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 - JM 북스
호죠 기에 지음, 김지윤 옮김 / 제우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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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정체불명의 살인범이 일으킨 시노의 참극이후 류젠 가문 사람들 대부분은 수십 년 동안 사고나 사건이나 질병으로 인해 단명하는 저주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모 도마의 아내 레나 역시 류젠 가문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치명적인 병에 걸린 채 사경을 헤매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모는 시공여행 안내자라 자칭하는 마이스터 호라라는 자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가모에게 시공여행을 통해 1960년으로 돌아가 저주의 출발점인 시노의 참극을 막고 살인범을 밝히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내 레나의 운명 역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안이었지만 가모는 어느 새 호라에게 이끌려 58년 전 참극이 벌어졌던 류젠 가문의 별장 앞에 도착합니다.

 

타임 슬립이나 시공여행이라는 소재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이가라시 리쓰토의 뒤틀린 시간의 법정과 호죠 기에의 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를 연이어 읽게 됐습니다. 두 작품 모두 소재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특한 설정과 인물들을 도입하긴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타임 슬립이나 시공여행이라는 소재는 역시 저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재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류젠 가문 출신인 아내 레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1960년으로 시공여행을 한 가모 도마가 당시 류젠 가문의 별장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살인사건, 일명 시노의 참극의 진상을 알아내고 범인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애초 참극이 벌어진 계기는 무엇인가? 참극 이후 60년 가까이 류젠 가문 사람들을 단명하게 만든 저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참극과 저주를 퍼부은 범인의 정체와 목적은 무엇인가?

참극이 벌어진 별장의 밀실 구조라든가 미스터리한 희대의 살인 수법은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틀을 잘 구현해놓았고, 본의 아니게 별장 사람들로부터 도쿄 출신의 명탐정으로 불리게 된 가모 역시 본격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부여받는 전형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리고 시공여행이라는 양념이 이야기 곳곳에서 다양한 맛과 향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쉽고 선명한 이야기라서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굴곡 없는 밋밋함때문입니다. 우선, 토막 나거나 독살당하거나 불에 타 죽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류젠 가문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지만 좀처럼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그건 살해당한 자들의 캐릭터가 독자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어 마땅한 악당인지, 죽지 않기를 바라게 만드는 선한 자인지조차 어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계속 죽어 나가기만 하니 사건이든 감정이든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1960년 당시 혼돈에 빠진 류젠 가문의 분위기가 초반부터 독자를 사로잡았어야 했는데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묘사에 그친 탓에 그저 뉴스 속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굴곡 없는 밋밋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정직하고 평면적일 뿐인 주인공 가모의 역할입니다. 시간은 한정돼있고, 자칫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여 과거를 바꾼다 하더라도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비해 가모는, 좀 심하게 말하면, 그리 다급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막판에 그가 진상을 밝혀내는 대목 역시 특별한 감흥이나 반전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종합하자면,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라는 설정 때문에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처럼 팽팽하고 쫄깃한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시공여행이라는 특별한 양념까지 가미됐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맵고 짠맛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청률이 안 나오는 착한 드라마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는 호죠 기에의 데뷔작이자 류젠 가의 일족’ 3부작 중 1편이라고 합니다. 후속작에서 가모 도마가 또다시 시공여행에 나서게 될 것 같은데, 한국에도 출간된다면 일단 앞부분은 읽어볼 생각입니다. 인물이든 사건이든 제 눈길을 사로잡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마지막 장까지 기꺼이 달리겠지만, ‘굴곡 없는 밋밋함의 기운이 다시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호죠 기에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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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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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육상 유망주였지만 비극적인 사고 이후 마약에 중독됐던 맬러리 퀸은 18개월 동안의 재활을 거쳐 뉴저지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5살 소년 테디의 보모로 일하게 됩니다. 잠시나마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고 여겼지만 맬러리의 일상은 테디가 그린 이상한 그림들 때문에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여자가 목 졸려 살해당한 뒤 숲으로 끌려가 매장당하는 과정을 그린 테디의 그림들은 어떻게 봐도 5살 소년의 상상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맬러리의 의문에 대해 테디는 애냐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대답하고, 테디의 부모 역시 애냐는 테디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생생하고 정교해지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말할 수 없이 잔혹해져갑니다.

 

내용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지만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도 없이 오히려 지극히 사실적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5살 소년 테디로 하여금 끔찍한 살인과 암매장 과정을 그리게 만든 애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주인공 맬러리의 미션인데, 그 과정에서 맬러리는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수차례 경험하며 대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테디의 그림이 점점 더 전문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구체적인 스토리를 지닌 연작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초자연적 현상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표지가 바로 테디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인데, 본문 속에는 이보다 더 섬찟하고 기괴한 그림들이 여러 장 수록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조금씩 진화하며 맬러리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가 좀더 공고하게 구축된다는 뜻인데, 그래선지 활자로만 읽은 초자연 호러물과는 사뭇 다른 톤의 공포를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 특유의 거칠고 단순하던 스케치가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드로잉으로 변하는 대목은 이야기에서도 큰 전환점 중에 하나인데, 단지 활자만으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빙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테디의 그림 솜씨, 70여 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실종사건과 애냐의 관계, 접신의 능력자라 자칭하는 이웃 영매의 수상한 태도, 그리고 뭔가를 감추는 듯한 테디의 부모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 등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자체도 수시로 급회전하거나 역주행하는 듯 많은 변곡점을 지니고 있어서 사소한 내용 하나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라이맥스 전후로 밝혀지는 뜻밖의 사실들이 맬러리는 물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이야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반전과 함께 가혹하지만 필연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갑니다. 특히 맬러리와 테디가 함께 하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의 경계에서 피가 난무하는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초자연 스릴러이자 아름답고 가슴 저릿한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처럼 독자의 오감을 먹먹하게 만들어서 오랫동안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만큼은 꼭 영상으로 보고 싶은 욕심인데, 넷플릭스와 판권 계약을 했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고 표지가 눈길을 끌긴 했어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큰 기대를 안 했지만 히든 픽처스는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초자연 호러 스릴러에 관심 없더라도 책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이야기의 힘을 꼽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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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소리 마마 밀리언셀러 클럽 4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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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쿄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가 괴물로 진화한 네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아임 소리 마마는 현재 40대인 마츠시마 아이코가 어렸을 때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끔찍한 괴물이자 연쇄살인마가 됐는지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로테스크출간 후 기리노 나쓰오는 당신 마음속에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제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해진 셈입니다.”라고 밝혔는데, ‘아임 소리 마마역시 똑같은 의도를 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엄마가 누군지도 모른 채 성매매업소에서 태어나 성장한 마츠시마 아이코는 이후 보육시설을 거쳐 어른이 되면서 악의와 잔혹함을 거침없이 폭발시키는 괴물이 됩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 자신을 얕잡아보거나 무시하는 사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등을 독극물이나 방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제거합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수시로 직업과 거처를 바꾸던 아이코는 누군가 자신의 죄상을 고발하는 팩스를 여기저기 뿌린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성매매업소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누군지 짐작조차 안 가지만 자신을 낳아준 사람 혹은 그와 가까운 사람의 소행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상도 못했던 자신의 과거와 조우합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괴롭히고 무시하는) 타인의 죽음은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걸 깨달은 아이코는 이미 10대 때 괴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합니다. 절도와 방화와 살인 등 그녀가 40대에 이르기까지 저지른 무수한 살상이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상대를 처리함에 있어 아이코에겐 조금의 주저함이나 고민도 없습니다. 그저 감정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물론 후회나 죄책감 따위도 없습니다. 그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은 것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아이코는 자기중심적이고 잔혹한 부분만을 농축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리노 나쓰오는 아이코를 괴물로 만든 갖가지 사연들 - 부모의 부재, 심신을 망가뜨린 학대, 배고픔과 절망 등 - 을 함께 풀어놓음으로써 단순한 소시오패스 스토리의 한계를 벗어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코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습니다. 이 사연들은, 괴물이란 그저 한 방향으로만 폭주하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재료와 양념이 가미되는 것은 물론 상하좌우로 급격히 요동치는 굴곡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이지만 동시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라게 만들기도 하는 미묘한 인물이라고 할까요? 또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정하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기리노 나쓰오는 아이코의 캐릭터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생생하게 창조해낸 것입니다.

 

23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모두 12개의 챕터로 나뉘어있는데, 일부 챕터는 어떤 식으로든 아이코와 접점이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진 경우도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은 아이코의 괴물 진화기를 다룬 장편이면서 동시에 아이코 못잖게 규범이나 도덕을 무시하는 일그러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작 단편이기도 합니다. 괴물까진 아니어도 극단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한 면모를 품은 조연들의 이야기는 아이코의 괴물 진화기만큼이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다만 대부분이 짧고 강한 임팩트를 남기며 등퇴장하곤 하는데, ‘아임 소리 마마가 군살 없이 탄탄한 작품이긴 하지만 이 흥미로운 조연들의 이야기에 좀더 많은 분량이 투입됐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테스크와 마찬가지로 아임 소리 마마는 이야미스와는 조금은 결이 다른 종류의 불쾌감이 책읽기 내내 따라다니는 작품입니다. 오물을 뒤집어쓰거나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는 대목들도 종종 있는데, 실은 그 불쾌감이야말로 두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자 개성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 있게 추천하긴 어렵지만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꼭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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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은 독
오리가미 교야 지음, 이현주 옮김 / 리드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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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생인 기세 요시키는 중학생 시절 과외교사였던 마카베 겐이치와 오랜만에 재회합니다. 의대생이었던 마카베가 인테리어 가게에서 일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기세는 그가 결혼을 앞두고 양심이 있으면 결혼하지 마라.”라는 협박 편지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마카베는 경찰에 알리기를 꺼려했고, 기세는 탐정을 통해서라도 협박범의 정체를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기세가 만난 탐정은 중학교 1년 선배이자 그 무렵부터 탐정 견습생으로 전교에 소문이 자자했던 기타미 리카입니다. 기세의 의뢰를 받아들인 기타미는 마카베가 협박당할 만한 과거가 있었는지부터 조사하는데,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정보는 기타미와 기세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한국에 일곱 편의 작품이 출간된 오리가미 교야지만 이 작품 전까지 읽은 건 특이한 영능력자 탐정이 주인공인 단지, 무음에 한하여한 편뿐입니다. 대표작인 기억술사시리즈는 취향과 거리가 먼 것 같아 읽지 않았는데, ‘꽃다발은 독을 읽고 나니 시리즈의 첫 편 정도는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다발은 독은 막판 반전이나 엔딩 외에도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많아서 서평 속에 인물과 줄거리를 언급하기가 무척 곤란한 작품입니다. 탐정인 기타미와 법대생인 기세가 마카베를 협박하는 범인을 찾는 것이 주된 줄거리인데, 마카베가 협박당하게 된 계기, 4년 전 마카베가 일으킨 사건이 100페이지 전후쯤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이 사건 자체가 꽤 충격적이어서 나름 스포일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 뒤의 줄거리는 두루뭉술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과 미덕을 서평에 담는 일은 줄거리 소개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고백하자면, 중반부를 조금 넘는 지점까지만 해도 느슨하고 평범한 협박범 찾기로 읽혀서 살짝 아쉬움이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기타미와 기세의 조사는 마카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일상적인 탐문에 그쳤고, 4년 전 마카베가 일으킨 사건이 충격적이긴 해도 독자의 시선을 계속 잡아둘 만큼 지속적인 긴장감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하지만 기타미와 기세가 조사 과정에서 수시로 위화감에 사로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이렇게 무난하고 쉽게 풀릴 리가 없다라는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카베는 왜 협박을 당하면서도 고발을 꺼리는가? 강경한 어조와 정중한 문체를 번갈아 사용하는 협박범의 의도는 무엇인가? 4년 전 사건은 실제로 마카베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원죄(冤罪) 사건인가? 숱한 의문이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대략 100페이지쯤 남은 지점부터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겹겹이 설치된 함정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작가는 독자들을 깊이도 크기도 다른 함정들 속에 연이어 빠뜨립니다. 이것이 진상인가 싶으면 어느새 작가는 다른 곳을 가리키기 시작하고, 그쪽으로 따라가다 보면 또 금세 엉뚱한 곳을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평범한 반전을 통해 평범하게 마무리될 것 같던 이야기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경로를 통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후반부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진실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주인공인 기타미와 기세는 자신들이 찾아낸 진실에 크게 놀라면서도 그보다는 그 진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큰 곤란에 빠지고 맙니다. “진실이 밝혀져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라는 본문 속 한 줄처럼 주인공과 독자 모두를 극단적인 딜레마에 밀어 넣은 작가는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면 눈앞의 이 폭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숙부가 운영하는 탐정사무소의 조사원 신분이지만 명탐정의 자질을 갖춘 20대 초반의 기타미 리카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으로서도 손색없어 보였는데 아쉽게도 2021년에 이 작품이 출간된 뒤로 후속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녀가 주인공인 미스터리가 출간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물론 그 전에 이 작품을 통해 새삼 그 진가를 알게 된 오리가미 교야의 다른 작품들부터 찬찬히 검색해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아주 약간번역에 관한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오역이나 비문은 없지만 가끔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들이 눈에 띄곤 했습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정도로 미미한 문제지만 옥의 티처럼 느껴져서 사족으로 달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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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처 : 벨몬트 아카데미의 연쇄 살인
서맨사 다우닝 지음, 신선해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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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크러처는 명문 사립고교 벨몬트 아카데미의 영문학 교사입니다. ‘올해의 교사에 선정될 정도로 능력도 있고,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와 신념 역시 확고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만과 독선과 자기애가 강한 테디는 극성 학부모, 건방진 학생, 못마땅한 동료 교사에 대한 혐오와 짜증으로 치를 떨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일종의 취미활동인 실험을 통해 상대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실험이 예상치 못한 착오와 우연으로 인해 사망자를 유발하고 맙니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몰리고 사태가 확산되자 테디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벨몬트 아카데미는 살인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티처는 심리극의 묘미가 깃든 연쇄살인 스릴러이자 잔혹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잘 짜인 한 편의 블랙 코미디입니다. 명문 사립고의 학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동일범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행태라든가 이야기 저변에 흐르는 신랄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 때문에 잔혹한 블랙 코미디의 풍미를 진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극성 학부모와 건방진 학생과 속물적인 교사들로 이뤄진 명문 사립고가 갑자기 살인라는 별명을 얻고 추락하면서 우왕좌왕하는 벌이는 꼴사나운 모습은 B급 군상극의 재미도 선사합니다. 초반에 범인과 수법이 모두 공개됨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 안에 다양한 장르가 혼재돼서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란 뜻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이토록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는데도 때로는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 그들을 위한 일이다.” (p254)

 

벨몬트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테디가 교사로서 가진 확고한 신념과 태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학생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교사라고 여기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헌신을 거부하거나 못 알아먹는 학생에겐 무자비한 응징을 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범인으로 몰린 학생을 구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정의로운(?) 교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학생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무자비한 사이코패스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라는 의미의 원제 ‘For Your Own Good’은 바로 테디의 대의이자 삶의 좌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죄다. 하지만 제자들을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구출해내기 위해서였다면 그건 넓은 의미로 가 아닌지도 모른다.” (p390)

 

테디의 광폭 행보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를 의심하고 뒤를 캐는 몇몇 인물들의 스릴감 넘치는 추적기입니다. 심증은 충분하지만 애매하게 조각난 단서들밖에 손에 넣지 못한 그들이 테디의 주변을 맴도는 장면들은 나름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들이 과연 테디의 행각을 밝혀낼 수 있을지, 저러다가 테디에게 당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과연 테디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그가 체포되기는 하는 건지, 그에게 목숨을 잃을 사람이 얼마나 더 나올지,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는 할지 가늠할 수 없어서 마지막 장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맨사 다우닝은 2020마이 러블리 와이프로 한국에 처음 소개됐는데, 심리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에 한참 질려 있을 때라 제목만 보곤 바로 외면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티처를 읽고 나니 궁금증과 호기심이 저절로 발동해서 기회가 되면 일단 초반 100페이지 정도만이라도 도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테디 크러처 못잖은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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