과 논조를 펼치며 배심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두뇌 대결은 마치 법정 현장을 생중계 하듯 긴장감과 사실감이 넘칩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피고가 계속 피고인으로만 명명될 뿐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인데, 중반쯤 되면 어렵지 않게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지만 루 마운틴의 복수극이 어떻게 진행됐기에 이 법정 장면과 연결된 것인지, 또 작가가 설정한 트릭은 무엇이며 어떻게 풀릴 것인지는 그리 쉽게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Tooth and the Nail’입니다. 번역 제목인 이와 손톱그대로입니다. 언뜻 보면 아이샴 레딕이 살해된 현장에서 발견된 이와 손톱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정관사 The를 뺀 ‘tooth and nail’맹렬하게, 필사적으로라는 뜻을 가진 숙어라는 점에서 작가 빌 밸린저가 중의적인 차원에서 정한 제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깊은 뜻까지 반영한 번역 제목을 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번역자의 후기를 통해서라도 그 뜻을 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스마트폰도, 유전자 감식도, CCTV도 없던 시절의 아날로그적인 스토리지만, ‘이와 손톱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 빛나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기발한 발상과 정교한 트릭, 두 갈래의 이야기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교차되는 구성미 등 고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못 읽은 빌 밸린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역시 이런 고전의 맛을 전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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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6
장은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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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튼실한 돼지 한 마리와 조금은 과장된 크기의 제목을 둘러싼 음산한 붉은 색조의 표지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공포물, 특히 영상으로 만들어진 공포물은 거의 보지 않는 편입니다. 솔직히 무섭고, 기억 속에 남아 수시로 떠오르는 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영상보다 활자로 기록된 공포 이야기가 더 오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지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책으로 된 공포물에는 자꾸 관심이 가곤 합니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오랜만에 만난 다양한 한국 작가들의 단편들이라 더 호기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표제작 돼지가면 놀이를 비롯해 모두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광기와 식인, 꿈과 환각, 육체를 지닌 귀신,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존재들, 시공간의 점프, 소시오패스, 구원(舊怨)과 복수 등 각각의 작품마다 독특한 설정과 기괴한 엔딩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돼지가면 놀이’(유재중), ‘숫자꿈’(김재은), ‘구토’(김유라)가 좋았는데, 세 작품 모두 뛰어난 비주얼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단편영화나 단막극으로 만들어지면 원작의 섬뜩한 느낌이 더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무섭다기보다는 안쓰럽고 애틋함까지 불러일으키는 여자 귀신(여관바리), 평범한 인물에게 닥친 끔찍하고 비현실적인 상황들(며느리의 관문, 파리지옥), 공포 분위기와 복수극을 잘 접목시킨 이야기(무당아들, 고양이를 찾습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신과 종교 혹은 환상에 관한 이야기(낚시터, 헤븐)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맛볼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다만,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공포감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심심함과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공포물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 저마저도 두세 작품 외에는 정말 무섭다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읽을 때는 잘 몰랐던 기괴함이 뒤늦게 스멀스멀 기어올라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싶었던 작품도 있었지만, 짜릿한 공포를 즐기는 마니아들에게는 2% 정도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 좋았고, 저 같은 독자가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공포물이라 더 좋았습니다. 이 작품이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의 여섯 번째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딱히 관심을 갖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눈여겨 본 몇몇 작가의 작품이 실린 여타 단편선도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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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죄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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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24살 웬디 해니포드가 난자당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웬디의 동거남 리처드 밴더폴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체포됐지만 얼마 안 돼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웬디의 아버지 케일은 무면허 탐정 매튜 스커더에게 최근 3년간 연락 한 번 없던 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언론에서는 웬디를 창녀로 짐작했지만 아버지 케일의 기억 속에 웬디는 순수하고 모범적인 외동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던 스커더는 웬디와 리처드의 기이한 인생에 적잖이 놀랍니다. 특히 학생 때부터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빠져들곤 했던 웬디가 목사 집안 출신의 동성애자 리처드와 동거하게 된 계기에 집중합니다.

 

2013년 겨울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죽음의 한가운데를 먼저 읽었고, 9개월이 지나서야 주인공 매튜 스커더의 원점인 시리즈 첫 편 아버지들의 죄를 읽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달(20149) 들어 두 편의 작품(‘살인과 창조의 시간’, ‘어둠 속의 일격’)이 한꺼번에 출간된 덕분에 그동안 깜빡하고 있던 이 시리즈가 생각난 것입니다. ‘진실 찾기라는 탐정물의 공식에 충실하지만 아버지들의 죄는 가치관의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중산층에서 일어났을 법한 극단적인 가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 사회 소설이기도 합니다.

 

웬디와 리처드는 성장과정에서 아버지 혹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족들과 불행하거나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악연을 맺어왔습니다. 웬디의 생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에서 전사했고, 계부인 케일은 뜻하지 않은 사건때문에 웬디에게 어정쩡한 거리를 둔 채 지내왔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리처드에게 있어 목사인 아버지는 그저 권위적이고 차갑고 보수적인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웬디는 또래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리처드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웬디는 정서적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순수함을 지닌 반면 남자들과의 관계만큼은 매춘으로 오해받을 만큼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고, 리처드는 수줍고 얌전한 성격과 달리 게이 바에서는 매일 같이 섹스파트너를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결코 평범하거나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생 경로를 택했던 웬디와 리처드의 삶은 적잖은 부분에 있어 아버지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들입니다. 그 영향들을 전부 라고 낙인찍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아버지들의 죄로 명명함으로써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삶과 최후가 아버지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껏 멋을 부렸으면서도 냉혹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마초적인 문장들도 그렇지만, 역시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매력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2편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랬지만 아버지들의 죄역시 매튜 스커더가 경찰을 그만두게 된 계기나 이후 그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 몇 줄, 그것도 감정 같은 건 아예 실리지 않은 평범한 대화 속에 잠시 언급될 뿐입니다.

 

다만 소소한 몇몇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에 대한 호기심이 좀더 부풀어 오른 게 사실인데, 가령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극도의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한없이 친절하다가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닥쳐!”라는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합니다. 반면 과할 정도로 성실하게 십일조를 내고 희생자들을 위해 초를 밝히는가 하면, 전처인 애니타나 아이들에게 이혼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딸린 별명 중 알코올 중독 탐정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에선 버번을 아주 맛있게 스트레이트 또는 커피에 타 마시는 장면이 나올 뿐 중독에 가깝다는 면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예상 못한 매튜 스커더의 진면목은 마지막 엔딩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모두 파악했지만 수사권도, 사법권도 없는 무면허 탐정 매튜 스커더가 아버지들의 죄에 내리는 마지막 판결은 요즘 작품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1976년에 출간됐고, 작품 속 시간적 배경은 1973년입니다. 요즘 작품들에 비해 분량도 짧고(238페이지) 사건의 규모도 크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나 비밀의 깊이와 무게, 캐릭터의 매력 등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현대물에 비해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짜임새는 더 촘촘하고 긴장감과 쫄깃함으로 꽉꽉 채워진 작품입니다. 또 짧은 분량이지만 한 줄 한 줄 작가가 흘려놓은 정보들이 지뢰밭처럼 흩어져 있어서 집중하지 않고 후루룩 읽어 넘겼다간 나중에 ?”하게 되는 상황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새삼 먼저 읽은 죽음의 한가운데에게 야박한 서평을 남긴 게 미안해집니다. 아무래도 매튜 스커더의 매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겼던 것 같고, 나중에라도 느리고 꼼꼼한 책읽기로 재도전한다면 처음엔 알아보지 못한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 출간된 살인과 창조의 시간’, ‘어둠 속의 일격역시 각각 1976, 1981년 작품이지만, ‘아버지들의 죄만큼 요즘의 작품들을 능가하는 완성도와 재미를 줄 것으로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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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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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월에 출간된 새벽 거리에서이후로 공허한 십자가이전까지 최근 만 3년 간 국내에 소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16편입니다. 그 가운데 10편의 작품을 읽었고, 2편은 만족, 3편은 so-so, 나머지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읽곤 했지만, 이제는 신간이 나오더라도 서평이나 블로그의 반응을 보고 선택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올 들어서만 7편이 폭주하듯 쏟아져 나왔는데, 그나마 두 작품 - ‘한 여름의 방정식’, ‘몽환화’ - 이 그동안의 실망감을 어느 정도는 해소해 준 덕분에 나름 기대감을 갖고 공허한 십자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공허한 십자가는 손에 꼽을만한 그의 몇몇 작품들의 미덕을 조금씩골고루 겸비한, 즉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열심히 살아가거나 맹렬히 싸우거나 또는 무력하게 침몰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복잡한 서사 속에 녹여냄으로써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방황하는 칼날), 소중한 인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악연으로 오랜 시간동안 엮였던 두 남녀(백야행, 환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붉은 손가락), 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성녀의 구제에서 보여준 비극 속의 애틋함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에서 인상 깊었던 다양한 코드들이 잘 버무려져있습니다.


 

공허한 십자가는 살인과 속죄, 그리고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살인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죄이고, 그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할 죄입니다. 하지만 그 벌로서의 사형에 대해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합니다.

사형반대론자인 범인의 변호사 : “(범인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유족에게)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사형판결은 그(범인)를 바꾸지 못했지요. 사형은 무력(無力)합니다.”

가족을 살해한 범인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는 유족들 :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그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형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살인은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속죄해온 자를 변호하는 사람 :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세 가지 입장 모두 일정부분 이해가 되지만 동시에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은 이 난해한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습니다. 21년 전 아직 철없던 시절에 사랑과 비극을 동시에 잉태했던 후미야&사오리, 11년 전 딸 마나미를 강도의 손에 잃고 이혼을 택한 나카하라& 사요코. 이들은 피살자로, 피살자의 유족으로, 살인자로, 속죄자로 등장하여 살인-속죄-사형이라는 정답 없는 난제 속에 내던져집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고루하고 평면적인 사형제도 찬반론 대신 서로 입장이 엇갈리는 인물들의 사연을 복잡하게 직조함으로써 미스터리의 미덕과 사회성 짙은 화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립니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갖게 만드는데, 가령 주인공의 진실 찾기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실패하기를 바라게 만들고, 살해당한 자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진범이 꼭 잡혀야 할까, 조바심나게 만들기도 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살인자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엔 그냥 묻어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그 덕분에 다 읽은 뒤에도 독자는 개운한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누구의 입장을 이해해야 할지, 죄와 벌이란 과연 인간의 영역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등 심난한 자문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열광했던 시절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허한 십자가는 부조리하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와 그로 인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 개인의 문제를 잘 녹여냈고, 특히 인물들이 서로 얽히는 과정을 긴장감과 재미를 곁들여 직조해낸 덕분에 오랜만에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초중반부까지 눈에 거슬렸던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번역이 옥의 티였습니다. 초중등생의 눈높이에 맞춘 듯한 짧고 평이한 단문들과 직역의 느낌이 든 문장들 때문에 초보 번역자의 데뷔작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표지를 보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많이 번역한 이선희의 작품이라 좀 의외였습니다. 원작이 그렇게 쓰인 탓일 수도 있고, 처음 접한 전자책의 레이아웃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초중반부까지의 가볍고 쉽고 짧은 문장들이 아쉽게 읽힌 것은 사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엔터테이너 기질과 폭발적인 다작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사회적 문제를 픽션 속에 제대로 버무릴 줄 아는 그의 탁월한 필력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후의 차기작들이 그런 맥락을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신작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분간은 여전하겠지만, ‘공허한 십자가의 완성도와 만족감이 이어진다면 그 역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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