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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관심은 있었지만 계속 미뤄두고 있던 ‘편혜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첫 단편집 ‘아오이 가든’부터 최신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읽을 생각이지만, 아마 연이은 ‘편혜영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한 달에 한 권 정도? 그 이상은 뇌나 마음이 소화하기 힘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먼저 읽은 작품의 뒷맛을 어느 정도 만끽한 후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된 ‘편혜영 읽기’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보통 “누구누구에게 바친다”, “감사한다”라는 글이 들어가는 책의 첫 머리에 편혜영은 “안녕 시체들”이라는, 간결하지만 임팩트 있는 다섯 글자를 남겼습니다. 수록된 아홉 편에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미 죽었든 곧 죽을 예정이든 여러 시체가 등장합니다. 한 번에 한두 편씩만 읽느라 미처 발견 못한 부분이지만, 후반부의 ‘해설’을 통해 수록작 대부분의 처음 또는 마지막 문장이 시체에 관한, 또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묘사로 이뤄졌음을 알게 됐습니다.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저수지)
“C는 눈동자가 빠진 하얀 눈으로 내가 흘린 내장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맨홀)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문득,)
시체 또는 예비 시체들의 상태가 양호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에 잠겨 퉁퉁 불었거나 여러 조각으로 해체됐거나 단백질 결핍과 천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작품 첫 머리에 인쇄된 ‘안녕 시체들’이라는 다섯 글자가 수시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수록작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코드를 담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였습니다. 역병과 쓰레기가 발산하는 악취로 가득 찬 거리(아오이 가든), 왕피천에 떠오른 여자 시체와 쥐의 사체가 풍기는 시취(문득,), 개를 두들겨 잡던 삼촌의 온몸에 배어있던 개 냄새(만국박람회), 아내가 즐겨먹던 생선 눈알이 작동을 멈춘 냉장고 안에서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시체들), 고양이 삶은 냄새와 여자의 오줌 냄새가 뒤섞인 약국의 노린내(서쪽 끝) 등 실제 후각으로 느껴지듯 생생한 냄새의 묘사가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냄새’ 못잖게 시각적인 자극 역시 강렬했는데, ‘검은 물’과 ‘붉은 피’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세기말적 풍경을 묘사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썩은 저수지를 가득 채운 검은 물(저수지), 음산한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풍경(아오이 가든), 왕피천 동굴을 흐르는 물줄기와 그것을 감싼 어둠(문득,), 기록적인 폭우로 토사와 하수와 분뇨에 삼켜진 소도시(만국박람회), 아내를 삼킨 뒤 사지를 토막내버린 U시의 깊고 거친 계곡물(시체들), 자궁을 찢고 태어난 붉은 피로 범벅된 아이 또는 개구리(마술피리, 아오이 가든), 폐경과 월경을 반복하며 피를 쏟아내는 엄마(아오이 가든)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독자의 시각과 후각을 점령한 채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 불편하고 거북하며 심지어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로 극단적인 서사를 보여줍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사라지고, 엽기적인 공포와 괴담으로 가득 찬 무대가 펼쳐집니다. ‘해설’은 이런 편혜영의 작품 세계를 ‘하드고어 원더랜드’라고 표현합니다. 동시에 그녀만의 표현방식을 단테적 상상력, 카프카적 상상력과 결부시킵니다. 특히 주류 리얼리즘으로부터 폄하되어 온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서사를 적극 변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평범한 독자들이 이러한 변호를 “아, 그렇구나” 하고 끄덕끄덕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건 뭐지?’가 보편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저 역시 ‘편혜영 읽기’의 출발점에서 적잖은 충격과 암담함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해설’을 꼼꼼히 읽어봤지만, 여전히 동굴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래도 계속 읽다 보면 지금은 이해 불가능한 그녀만의 세계를 어설프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된 건 ‘해설’ 말미의 몇 줄 덕분이었습니다.
“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이미지들 속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소설 미학의 낯선 차원을 만나는 두근거리는 모험이 될 것이다.“
이 몇 줄을 의지 삼는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중단 없이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2007년에 나온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입니다.
사족으로.. 거의 동시에 또 한 명의 관심작가인 한강의 작품들을 비슷한 방법으로 읽을 계획입니다. ‘여수의 사랑’이 그 시작점이 되는데, 늦어도 1년 안에 두 작가의 작품을 완독하려고 합니다. 편하게 읽히는 작가들은 아니지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정작 그 ‘불편함’ 때문이었기에 모난 돌 같으면서도 고유의 색깔을 품고 있는 두 작가의 세계를 만끽하는 책읽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