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쿄 기담집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평점 :
딱히 하루키의 팬이라 자칭할 만큼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은 책들 가운데 ‘나만의 베스트’에 올리고 싶은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하루키의 작품에 손이 가고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애써 현학적이거나 과다한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도 사람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겸손함도 좋고,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억지스러움 없이 편하게 넘나드는 상상력도 좋고, 때론 퇴폐미로 가득했다가 때론 이상주의자나 순수낭만파, 때론 블랙코믹파로 변신하는 그의 자유로운 운신도 좋습니다.
‘도쿄 기담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그의 겸손함과 상상력을 맛볼 수 있는, 기담이면서 기담 같지 않은 잔잔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입니다. 주변에서 “이거, 하루키 맞아?”, “이게 무슨 기담?”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 역시 기담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하루키만의 기이함이나 쇼킹함을 기대했던 터라 다 읽고 난 후에 어딘가 양념 덜 된 심심함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오래 전 ‘빵가게 재습격’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수록작들의 줄거리를 요약하다 보니 읽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 했던 미묘한 정서나 분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들을 때는 잘 모르다가 나중에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워지거나 애틋해지는 이야기처럼 뒤늦게 깊은 맛을 깨닫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일상적인 기담들이 실려 있습니다.
하루키는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을 위해 스무 개의 키워드를 꼽은 후, 세 개씩을 골라 각각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고 밝혔지만, 굳이 한두 개로 집약하자면 ‘우연’ 그리고 ‘상실 또는 결락(缺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밍아웃 때문에 가족을 잃어버렸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게이 피아노 조율사는 겹쳐진 우연으로 가까워진 한 여인 덕분에 절연했던 누나와 10여년 만에 연락이 닿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을 처지였고, 조율사는 오랫동안 가둬놓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그녀는 물론 매형, 조카들과도 화해합니다.(우연 여행자)
사치의 19살 아들은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도중 상어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로 10년 넘게 아들의 기일을 전후하여 3주 간 하나레이 해변에 머물러 온 사치는 아름답지만 때론 치명적인 하나레이의 자연 속으로 돌아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나레이를 찾은 같은 또래의 일본인 서퍼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하나레이 해변)
그 외에도 아파트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20여일 만에 엉뚱한 곳에서 발견됐으나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평생 의미 있는 여자는 셋뿐’이라는 아버지의 논리에 세뇌되어 만나는 여자마다 어중간한 관계 이상을 맺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기리에와 신기루 같은 연애를 나누지만 어느 날 홀연히 그녀를 잃어버리고 마는 소설가 준페이(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1년 전부터 문득문득 자신의 이름을 잊게 된 탓에 구청 상담실의 카운슬러를 찾았다가 자신의 무미건조했던 삶과 이름에 얽힌 기이한 사연을 확인하는 미즈키(시나가와 원숭이) 등 다양한 인물들이 ‘우연’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좋아하는 작품들이 제각각인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최고와 최악으로 갈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담이라는 특징, 그것도 우연과 상실이라는 메인 코드 때문에 독자마다 공감을 느끼는 폭과 깊이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과 ‘우연 여행자’가 좋았는데, 이 두 작품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편한 전통적인 서사에 가까웠고, 우연과 상실이라는 모티브가 가장 잘 살아있는, 그리고 주변에서 정말 일어날 법한 사실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레이 해변’은 일본 영화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비극 앞에서의 담담함’이라는 정서가 잘 살아있는 작품인데, 제가 좋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경향과도 잘 맞아떨어져서 그가 영상물로 만든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키는 작품 곳곳에서 “이 작품의 메시지입니다”, 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조금은 설명적이거나 테마를 강요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도쿄 기담집’의 미덕을 이해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문장들이고, 또 제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문장들이라 이 자리에 소개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우연의 일치는 매우 흔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