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뽑은 '도쿄 기담집' 수록작 중 베스트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편한 전통적인 내러티브에 가까웠고,

'도쿄 기담집' 전체를 관통하는 '우연'과 '상실'이라는 모티브가 가장 잘 살아있는,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기리에 같은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을 꿈꿉니다.

그 만남이 파티장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이뤄진다면,

또한 그 상대가 내가 찾던 '정말 의미 있는 여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

그 로망은 완벽하게 실현되겠지요.

불행히도 그런 로망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고,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루키는 준페이와 기리에의 만남과 짧은 연애를 담담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대리만족감을 훨씬 더 고양시켰습니다.

 

준페이가 기리에를 '상실'하는 과정 역시 하루키답게 애틋하지만 깔끔했습니다.

그를 통해 준페이는 비록 31살의 나이지만 또한번 삶의 진화를 이루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세뇌당한(?) '세 명의 의미 있는 여자'의 참뜻도 깨닫게 되지요.

기리에가 고층 빌딩 위의 외줄 위에서 바람과 함께 서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괜히 가슴이 시큰해집니다.

신비하지만 어딘가 큰 상처를 감추고 있는 듯한 기리에의 삶이

한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아마 라디오로 기리에의 이야기를 듣던 준페이도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더불어 소설 속의 소설인 준페이의 동명 단편 역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콩팥 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완결된 단편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우연과 상실, 사랑과 로망, 그리고 아스라한 추억 등이

읽는 내내 그림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걸 보면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영상물로 만들어진다면

훌륭한 단편 영화 또는 단막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이 슌지나 고레에다 가즈히로 같은 명장들이 만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딱히 하루키의 팬이라 자칭할 만큼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은 책들 가운데 나만의 베스트에 올리고 싶은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하루키의 작품에 손이 가고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애써 현학적이거나 과다한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도 사람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겸손함도 좋고,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억지스러움 없이 편하게 넘나드는 상상력도 좋고, 때론 퇴폐미로 가득했다가 때론 이상주의자나 순수낭만파, 때론 블랙코믹파로 변신하는 그의 자유로운 운신도 좋습니다.

 

도쿄 기담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그의 겸손함과 상상력을 맛볼 수 있는, 기담이면서 기담 같지 않은 잔잔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입니다. 주변에서 이거, 하루키 맞아?”, “이게 무슨 기담?”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 역시 기담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하루키만의 기이함이나 쇼킹함을 기대했던 터라 다 읽고 난 후에 어딘가 양념 덜 된 심심함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오래 전 빵가게 재습격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수록작들의 줄거리를 요약하다 보니 읽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 했던 미묘한 정서나 분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들을 때는 잘 모르다가 나중에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워지거나 애틋해지는 이야기처럼 뒤늦게 깊은 맛을 깨닫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일상적인 기담들이 실려 있습니다.

 

하루키는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을 위해 스무 개의 키워드를 꼽은 후, 세 개씩을 골라 각각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고 밝혔지만, 굳이 한두 개로 집약하자면 우연그리고 상실 또는 결락(缺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밍아웃 때문에 가족을 잃어버렸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게이 피아노 조율사는 겹쳐진 우연으로 가까워진 한 여인 덕분에 절연했던 누나와 10여년 만에 연락이 닿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을 처지였고, 조율사는 오랫동안 가둬놓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그녀는 물론 매형, 조카들과도 화해합니다.(우연 여행자)

사치의 19살 아들은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도중 상어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로 10년 넘게 아들의 기일을 전후하여 3주 간 하나레이 해변에 머물러 온 사치는 아름답지만 때론 치명적인 하나레이의 자연 속으로 돌아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나레이를 찾은 같은 또래의 일본인 서퍼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하나레이 해변)

 

그 외에도 아파트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20여일 만에 엉뚱한 곳에서 발견됐으나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평생 의미 있는 여자는 셋뿐이라는 아버지의 논리에 세뇌되어 만나는 여자마다 어중간한 관계 이상을 맺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기리에와 신기루 같은 연애를 나누지만 어느 날 홀연히 그녀를 잃어버리고 마는 소설가 준페이(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1년 전부터 문득문득 자신의 이름을 잊게 된 탓에 구청 상담실의 카운슬러를 찾았다가 자신의 무미건조했던 삶과 이름에 얽힌 기이한 사연을 확인하는 미즈키(시나가와 원숭이) 등 다양한 인물들이 우연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좋아하는 작품들이 제각각인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최고와 최악으로 갈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담이라는 특징, 그것도 우연과 상실이라는 메인 코드 때문에 독자마다 공감을 느끼는 폭과 깊이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우연 여행자가 좋았는데, 이 두 작품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편한 전통적인 서사에 가까웠고, 우연과 상실이라는 모티브가 가장 잘 살아있는, 그리고 주변에서 정말 일어날 법한 사실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레이 해변은 일본 영화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비극 앞에서의 담담함이라는 정서가 잘 살아있는 작품인데, 제가 좋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경향과도 잘 맞아떨어져서 그가 영상물로 만든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키는 작품 곳곳에서 이 작품의 메시지입니다”, 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조금은 설명적이거나 테마를 강요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도쿄 기담집의 미덕을 이해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문장들이고, 또 제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문장들이라 이 자리에 소개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우연의 일치는 매우 흔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코, 여신의 영원
시바타 요시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홍보 카피를 보면서 호기심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이 두 코드를 버무렸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10년차 경부보인 무라카미 리코가 이끄는 이야기는 초반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경찰소설의 근간인 사건은 들어본 적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성애소설의 근간인 연애는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진행됐으며, 그 수위는 꽤 높은 편이라 읽는 내내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성에 의한 남성 윤간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사건을 수사하던 신주쿠경찰서의 리코는 안도 아키히코와 다카스 요시히사가 이끄는 본청 5계와의 합동수사를 지시받곤 그들과 얽혔던 2년 전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립니다. 뛰어난 본청 여경이었지만 상사와의 불륜 스캔들에 이어 동료들로부터 끔찍한 집단폭행을 당한 리코는 창녀라는 비난까지 받은 끝에 신주쿠경찰서로 자리를 옮긴 바 있습니다.

그들과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지만 비디오테이프 사건이 점점 심상치 않은 사태로 악화되자 리코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공조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2년 전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리코로 기억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리코는 그녀만의 방식, 즉 그들을 정복하고 강간하는 것으로 복수를 다짐합니다.

 

출발점이 된 사건은 무척 충격적이지만 진범 찾기의 과정만 놓고 보면 조금은 평면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주인공 리코의 추리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긴 하지만, 정체된 수사를 급진전 시킨 것은 대부분 의외의 제보들이었고, 그래선지 조금 이른 타이밍에 대부분의 독자가 진범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리코라는 한 여자의 기구한 삶, 즉 그녀의 성애와 성장을 경찰소설이라는 이질적인 코드와 잘 버무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리코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네 명의 연인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여자입니다. 과거의 연인 중 한 명은 본청 상사이자 유부남이었지만 스캔들이 터지자 비겁하게 도망쳤고, 또 한 명은 청혼까지 했던 본청 동료지만 리코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만 남겼습니다. 현재의 남자 연인은 거칠지만 귀엽고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5살 연하인 동료 경찰입니다. 현재의 여자 연인 역시 동료 경찰이지만 양성애자인 그녀는 리코에게 푸근한 의지처입니다.

유년시절, 리코는 고지식한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육체적 훈련과 함께 순종하는 여성성을 강요당하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남성우월주의자인 과거의 두 연인은 리코를 전혀 다른 여자로 성장시켰습니다. 사랑과 결혼을 완벽하게 부정하게 만들었고, 남자란 몸을 줘야 할상대가 아니라 대등하게 쾌락을 나누는 파트너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는 동성애까지 받아들이게 변화시켰습니다. 아울러 현재의 동성 연인인 마리의 남성관 역시 리코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리에게 남자란 편리한 서바이벌 나이프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 꺼내 필요한 부분만 쓴다. 필요 없을 때는 그냥 접어두면 그뿐. 그것이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고 논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이룬 그녀 앞에 2년 전의 악연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리코는 또 한 단계 비약적인 행보를 걷기로 결심합니다. 과거의 연인들은 그들의 악행은 다 잊은 듯 또다시 리코의 몸과 마음을 탐합니다. 그리고 리코는 조금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리코만의 복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리코는 그때의 리코를 경멸한다. 사랑한다는 뻔한 말에 휘둘려 남자의 성욕을 순순히 채워주는 편한 여자였던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2년 전의 내가 아냐. 그는 오늘 밤 내 소유물이 됐어. 나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그는 열심히 봉사해야 돼.” 리코는 웃고 싶어졌다. “나도 할 수 있지? 당신을 강간하는 것쯤!”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쾌한 복수를 퍼붓는다면 모를까, 쉽게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심리입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자신을 버렸던, 또 끔찍한 기억만 남겼던 남자들과 다시 몸을 섞으면서도 그 행위를 통해 그들을 강간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각오인데, 사실 중반까지는 뭐지?”라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승리감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싶으면서도 동시에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그녀만의 여정에 조금은 동조하게 됐지만, 왠지 리코가 자학하듯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아 끝까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나약하고 갈대 같던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성을 획득함으로써 복수와 쾌락을 동시에 성취하려 했던 리코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리코, 여신의 영원입니다. 만일 한 페미니스트에 의한 단순하고 통쾌한 복수 이야기였다면 아마 재미있게 읽히긴 했어도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작품이 됐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의견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어쨌든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눈길을 끄는 홍보 카피는 제몫을 충분히 해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일본에서 성모의 심연’, ‘월신의 얕은 꿈리코 시리즈가 꽤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호응을 얻어서 나머지 리코 시리즈도 읽어볼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조도둑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과 의사 앤드루 말로우는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칼로 공격하려던 로버트 올리버라는 남성을 맡지만, 그가 전혀 입을 열지 않는 탓에 왜 그림을 공격했는지, 그의 증상을 무엇이라 진단해야할 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올리버가 공격했던 그림은 질베르 토마의 작품 레다였는데,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올리버는 그림을 공격한 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한 일이고, 그 여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생각하시오라는 대답만 할 뿐입니다. 정신과 의사지만 미술에 조예가 깊은 말로우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올리버의 사건에 몰입합니다.

말로우는 올리버의 전처 케이트, 그의 새 연인 메리 버티슨을 만나면서 올리버의 특이한 과거를 알게 됩니다. 그는 광적인 미술가였고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집착에 가까울 만큼 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데만 몰두해왔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676페이지의 <>자를 보는 순간, 중후한 고전 한 권을 끝낸 듯한 뿌듯함과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작가의 전작 히스토리언이 지적 미스터리라는 별칭을 얻은 바 있고, ‘백조도둑역시 예술 미스터리로 분류된 탓에 읽기 전부터 딱 떨어지는 장르물이 아니라 조금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필요한, 즉 예술과 예술가의 세계를 그린 묵직한 작품이란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을 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지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100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과 미술에 관한 대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물은 사랑과 미술로 인해 행복과 불행을 겪는 것은 물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삶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는 때론 비극으로 마무리되기도 하고 때론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지배하는 기본 정서는 안타까움과 애틋함에 가깝습니다.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는 구성인데, 정신과 의사 말로우, 올리버의 전처 케이트, 그의 새 연인 메리가 번갈아 이야기를 이끌고, 1870년대 후반을 살았던 베아트리스와 올리비에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삽화처럼 등장합니다.

말로우의 챕터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향타 역할이라면, 1870년대의 편지는 수십 년의 나이를 건너 뛴 두 남녀, 그것도 근친에 가까운 금단의 사랑을 담고 있어서 호기심과 긴장감을 이끌어냅니다. 반면 케이트와 메리의 챕터는 주로 올리버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그림을 그렸으며 한 여인에 대한 그의 집착이 자신들이 남긴 상처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작품에서 중후하고 묵직한 고전의 향기가 풍기는 것은 누가?’, ‘?’라는 장르물적인 호기심을 능가하는,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작품 전체를 면면히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인 화자인 말로우의 시선을 통해 여러 인물의 희로애락이 묘사되는데, ‘한 여인에 대한 집착과 그림에 대한 광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채 정신병원에 갇힌 올리버, 그를 사랑했지만 깊은 상처만 받곤 등을 돌렸던 케이트와 메리, 그리고 100여 년 전 편지를 통해 사랑과 미술에 대해 논했던 베아트리스와 올리비에 등 평탄하지 못했던 삶을 살아야했던 여러 인물들의 사랑, 욕망, 배신, 절망을 작가는 차분하고 깊이 있는 문장을 통해 그려냅니다. 때론 차분함과 깊이가 실제 고전의 그것에 맞먹을 정도라서 지루함을 줄 때도 있지만, 그 진가는 대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발휘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고비를 넘겨야만 합니다.

 

곳곳에서 소개되는 프랑스 인상파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보너스이자 왜 이 작품이 예술 미스터리로 분류되는지를 입증해주는 대목입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검색창을 열어 당대의 화가나 작품들을 직접 찾아보게 만들 정도로 흥미롭게 설명됩니다. 특히 작품 속 주요 공간인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해안마을 에트르타와 그곳에서 그려진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의 걸작들에 대한 설명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장르물로서의 매력은 한 여인과 그림의 실체가 밝혀지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극대화되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중반부까지의 고전적 서사를 견디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과 미스터리가 조합된 21세기 판 영국식 고전을 기대한다면, 또 너무 급하게 달리려 하지 말고 천천히 인물 하나, 문장 하나를 음미해가며 읽는다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책읽기와 함께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인상파 소설의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파계 재판을 비롯하여 한국에 네 작품이 소개된 작가지만 다카기 아키미쓰와는 첫 만남입니다. 제목도 뭔가 파격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 같고,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라고 해서 굉장히 잔혹한 사건을 다루거나 아니면 예상외의 법정물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다 읽고 난 소감은, 두 가지 기대 모두 빗나갔거나 모두 맞았을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잔혹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주인공의 삶은 끔찍한 악연과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고, 일부 장면 외에는 이야기 전체가 법정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예상외의 법정물이라는 기대 역시 전혀 어긋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라타 가즈히코는 두 건의 살인과 두 건의 사체유기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에 섭니다. 불륜관계에 있던 야스코의 남편 겐지를 살해 후 유기한 혐의와 그로부터 한 달 후 연인인 야스코마저 살해 후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타는 겐지의 사체유기만 인정할 뿐 나머지 세 건의 혐의는 모두 부인합니다. 그는 야스코의 부탁을 받아 그녀가 죽인 남편 겐지의 사체를 유기한 게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야스코마저 죽은 상황에서 그의 말은 신빙성을 얻지 못합니다. 더구나 경찰과 아마노 검사는 공금유용과 사기를 비롯하여 꽤나 불온하고 음침한 과거를 갖고 있는 무라타의 주장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정황이 무라타를 연쇄살인과 사체유기의 흉악범으로 지목하는 가운데 젊은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와의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무죄를 확신했고, 그가 시인한 한 건의 사체유기 외의 나머지 사건들의 진실을 캐기 시작합니다.

 

햐쿠타니의 끈질긴 탐문과 자료수집, 멋진 변론과 심문은 물론 그의 슈퍼 와이프(?) 아키코의 탐정을 방불케 하는 자료조사는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는 히어로 변호사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구축합니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욕망과 끝없는 탐욕을 앞세워 무라타의 삶에 끼어든 뒤 그를 흔들고 괴롭히고 왜곡한 끝에 흉악범임에 틀림없어!”라고 단정하게 만든 주변 인물들 역시 적절하게 잘 배치되어 있어서 법정물을 읽을 때의 재미 -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악당들에 대한 분노의 게이지가 쉴 새 없이 솟구치고, 누명쓴 주인공에 대한 조바심과 안쓰러움이 요동치는 - 를 배가시킵니다.

 

하지만 책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다양한 법정물을 경험한 독자 입장에서 1961년에 집필된 이 작품의 개성이나 반전은 예상외의 법정물이라고 극찬하기엔 조금은 단선적이고 심플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뭐랄까, 정직한 돌직구 같은 느낌? 또한 일본인, 그것도 패전 전후를 살아온 세대가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데 문제는 이 설정이 재판의 기류를 크게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다,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라는 부제의 숨은 뜻을 가리킬 정도로 중요한 설정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초반에 얼핏 언급되긴 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조금은 형이상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인 논리처럼 보이는 이 설정 덕분에 공감도는 갑자기 훅이 떨어지고, 그 지점부터는 쉽게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작가는 나름 그 설정에 대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부연설명을 하지만, 역시 외국 독자나 요즘 세대 독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인 느낌이었습니다.

 

분류상 100% 법정물이긴 하지만, ‘파계 재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날 때부터 일그러진 삶을 부여받았고 그로 인해 예정된 불행한 인생경로를 살아온 한 남자의 휴먼스토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의 선의는 타인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왜곡당했고, 그가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맞이한 위기는 평생 그를 외면하다가 딱 한번 찾아온 행운 덕분에 극복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누명을 벗은 승리의 기쁨만은 아닙니다. 그래선지 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는 오히려 부차적인 서사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돌직구 같은 고전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매력적인 작품이 될 것이고, 이리저리 꼬이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복잡한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양념이 덜 들어간 심심한 여운을 남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