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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슬립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평점 :
5살 때 오버룩 호텔에서 겪은 악몽 같은 기억들(전편인 ‘샤이닝’의 내용)은 댄(대니) 토런스를 아버지 잭 못잖은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습니다. 허접한 일자리나마 매번 알코올 때문에 날려버렸던 댄은 뉴햄프셔의 프레이저에 이르러 빌리 프리먼과 존 돌턴을 만난 뒤 고통스러운 금주(禁酒)의 시간과 함께 호스피스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닥터 슬립’은 죽음을 앞둔 자에게 마법처럼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게 해주는 댄의 별명입니다.
댄이 새 삶을 시작할 즈음, 인근 마을 애니스턴에서 어마어마한 샤이닝의 소유자인 아브라 스톤이라는 여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꿈을 통해 9.11 테러를 암시할 정도로 뛰어난 샤이닝 능력자인 아브라는 3살이 되자 댄에게 ‘hEll☺’라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한편 로즈 오하라가 이끄는 트루 낫(True Knot)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입니다. 그들은 14대의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방랑하며 살아갑니다. 이유는 ‘나이를 먹지 않는 그들에게 쏠릴 수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남북전쟁이나 스페인전쟁 때부터 살아오던 자도 있는데, 그런 영생의 힘은 ‘스팀’이라 불리는 정기(精氣) 덕분이고, 그 정기는 샤이닝 능력자의 목숨을 통해 추출할 수 있습니다. 댄과 아브라가 트루 낫의 레이더에 걸려든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3살이 된 아브라는 댄과 함께 트루 낫 일당에 맞서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1~2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줄거리 소개도 그만큼 길어졌지만, 짧게 요약하면 샤이닝의 능력자 댄과 아브라가 뱀파이어와 유사한 트루 낫 종족과 벌이는 숨 막히는 대결 이야기입니다. 공포물로서의 매력은 ‘샤이닝’에 비해 떨어지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오락물로서는 제격인 작품입니다.
‘샤이닝’의 독자라면 오버룩 호텔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5살 소년 댄의 삶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다들 댄이 악몽을 딛고 평범한 삶을 누리기를 바랐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버룩 호텔의 망령들은 쉴 새 없이 댄 앞에 나타났고, 댄은 그 망령들을 떨치기 위해 술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호스피스로서 새 삶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초반부는 오버룩과 알코올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하지만 애처롭기까지 한 댄의 ‘인간극장’ 같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에 반해 뛰어난 샤이닝 능력자 아브라 스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댄과 그녀의 관계는 ‘샤이닝’에서 능력자이자 요리사였던 딕 할로런과 어린 대니의 그것과 마찬가지인데, “언젠가는 네가 선생님이 될 차례가 찾아올 거다. 학생이 나타날 거야.”라는 딕 할로런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진 것입니다. 댄과 아브라는 텔레파시를 통한 소통은 물론 심지어 ‘바꿔치기’라 불리는 일종의 유체 이탈, 즉, 두 사람의 영혼이 상대방의 몸으로 바꿔 들어가는 것까지 가능한 관계가 됩니다.
중년의 댄과 10대 소녀 아브라는 ‘치유’와 ‘성장통’이라는 교집합을 지닙니다. 샤이닝이라는 능력 때문에 운명처럼 감내해야 했던 댄의 통과의례들, 그리고 아브라 앞에 놓인 이제부터 하나씩 겪어나가야 하는 통과의례들.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하며, 각자의 성장통을 잘 견뎌냅니다. 물론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개입하지만, 아브라에게 있어 댄은 훌륭한 선생님이자 에어백처럼 든든한 보호막으로, 댄에게 있어 아브라는 지켜줘야 할 소중한 존재로 애틋하고 끈끈한 인연을 이어갑니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 덕분에 공포물로서의 미덕은 많이 감소됐지만, 스티븐 킹은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을 통해 감소된 미덕을 보충시킵니다.
줄거리에서 설명한대로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은 샤이닝 능력자의 목숨을 통해 얻은 ‘스팀’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정기를 보충합니다. 때론 ‘터닝’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일반인을 트루 낫으로 변신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이 샤이닝 능력자에게서 스팀을 얻는 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순수하고 풍성한 샤이닝을 얻기 위해 어른보다는 아이를 선호하는 것은 물론 테러나 자연재해나 전쟁이 야기한 대참사를 다량의 스팀을 얻을 수 있는 호기로 삼습니다.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의 극단적인 악마성은 기상천외한 설정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닥터 슬립’의 아쉬운 점 중 역시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 때문이었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그들이 좀더 강력한 존재였다면..’이란 아쉬움입니다. 일부를 제외하면 트루 낫의 멤버들은 예상 외로 유순했고, 그들이 스팀을 얻기 위해 벌이는 잔혹한 행각들 역시 기대만큼 많이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결코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지만, 댄과 아브라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기엔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의 스펙은 처음부터 너무 낮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닥터 슬립’ 전에 일부러 ‘샤이닝’을 구매해서 읽었는데, 그러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샤이닝’을 건너뛰고 ‘닥터 슬립’을 읽어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오버룩 호텔의 끔찍한 유산들이 ‘닥터 슬립’ 곳곳에서 재차 그려지는데다, 무엇보다 댄 토런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샤이닝’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에 관한 한 초보 또는 무관심 상태였지만, ‘샤이닝’과 ‘닥터 슬립’ 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첫 장편인 ‘캐리’와 ‘살렘스 롯’, ‘애완동물 공동묘지’ 등 초기작과 대표작을 기회가 될 때마다 한 권씩 마스터할 생각입니다.
좀 무리한 발상이지만, 언젠가 중년에 이른 아브라 스톤이 또 다른 ‘학생’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필로그 격인 아브라 스톤의 15번 째 생일 장면을 읽으면서 문득 오버룩 호텔 3편 격인 작품이 출간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이게 샤이닝인지 막연한 기대감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