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 한 잔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켄지&제나로 시리즈첫 편임에도 한국에선 후속작보다 늦게 출간된 작품입니다. 2009년에 출간된 작품을 이제야 읽게 돼서 한참 늦은 감은 있지만, 운 좋게(?) 후속작들 역시 읽지 않은 상태라 저는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합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비밀을 캐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갱단에게 위협받지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기어이 미션을 완수한다는 스토리입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 스타일이고, 적절한 폭력성과 선정성이 가미되어 페이지는 순식간에 넘어가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그리 거북하진 않습니다. 폭력적인 장면들이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그 역시 불편하진 않습니다. 켄지와 제나로의 캐릭터는 슈퍼히어로처럼 과장되지 않아 훨씬 인간적이고 정이 갑니다. 비아냥 또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동원된 유머들은 위트가 넘치고, 부패한 정치인, 잔인한 갱단, 노회한 언론인 등은 자신들의 캐릭터에 딱 맞는 어휘와 톤을 구사해서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작품이 지녀야 할 여러 가지 미덕을 다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그저 신나고, 재미있고, 권선징악의 통쾌함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신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상처투성이인 캐릭터들 때문이었는데, 영웅으로 알려진 아버지로부터 씻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물려받은 켄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제나로, 그리고 16살에 갱단의 두목이 되어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롤랜드 등 평범한 삶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캐릭터들이 내뿜는 원초적인 증오와 분노가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단순한 권선징악 이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또한 흑백간의 인종차별 문제 역시 적잖은 분량을 통해 다뤄지는데, 어느 한쪽이 선하고 어느 한쪽이 악하다는 식의 얕은 수준의 이분법은 물론 근거 없는 적개심이나 동정심을 강조하는 비현실적인 이상론 대신 문제는 인종이 아니라 인간의 선악이라는 당연하고도 현실적인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인종차별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런 구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여러 가지 가볍지 않은 설정들 때문에 보통 할리우드 액션물 스타일의 작품을 읽고 나면 느낄 수 있는 머리가 싹 비워지는쾌감 대신 이것저것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준 작품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대체로 이런 정서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남은 작품들 역시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제나로를 덮칠 생각만 하며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다가도 진정성 있는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로 변신하는 켄지를 보고 있으면 새삼 그의 뇌의 상당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트라우마가 더욱 안쓰러워 보입니다. ‘폭력의 달인이면서도 남편의 폭력 앞에 무기력했던 제나로의 변심은 통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켄지와 쌓아나갈 달달한 애정전선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해줬습니다.

서평에서 언급하진 못했지만 맛깔난 조연이자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부바 역시 후속작에서의 활약과 함께 그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쓰다 보니 여러 가지로 기대할 것이 많은 시리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맛있는 음식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한 권씩 그 맛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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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에피소드 S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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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인 어나더의 표지가 길거리에서 들고 다니기엔 영 부담스러운 정통 호러 풍이었다면, 속편인 어나더 에피소드 S’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부담감을 줍니다. 여주인공 미사키 메이의 45도 프로필을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구성한 표지는 그녀가 살고 있는 인형 갤러리의 지하실처럼 빨아들이는매력을 내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이목구비는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이고, 거칠고 날것 같은 머리칼과 그녀가 들고 있는 청회색 스케치북의 조합은 어나더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렸던 미사키 메이의 이미지 그대로였습니다.

 

본편인 어나더의 중후반부쯤 여름방학을 맞은 미사키 메이가 가족과 함께 잠시 요미야마를 떠나 별장에 다녀오는 대목이 있는데, ‘어나더 에피소드 S’는 그 시기에 미사키가 한 유령을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 설명에 따르면 제목의 SSummer(여름)이기도 하지만, Sitai(시체) 또는 Shinkirou(신기루)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 작품의 주된 화자인 Sakaki(사카키)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카키는 1987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학생이었고, (‘어나더에서 언급됐던) 수학여행 버스사고로 부상을 입은 뒤 요미야마를 떠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11년이 지난 199853, 죽습니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자신이 살던 호반의 저택에 나타납니다. 자신이 죽은 이유도 과정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누나 부부에 의해 은폐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카키는 유령의 몸으로 저택 곳곳을 뒤지며 죽음의 진상과 함께 자신의 시신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던 중 가족 간의 인연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미사키와 마주칩니다.

사카키는 안대 속 의안을 통해 유령인 자신을 알아보는 미사키와 함께 자신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조금씩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동기와 과정을 알아내고 자신의 시신도 발견합니다. 하지만, 미사키를 통해 유령의 진실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들려줄까, 사카키바라 군? 네가 몰랐던 올 여름의, 또 한 명의 사카키이야기...”

 

이야기는 미사키 메이가 (‘어나더의 주인공인) 사카키바라 코이치에게 별장지에서 만난 유령 사카키와의 기이한 인연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본편의 대부분은 유령 사카키의 독백형 1인극처럼 진행됩니다.

작가 스스로도 당황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어나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어 무척 낯설기만 했습니다. 이 작품이 어나더의 속편이 아니라 독립된 유령 소재 호러물이었다면 아마 쉽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잘 해야 중편 정도의 규모인데다 마지막 반전을 제외하면 평범한 유령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는 유령 사카키가 1987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을 휩쓴 재앙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26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유산으로 고등유민처럼 유유자적 살아가는 외양과는 반대로 3학년 3반이 남긴 불행한 유산은 11년이 지나도록 사카키의 삶을 짓눌러 왔습니다. 기어이 그는 죽음에 이르렀고, 유령이 되어서도 불행에게 발목잡힌 처지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의 3학년 3반에 닥친 재앙에 관해 조언을 얻고자 미사키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사카키의 죽음의 진상과 멈출 줄 모르는 3학년 3반의 재앙이라는 두 축으로 진행됩니다. ‘어나더’(3학년 3반의 재앙)에피소드 S’(유령 이야기)가 결합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특히 1987년 여름방학, 재앙을 피해 자신의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과 사카키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작품 속에서 꽤 중요한 소품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후반부에 밝혀지는 사진 속의 비밀은 사카키의 죽음의 동기는 물론 이 작품의 정체성, 즉 왜 이 작품이 어나더의 속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정은 어나더없이는 어나더 에피소드 S’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는, 무척이나 역설적이고 곤혹스러운 결론을 이끌어내게 되는데, 대체로 속편이나 시리즈물의 경우 본편이나 전작을 읽지 않더라도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끔 친절한 부연설명들이 군데군데 삽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나더 에피소드 S’는 본편인 어나더를 읽지 않고는 중요한 맥락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작품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기 쉽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광팬은 아니지만 어나더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 입장에서 어나더 에피소드 S’ 자체가 가진 매력과 약점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재앙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게 되고, 살아남은 자 역시 남은 기억 혹은 잊힌 기억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유령이라는 소재와 독백형 1인극 형식을 통해 구성한 점은 여느 호러물이나 미스터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이자 이 작품만의 매력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은 동시에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내용과 형식 모두 심하게, 조금은 현학적으로 보일만큼, 특이하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어나더없이는 제대로 된 해석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작품 말미에서 아야츠지 유키토는 어나더 에피소드 A’ 또는 어나더 에피소드 S2’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는데, ‘옮긴이 후기를 보니 올해(2014) 가을부터 어나더 2’가 일본에서 연재된다고 합니다. 말미의 단서대로라면 공간적 배경은 역시 요미키타 중학교가 될 것으로 보이고, 시간적 배경은 2001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사키와 사카키바라는 3년이 지나 대입시험을 앞둔 고3이 돼있겠지만, (물론 갑자기 10년 정도 건너뛰어 미사키나 사카키바라가 3반 담임으로 요미키타 중학교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연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국내에도 빠른 시간 안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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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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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으로 전학 온 사카키바라 코이치는 3반 주변 인물들이 연이어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사카키바라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신비한 여학생 미사키 메이를 통해 3반에 전해 내려오는 재앙의 이력을 알게 됩니다. 26년 전, 사고로 죽은 친구를 기리기 위해 벌였던 선의의 퍼포먼스 이래로 3반은 거의 매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학생, 교사 또는 그들의 가까운 인척들이 자살, 병사, 원인불명의 사고로 인해 매년 많게는 10여 명씩 목숨을 잃어온 것입니다. 새 학년의 첫날, 학생 수에 비해 책걸상 1개가 모자라는 해마다 여지없이 재앙이 벌어진다는 패턴이 발견되자 존재해서는 안 될 누군가가 재앙을 일으킨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결국 10년 전부터 희생양을 만들어 참극을 막아보겠다는 나름의 대책을 실행해왔습니다. 하지만, 사카키바라가 전학 온 1998년의 3학년 3반에는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한 새로운 패턴이 나타났고, 그동안 몇 차례 성공했던 대책도 무용지물이 돼버리면서 곳곳에서 희생자가 속출합니다.

 

호러물 마니아는 아니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작품입니다.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읽은 적 있지만, 제대로 된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운 좋게도 속편 격으로 출간된 어나더 에피소드 S’ 서평단에 뽑혔고, 당장에라도 미사키 메이의 치명적인 클로즈업을 표지로 삼은 속편을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왕이면 두 작품을 순서대로 읽는 것도 괜찮은 일 같아 책장에 꽂혀있던 어나더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분량만큼이나 이야기 역시 방대하게 짜여있어서 줄거리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또한 호러, 미스터리, 청춘 성장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가 믹스되어 있어서 이 작품은 OO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 역시 난감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금세 다 읽힐 정도로 몰입감과 속도감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재앙을 몰고 온 존재해서는 안 될 누군가의 존재, ‘()’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의 상존, 졸업과 동시에 ()’에 관한 모든 기록과 기억이 재조정된다는 초자연적인 집단최면,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죽음의 빛깔을 볼 수 있는 미사키 메이의 의안(義眼) 등 명백히 비현실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설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그와 병행하여 사카키바라 일행이 재앙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이 긴장감 있게 묘사돼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100% 호러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호러 설정들과 미스터리 요소들이 잘 버무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선지 읽는 동안 괴담과 미스터리를 맛깔나게 접목시킨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떠오르곤 했는데, ‘어나더의 경우 현대물이면서 괴담의 단골 공간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보니 공포심의 순도는 훨씬 더 높고 강렬했습니다.

 

서술트릭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나 일부러 문맥을 난해하게 만든 문장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후반부에 가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해놓은 경우가 꽤 많습니다. 독자에 따라 답답하거나 짜증스러울 수도 있는데, 일종의 서술트릭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속편 어나더 에피소드 S’의 초반 몇 페이지를 살짝 읽어봤는데, 역시나 이런 미완성 문장이 꽤 자주 눈에 뜁니다.)

 

재미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쉽게 느껴졌던 점은 미사키 메이의 정체성 묘사를 위해 초중반에 과도하게 분량을 할애한 점입니다. 조금은 강요하듯 동어반복적인 상황들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미사키의 실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미사키에 대한 강조는, 역설적이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사카키바라의 역할을 수동적이거나 의존적으로 보이게 만든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싹한 호러물을 기대했거나 본격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장르의 경계선에 위치한 어나더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딱히 기억에 남을 만큼 무섭거나 소름끼치는 대목도 없고, 그렇다고 명쾌하고 해피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나더의 가장 큰 매력을 두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양파껍질처럼 벗겨낼 때마다 드러나는 새로운 국면과 예측불허의 전개’, 그리고 독특함과 기이함을 겸비한 다채로운 캐릭터입니다. 두툼한 분량 때문에 읽기 전부터 부담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 매력 덕분에 마지막 장에 이르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습니다. 장르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 몰라도, 이야기 자체만 보면 대부분의 독자가 만족할만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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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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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평론가이자 여대생들의 롤모델 1위로 꼽히는 현수빈은 유년기행이라는 칼럼을 통해 7살 무렵에 겪은 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연재합니다. 칼럼이 연재되던 중 수빈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우선 다가구 주택에 함께 살던 이웃 중 몇 사람의 연락을 받게 됐고, 이어 지금은 퇴직한 한 경찰의 방문을 통해 다가구 주택에서 일어났던 연탄가스 중독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소개에 소개를 거쳐 다가구 주택에 살던 대부분의 이웃들과 만난 수빈은 자신이 기억하는 예쁘고 소중한 7살의 기억 속에 실은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상처들이 숨어있었으며, 그것은 29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혀 아물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과일행상을 하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던 우돌네 식구들, 자신을 예뻐해 주던 건넌방 세 언니들, 그리고 젊고 아름다웠던 신혼부부와 문간방 대학생 등 7살의 수빈과 함께 했던 모든 이웃들이 지금껏 감추거나 숨겨왔던 진실들이 수빈의 탐문과정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능력 있는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잔인한 연쇄살인마나 참혹하게 난도질당한 시신이 튀어나오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은 1984년 은평구 D동의 한 다가구 주택에 살던 평범한 서민들일 뿐이며, 사건이라고 해봐야 당시에는 다반사였던 연탄가스 중독사가 전부입니다. 이런 평이한 배경 탓에 가족 같았던 이웃들이 숨겨온 어두운 진실이라는 홍보 카피가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됐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한편의 뛰어난 한국 미스터리 작품을 만났다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일상 미스터리겠지만, 그러기엔 왠지 작품과 작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밝혀지는 진실의 규모나 충격은 도저히 일상이라고 볼 수 없는 참혹함과 비극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인간관계와 사건들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공감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실감을 잘 부여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벌어진 사건은 무척 단순했고, 인물들 간의 관계는 대부분 탐욕, 시기와 질투, 사랑과 증오 등 가장 원초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1984년이었기에 그 단순함과 원초성은 좀더 거칠고 날것 같은 모양새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사건에 대처하는 다가구 주택 이웃들의 자세 역시 본능에 가깝긴 하지만 섬뜩함이 좀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읽는 동안 한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그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등장인물들이 다가구 주택의 이웃들이긴 하지만 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들 속에서 비극이 벌어졌다는 점, 그래서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이 놀라움 뿐 아니라 서늘함까지 전해줬다는 점,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점 등 어딘가 닮은꼴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괜히 스케일만 크고 눈에 힘만 잔뜩 들어간 채 정작 중요한 서사를 놓친 대작들에 비하면 훨씬 더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입니다. 간혹 눈에 띄었던 작위적인 전개 주로 수빈의 탐문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는 지점에서 목격되곤 했던 가 옥의 티처럼 느껴져 별 다섯 개까지는 어려웠지만, 네 개 반은 충분히 받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소한 배경 속에서 이처럼 큰 서사를 뽑아낸 작가의 이력이 궁금했는데, 띠지를 보니 대형 신인의 첫 장편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과 한국추리작가협회 황금펜상을 수상한 단편들도 소개됐는데 가능하면 다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송시우의 두 번째 장편이 기다려집니다. 더불어 이 작품이 대형 신인의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평을 듣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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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제국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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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충격적인 과거와 만나게 된 안나 에메스, 그리고 프랑스 내 터키 타운에서 벌어진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쫓는 경찰청 팀장 폴 네르토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폴 네르토는 안나 에메스라는 여자가 연쇄살인사건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 사건 배후에 자리 잡은 프랑스 정부와 군, 과학자, 경찰 등의 추악한 비밀까지 알아냅니다. 이후 연쇄살인에 터키의 급진세력 회색늑대가 개입한 사실까지 파악하면서 폴 네르토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안나의 행적을 거의 따라잡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 폴 네르토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꽤 오래 전 검은 선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긴장감, 재미, 적절한 잔혹함 덕분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여러 작품이 출간된 상태였지만, 두 번째로 그랑제와 만난 것은 미세레레였습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방대한 서사를 다루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장점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에야 늑대의 제국을 읽게 됐습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분명 뛰어난 이야기꾼입니다. 수많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자유자재로 지휘할 뿐 아니라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까지 곁들여 능숙하게 포장하는 솜씨는 그를 최고의 프랑스 스릴러 작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번엔, 잘 나가다가, 정말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도록 너무 잘 나가다가, 그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스릴러의 결말, 즉 범인 체포와 해피엔딩을 넘어선 새로운 결말에의 도전은 좋았지만, 문제는 후반부의 결정적인 지점부터 이야기가 전혀 다른 길로 빠져버렸고, 그로 인해 애초에 쌓아온 서사들을 모조리 불필요하게, 또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느닷없이 등장한 인물들이 엉뚱한 엔딩을 장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나름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인간의 자유정신터키 역사의 비극으로 귀결시킨 덕분에 한껏 달아오른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은 당혹스러운 실망감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폴 네르토의 유년의 트라우마, 형사로서의 이력,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위험천만한 노력들은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딩에 이르러 돌아보면 결국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불필요한 서설이었고, 폴 네르토를 돕는 결정적인 조연인 퇴직 형사 시페르를 비롯한 몇몇 중요한 캐릭터 역시 비슷한 봉변(?)을 당했습니다.

 

잘못 읽었나 싶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비슷한 의견이 많았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돌의 집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경고한 독자도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도 검은 선이나 미세레레에서는 이런 식의 전개를 본 것 같지는 않고, 왜 그랑제가 늑대의 제국에서 이런 결말을 선택했는지는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독특한 캐릭터들, 끔찍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쇄살인 등 이야기꾼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설정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만간 돌의 집회도 읽을 계획인데, ‘검은 선이래로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팬임을 자처해 왔으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두 번씩 할까봐 괜한 걱정부터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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