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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ㅣ 불야성 시리즈 1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의 대표적 환락가이자 중국계 마피아들이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신주쿠 가부키초. 일본인과 대만인의 피가 섞인 반반(半半)으로 태어난 탓에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던 장물아비 류젠이(일본명 타카하시 켄이치)는 신주쿠 일대 마피아 간의 알력에 휘말려 과거 자신의 단짝이었던 우푸춘을 사살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나츠미가 등장하고, 그녀가 우푸춘과 각별한 인연이 있음을 확인한 류젠이는 우푸춘의 행방을 쫓기 위해 도리 없이 그녀와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션이 성공해도 살아남을 공산이 적다고 생각한 류젠이는 빈틈없는 전략으로 상대방을 속이며 이중삼중의 보험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피아들의 위협은 갈수록 살벌해집니다.
류젠이의 계획대로라면 신주쿠 일대가 총성과 피바람으로 뒤덮이게 될 거사 당일 아침. 나츠미의 도움 속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을 싹쓸이하고 자유로운 삶과 조우할 것을 기대하던 류젠이는 예상치 못한 제보를 통해 나츠미의 정체를 파악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또한 거사의 순간, 류젠이의 각본에 없던 상황이 벌어지면서 신주쿠 일대는 대혼란에 빠지고, 류젠이와 나츠미, 우푸춘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계 마피아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장한가’를 뒤늦게 구한 뒤 문득 시리즈 첫 편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불야성’을 꺼내들었습니다. 최근 읽은 작품 대부분이 비교적 소프트한 이야기들이라 머릿속 어디선가 독하고 쎈 이야기가 그리웠던 탓인지 2년여 만에 다시 읽은 ‘불야성’은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전해줬습니다.
피와 살이 튀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불야성’은 잘 짜인 대중적 액션 스릴러이면서 동시에 조금은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선정적이고 잔인한 하드코어 물입니다. 폭력과 성(性)의 묘사는 눈앞에서 지켜보듯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고,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듯 그야말로 막장에 가까운 상황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불야성’을 비롯한 시리즈 전편이 마니아들의 호응을 얻은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호응을 이끌어낸 매력들 가운데 딱 한 가지만 꼽아보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캐릭터들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류젠이를 어린 시절부터 키웠으며 가부키초를 손안에 틀어쥔 노회한 대만인 양웨이민, 가부키초의 이권을 나눠가진 상하이 출신의 위안청구이와 베이징 출신의 추이후, 그리고 폭주하는 다혈질 건달 우푸춘과 양파껍질처럼 비밀투성이인 여인 나츠미, 그 외에도 등장하는 크고 작은 캐릭터들 모두 뚜렷한 존재감과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다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생존을 위한 최고의 방편으로 거짓말과 배신을 일삼는다는 점입니다. 진실과 진심은 마지막 베일이 벗겨질 때까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상대의 거짓말과 배신을 당연하게 여겨 그것을 뒤엎을 또 다른 거짓말과 배신을 준비합니다. 또한 자신을 키워주거나 자신이 키운 존재, 평생의 우정을 나눈 친구나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연인은 물론 피를 나눈 형제자매조차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배신을 통해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 어느 캐릭터도 아군이나 적군이라 확신할 수 없고, 거짓말을 뛰어넘는 거짓말, 배신을 뛰어넘는 배신을 감행하는 캐릭터들을 보면서 한 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캐릭터들을 현실감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가부키초의 잔혹한 역학관계입니다. 복수가 결정되면 전멸을 불사하고 전면전을 펼치지만, 장래의 이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보스가 피살당하더라도 기꺼이 적과 협상하여 이권을 나눠 갖는 탁월한 정치적 촉각과 중재력을 가진 것이 중국계 마피아입니다. 그렇기에 수십 년 간 피비린내를 진동하며 이어온 권력 투쟁 속에서도 어느 한 쪽이 절대적 우위에 서지 못하게끔 합의와 거래를 반복해왔습니다.
늘 전운이 감도는 공간적 배경과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캐릭터들 덕분에 ‘불야성’은 단 한 페이지도 마음 편하게 쉬어가는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독자에 따라 초중반부의 상황 설명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들조차 면밀한 계획에 따라 깔린 일종의 복선이라는 점을 오래지않아 확인하게 됩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류젠이와 나츠미에 대한 이야기를 뒤늦게 하게 됐는데, 두 사람을 규정하는 공통점은 반반(半半)이라 불리는 불행한 태생입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인 혼혈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물론 가부키초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류젠이가 어린 시절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첫 살인을 하게 된 계기도, 나츠미가 겪은(혹은 자초한) 지옥 같은 소녀 시절의 기억도 그 단초는 반반으로 태어난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업보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류젠이는 싸움에 능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빛나는 카리스마를 지닌 히어로도 아닌 겁 많고 소심한 뒷골목 건달 가운데 하나로, 터프한 천하무적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는 고독하고 영리하며, 타협할 줄 모르는 반골기질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나는 혼자인 게 좋다. 혼자 살다 혼자 뒈진다. 일주일 앞일을 고민해본 적이 없어. 그런 짓은 무의미하니까. 일단 오늘 살아남는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그러니까 난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아.”
그런 류젠이가 지상 최악의 팜므 파탈 나츠미를 만나면서 위태로운 행보를 걷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 속에 감춰진 비밀이 결국 자신을 향한 비수가 될 것임을 잘 알면서도 류젠이는 나츠미에 관한 한 자신의 모든 원칙을 무너뜨리고 파멸을 향해 폭주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나츠미가 자신과 똑같은 종(種)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인물 중에서도 최악의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나는 나츠미를 떨쳐 낼 수가 없다. 나츠미는 나와 같은 장소에 태어난 생물인 것이다. 나이프로 나츠미의 몸을 난도질하여 모든 살을 내 위 안에 넣어두고 싶었다. 또는 반대로 나츠미가 나를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나츠미의 손으로 내 거지같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면 별 군말 없이 지옥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신주쿠를 피로 물들인 그날의 거사가 마무리될 때쯤에야 밝혀진 그녀의 진실 때문에 류젠이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고, 엔딩은 비극을 향해 치닫습니다. 가부기초의 중국계 마피아 간의 폭력적인 하드코어 스토리는 실은 닮은꼴이면서도 공존할 수 없었던 두 남녀를 위한 일종의 ‘병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파국을 향해 폭주하는 류젠이와 나츠미의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들은 파괴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선정적이면서도 애틋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불야성’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읽은 ‘불야성’의 느낌은 엔딩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강렬하고 충격적입니다. 조만간 역시 두 번째로 읽게 될 ‘진혼가’도 크게 다르지 않을 느낌을 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장한가’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3부작’을 마쳐보려고 합니다.