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소녀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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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생후 3개월 여아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합니다. 두 가족이 여아의 혈연임을 주장하면서 18년에 걸친 비극이 시작됩니다. 한쪽은 어마어마한 부자인 카르빌 가문이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 비트랄 가문입니다. “아이 이름이 리즈로즈 카르빌이냐, 에밀리 비트랄이냐?”를 놓고 프랑스를 뒤흔든 재판이 벌어지고, 양쪽의 이름을 따 릴리라 불리던 아이는 가난한 비트랄 가문의 혈연으로 판정 납니다. 하지만 아이를 빼앗긴 카르빌 가문은 사립탐정 그랑둑을 고용하여 아이를 되찾아 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18년에 걸친 그랑둑의 조사가 진행되고, 1998년에 이르러 그랑둑은 사건의 진상을 담은 일기장을 남긴 채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랑둑에게서 일기장을 받아본 에밀리는 오빠 마르크에게 문제의 일기장을 전하곤 종적을 감춥니다. 이야기는 그랑둑의 18년 동안의 기록과 그것을 읽는 오빠 마르크의 현재 상황이 교차되면서 진행됩니다. 오빠지만 에밀리를 사랑했던 마르크는 일기장에 담긴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앞에서 한없이 좌절하고 분노하다가 기어이 진실을 찾는 위험한 여정에 나섭니다.

 

2012~2013년에 걸쳐 프랑스에서 주요 추리문학상을 많이 받은 작품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느낌은 그 이상의 깊고 묵직한 여운이었습니다. 적잖은 인물들이 스스로 또는 타의에 의해 목숨을 잃는데다 베일에 싸인 비밀을 캐는 이야기라 장르물로 분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 사람의 기구한 운명이 바닥까지 파헤쳐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그만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휴먼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랑둑의 일기장으로 인해 에밀리로 살아온 지난 18년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혼란에 빠진 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여동생이지만 여동생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녀를 사랑해온 오빠 마르크는 릴리못잖은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사립탐정 그랑둑은 릴리의 할머니인 마틸드 카르빌로부터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18년 동안 매년 10만 프랑의 보수를 받으며 릴리를 빼앗아 올 단서를 잡아야하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릴리를 비롯한 비트랄 가문의 가족들과 따뜻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소중한 손녀와 여동생을 비트랄 가문에게 빼앗긴 할머니 마틸드와 언니 말비나는 거의 광기에 서린 릴리 되찾기에 나서는데, 특히 말비나의 경우 동생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성장 거부증에 걸릴 정도였고, 겁 없이 총을 휘두를 만큼 반미치광이로 24살의 나이에 이릅니다.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가 두 가문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지독했고, 18년이 지나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참극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작가는 오빠 마르크가 읽는 그랑둑의 일기장 내용과 진실이 드러나는 현재의 3일 간의 급박한 상황을 교차하여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극적으로 끌어올립니다. 또한 양쪽 집안의 인물들을 포함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살인사건을 설정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의 예상을 깨는 범인을 드러냄으로써 반전의 효과는 물론 이야기의 비극성을 한층 더 깊게 만듭니다.

 

과연 릴리는 어느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양쪽 가문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그랑둑이 알아낸 진실은 무엇인지, 그 많은 희생자들은 왜, 누구에게 목숨을 빼앗겨야 했는지, 그리고 마르크와 릴리의 멜로는 비극적인 근친상간으로 막을 내릴 것인지 등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수많은 의문들이 미궁인 채로 독자를 유혹합니다. 더불어, 거듭되는 막판 반전은 단번에 끝까지 완주해온 독자의 뒤통수를 쉴 새 없이 두드리며 수많은 ?’라는 질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보여줍니다.

 

미셸 뷔시의 여섯 번째 장편이지만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입니다. 외국작가의 한국 데뷔작은 출간순서와 무관하게 가장 뛰어난, 혹은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선택되곤 하지만, 이만한 필력이라면 미셸 뷔시의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잔혹한 연쇄살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가 볼 때 비극적이긴 해도 심심한 가족사정도로 오해할만한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림자 소녀는 웬만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보다 더 독하고 진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실망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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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별 1 유다의 별 1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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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어마어마한 재산을 은닉한 채 경찰에게 토벌된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 70여년이 지난 후 그 재산의 행방을 찾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용해운과 수상한 사내들, 마찬가지로 백백교의 유산을 탐내는 사채업계의 거부 김성노와 그의 앞잡이 임인건, 그리고 김성노의 제안으로 유산 찾기에 뛰어든 뒤 거대한 비밀을 풀어가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그의 파트너들(광역수사대 이유현 팀장 & 김성노의 변호사 화미령).

 

어떻게든 줄거리를 정리해보려 했지만, 방대한 건 둘째 치고 사방에 스포일러 투성이라 등장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 정도로 그치기로 했습니다. 물론 위에 언급한 내용 가운데에도 스포일러에 가까운 내용이 있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작품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어서 부득이 노출시켰습니다.

 

1~2권 합쳐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스케일도 크고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뛰어나며 반전 역시 멈출 줄 모르고 이어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틀 간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참혹한 연쇄살인,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이비 종교의 악행, 대를 이은 비극적인 가족사 등 다양한 코드들이 버무려져있고,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광역수사대로 자리를 옮긴 이유현 팀장의 콤비 플레이는 전국은 물론 바다 건너 일본까지 샅샅이 뒤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스피디하게 전개됩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이야기 바닥에 깔린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추악한 탐욕이라는 테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70여 년 전 백백교가 은닉한 보물찾기지만, 그 이면에는 허황되기 짝이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욕망의 폭주들이 뒤엉켜 있어서 고진과 이유현 팀장의 수사가 진실에 조금씩 다가갈수록 독자를 착잡하게 만듭니다.

누구든 욕망의 폭주가 선을 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고, 드디어 진실의 실마리가 잡혔다고 흥분할만하면 엉뚱한 국면이 새로 얼굴을 드러냅니다. 베일에 감춰졌던 과거사를 쫓다보면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비극과 만나게 되고, 70여 년 전의 끔찍한 백백교의 만행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고진은 여전히 4차원스러운 조크와 변죽만 울리며 상대를 열 받게 하는 화법을 구사합니다. (bar) 여사장 류경아와 김성노의 변호사 화미령 사이에서 3각 로맨스를 즐기는가 하면, 노회한 사채업자 김성노와는 통 큰 담판을 벌여 거액의 수수료를 약속받기도 합니다. 때론 엉뚱한 가설로 이유현 팀장의 분노를 사기도 하지만, 결국엔 작은 단서에서 출발한 무한한 상상력으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론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천하무적일 것 같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도 막판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까무러칩니다. 적어도 세 번 정도는 헉~ 소리가 날 정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독자와의 공감을 배려해선지 이 지점에서는 고진 역시 숨이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딱 두 가지인데, 우선은 고진의 추리가 지나치게 비약적인 나머지 독자들이 따라가기 곤란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말하자면, 포착한 단서는 하나뿐인데 그것으로 너무 많은 해답을 이끌어내곤 합니다. 적어도 독자들이 ~!”하며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데, 몇몇 부분은 어떻게 저런 추리가 가능?”이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비약이 심합니다. 워낙 이야기가 빠르고 긴장감 넘치다 보니 그냥 넘어가지긴 하지만, 마지막의 대반전에서 벌어진 몇 번의 비약은 고진의 캐릭터를 초능력자로 보이게 할 만큼 도를 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유현 팀장의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 같은 단순한캐릭터인데, 이 부분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이 팀장이 희생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어둠의 변호사에서 지나치게 탐문과 알리바이에 집착했던 모습은 좀 불편해도 이해가 됐지만, 이번 작품에서 과하게 흥분하다가 무모한 언행으로 인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아했습니다. 잠시 후 그것이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필요한 설정이었다는 점이 드러나지만, 어쨌든 이유현 팀장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서평을 써놓고 보니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수사(修辭)만 가득할 뿐 정작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도움말이나 알맹이에 대한 소개는 별로 없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내용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뭐든 조금만 상세히 설명하면 바로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지뢰밭 투성이인 작품이라 이런 수박 겉핥기식의 서평 외엔 도리가 없었습니다.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다는 점, 연쇄살인+사이비종교+인간의 탐욕 등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코드의 범벅이지만 이야기는 사실적이며 깊이를 겸비했다는 점, 그리고 뒷골목 어둠의 변호사 고진은 역시 매력적이라는 점만 결론으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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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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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틀린 인연으로 맺어진 후 갈등과 불화 속에 살다가 기어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잃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3대의 이야기가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오래된 벽돌 외관의 양옥집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조부모 대에 일어났던 광기 서린 부부간의 살인사건에 이어 부모 대에 이르러서는 강도의 행각으로 추정되는 참사가 일어났고, 이제 비극은 자식 대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제도권의 법 집행에 환멸을 느껴 판사를 그만두고 어둠의 변호사를 자청한 고진은 서초경찰서 강력팀장 이유현과 함께 붉은 벽돌집의 비밀을 풀기 위해 뛰어듭니다. 하지만 수사는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용의자의 알리바이는 철벽같고 범행 동기는 그저 모호할 뿐입니다. 더구나 수사가 진행되던 중 연이어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고진은 그때까지 당연한 사실로 여겨온 모든 단서와 전제들을 뒤집기에 이릅니다.

 

신간 유다의 별’(‘고진 시리즈네 번째 작품)을 계기로 그동안 소문만 들어왔던 도진기의 작품을 접하게 됐습니다. ‘유다의 별을 읽기 전에 시리즈 전부를 읽기는 어렵더라도 주인공 고진의 데뷔만큼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 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을 펼쳐들었습니다.

 

범인과 피해자 모두 일가족 중에 있다는 설정 하에 진실을 찾는 내용이다 보니 밀도와 긴장감은 높은 반면 이야기의 폭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붉은 집 가족들의 캐릭터를 있는 대로 비틀어 설정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합니다. 재혼으로 인한 두 가정의 합체, 입양 이후 태어난 친자식, 이해가 엇갈리는 유산상속 외에 불륜, 별거, 시기, 질투 등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마약, 광기, 살인이라는 참극과 버무려냅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고 진범이 잡히더라도 통쾌함보다는 불편한 여운만 남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도 고진은 정의가 실현됐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와 탐욕에 대한 진절머리 끝에 남는 덧없음과 허허로움만을 느낀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는 독자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마지막 반전 카드를 마련해놓았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진범과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두어 차례 반전이 이어지지만, 가장 매력적인 반전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가 왜 판사라는 제도권의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 죄와 벌에 대한 그만의 철학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암시해주는 순간인데, 덕분에 덧없음과 허허로움은 어느 새 사라지고 오히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의 고진의 활약을 무척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사실 읽는 동안 고진의 캐릭터 때문에 조금 오락가락한 적도 있긴 합니다. 주로 함께 수사하는 이유현의 입을 통해 묘사되곤 하는데, 고진은 무척 게으르고 매사에 무심한 편이며 30대지만 50대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연루된 20대 여성에게 빠진 나머지 평소 고진답지 않은 열정 넘치는 수사를 펼치기도 합니다. 또 고전적인 탐문과 알리바이 조사에만 주력하다 보니 중반부까지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결국 후반에 이르러 고진만의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이 발휘되고, 왓슨 앞의 홈즈처럼 조금은 거만한 자세로 진실을 밝히면서 그의 진짜 매력이 드러나지만 아무튼 초중반까지는 기대가 너무 컸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고진의 캐릭터라든가 동어반복식으로 전개되는 알리바이와 탐문, 또 일부 캐릭터의 무리한 설정 등 아쉬운 점들은 있었지만,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엔 모자람이 없는 데뷔작이었습니다. 신간 유다의 별을 먼저 읽어야 하는 상황이라 시리즈 2~3편인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정신자살은 건너뛰게 됐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도진기의 나머지 작품들도 Must-Read 아이템에 넣어놓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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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슬립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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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 오버룩 호텔에서 겪은 악몽 같은 기억들(전편인 샤이닝의 내용)은 댄(대니) 토런스를 아버지 잭 못잖은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습니다. 허접한 일자리나마 매번 알코올 때문에 날려버렸던 댄은 뉴햄프셔의 프레이저에 이르러 빌리 프리먼과 존 돌턴을 만난 뒤 고통스러운 금주(禁酒)의 시간과 함께 호스피스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닥터 슬립은 죽음을 앞둔 자에게 마법처럼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게 해주는 댄의 별명입니다.

댄이 새 삶을 시작할 즈음, 인근 마을 애니스턴에서 어마어마한 샤이닝의 소유자인 아브라 스톤이라는 여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꿈을 통해 9.11 테러를 암시할 정도로 뛰어난 샤이닝 능력자인 아브라는 3살이 되자 댄에게 ‘hEll라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한편 로즈 오하라가 이끄는 트루 낫(True Knot)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입니다. 그들은 14대의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방랑하며 살아갑니다. 이유는 나이를 먹지 않는 그들에게 쏠릴 수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남북전쟁이나 스페인전쟁 때부터 살아오던 자도 있는데, 그런 영생의 힘은 스팀이라 불리는 정기(精氣) 덕분이고, 그 정기는 샤이닝 능력자의 목숨을 통해 추출할 수 있습니다. 댄과 아브라가 트루 낫의 레이더에 걸려든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3살이 된 아브라는 댄과 함께 트루 낫 일당에 맞서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1~2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줄거리 소개도 그만큼 길어졌지만, 짧게 요약하면 샤이닝의 능력자 댄과 아브라가 뱀파이어와 유사한 트루 낫 종족과 벌이는 숨 막히는 대결 이야기입니다. 공포물로서의 매력은 샤이닝에 비해 떨어지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오락물로서는 제격인 작품입니다.

 

샤이닝의 독자라면 오버룩 호텔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5살 소년 댄의 삶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다들 댄이 악몽을 딛고 평범한 삶을 누리기를 바랐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버룩 호텔의 망령들은 쉴 새 없이 댄 앞에 나타났고, 댄은 그 망령들을 떨치기 위해 술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호스피스로서 새 삶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초반부는 오버룩과 알코올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하지만 애처롭기까지 한 댄의 인간극장같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에 반해 뛰어난 샤이닝 능력자 아브라 스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댄과 그녀의 관계는 샤이닝에서 능력자이자 요리사였던 딕 할로런과 어린 대니의 그것과 마찬가지인데, “언젠가는 네가 선생님이 될 차례가 찾아올 거다. 학생이 나타날 거야.”라는 딕 할로런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진 것입니다. 댄과 아브라는 텔레파시를 통한 소통은 물론 심지어 바꿔치기라 불리는 일종의 유체 이탈, , 두 사람의 영혼이 상대방의 몸으로 바꿔 들어가는 것까지 가능한 관계가 됩니다.

 

중년의 댄과 10대 소녀 아브라는 치유성장통이라는 교집합을 지닙니다. 샤이닝이라는 능력 때문에 운명처럼 감내해야 했던 댄의 통과의례들, 그리고 아브라 앞에 놓인 이제부터 하나씩 겪어나가야 하는 통과의례들.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하며, 각자의 성장통을 잘 견뎌냅니다. 물론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개입하지만, 아브라에게 있어 댄은 훌륭한 선생님이자 에어백처럼 든든한 보호막으로, 댄에게 있어 아브라는 지켜줘야 할 소중한 존재로 애틋하고 끈끈한 인연을 이어갑니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 덕분에 공포물로서의 미덕은 많이 감소됐지만, 스티븐 킹은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을 통해 감소된 미덕을 보충시킵니다.

 

줄거리에서 설명한대로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은 샤이닝 능력자의 목숨을 통해 얻은 스팀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정기를 보충합니다. 때론 터닝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일반인을 트루 낫으로 변신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이 샤이닝 능력자에게서 스팀을 얻는 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순수하고 풍성한 샤이닝을 얻기 위해 어른보다는 아이를 선호하는 것은 물론 테러나 자연재해나 전쟁이 야기한 대참사를 다량의 스팀을 얻을 수 있는 호기로 삼습니다.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의 극단적인 악마성은 기상천외한 설정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닥터 슬립의 아쉬운 점 중 역시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 때문이었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그들이 좀더 강력한 존재였다면..’이란 아쉬움입니다. 일부를 제외하면 트루 낫의 멤버들은 예상 외로 유순했고, 그들이 스팀을 얻기 위해 벌이는 잔혹한 행각들 역시 기대만큼 많이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결코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지만, 댄과 아브라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기엔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의 스펙은 처음부터 너무 낮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닥터 슬립전에 일부러 샤이닝을 구매해서 읽었는데, 그러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샤이닝을 건너뛰고 닥터 슬립을 읽어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오버룩 호텔의 끔찍한 유산들이 닥터 슬립곳곳에서 재차 그려지는데다, 무엇보다 댄 토런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샤이닝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에 관한 한 초보 또는 무관심 상태였지만, ‘샤이닝닥터 슬립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첫 장편인 캐리살렘스 롯’, ‘애완동물 공동묘지등 초기작과 대표작을 기회가 될 때마다 한 권씩 마스터할 생각입니다.

좀 무리한 발상이지만, 언젠가 중년에 이른 아브라 스톤이 또 다른 학생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필로그 격인 아브라 스톤의 15번 째 생일 장면을 읽으면서 문득 오버룩 호텔 3편 격인 작품이 출간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이게 샤이닝인지 막연한 기대감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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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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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역사를 가진 오버룩 호텔은 혹독한 기후 탓에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문을 닫습니다. 그 기간 동안 관리자로 취업한 잭 토런스는 가족과 함께 아무도 없는 호텔에 머물게 됩니다. 잭은 단편소설과 희곡을 쓰며 교사로 재직했지만, 치명적인 알코올중독과 학생 폭행으로 인해 해직됐고, 그의 폭력은 가족을 향한 적도 있습니다.

한편 아들 대니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5살 소년입니다. 같은 능력을 지닌 오버룩 호텔의 요리사 딕 할로런에 따르면 그것은 빛(샤이닝), 환상, 예견이라 부르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오버룩 호텔에서의 생활이 결정되자마자 대니는 그곳에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예감합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 잭과 아내 웬디, 대니 앞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생물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오버룩 호텔이 내뿜는 광기는 세 사람을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물론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붙입니다.

 

스티븐 킹의 닥터 슬립서평단에 뽑혀 책 배송을 기다리는 동안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샤이닝을 읽기로 했습니다. “36년 만에 출간된 샤이닝의 속편이라는 홍보문구처럼 닥터 슬립샤이닝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이제는 중년이 된 대니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36년 전 5살 소년이던 대니가 겪은 참극을 읽어야 닥터 슬립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스티븐 킹의 대표작 샤이닝을 뒤늦게나마 읽게 됐습니다.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호러물이나 스티븐 킹의 마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닙니다.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기 힘든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오버룩 호텔의 카리스마는 때론 난해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 내용을 복기하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오버룩 호텔 곳곳에 배치된 여러 가지 소품들입니다. 잭이 수시로 씹어 먹는 아스피린 계열의 엑세드린은 그의 광기를 부추기는 촉매제 같았고, 호텔 곳곳의 크고 작은 소품들은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상세하게, 또 곧이어 벌어질 어떤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긴장감 있게 묘사됐습니다. 잭에게 창작욕과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스크랩북, 스스로 움직이는 낡은 엘리베이터, 살아 움직이는 동물 전정나무, 그리고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보일러 등은 초반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언급되다가 사건과 함께 그 의미를 증폭시키면서 오버룩 호텔이 내뿜는 악마적 기운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소품못잖게 인상적이었던 건 오버룩 호텔 곳곳에서 수시로 들리는 환청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입니다. ‘또 이성을 잃었군, .’, ‘그곳 가까이 가지 마라... 절대로.’, ‘이리 나와, 이 새끼! 이리 나와서 남자답게 벌을 받아!’ 등 주로 잭과 대니가 듣곤 하는 이 기괴한 목소리는 내용도 섬뜩하지만 특이한 방식으로 서술돼서 더 눈길을 끌었습니다. 즉 따옴표나 괄호로 표시된 채 문장의 한 가운데 툭툭 삽입되거나 맥락 없이 끼어들곤 하는데, 처음엔 이런 방식이 너무나 낯설기도 하고 그 의미조차 알 수 없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여러 차례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직접 들리는 듯한, 즉 오버룩 호텔의 환청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그의 세계관이나 독특한 서술방식이 낯설 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다 읽은 뒤 몸과 머리가 얼얼한 상태에서 읽은 해설 : 스티븐 킹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덕분에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샤이닝을 읽으면서 이건 뭐지?”라고 의문을 품었던 부분들이 적잖이 해소되기도 했습니다. 본편의 줄거리가 공개돼있어서 해설을 먼저 읽어선 안 되겠지만, 스티븐 킹의 초심자라면 한번쯤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입니다.

 

(해설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스티븐 킹의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 고립된 공간과 고립된 인간(가족), 또 거기에서 비롯되는 끔찍하고 기이한 비극은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연상시켰습니다. 토속적인 느낌이 강조된 미쓰다 신조의 작품에서도 비극은 고립과 밀접하게 연관돼있습니다. 또한 가족염력이라는 개념 역시 두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코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미쓰다 신조의 작품에선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이 샤이닝에서 감지된 것은 미국식 호러는 왠지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인 현상일 거라는 문화적 선입견 때문인 듯 보입니다. 어쨌든 스타일이나 화법 자체가 전혀 다른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호러물을 위해 비슷한 코드를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워 보인 건 사실입니다.

 

책이 배송 되는대로 닥터 슬립을 읽을 예정인데, 아마 샤이닝을 읽지 않았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나 몰입감이 훨씬 떨어졌을 거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의 호러물을 연이어 읽는 것이 정신건강에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36년이 지난 후 대니 토런스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또 이번에는 무슨 기막힌 상황과 마주칠지 궁금하다 보니 닥터 슬립이 배송되는 즉시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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