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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예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독자 쿠보의 투고 때문에 오카야 맨션의 괴담을 조사하기 시작한 ‘나’는 맨션과 인근 주택단지에 살고 있거나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거나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목을 맨 기모노 차림의 여자 형체, 그 여자의 허리띠가 사악사악 다다미를 쓰는 소리, 벽을 기어 나오는 아기의 형상, 찰싹찰싹 뺨을 만지는 차가운 촉감 등이 그것입니다.
‘나’와 쿠보의 탐문은 오카야 맨션과 주택단지의 과거 속으로 향하고, 그곳에 오래 살았던 인물이나 절 관계자 등을 통해 거의 1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끔찍한 괴담의 실체와 근원을 조금씩 파악합니다. 오카야 맨션이 자리 잡은 터에서 오래 전부터 참혹한 사고, 방화와 살인, 자살 혹은 강제 동반자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알게 된 ‘나’는 그 시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웬만한 괴담수집가도 다루기를 꺼려한다는 ‘오쿠야마 괴담’에 도달합니다.
오노 후유미 스스로 ‘나’라는 작가로 등장하여 괴담의 근원을 쫓는 이야기로, 소설이라기보다는 르포에 가까운, 그래서 독특한 공포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A 집안의 흉사를 조사하다 보니 B 집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B 집안을 조사하다 보니 그 선대에서 C 집안과 연루된 사건이 있었고...
결국 오카야 맨션과 주택단지에 현재 거주 중인 인물들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취재는 금세기 - 지난 세기 - 고도성장기 - 전쟁 후 - 전쟁 전 - 메이지&다이쇼 시대까지 이릅니다. 자연히 수많은 인물과 가계(家系)가 등장하고, 또 그만큼의 괴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등장인물과 가문 이름 때문에 읽는 내내 꽤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이야기 구조 상 불가피한 설정이라 여기저기 메모를 남겨가며 읽어야만 했습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잔예’라는 제목에 있습니다. 그 의미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갔는데, 엔딩에 이르러서야 ‘그 뜻을 미리 알고 읽었다면 훨씬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아두면 유용한 팁이라서 본문에서 잔예의 뜻을 소개한 문장들을 발췌, 편집해봤습니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촉예(触穢)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더러움에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특히 죽음에 의한 더러움은 사예(死穢)라고 해서 중시했다. 죽음은 모종의 더러움을 낳는지도 모른다. 더러움에 닿은 우리도 주술적으로 방어한다. 죽은 이를 공양하고 땅을 정화한다. 하지만 너무 강한 탓에 그러고 나서도 남는 무엇이 있다면? 그곳에는 더러움의 잔여물인 잔예(殘穢)가 남았다.”
즉 메이지와 다이쇼의 교체기에 일어난 끔찍한 죽음이 탄생시킨 더러움(사예)이 시간의 흐름과 주술적인 정화의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잔여물(잔예)로 살아남아 끊임없는 전염(촉예)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오염된 땅과 집이 그곳을 찾는 사람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오염된 자가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가 오염된 자를 방문할 때 전염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림이나 칼, 가구나 건축 자재 등이 매개체가 돼서 전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설 중 하나인 사또와 처녀귀신(부임하는 사또마다 첫날밤에 처녀귀신을 보고 죽어나간다는 이야기)처럼 ‘붙박이 더러움’이 아니라, 강력한 전염력을 지닌 탓에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무차별로 퍼져나가는 ‘잔예’라는 개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르포에 가까운 ‘나’의 탐문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 가장 무섭다”라거나 “손닿는 곳에 책을 놓기조차 두렵다”는 야마모토 슈고로 상 심사위원의 심사평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늦은 밤, 혼자 책상에 앉아 읽다보면 자꾸 등 뒤가 서늘해지거나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문득문득 천장을 올려보거나 멀쩡한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막판에 진실이 밝혀지는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종류의 무서움이 있다”는 식의 평면적인 르포에 가깝기 때문에 소설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흑사의 섬’을 통해 호감을 갖게 된 오노 후유미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별 세 개에 그치게 만든,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완독하는데 사흘씩이나 걸리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