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모중석 스릴러 클럽 7
존 카첸바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부터 망상과 환청에 시달려온 페트럴 프랜시스는 23살이 된 1979년 이른 봄, 가족들에 의해 웨스턴 스테이트 정신병원에 갇힙니다. 이름보다 별명이 통용되던 그곳에서 프랜시스는 바닷새로 불리게 되고, 교회에 불을 질러 사상자를 내고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입원한 소방수피터를 만납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짧은 금발의 간호사가 참혹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합니다. 한편 훼손된 사체에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발견한 여검사 루시 존스는 관료적인 원장 걸프틸리 박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체류하며 프랜시스와 피터를 조수로 삼아 환자 가운데 숨어있는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방대한 탐문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정신병자들로 가득 찬 병원에서의 생활은 세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 와중에 동일범에 의한 살인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지만 걸프틸리 박사는 정신병자의 단순 자살 또는 병사로 단정지으며 루시의 수사를 방해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정신병원에서 벌어진 스릴 넘치는 연쇄살인범과의 대결인 듯 보이지만, 사실 다 읽고 난 뒤 마음에 남은 것은 한없는 암울함과 지독한 중압감입니다. “이 병원은 사방에 위험이 도사린 곳이며, 불화와 분노와 광기가 뒤섞여 항상 부글거리는 가마솥이었다.”는 묘사대로 존 카첸바크가 그린 웨스턴 스테이트 정신병원의 낮과 밤은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이면서도 약에 취한 환자들의 눈에 비친 몽환적 분위기까지 잘 살아있어서 마치 실제로 그곳에 갇혀있는 듯한 불쾌함을 생생히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세 주인공의 캐릭터 역시 불행과 비극을 테마로 설정돼있습니다. ‘바닷새프랜시스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그의 귓가를 점령한 목소리들이 쉴 새 없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평범한 삶을 구성하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빼앗아갔으며, 결국에는 그를 정신병원이라는 곳까지 몰아세웠습니다.

소방수피터는 원래 유능한 방화조사관이었지만, 조카를 성추행한 신부를 증오하여 그의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정신이상이 입증되면 정신병원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교도소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여검사 루시 존스는 대학 1학년 때 성폭행 당한 후 칼에 맞아 눈 위에서 턱에 이르는 길고 흉한 자상이 남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과 사랑을 잃은 채 성범죄를 전담하는 검사의 길을 걷게 됐는데, 젊은 날 겪은 끔찍한 사건이 자신을 성공한 여검사로 이끌었다고 자위해보지만, 그날의 악몽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 기구한 이력을 지닌 세 명의 주인공과 연쇄살인범이 배치된 만큼 수사는 정상적으로전개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연쇄살인범은 어디선가 이들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공포심을 자극하고, 살인사건마저 자살이나 병사로 위장하려는 원장은 악의적인 탐욕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탓에 바깥세상의 합리성을 기반으로 시작한 수사는 벽에 부딪히고 결국 미친 세상의 룰에 맞춘, 즉 가장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용의자를 찾기에 이릅니다. 일부러 환자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혼란을 야기하여 연쇄살인범의 이상행동을 유도하거나 주인공 스스로 미끼가 되고 함정을 파는 등 미친 세상에 어울리는 전략을 짜내기에 골몰합니다.

 

장소, 사건, 인물 모두 일그러지고 비틀린 설정으로 이뤄졌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조합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독특한 분위기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는데,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암울한 정서가 워낙 강한데다 주인공들의 불안정한 심리나 정신병원 환자들의 막장 같은 삶에 대한 묘사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다 보니 정작 사건 자체나 수사과정은 관심 밖으로 밀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분량 상으로도 600여 페이지 가운데 사건과 수사에 할애된 것은 절반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번역자는 인간의 심리를 한 올 한 올 파고들어가는 치밀한 관찰력을 이 작품의 미덕 가운데 한가지로 꼽았는데, 분명 일리 있고 공감되는 이야기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이 치밀한 관찰력이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문학을 연상시키는 깊이 있는 문장과 다채롭고 화려한 비유는 존 카첸바크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지만 느슨한 만연체를 즐기지 않는 독자에게는 넘기 힘든 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존 카첸바크의 작품 가운데 중고로 구입한 애널리스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분량도 비슷하고(646p), 꽤나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 내용인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고 넘기 힘든 산이지만, 똑같은 이유로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걸 보면 존 카첸바크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바이, 엔젤 - 라루스가 살인 사건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유명 평론가의 소설 데뷔작이라는 정보 때문에 최신작으로 알고 읽었는데, 1974년에 집필된 작품인데다 탄생의 배경이 무척 독특하다는 점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좌익학생운동 도중 동지 12명을 집단 구타해 죽인 연합적군사건을 접한 작가 가사이 기요시는 1974년 파리로 건너가 혁명을 꿈꾸던 인간이 왜 학살을 저지르는가?’라는 문제를 추적하며 테러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거의 동시에 바이바이 엔젤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사체, 호텔방에서 폭사한 남자, 숲속의 여자 변사체 등 라루스 가문과 관련된 참혹한 연쇄살인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 탐정물이지만,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이야기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 때문에 바이바이 엔젤은 조금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할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라루스 가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모가르 경정과 바르베스 경감이 나섭니다. 그리고 모가르 경정의 딸인 나디아 역시 탐정 못잖은 의욕과 호기심으로 사건에 뛰어드는데, 나디아는 같은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에게 묘한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살인사건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증거와 추론을 바탕으로 한 나디아의 정석 수사와 달리 가케루는 현상학적 본질직관이라는 독특한 수사기법을 구사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변사체 이후 새로운 희생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나디아는 그동안의 추리를 바탕으로 자신 있게 진범을 지목하지만 가케루의 가차 없는 공격을 받곤 자신의 논리와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곳곳에서 고전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바이바이, 엔젤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어딘가 4차원스러운 탐정 역할을 맡은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의 캐릭터입니다. 그를 묘사한 내용을 대략 편집해보면 음악, 미술, 철학, 역사 등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심문자의 화술, 미행을 따돌리는 기술, 마술사를 능가하는 손놀림 등 어딘가 수상쩍은 기질도 지닌 인물입니다. 매일 밤 권총을 관자놀이에 댄 채 명상에 잠기는 그는 현상학의 실천을 위해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과 하루 한 끼의 식사, 그리고 독서와 산책만으로 삶을 영위합니다. 자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고, 여자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캐릭터만 놓고 보면 무척 흥미롭고 신선해 보이지만, 가케루의 철학적 스탠스이자 수사 기법인 현상학 때문에 읽는 내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작가 나름대로 쉽고 친절하게 현상학에 대해 누차 설명하고 있지만, 대학 1학년 때 끝없는 두통과 함께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철학 개론처럼 현상학 관련 내용은 몇 번씩 되읽어가며 노력했음에도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았고, 그를 기반으로 한 가케루의 수사는 어딘가 신비주의 또는 예지자의 그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상학은 난해한 기존 철학과 달리 본질직관을 통해서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의 정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도 그게 원이라는 걸 본질직관을 통해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케루는 탐정은 사건을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게 아니라 직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나디아의 추리 방법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개별적인 요소로 분해한 다음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보면서 그 안에서 지렛대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정리한다고 했지만 역시 어렵고 난해합니다. 번역자도 가케루는 현상학을 이용하여 사건을 추리하고 철학적인 주장을 펴는데 여기에서 독자의 호불호가 갈린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 방식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가더라도 연쇄살인을 풀어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와 진범의 실체는 꽤 커다란 위화감을 자아냈습니다. 자세한 언급은 어렵지만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던 외적 요소들이 중요한 범행 동기로 밝혀지는데, 제가 느낀 위화감의 실체는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또 작가의 사상적-철학적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 무리하게 이야기를 짜맞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결론을 위해 과정을 작위적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이랄까요? “추리소설이지만 범죄를 그린다기 보다는 사상을 그리기 위해 쓰였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철학적인 문장들이 번거로운 분들은 좀 어려운 문장이 나온다 싶으면 과감하게 패스하고 사건 해결의 과정에만 집중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자 미덕이 가케루와 현상학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다 보면 오히려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는 서머 아포칼립스’(1981)가 곧 출간된다는데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가 독자들의 흥미를 계속 이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독 소사이어티 - 82명의 살인 사건 전문가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비독 소사이어티는 장르가 참 모호한 작품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대체로 사회 분야(사회과학, 사회문화, 사회문제 등)로 구분해놓았는데, 실은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집이면서 동시에 미스터리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기록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픽션에 못잖은 캐릭터와 참혹한 사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 더 재미있게 짜여있기 때문입니다.

 

1990년 필라델피아에서 출범한 비독 소사이어티는 미제 사건 전문 명탐정 드림팀입니다. 유능한 현장 경찰에서부터 FBI, 세관, 마약단속국 등 다양한 기관의 인재들이 모여 경찰로부터 요청 받은 미제 사건을 함께 수사하고 해결합니다. 비독 소사이어티라는 명칭은 1811년 프랑스에서 최초의 국립수사기관 쉬르테를 설립했으며 아르센 뤼펭, 셜록 홈스, 오귀스트 뒤팽 등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프랑수아 비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는 악명 높은 살인자, 바람둥이, 사기꾼, 노상강도, 탈옥자였지만 결국엔 위대한 탐정이자 파리 최고의 경찰이 된 특이한 인물입니다. 경찰로서의 그의 가장 큰 미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이 돼주는 친구였다는 점, 그리고 가족을 위해 빵을 훔친 사람에겐 관대했다는 점입니다.

 

비독 소사이어티는 그런 미덕을 이어받아 미제 사건의 살인자들을 추적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피해자의 가족들을 보호하는 목적에서 출발했습니다. 살인에 관한 한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활약은 짧게는 2년 전, 길게는 40여년이 지난 사건에까지 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은 관할 경찰에 넘기고 자신들은 무대 뒤의 자리에 만족했는데, 언론은 자원 봉사로 일하는 일류 탐정들’,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카우보이들이라 불렀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은 적어도 이 작품이 커버하고 있는 2009년까지 계속 됩니다.

 

비독 소사이어티는 82명의 회원으로 구성됐지만 이 작품은 모임을 주도한 3명의 명탐정과 그들이 해결한 10여 건의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화려한 현장 경력을 자랑하는 전직 FBI 수사관이자 모임의 창시자인 윌리엄 플라이셔, 명석하지만 오만하기까지 한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 낭만적인 바람둥이에 직감과 본능에 의존하는 법의학 예술가 프랭크 벤더가 그들인데, 특히 이성적인 리처드와 감성적인 프랭크의 콤비 플레이는 비독 소사이어티의 백미입니다.

 

교도소에서 프로파일러의 이력을 쌓았고 현장 사진만으로도 범죄자의 성향을 정확하게 지목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리처드에 반해 프랭크는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남들은 갖지 못한 3의 눈덕분에 영매에 가까운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여 난제로 꼽히던 미제 사건을 거뜬히 해결합니다. 프랭크는 20년 전의 사진만으로도 현재 그 인물의 생김새를 유추할 수 있고, 피부 하나 없는 두개골만으로도 당시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극과 극을 달리는 성향 때문에 리처드와 프랭크는 내내 티격태격 으르렁대지만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서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들이 다룬 사건은 하나같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데, 범인은 어지간한 픽션 속의 연쇄살인범보다 더 잔인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디스트들이고, 희생자들의 끔찍한 최후는 충격적이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묘사됐습니다. 특히 이 작품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읽으면서 느끼는 체감 충격은 훨씬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뉴욕 범죄조직의 두목, 자신의 가족이나 약혼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마, 소년소녀들을 성폭행하거나 살해한 신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희대의 사디스트들이 저지른 미제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3명의 조촐한 점심 모임에서 출발하여 산 자의 동료이자 죽은 자의 영웅으로 진화한 비독 소사이어티와 그 멤버들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그런 조직의 탄생과 활동이 가능했던 사회적 환경에 대한 부러움까지 갖게 됩니다.

 

작품 후반부에 소개된 천재적인 프로파일러 리처드의 헬릭스 이론은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나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대목입니다. 헬릭스는 사디스트 유형을 단계적으로 나누고 각 단계의 특징을 설명한 그림이자 도표인데, 페티쉬나 관음증에서 시작된 범죄가 접촉도착증과 상대를 구속하려는 증상을 거쳐 신체의 일부 등을 기념품으로 수집하는 가학적 살인자의 단계를 지나 시간(屍姦), 흡혈, 식인이라는 사디스트의 최종적인 경지까지 진화하는 과정을 8단계로 나눈 후 실제 범죄 사례를 들어 자세히 묘사합니다. 새삼 그동안 읽은 픽션 속의 연쇄살인범들이 어느 단계쯤이었는지 떠오르기도 했고, 앞으로 만날 연쇄살인범들에 대해서도 나름 사전 지식을 갖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면 비독 소사이어티는 스릴러 소설의 쾌감, 프로파일러가 주인공인 미드의 흥미, 인간극장의 감동이 버무려진작품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아마 이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한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작품이 인터넷서점에서 사회 분야로 분류된 탓에 많은 장르물 독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까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저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쓴 소리를 한 가지만 하자면, 요즘 출간되는 책들이 당연하다는 듯 오타를 남발하고 있다 보니 중반 정도까지 발견된 평균치 수준의 오타는 어떻게든 참아내고 읽었지만, 그 이후부터 점점 빈도도 높아지고 납득하기 어려운 오타까지 등장한 탓에 내용보다 오타에 더 신경이 쓰이면서 책읽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별 다섯 개도 부족한 작품이지만 오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옥의 티였습니다. 수많은 띄어쓰기 오류는 지적하기도 무안할 정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관심은 있었지만 계속 미뤄두고 있던 편혜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첫 단편집 아오이 가든부터 최신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읽을 생각이지만, 아마 연이은 편혜영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한 달에 한 권 정도? 그 이상은 뇌나 마음이 소화하기 힘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먼저 읽은 작품의 뒷맛을 어느 정도 만끽한 후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된 편혜영 읽기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보통 누구누구에게 바친다”, “감사한다라는 글이 들어가는 책의 첫 머리에 편혜영은 안녕 시체들이라는, 간결하지만 임팩트 있는 다섯 글자를 남겼습니다. 수록된 아홉 편에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미 죽었든 곧 죽을 예정이든 여러 시체가 등장합니다. 한 번에 한두 편씩만 읽느라 미처 발견 못한 부분이지만, 후반부의 해설을 통해 수록작 대부분의 처음 또는 마지막 문장이 시체에 관한, 또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묘사로 이뤄졌음을 알게 됐습니다.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저수지)

“C는 눈동자가 빠진 하얀 눈으로 내가 흘린 내장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맨홀)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문득,)

 

시체 또는 예비 시체들의 상태가 양호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에 잠겨 퉁퉁 불었거나 여러 조각으로 해체됐거나 단백질 결핍과 천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작품 첫 머리에 인쇄된 안녕 시체들이라는 다섯 글자가 수시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수록작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코드를 담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였습니다. 역병과 쓰레기가 발산하는 악취로 가득 찬 거리(아오이 가든), 왕피천에 떠오른 여자 시체와 쥐의 사체가 풍기는 시취(문득,), 개를 두들겨 잡던 삼촌의 온몸에 배어있던 개 냄새(만국박람회), 아내가 즐겨먹던 생선 눈알이 작동을 멈춘 냉장고 안에서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시체들), 고양이 삶은 냄새와 여자의 오줌 냄새가 뒤섞인 약국의 노린내(서쪽 끝) 등 실제 후각으로 느껴지듯 생생한 냄새의 묘사가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냄새못잖게 시각적인 자극 역시 강렬했는데, ‘검은 물붉은 피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세기말적 풍경을 묘사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썩은 저수지를 가득 채운 검은 물(저수지), 음산한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풍경(아오이 가든), 왕피천 동굴을 흐르는 물줄기와 그것을 감싼 어둠(문득,), 기록적인 폭우로 토사와 하수와 분뇨에 삼켜진 소도시(만국박람회), 아내를 삼킨 뒤 사지를 토막내버린 U시의 깊고 거친 계곡물(시체들), 자궁을 찢고 태어난 붉은 피로 범벅된 아이 또는 개구리(마술피리, 아오이 가든), 폐경과 월경을 반복하며 피를 쏟아내는 엄마(아오이 가든)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독자의 시각과 후각을 점령한 채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 불편하고 거북하며 심지어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로 극단적인 서사를 보여줍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사라지고, 엽기적인 공포와 괴담으로 가득 찬 무대가 펼쳐집니다. ‘해설은 이런 편혜영의 작품 세계를 하드고어 원더랜드라고 표현합니다. 동시에 그녀만의 표현방식을 단테적 상상력, 카프카적 상상력과 결부시킵니다. 특히 주류 리얼리즘으로부터 폄하되어 온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서사를 적극 변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평범한 독자들이 이러한 변호를 , 그렇구나하고 끄덕끄덕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건 뭐지?’가 보편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저 역시 편혜영 읽기의 출발점에서 적잖은 충격과 암담함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해설을 꼼꼼히 읽어봤지만, 여전히 동굴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래도 계속 읽다 보면 지금은 이해 불가능한 그녀만의 세계를 어설프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된 건 해설말미의 몇 줄 덕분이었습니다.

 

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이미지들 속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소설 미학의 낯선 차원을 만나는 두근거리는 모험이 될 것이다.“

 

이 몇 줄을 의지 삼는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중단 없이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2007년에 나온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입니다.

 

사족으로.. 거의 동시에 또 한 명의 관심작가인 한강의 작품들을 비슷한 방법으로 읽을 계획입니다. ‘여수의 사랑이 그 시작점이 되는데, 늦어도 1년 안에 두 작가의 작품을 완독하려고 합니다. 편하게 읽히는 작가들은 아니지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정작 그 불편함때문이었기에 모난 돌 같으면서도 고유의 색깔을 품고 있는 두 작가의 세계를 만끽하는 책읽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의 여자 동서 미스터리 북스 9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구했지만,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 년은 더 책장 신세를 면치 못했을 작품입니다. ‘도착의 론도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주인공의 추리소설 제목이 환상의 여인인데다 그것이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선 출판사에 따라 제목을 환상의 여자또는 환상의 여인으로 붙였습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1942년 작 ‘Phantom Lady’는 세 가지 버전으로 국내에 출간됐는데, 제가 읽은 것은 2008년에 27(초판 1977)를 찍은 동서문화사의 환상의 여자입니다. 초판이 워낙 오래돼서 그런지 등장인물의 이름도 최근 출간된 작품들과는 다르게 표기됐습니다. 존 롬바드(엘릭시르)와 잭 론버드(동서), 버지스(엘릭시르)와 바제스(동서)가 대표적 경우인데, 이 서평에서는 제가 읽은 동서문화사 표기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홍보카피에 따르면 세계 3대 미스터리이며, 미스터리 팬이라면 읽지 않았어도 줄거리는 다 아는작품이라지만, 3대 미스터리라는 것이 일본에서 근거도 없이 갖다 붙인 타이틀이란 점은 진작 알고 있었고, 제 경우 나름 미스터리 팬을 자처하는 편이지만 무슨 이야기인지조차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유명세를 떨친 작품이고, 아직 못 읽은 고전이라는 점 때문에 약간은 숙제나 의무감 같은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습니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스콧 헨더슨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아내와 다툰 후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가 오렌지색 모자를 쓴 환상의 여자를 만나 늦은 밤까지 바, 극장, 레스토랑 등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이 아내가 살해된 것입니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만 찾으면 무죄입증은 간단해지는데, 문제는 그녀의 이름이나 주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외모까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 그녀와 함께 다녔던 바, 극장, 레스토랑은 물론 마주쳤던 택시기사, 거지 등 모두가 스콧 헨더슨은 기억하지만 곁에 있던 여자는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형일자가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그의 무죄를 믿는 형사 바제스의 권유로 스콧 헨더슨은 절친인 잭 론버드에게 환상의 여자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론버드의 끈질긴 탐문에도 환상의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목격자들이 한 명씩 기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1942년 작임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내용, 구성, 전개 모두 올드함이 과합니다. CCTV만 있었다면 금세 해결될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설정, 수사(탐문)의 과정, 반전의 구조 등 미스터리의 뼈대 자체가 너무 허술하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나머지 공감을 얻지 못 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밤이었고, 나란히 앉은 시간이 많았으며,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스콧 헨더슨이 환상의 여자의 외모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한다는 설정, 또 사건과 무관한, 더구나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가 중남미에서 날아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처럼 탐문을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반전과 진범의 범행 동기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실은 조금은 화가 난 상태로 서평을 쓰고 있는 중인데, 그건 작품 자체보다 제가 읽은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에 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명백히 직역이거나 일본식 번역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문장들 때문에 맥락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몇 번씩 다시 읽어도 그 의미가 모호한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드물지 않게 보이는 오타가 1977년 초판 이후 무려 30여년이 흘러 27쇄가 되도록 고쳐지지 않은 건 이해할 수가 없었고, “있었소.”, “아닐세.”, “생각나오?” 등 사극 대사와 꼭 닮은 문장들 역시 초판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물론 오류투성이의 낡은 번역 때문에 작품 자체를 비난해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했고, 그러다 보니 작품 자체가 가진 약점이 더 도드라져 보였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지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분명 인정할 부분이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딱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미덕마저 온전치 못하게 만든 것은 명백히 불량한 번역과 30년 넘게 수정 한 번 하지 않고 재쇄만 남발한 출판사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