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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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라하의 중세 역사와 문화에 빠져있는 크베토슬라프 슈바흐는 경찰에서 해고된 지 얼마 안 돼 복직의 기회를 잡습니다. 프라하의 건축물을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복원하겠다고 나선 재력가 마티아슈 그뮌드가 경찰서장에게 슈바흐를 안내 겸 경호역할로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뮌드가 슈바흐를 요구한 이유는 그의 특별한 능력 - 옛 건물이나 바위에 손을 대면 과거의 사건들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그뮌드의 카리스마에 푹 빠진 슈바흐는 그의 은밀하고 엄청난 계획에 일조하게 되고, 그뮌드의 고용인 프룬슬릭, 특수반의 여경 로제타와 함께 프라하 신시가지의 성당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합니다.

한편, 그 무렵 프라하에선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살인예고 메시지를 받은 후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살인사건 수사까지 맡게 된 슈바흐는 희생자들이 모두 건축 종사자들이라는 점과 그뮌드 일행이 일련의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만, 서장은 그의 추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유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냉전과 민주화라는 이념적 이미지가 대세였지만, 요즘의 동유럽은 중세의 유산이 고스란히 간직된 클래식한 풍경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프라하는 그런 동유럽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하지만 대도시의 숙명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일곱 성당 이야기는 모더니즘과 현대화의 물결에 휩싸인 현재의 프라하를 붕괴시키고 고딕 양식으로 빛나던 14세기의 프라하로 복원시키려는 비밀결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보기 드문 체코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외에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기이한 능력자, 중세로의 복원을 꿈꾸는 수수께끼 같은 세력 등 소재나 캐릭터 모두 독특함을 넘어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역사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체코의 역사와 건축, 종교 이야기가 그려져 있고, 거기에 스릴러라는 형식까지 더해져 방대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판타지-스릴러라고 할까요?

 

연쇄살인의 진상은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쉽게 짐작이 되지만,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살인수법과 동기 때문에 진범 찾기 이상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건축 종사자들의 연이은 죽음, 연쇄살인과 무관해보이던 10대 소년들의 죽음, 특수반 여경 로제타의 비극적인 과거 등을 통해 드러나는 살인수법과 동기는 잔혹함을 넘어 마치 중세와 현대의 정면충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면 비틀려 버린 과거와 더 좋고 아름다울 수도 있었을 현재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카피가 있는데, 말하자면 그 안타까움의 극단적인 발현이 연쇄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번역자가 옮긴이의 말을 통해 한국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나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암시가 곳곳에 깔려있다라고 언급했듯이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묘사된 14세기 이래 체코의 역사에 관한 언급은 한 권으로 읽는시리즈처럼 쉽고 편안한 체코 중세사의 미덕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물론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상쇄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에게는 일곱 성당 이야기가 반갑고 흥미진진하게 읽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좀 당혹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전개나 설명 때문에 순간순간 뭐지?’라고 자문하곤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 역시 본문에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독자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중략) 여러분은 내가 어떤 부분을 일부러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의심할 것이다. (중략) 진실을 찾는다면 이 단어의 미로 사이에서 내 뒤에 바짝 붙어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이라며 조금 위로를 받긴 했지만, 어쨌든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중세와 현대를 오가며 판타지와 스릴러를 함께 버무린 독특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냈을지 개인적으로 많이 궁금합니다. 무척 다양한 서평들이 올라올 것 같은데, 제 느낌과 얼마나 같은지, 또 얼마나 다른지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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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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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든 영상물로든 아무리 재미있게 재구성됐다 하더라도 굳이 읽거나 보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정묘년과 병자년의 호란은 어떻게 풀어가든 기어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분노, 참담, 열패 등등 정신건강에 해로운 후유증만 남기다 보니 이성적인 책읽기가 쉽지 않은 소재입니다.

두 호란을 전후로 한 이야기지만 이신에게 눈길이 끌렸던 것은 단 한 줄의 카피 -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 때문이었습니다. 간결하지만 선명하고, 직설적이지만 공감할 수 있는 카피라서 그저 자탄과 자괴로 가득했던 기존의 호란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를 거란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결국 그래봐야 나쁜 왕은 실제로 죽지 않았으니...’라는 선입견도 있었지만, 김훈의 남한산성이래 처음으로 호란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묘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가며 아내와 딸을 잃은 이신은 우여곡절 끝에 청 황제의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반정 당시 광해의 내금위장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의 칼을 손에 넣은 이신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 딸을 찾는 한편, 나라와 백성을 환란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들을 향한 복수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주변 상황이 급변합니다. 이신은 명백한 역모의 기운과 함께 자신의 뒤를 쫓는 세력을 감지합니다. 급기야 이신은 역모 세력에게 납치당하기에 이르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는 자는 물론 역모 세력의 몸통까지 확인합니다. 겨우 사선을 벗어났지만 측근들이 역모 혐의로 잡혀 들어가자 이신은 자신에게 남은 선택이 단 하나뿐임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나쁜 왕을 죽이는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신80년대에 쓰였다면 아마 출판이 금지됐거나 출판됐더라도 금세 금서가 됐을 거라는... ‘이신속의 절대 권력은 부패와 탐욕 덩어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정통성을 얻지 못한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비굴한 삶을 택했고, 반정공신들은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야차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십만의 백성의 목숨도 하찮게 여겼습니다.

400년 전 조선의 절대 권력의 야비하고 탐욕스런 추태를 읽으면서, 또 청나라로 끌려간 수십만의 백성들의 참혹한 운명을 읽으면서, 그리고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청의 칙사로 살아 돌아온 이신의 삶을 읽으면서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신 같은 자가 존재했더라면, 그래서 그 운명의 밤에 아버지의 칼로 역사에 남을 단 한 번의 합을 휘둘렀더라면, 하는 그런 공상을 해보게 됐습니다.

 

이신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주인공 이신과 그 아내 선화 외에 여러 인물들을 화자로 내세워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구성한 점입니다. 스스로 오랑캐의 첩이 됐던 여인,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공신의 처, 죽여야 할 나쁜 임금, 골수까지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대부, 역모를 주도한 양반세력 등 작가는 많은 인물들에게 변명 내지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줍니다. 이신을 통한 대리감상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음으로써 안타까움이든 분노든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형식 덕분에 감정적인 책읽기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이신은 역모를 소재로 환란의 시대를 그려낸 역사소설이면서 치밀하게 조작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정치 스릴러이고 동시에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멜로물입니다. 분노의 게이지가 높아질 만하면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로 넘어갔다가 또 적당한 지점에서 이신의 애틋한 감정을 건드리는 멜로선을 탑니다. 한 편의 작품을 읽었지만 이런저런 다양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미덕은 동시에 아쉬움의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비유하자면 너무 폼나는 숲을 꾸미려다가 중요한 나무 몇 그루를 놓쳤다고 할까요? 특히 스릴러의 뼈대는 깔끔하게 세워지지 않았고, 아내와 딸을 그리는 이신의 꿈과 독백은 조금 과하게 반복됐습니다. 역모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와 평범하고 소박한 삶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애틋한 멜로가 거대한 서사 속에서 치밀함과 균형감을 유지하지 못한 점은 이신에서 가장 크게 아쉬움을 느낀 부분이었습니다.

 

인조와 서인세력의 무능을, 전쟁의 후유증을 신랄하게 전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보다 이신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볼륨을 좀더 키워서 2~3권 정도의 분량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과거형으로만 묘사된 이신의 사연이라든가,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친구와의 옛 우정, 역모를 꾸민 세력의 대의와 그에 대처하는 임금의 자세 등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했던 대목들이 많았던 탓입니다.

 

픽션이니까 가능한 캐릭터였지만 이신은 얼마든지 실존 가능했던 개연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들춰보고 싶지 않은 역사의 장면 속엔 또 다른 이신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역사가 남긴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면 무척 의미 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400년이 지나도 별 달리 변한 것이 없는 절대 권력과 위정자들에게 이신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은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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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도사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2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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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 야콥 퀴슬과 그의 딸 막달레나, 그리고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는 코프마이어 신부의 독살 사건을 조사하던 중 템플기사단의 보물에 관해 알게 됩니다. 지몬은 신부의 여동생 베네딕타와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가며 템플기사단의 보물을 찾기 위해 바바리아 주 일대의 성당과 수도원을 뒤지고 다닙니다.

한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수도사들이 지몬과 베네딕타의 뒤를 집요하게 쫓습니다.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여러 개의 난해한 수수께끼를 푼 끝에 지몬과 베네딕타는 보물의 위치를 파악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을 쫓던 검은 수도사 일행과 마주치고 맙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은 여러 경로로 들어온 정보를 통해 사건의 윤곽은 물론 지몬과 베네딕타가 큰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됩니다. 서둘러 보물이 묻힌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야콥 퀴슬은 그곳에서 지몬과 베네딕타, 딸 막달레나와 극적으로 만나고, 템플기사단의 보물을 놓고 검은 수도사들과 마지막 일전을 벌입니다.

 

중세라는 시대적 공간은 상반되는 두 가지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하나는 문명의 개화나 과학의 발달이라는 밝고 긍정적인 면이고, 또 하나는 마녀사냥으로 상징되는,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한 본능적이고 잔혹한 면입니다. 픽션의 무대로서의 중세는 이런 양면성으로 인해 호기심과 기대감을 유발하는데,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는 문명과 원시의 대립 또는 혼재를 잘 살린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사형집행인의 딸이 연쇄소년살인과 마녀사냥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면, 이번 작품은 템플기사단의 보물을 둘러싼 어드벤처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더 가벼웠다면 인디애나 존스-사형집행인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검은 수도사는 제목이 주는 느낌 그대로 목숨을 건 잔혹한 보물찾기 이야기입니다.

 

숨겨진 전설적인 보물,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단서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추격전을 벌이는 주인공과 악당들, 그리고 그 와중에 알콩달콩 벌어지는 3각 로맨스 등 할리우드 식 보물찾기 모험물에 어울리는 맛깔난 코드들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덧붙여 대를 이어 천대 받아온 사형집행인의 비애와 피로 얼룩졌던 종교 갈등 등 중세만의 독특한 사연들이 함께 버무려져 있어서 영화 소재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구성 면에서는 세 주인공(야콥, 막달레나, 지몬)의 동선을 흩어놓고 각자 상대해야 할 악당을 설정함으로써 긴장감과 위기감을 고조시켰습니다. 지몬과 베네딕타가 전형적인 주인공 역할을 수행했다면, 야콥 퀴슬은 본연의 사형집행인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동시에 정보전을 진행했고, 야콥의 딸 막달레나는 원톱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사건의 큰 그림을 소개했습니다. 주인공들이 따로 노는전개가 부담스러운 전략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모두 함께 보물찾기에 나섰다면 무척 지루한 전개가 됐을 것입니다.

 

캐릭터 역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전작에 비해 노련하고 유연해진 것은 물론 영리하고 대담해진 느낌을 받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변신은 첫 편을 읽은 독자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야콥 퀴슬은 원래 사형집행인으로서의 거칠고 원시적인 매력이 강한 캐릭터였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거세된 반면, 지혜롭고 부드러우며 심지어 정치적이거나 착한 사형집행인의 인상이 부각됐습니다. 첫 편에서 역할이 미미했던 막달레나는 가문의 유산인 야성은 여전했지만 조금은 소란스러운 왈가닥 캐릭터가 된 듯 했고, 그녀의 연인이자 의사인 지몬은 전편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해진 나머지 검은 수도사 일행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척척 풀어내는 인디애나 존스가 돼버렸습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재미있게 달리긴 했는데,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전작인 사형집행인의 딸을 읽고 쓴 서평을 찾아보니 악당들의 캐릭터와 전략이 아쉬웠다”, “반전이 좀 밋밋했다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은 수도사에서 느낀 허전함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우선 악당의 캐릭터와 전략의 경우 보물을 찾겠다는 의욕은 넘치는데, 그것을 찾기 위한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안 되니 주인공들의 꽁무니만 죽어라 따라다니는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악당들의 행태는 본문 속에서 지몬과 베네딕타는 누군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식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문제는 이런 문장이 여러 챕터에 걸쳐 반복되면서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렸다는 점입니다.

반전의 경우 템플기사단의 보물에 관한 것 외에는 대체로 중반부 쯤 눈치 챌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작품 자체가 반전보다는 모험물에 방점이 실린 작품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더 잘 감춰뒀다가 나중에 빵~ 터뜨렸다면 후반부의 긴장감을 훨씬 고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적정선보다 조금 넘쳐 보이는 분량,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수수께끼들, 위기에 처한 주인공들을 위해 작가가 베푼 과도한 친절 -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이나 막다른 상황을 타개해줄 단서가 수시로 출현하는 - 등이 읽는 내내 아쉬움을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보물찾기 모험물이라는 대중적인 재미에는 충실한 작품이었고, 앞서 언급한대로 문명과 원시가 공존한 중세를 사실적으로 잘 묘사한 것은 물론 작품 곳곳에서 목격되는 작가의 꼼꼼하고 방대한 자료조사 덕분에 중세 독일을 직접 여행한 듯한 시각적인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만나게 될 사형집행인 일가족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악당들과 마주칠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더 거칠고, 본능적이고, 중세적인 캐릭터가 부각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불어 그 시대에 걸맞는 적절한 잔혹함도 함께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는 두 편 정도가 더 출간됐다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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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리스트 - 연재물을 쓰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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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필명으로 포르노부터 SF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3류 연재물을 기고하는 해리 블로흐는 사형집행을 목전에 둔 희대의 연쇄살인범 대리언 클레이로부터 황당한 의뢰를 받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자신에게 러브레터를 보낸 여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한 뒤, 자신과 그녀가 주인공인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노 대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10년 전 클레이가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클레이의 변호사 캐롤은 즉각 사형집행을 유예해줄 것을 요구하고, 당시 클레이를 체포했던 FBI요원 타운스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희생자들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해리는 자신의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는 15살의 부잣집 딸 클레어, 10년 전 클레이에게 쌍둥이 언니를 잃었던 다니엘라와 함께 비공식 수사를 시작합니다. FBI의 미행과 정체불명의 괴한의 습격 등 온갖 고비를 넘긴 끝에 해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Serial Killer(연쇄살인범)의 포르노를 대필하는 Serialist(연재물 작가)의 이야기라 그런지 폭력성과 선정성에 있어서는 제가 읽은 작품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도 남을 만한 작품입니다. 연쇄살인범 클레이의 범행은 거의 난도질 수준이고, 해리가 대필하는 포르노는 ‘19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입니다.

일단 재미있습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3류 연재물 작가 해리 블로흐를 비롯하여 어딘가 롤리타의 냄새를 풍기는 15살 매니저 클레어, 희생자의 동생이자 스트리퍼이며 해리와 로맨스를 나누는 다니엘라 등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또한 연쇄살인범의 포르노 대필이라는 선정적이지만 특이한 소재, 복역 중인 연쇄살인범과 동일한 수법으로 자행되는 새로운 살인, 그리고 10년을 복역한 사형수가 실은 무죄였을지 모른다는 의문 등 그야말로 재미를 위한 설정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형식이나 구성도 무척 독특했는데, 해리 블로흐가 다양한 필명으로 기고했던 여러 연재물이 액자소설처럼 배치되어 있어서 마치 극중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원색적인 상담코너인 잡년 조련사에서부터, 뱀파이어, SF, 수사물에 이르기까지 해리 블로흐의 연재물이 발췌되어 실려 있는데, 딱히 메인 스토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들은 아니지만 주인공 해리 블로흐의 취향과 작가 데이비드 고든의 작가론을 살펴볼 수 있어서 일종의 덤이나 부록처럼 소소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다 읽은 뒤 독자들의 평을 보니 조금은 호불호가 갈린 듯 보였습니다. “페이지가 안 넘어간다”, “반전이 무리하다”, “폭력성과 선정성이 과하다등이 비호감을 표현한 서평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 역시 조금씩이나마 동감하는 부분들이었습니다.

페이지가 안 넘어갔던 이유를 꼽자면 두 가지 정도인데, 첫째는 해리 블로흐의 발췌된 연재물들이 구성 자체로는 독특함을 지녔지만 내용은 사족처럼 느껴졌고 분량 역시 적잖이 할애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해리 블로흐의 입을 빌려 설파되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의 작가론이 다소 현학적이면서 동시에 강요하는 둣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재미나 재치의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반복된 점 역시 무리수였다는 생각입니다.

무리한 반전에 관해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언급은 못 하겠지만, 단서나 논리보다는 깨달음 또는 우연한 연상에 주로 의지하다 보니 독자에 따라 과도한 비약또는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도 여러 차례 반전이 반복되다 보니 마지막 반전에 이르러서는 놀람보다는 이건 사족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종합하자면, 욕심은 이해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했던 것이 옥의 티랄까요? 발췌한 연재물도, 과도한 작가론도, 거듭된 반전도 대체로 적정량을 초과한 탓에 긴장감과 몰입감은 물론 페이지 터너로서의 힘까지 손해 본 게 아닌가, 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신인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만한 아쉬움은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필력으로 볼 때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스토리 텔러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중년작가 해리 블로흐와 똑똑한 15살 부잣집 딸 클레어의 콤비 플레이 역시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매력적인 조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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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 개정판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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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월째 임신 중인 여인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유서 깊은 산부인과 가문 구온지에 관심을 갖고 있던 3류 기고가 세키구치 다츠미는 고교 선배이자 괴짜 탐정인 에노키즈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난 구온지의 장녀 료코를 통해 소문의 주인공이 그녀의 동생 교코임을 알게 됩니다. 한편 료코는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교코의 남편 후지마키의 생사 확인을 에노키즈에게 의뢰합니다.

에노키즈의 조수로 구온지를 방문한 세키구치는 료코와 교코의 부모 등 관련 인물들을 탐문하며 사건 현장을 둘러보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찬 일기장과 단편적인 단서 외에는 소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천재 음양사 교고쿠도와 경찰 기바까지 개입하면서 20개월째 임신 중인 교코, 그 남편의 실종, 구온지를 둘러싼 영아살해 의혹 등 일련의 사건들의 진상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냅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오래 전부터 구온지를 짓눌러온 비극의 연장일 뿐이며,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다수의 참상이란 점도 밝혀집니다.

 

() 또는 괴담이나 전설을 소재로 한 일본 미스터리는 명백한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들을 꽤 읽어봤지만, ‘우부메의 여름은 그중에서도 극단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엽기적인 사건이나 괴담을 소재로 3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주인공 세키구치부터 과거에 벌어진 일을 볼 수 있는 환시(幻視) 능력을 가진 괴짜 탐정 에노키즈, 세상의 모든 지식을 꿰고 있는 고서점의 주인이자 뛰어난 음양사 교고쿠도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 무대인 낡고 오래된 산부인과 구온지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독특하다 못해 기괴한 분위기를 내뿜는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초자연적 현상에서부터 뇌와 신경, 양자역학, 심리학 그리고 각종 종교적 논쟁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화려한 말의 성찬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논리적인 전개 따위는 깨끗이 무시한 채 수상하기 그지없는 궤변과 형이상학적인 비유가 이야기의 흐름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신비한 주술과 주문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조차 호불호의 논쟁을 크게 일으켰다고 하니 한국 독자들에게서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할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고쿠도 시리즈우부메의 여름으로 처음 읽게 됐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몇몇 작품들을 읽은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곳곳에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는 정체 상태와 마주치곤 했습니다.

 

겨우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 건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부터인데, 물론 여전히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지만, 오래 전부터 등장인물들을 옭아매왔던 비극적인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중후반부 이후에는 교고쿠 나츠히코만의 매력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후반 200여 페이지에 걸쳐 음양사 교고쿠도가 벌이는 다분히 주술적인 의식은 한 시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긴장감 있게 진행되며 대미를 장식합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불쾌감이나 이물감을 버리지 못한 독자도 적잖겠지만, 저 같은 경우 스스로에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읽어!’라는 주문을 걸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어느 시점인가부터 아무 생각 없이 활자에만 집중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사건과 진실, 이야기의 흐름에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앞으로 이어질 교고쿠도 시리즈역시 이런 독자의 자세를 필요로 한다면 무척이나 피곤하고 가시밭길 같은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고쿠 나츠히코가 선사하는 마약 같은 유혹 역시 절대 포기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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