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모두 세 편이 출간된 도착 시리즈는 서술트릭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술트릭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계속 손을 댈까, 말까 고민했던 게 사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8:2 정도로 재미보다는 실망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자 권일영이 후기를 통해 서술트릭은 대성공과 대실패, 두 가지 결과만 얻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결과를 알고도 몇 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엔 이 무슨 말장난?”이라는 불쾌감만 남게 됩니다. (이해 못할 분들이 더 많겠지만) 서술트릭의 국대급인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제겐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호기심에, 또 실망할 때 실망하더라도 일단 읽어보자는 마음에 시리즈의 첫 편인 도착의 론도를 집어 들었습니다.

 

고생 끝에 완성한 작품을 월간추리 신인상에 응모하려던 야마모토 야스오는 친구 아키라의 어이없는 실수로 응모작을 도둑맞습니다. 다시 집필을 시작해 마감일 직전 원고를 완성하지만, 이번에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그해 신인상은 시라토리 쇼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는데, 문제는 당선작이 자신이 썼던 원고와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똑같다는 점입니다. 여기저기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만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야마모토는 도작(盜作)’의 원흉인 시라토리 쇼를 응징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획득한 고급아파트와 여자까지 빼앗을 작정입니다. 뜻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갈 무렵 그는 두 번째 습격을 당하지만 이번엔 범인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 역시 해결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밝혀진 진실은 앞서 서술됐던 모든 이야기를 전부 뒤엎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이 도착(倒錯)의 론도였음이 드러납니다.

 

-도착(倒錯)

1. 뒤바뀌어 거꾸로 됨.

2.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

 

-론도(rondo)

1. 원무곡을 가리키며, 원무 또는 그 노래를 이르는 말.

2. 주제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되풀이되면서 나타나는 음악의 한 형식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도착론도두 단어를 조합하여 해석하면, ‘뒤바뀌고 거꾸로 된, 그것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이 원을 그리듯 되풀이 됨입니다. 특이한 제목이지만 이만큼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대변한 경우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인물도, 사건도, 이야기도 모두 도착과 론도의 회오리 속에 갇혀있어서 독자로서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올바른 상태, 즉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목차만 봐도 뭔가 뒤바뀌거나 잘못된, 그리고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도작의 발견 (프롤로그)

-도작의 진행 (1)

-도착의 진행 (2)

-도착의 도작 (3)

-도작과 도착 (에필로그)

(참고로, 도작(盜作)과 도착(倒錯)은 도사쿠(とうさく)라는 같은 발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번역자의 이야기를 인용하면, “작가와 한바탕 숨바꼭질을 하며 즐긴다면 - 번역자는 이를 작가가 작품의 바탕에 깔아놓은 유희정신이라고 표현했는데 - ‘도착 시리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리하라 이치가 열심히 뒤바꿔놓고, 거꾸로 놓고, 되풀이 시켜놓은 것을 숨바꼭질 하듯 열심히, 단 즐기면서 찾아내거나 발견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문장은 참 쉽습니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도 불필요하게 꼬아놓지 않아서 몇 시간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하면서도 연이어 변곡점을 품고 있어서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도착의 론도의 진실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감탄할 수도,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론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의 횟수와 속도가 빨라서 오히려 제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얻어맞긴 맞았는데 어디를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파악하느라 얻어맞은 충격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라고 할까요?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은 우려했던 만큼 실망감을 주진 않았지만, 기대만큼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착의 의미도 대략 이해가 됐고, 어느 정도 패턴을 읽어냈다고 생각하니 후속작인 도착의 사각이나 도착의 귀결에서는 왠지 작가의 함정과 트릭을 미리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99%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도전해볼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어서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인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읽을 생각입니다. 고전 명작임에도 아직 읽지 못 했는데 도착의 론도덕분에 먼지 쌓인 책장에서 구해줄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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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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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족에게 상처받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세 사람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틀에 박힌 여자의 삶을 강요하는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3살에 겪은 끔찍한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경찰이 되어 홀로 살아가는 아사야마 후키, 음악을 하고 싶어 학교는 물론 가족과도 절연한 채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며 고독의 노랫소리에 파묻혀 사는 요시카와 준페이, 그리고 불행한 가족사와 억압당한 성장기 탓에 완벽한 사랑으로 이뤄진 완벽한 가족을 갈망하며 잔혹한 연쇄살인마가 돼버린 마쓰다 다카시가 그들입니다.

 

절도 수사팀의 후키는 편의점 연쇄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중 준페이를 만납니다. 가족은 물론 친구조차 없는 혼자라는 공통점, 그리고 고독한 삶을 원하지만 바로 그 고독한 삶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공통점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흐르게 만듭니다.

한편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고독한 삶을 강요당한 다카시는 완벽한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나섭니다. 납치된 여자들에게 자신의 가족사가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며 고문과 세뇌를 가하지만 모두 그가 꿈꾸는 완벽한 가족의 마지막 퍼즐이 되기를 거부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점찍은 최상의 가족 후보는 바로 여경 아사야마 후키였습니다.

 

캐릭터와 줄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무척 무겁고 어두운 작품입니다. “가족은 인간의 안식처지만, 모든 욕망과 억압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하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작품 속 가족들은 하나같이 일그러지고 굴절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폭압적이거나 기성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는 불행의 순도가 너무 높아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입니다. 또한 피해자의 신체를 고깃덩어리처럼 훼손하는 다카시의 범행은 잔혹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너무 끔찍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읽기를 힘들게 했던 것은 고독에 대한 지나친 강조였습니다. 그들의 고독이 드리운 그늘은 너무 짙었고, 때론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보기 불편했습니다. 더구나 그 묘사의 양이 필요 이상으로 방대하다 보니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현실감은 떨어지고 작위적인 느낌만 남았습니다. 물론 이들의 고독이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트라우마라는 점, 또 고독한 삶으로 인해 서로 악연 또는 인연을 맺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 묘사가 지나친 나머지 이 사람들, 그저 철없는 어른들일 뿐이네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듭니다.

다만 후키의 집요한 탐문과 준페이의 활약에 힘입은 사건 해결과정이라든가 후반부에 밝혀지는 몇 가지 진실들 - 후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유년의 악몽이라든가 다카시가 희생자들에게 보여준 비디오 속의 비밀, 그리고 다카시의 어머니가 그의 뇌리에 박아 넣은 괴물 같은 유산 등은 이 작품이 추리서스펜스 대상수상작임을 보여주는 반증이자 미덕들이기도 합니다.

 

독자에게 강요하듯 동어반복적으로 묘사된 고독만 아니었다면 수작으로 기억될 작품일 텐데, 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애도하는 사람이후 두 번째로 읽은 텐도 아라타의 작품인데, ‘가족사냥이나 영원의 아이같은 그의 대표작이 초기작인 고독의 노랫소리의 아쉬움을 덜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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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안녕을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1 탐정 링컨 페리 시리즈 1
마이클 코리타 지음, 김하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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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러운 사고로 경찰복을 벗은 링컨 페리와 경찰 조직에 염증을 느낀 베테랑 조 프리처드는 사립탐정 사무소를 차린 후 처음으로 큼직한 사건을 의뢰받습니다. 의뢰자 존 웨스턴은 경찰이 자살이라 단정한 아들 웨인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고 실종된 며느리 줄리와 손녀 베시의 행방을 파악해달라고 의뢰합니다.

하지만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클리블랜드 경찰과 FBI가 끼어들어 조사중지를 요구하고, 사건의 배후에 클리블랜드 최고의 거부 제러마이아 허버드는 물론 새롭게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 두목 대니우스 벨로프까지 개입됐단 사실을 알곤 링컨과 조는 자신들이 맡은 사건이 평범한 탐정놀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죽은 웨인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찾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향한 링컨은 그곳에서 충격적인 현장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웨인의 죽음의 동기는 물론 클리블랜드 거부와 러시아 마피아의 관계, 사건 수사에 끼어들었던 경찰과 FBI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밤을 탐하다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마이클 코리타의 작품입니다. 액션스릴러, 그것도 재벌이나 마피아, FBI가 등장하는 작품은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밤을 탐하다덕분에 마이클 코리타의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최근 인터넷서점의 행사를 통해 오늘 밤 안녕을숨은 강두 편을 구입했습니다. ‘링컨 페리 시리즈의 첫 편이기도 한 오늘 밤 안녕을밤을 탐하다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 영화의 원작에 잘 어울리는 재미있고 빨리 읽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입니다.

 

어딘가 삐딱해 보이고 모난 돌처럼 제멋대로인 젊은 링컨 페리와 장년의 조 프리처드는 상투적이긴 하지만 안정감 있고 매력적인 사립탐정 콤비입니다. 탐정, 살인사건, 마피아, 재벌, 경찰, FBI, 그리고 애틋한 로맨스와 거듭된 반전 등 흥미 요소가 가득한데다 롤러코스터처럼 한시도 안심할 수 없게 이야기가 요동치고, 단순 탐문에서부터 목숨을 건 총격전까지 눈앞에서 목격하듯 생동감 있게 묘사된 덕분에 페이지는 거의 빛의 속도로 빠르게 넘어갑니다. 결정적인 첫 반전이 중반쯤 등장해서 그 이후의 스토리를 언급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확실한 것은 일단 시작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쉴 새 없이 달리게 될 거라는 점과 후반부의 연이은 반전 때문에 뒤통수를 맞는 느낌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조연들의 배치도 적절하고 효과적이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기자 역할이면서 동시에 링컨과 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매력녀 에이미, 죽은 웨인의 옛 동업자이자 링컨과 조의 수사에 합류한 전직 탐정 킨케이드 등 주요 조연부터 몇 장면 등장하지 않는 작은 조연들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존재감과 역할을 맡고 있어서 그들의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읽다보면 의외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어딘가 좀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번역이었는데, 딱히 오역은 아니지만 몇 번씩 다시 읽어도 그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이 꽤 있었습니다. 영어권 독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묘사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부분은 좋았지만, 가끔씩 목격되는 직역인지 오역인지 헷갈리는 문장들은 옥의 티였습니다.

 

마이클 코리타가 만 21살이 되기 전에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 홈페이지를 찾아봤더니 중년으로 보이는 그의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계산을 해보니 이제 만 서른 전후였습니다.) 홈페이지에는 모두 11편의 작품이 게재돼있는데, ‘링컨 페리 시리즈4, 스탠드얼론이 6, 그리고 단편이 1편입니다. 이 가운데 한국 출간작은 오늘 밤 안녕을외에 스탠드얼론 2(‘밤을 탐하다’, ‘숨은 강’) 뿐입니다. ‘링컨 페리 시리즈정도면 한국에서도 환영받을 만한 수준인데 이 작품이 소개된 2012년 이후 아무 소식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오늘 밤 안녕을은 홍보카피대로 서스펜스, 긴장감, 트릭 등 여러 미덕을 갖추고 있어서 요즘처럼 더운 날 다른 생각이 날 틈도 없는 재미있는 책을 찾는 독자에겐 특별히 더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좀더 많은 독자들이 링컨 페리에게 관심을 갖고 입소문을 내준다면 머잖아 한두 편이라도 더 소개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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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7일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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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사신 치바가 여섯 편으로 구성된 연작단편인 반면, ‘사신의 7은 한 유명작가의 조사를 맡은 치바의 7일의 여정을 담은 장편입니다. 이 작품에도 치바의 캐릭터와 그의 미션에 대해 친절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굳이 전작을 읽지 않고도 치바의 모든 것을 무난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다양한 매력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전작을 꼭 읽어볼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항상 비를 몰고 다니고,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대화로 상대를 당황케 만들며, 음악에 빠진 채 엉뚱한 블랙코미디를 구사하는 치바의 유쾌한 캐릭터는 여전합니다. 또한 자신이 맡은 대상을 7일 동안 조사한 후 생사를 결정하는 사신으로서의 역할에 있어서 치바는 거의 대부분 ’, 즉 죽음 쪽으로 결정하는 비정함을 보여줍니다.

이번에 치바가 조사를 맡은 인물은 야마노베라는 유명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아내 미키는 1년 전 딸 나쓰미를 혼조 다카시라는 괴한에게 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죄 선고를 받고 자유인이 된 혼조에게 사적인 복수를 준비 중입니다. 처음엔 아니겠지, 하다가 초반부에 치바의 조사대상이 야마노베라고 밝혀진 순간부터 왜 하필...’이라는 안타까움과 도대체 어떻게 끝나려나?’하는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습니다. 평소의 치바라면 아무리 딸을 잃은 슬픔을 겪은 야마노베라 하더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냉정하게 죽음을 선고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혼조는 쉽게 말하면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사이코패스입니다. 10살 된 나쓰미를 살해하고, 완벽한 사전준비를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음으로써 야마노베 부부의 절망을 극한까지 몰아붙입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도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이벤트를 만들어 냅니다. 야마노베 부부는 복수를 위해 혼조에게 접근하지만 번번이 실패할 뿐 아니라 그가 쳐놓은 덫에 걸려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 항상 치바가 동행합니다. 본의 아니게 두 부부를 도울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치바는 감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방관자처럼 행동하거나 극한의 슬픔에 잠긴 부부 앞에서 엉뚱한 질문과 코멘트를 쉴 새 없이 날리곤 합니다.

 

하지만 7일 동안 치바와 함께 있으면서 부부는 조금씩 웃음과 안식을 찾아갑니다. 심각한 위기와 좌절을 겪지만 치바 덕분에 기운을 얻고, 위안을 받고,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복수에 대해, 남은 삶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담기 위해 야마노베와 치바가 챕터마다 번갈아 화자를 맡습니다. 특히 평생 죽음을 두려워했던 야마노베의 아버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죽음에 대한 다양한 감정과 태도가 적잖은 분량에 걸쳐 묘사되는데, 살짝 지루하긴 하지만 치바가 죽음의 신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다 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작인 사신 치바의 마지막 수록작에 치바가 처음 본 파란 하늘을 보며 감동받는 장면이 있는데, 야마노베를 조사하는 치바가 다시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과연 야마노베 부부의 복수는 성공할 것인지? 도대체 야마노베 부부를 향한 혼조의 끝없는 악의의 정체는 무엇인지? 7일의 조사를 마친 치바가 야마노베에 대해 내린 결정은 일지, ‘보류일지? 이 많은 기대와 의문들 덕분에 페이지는 아쉬울 정도로 금세 넘어갑니다.

 

사신 치바에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을 읽은 독자에게는 치바의 장편이 좀 어색하거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등장인물과 단단하게 압축된 스토리로 무장한 단편들에 비해 한 인물에 대한 7일의 조사 기간은 지루하거나 장황하게 보였고, 특히 야마노베가 화자인 챕터에서는 치바 특유의 매력이 감소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랜만에 속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당연히 연작단편집이겠지, 라고 생각한 것은 저뿐 아니라 치바의 팬이라면 대부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라부 시리즈가 단편만의 매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듯이 치바의 다음 이야기는 다시 한 번 단편으로 만나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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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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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작 사신의 76년 만에 출간된다는 소식에, 한참 전에 읽었던 사신 치바의 따뜻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서평도 써볼 겸 오랜만에 책장에서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치바는 인간의 죽음을 결정하는 사신이면서도 정작 인간이나 죽음 자체엔 별 흥미가 없으며 오로지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음반매장에서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는 것뿐입니다. 미션을 수행할 때면 예외 없이 비가 내려 치바는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잠도 안 자고, 피로도 못 느끼며, 감각이 없어 음식의 맛이나 통증도 못 느낄 뿐 아니라 미션에 따라 그때그때 나이나 외모가 달라지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신입니다.

정보부에서 죽을 사람을 지정하면 조사부에 속한 치바 같은 사신들이 그들과 접촉합니다. 일주일 간 두세 번 정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곤 상부에 가() 혹은 보류라고 보고하는데 가()일 경우 예정대로 죽음이, 보류일 경우 좀더 연장된 삶이 그들 앞에 주어집니다.

스토커에 쫓기는 오피스레이디, 복수를 눈앞에 둔 야쿠자, 폭설로 고립된 산장 여행객, 로맨스를 꿈꾸는 미남 청년,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길에 나선 청년, 그리고 바닷가 미용실을 지키고 있는 70대 노파 등이 치바가 만난 죽을 사람들입니다.

 

좀 장황하지만 치바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 혹은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하드보일드 탐정 같지만, 그런 차갑고 뻔뻔한 얼굴로 배꼽 잡는 블랙코미디를 구사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처음 읽었을 때나 다시 읽었을 때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치바의 대사와 독백 덕분에 몇 번씩이나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역설적으로 또는 맘껏 비틀어 다루는 일본만의 독특한 문법은 소설 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만나볼 수 있는데, ‘사신 치바는 그 가운데서도 눈에 뛸 만큼 개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목차와 첫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남은 에피소드들에 대한 몇 가지 기대감이 떠올랐습니다. 뻣뻣하고 고지식한 치바도 한번쯤은 툭하고 부러지거나 자신이 혐오하던 인간의 감정을 경험하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기어이 독자의 마음과 눈물샘을 한번쯤은 후두둑 무너지게 하지 않을까? 그리고 치바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디쯤에선가 치바와 재회하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은 예상대로 맞아들었고, 만족감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사신 치바는 지독한 블랙코미디와 훈훈한 인간극장이 잘 믹스된 듯한,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질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조차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한 부분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기분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 사신의 7은 장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 짜인 연작 단편에서의 치바의 두 번째 활약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장편에서도 치바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수록작 평점

사신의 스토커 리포트 ★★★★★

사신의 하드보일드 ★★★★★

사신의 탐정소설 ★★★

사신의 로맨스 ★★★★

사신의 로드무비 ★★★★

사신의 하트워밍 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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